< 돋보기 >
이코노미는 모든 좌석이 동일하지만, 비즈니스부터는 다 같은 좌석이 아니다. 기본 비즈니스부터 수면 침대 형 비즈니스 등이 있는 식이다. 한국의 영화관처럼 특정한 자리에 VIP라고 이름만 붙여놓고 값을 비싸게 받는 것이 아니며 이것은 일등석 역시 마찬가지였다.
[비즈니스라고 하시더니 여기서 다시 뵙네요?]
[그리됐습니다.]
휘 잭맨의 가족은 Q스위트였다.
프라이빗한 공간을 만들기 위해 사방이 벽으로 둘려 있으며 내부에 침대가 있는 형태의 좌석인데 이 좌석은 4개의 좌석을 연결해서 하나의 방과 비슷한 구조로 엮을 수 있다.
‘일등석 중에서도 가장 비싼 좌석이지.’
LA에서 인천공항까지면 4좌석의 가격을 합하면 대략 8,000만 원 수준이다. 케인과 내가 앉을 자리는 그다음으로 비싼 좌석인데 딱히 휘 잭맨 가족의 좌석보다 나쁘거나 한 건 아니었다.
저 가족처럼 좌석을 엮어서 방으로 만들거나 할 이유가 없기 때문일 뿐, 좌석의 등급은 동일하다. 이를 바꿔 말하면 저들은 단지 서로의 얼굴을 편히 보면서 가기 위해서 1,600만 원을 내고 있다는 의미가 된다.
‘나란 놈도 참 묘해. 돈이 안 되는 작품이더라도 내가 만들고 싶으면 몇천억의 손해도 감수할 수 있는데 정작 이런 일에는 펑펑 쓰지 않는 성격이거든. 필요한 만큼의 소비에는 거리낌이 없는데 사치스러움에는 꽤 머뭇머뭇하게 돼.’
퍼스트 클래스가 다른 좌석과 확연한 차이를 보이는 것은 두 가지다. 첫째는 퍼스트 클래스 이용 고객만을 위한 라운지 이용. 둘째는 정해진 식사 시간이 없다는 것이다.
언제든 식사를 하고 싶을 때 승무원에게 이야기하면 퍼스트 클래스 고객을 위한 전문 셰프가 요리해 주고 최상급 와인 역시도 가져다준다.
자리를 잡고 나니, 승무원이 메뉴판과 함께 한국어로 말했다.
“웰컴 드링크로 어떤 것을 준비해드릴까요?”
퍼스트 클래스 고객에 대한 정보는 매우 중요한 부분이기 때문에 이들은 내가 한국인이라는 것을 이미 알고 있었다.
‘종류가 참 지나치게 많아.’
선택 장애가 있는 사람은 여기서 한참 시간을 끌 게 틀림없었다. 드링크의 종류가 무려 10개나 된다.
“식사할까 하는데 식전주에 맞을만한 것으로 추천해 주시겠습니까?”
이제는 제법 상류 문화도 많이 배웠다. 굳이 있어 보이게 하려면 못할 것도 없다. 하지만 이미 갖출 것을 다 갖춘 사람이 굳이 있어 보이기 위해 원하지도 않는 행동을 할 이유는 없다는 것이 내 생각이다.
“그러신가요? 오늘 메뉴는 절인 연어와 완두콩 퓌레를 곁들인 구운 관자에 비프 소스를 곁들인 최상급 소고기 안심 스테이크와 단호박 퓌레입니다. 웰컴 드링크로는 로랑 페리에 브뤼와 와인으로 샤또 쁠뤼에르 까르디날이 어떠신가요?”
‘들리는 건 한국말인데 의미는 외계어랑 마찬가지군.’
서툴러도 하다보면 익숙해지고 나중에는 능숙하게 된다. 반대로 서투르다고 하지 않다보면 무지하게 되고 끝내는 하지 못하게 되는 법이다.
지금의 이 상류 문화식 주문이 내게는 이러한 경우였다.
‘뭔지는 몰라도 다 먹는 것들의 이름이기는 하겠지?’
나는 못 하는 게 맞다.
이놈의 문화는 뭘 알면 알수록 뭔 소린지 모르겠는 것들이 너무 많다.
그리고 이렇게 모르겠을 때는.
“좋습니다.”
무조건 오케이가 답이다.
설마 먹고 죽어버리는 걸 주지는 않을 테니까.
*
한국에서의 울버렌의 촬영지는 첫 촬영지는 서울이다. 시나리오의 흐름상 서울에서 시작해서 부산으로 넘어가는 만큼 자연스럽게 출발지점으로 잡았다.
물론, 바로 일정을 시작하지는 않았다. 도착한 한국은 슬슬 해가 지려고 하는 시간이기도 했거니와 지구 반대편에서 날아온 만큼 시차에 적응할 시간을 주어야 한다.
하루 정도 여유 시간을 더 주어 휴식을 취한 뒤 한국에서의 이틀째부터 일정을 시작했다.
[몸 상태는 다들 괜찮습니까?]
[워낙 여기저기 돌아다니는 것을 좋아하는 성격이라 시차 적응에는 이골이 난 몸입니다. 그런 건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휘 잭맨은 한국식으로 계산하면 이제 45세다. 불혹을 넘은 나이인 만큼 젊은 기운이 사라질 때도 됐다. 그런데도 여전히 젊고 강한 사내의 기운을 여실하게 풍기고 있었다.
‘타고난 사람들이고 몸이 재산이기도 하니 잘 관리해서 더욱 건강한 거겠지. 나도 아차 하면 배둘레햄이 생길 수 있으니 꼭 운동하고 먹는 거 조심해야지.’
울버렌의 서울 씬 배경은 한국 재벌가의 저택 내부와 장례식을 위한 사찰, 전투를 위한 공원과 KTX였다. 이중 첫 번째인 재벌가의 저택으로 가려 하니 스태프들이 이상한 기대감을 하고 나를 보았다.
[한국 재벌가의 집이라면 회장님의 집에서 촬영하는 거죠?]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총대를 맨듯한 휘 잭맨의 재표 질문에 웃으며 대답했다.
[영화 속의 설정으로 재벌가의 집은 상당히 고전적이고 또한 크기도 대단히 큽니다. 반면에 우리 집은 생각보다 거대하지도 않고 고전적인 부분도 부족하지요.]
일반인의 관점에서는 충분히 으리으리한 집이고 잘 가꾼 정원에 온갖 고급스러운 가구들로 넘쳐나는 집이 틀림없다. 그러나 최소한 10명 이상의 사용인이 필요한 궁궐과도 같은 거대 저택 정도는 되지 않았으니 영화에 등장시키기에는 초라했다.
‘그래서 가장 적합한 집을 열심히 수색했고 이곳으로 정했지. 이름하여 백인제 가옥인데, 아는 사람이 아직은 많지 않더라고.’
백인제 가옥은 후일 국내에서 친일파를 암살하는 2015년 영화에 등장하는 집이다. 친일파 강인국의 저택으로 등장했었는데 사실 백인제 가옥은 1913년 한성은행 전무인 한상룡이 지었다.
한상룡은 이완용의 외조카로 동양척식회사 이사를 지낸 대표적인 친일파다.
그는 1906년 가회동으로 이사했는데 이때 일본의 고관들을 접대하기 위한 집을 짓기로 마음먹고 한옥 12채를 사들인 뒤 북촌이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2,460㎡(745평)의 넓은 땅에 별당채와 정원까지 갖춘 저택을 새로 지었다.
집주인은 그간 여러차례 바뀌다가 지난 2009년에는 서울시가 매입했다. 그리고 지금은 민간에 역사박물관 같은 개념으로 공개하고 있다.
‘규모도 훌륭하고, 외견도 훌륭하고 무엇보다 컨셉 역시 이번 우리 영화와 딱 맞지.’
기대했던 만큼 함께 온 이들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서울에 이런 집이 있었습니까?]
[오랜 전통과 근대적인 요소가 교묘하게 어우러진 가옥이죠.]
백인제 가옥을 처음 본 휘 잭맨의 입이 떡 벌어진다.
본래 한옥은 다른 방으로 이동할 때 실외로 나와서 이동하는 것이 특징이다. 하지만 백인제 가옥은 그것들이 복도로 연결된 근대 건축물의 특징을 함께 가지고 있다.
[고개만 돌려도 언덕 아래로 현대화된 도시의 풍경이 눈에 한가득 들어오는데, 이곳에는 전통이 살아 있는 궁궐과도 같은 집이라니!]
휘 잭맨은 백인제 가옥을 보는 내내 입에서 감탄이 멈추질 않았다.
[얼마나 된 집인가요?]
[내년이면 딱 100년이 됩니다.]
[대단하군요! 100년이라니!]
휘 잭맨은 호주 출신에 미국에서 활동하고 있는 배우다. 호주나 미국이나 둘 다 역사가 짧은 것은 마찬가지다. 그래서인지 이런 나라에 살고 있는 사람들은 역사와 전통이 묻어나는 것을 매우 부러워하는 편이었다.
물론 두 나라 모두 백인제 가옥보다는 배 이상 긴 역사를 가지고 있지만, 그래도 근대화가 시작된 이후에 시작된 나라들이라 전통을 느낄 수 있는 건축물 찾기가 매우 힘들다는 동일한 특징을 가지고 있었다.
[우리 호주도 언젠가는 지금의 건물들을 보며 ‘전통적인 건축법으로 지어진 건물’이라는 이야기를 하는 날이 오겠죠?]
[그럴 겁니다. 결국 모든 것은 상대적인 거니까요. 지금은 현대적이라 말하는 것들이 1,000년 후에는 고전 양식이 되지 않겠습니까?]
호주가 그때까지 존재한다면 분명 그가 말하는 일들이 벌어질 수 있을 거다.
‘우린 지금도 전통적인 것들이 많이 남아 있지만.’
살짝 우쭐하게 콧대를 높여보도록 하자.
[이곳이 영화로 촬영된 것을 하루라도 빨리 보고 싶어지네요.]
[정말 아름답게 잘 나올 것 같아요.]
여러 각도로 사진을 찍는 스태프들 사이로 휘 잭맨 역시 고개를 끄덕였다.
[이런 아름다운 배경에서 영화를 촬영할 수 있는 걸 보면 역시 저와 서울은 잘 맞는 것 같습니다.]
무던한 것보단 이렇게 즐거워하는 게 보기 좋고 나 역시도 기분이 좋아졌다.
[이 멋진 집을 가족들과 함께 볼 수 있었으면 더 좋았을 텐데, 아쉽네요.]
[나중에 따로 시간을 내서 오시면 되겠군요.]
[그래도 되는 겁니까?]
[일반에 공개된 박물관 개념이니 안 될 건 없을 겁니다.]
[오! 꼭 그리해야겠습니다. 그런데 원래는 집이 아니라 다른 귀빈관 같은 것으로 지어진 건물인 것 같은데요?]
백인제 가옥의 또 다른 특징은 가옥에 들어설 때, 사랑채를 중심으로 넉넉한 안채와 아담한 별당채, 그리고 정원이 펼쳐진다는 점이다. 특히 흥미로운 부분은 사랑채와 사랑채 정원의 면적이 가옥 총면적의 절반을 차지한다는 것이다.
휘 잭맨은 지금 그러한 부분을 발견하고는 순수하게 의문을 표했다.
[귀빈관의 개념을 가지고 있었던 것은 맞습니다. 그런데도 집이었던 것도 맞고요.]
[귀빈관이면서 집이었다고요?]
[애초부터 이 집은 일제강점기 시절에 친일파에 의해서 지어진 집으로 접대와 사교 활동을 목적으로 지어진 집입니다. 단순히 부자가 멋지게 살고 싶어서 멋진 집을 지은 것이 아니라 자신의 집에서 접대하며 인맥을 관리하고자 지었지요.]
[그래서 이··· ‘별채?’, ‘사랑채?’ 제대로 발음했나 모르겠네요. 이런 것들을 열심히 꾸민 거였군요.]
[맞습니다. 그래서 본채는 한옥식 우물마루가 되어 있지만, 이쪽의 사랑채와 별채는 일본식 장마루로 되어 있지요.]
[아주 조금뿐이지만, 한국의 역사에 대해서는 들어본 적이 있습니다.]
외국인들이 우리의 아픔에 대해서 더 잘 알고 공감해주길 원하지만, 어쩌겠나. 이들은 외국인이다. 우리가 폴란드의 아픔이나 우크라이나의 상처, 아프리카에 있는 나라들의 고난에 대해서 자세히 알지 못하는 만큼 저들도 우리의 상처를 제대로 아는 것은 힘든 일인 게 당연했다.
그래도 우리의 역사에 상처가 담겨 있다는 걸 아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긍정적인 것이다.
저택 다음은 사찰을 볼 차례다. 다만, 진짜로 사찰에서 촬영할 계획은 아니었다. 남산 이승만 동상에서 촬영한 후 CG를 활용해서 사찰로 꾸밀 요량이다.
[혹시, 여기에도 다른 이유나 의미가 있는 건가요?]
[물론입니다.]
스쳐가듯이 봐도 상관없지만, 우리 영화를 씹고 뜯고 맛보고 깊이 있게 즐기려는 이들에게는 파고 또 파도 해석할 거리가 많은 작품이 되도록 디테일에 신경을 많이 썼다.
이곳은 일제강점기 시절에 조선신궁이 만들어졌던 터다. 1925년 6월 27일 일본 내각고시에 의해 사격(社格)을 높여 신사의 명칭을 종래 '조선 신사'에서 '조선 신궁'으로 개칭하고는 같은 해 10월 15일에 진좌제 행사를 가지고는 조선인들에게도 참배를 강요했던 곳이었다.
당시 남산에는 국사당이 있었으나 자신들의 신궁보다 국사당이 더 높은 곳에 있다는 이유로 국사당은 현재의 위치 인왕산으로 강제 이전을 해야만 했다.
현재는 일부의 흔적을 제외하고는 다 사라졌는데 일본이 패전 이후 자신들의 신당과 신령이 조선인에 의해 모욕을 당하지 않도록 먼저 해체하기도 했고, 해방 이후 실제로 철거 작업들을 했기 때문이다.
[일본이 그토록 야만적인 행위까지 했다니 믿을 수가 없군요.]
휘 잭맨의 이 반응은 외국인들과 대화하다 보면 자주 느끼게 되는 답답한 상황이었다. 일본이 어찌나 홍보를 잘해 놓았는지 기사도와 비견되는 사무라이 정신을 비롯하여 일본인의 겸손함과 친절함은 뼛속 깊이 타고난 국민성 수준으로 알려져 있었다.
즉, 이들처럼 선량하고 겸손한 이들이 그토록 잔인무도한 짓을 했을 리가 없다는 선입견이 확고하게 있는 것이다. 이러한 인식은 자연스럽게 잘 아는 일본을 믿고 잘 모르는 한국이 거짓말을 하는 건 아니냐고 되묻는 의구심으로 이어진다.
‘이래서 미디어의 힘이 대단한 거야. 딱히 공부하려고 하지 않는 모든 사람한테는 게임이나 영화, 만화의 일본이 곧 사실이나 마찬가지니까.’
이렇듯 서구가 보는 일본은 배려와 겸손의 아이콘이고 한국이 보는 일본은 음흉함 배신의 상징이었다. 진짜 착함이 뭐냐고 묻는다면 나도 딱 부러지게 정의할 수는 없지만, 한 가지는 장담할 수 있다.
‘믿음, 사랑, 곧은 절개 같은 건 일본 스타일이 절대로 아니야.’
확증편향은 위험하지만, 문화적인 특징과 대략의 국민성이라는 것까지 부정할 수는 없다. 그런 의미로 차후에 나오는 GF의 게임에서는 일본 출신이라면 NPC 하나하나에 이르기까지 진실한 이미지를 꼭 잘 반영해서 만들어야겠다.
< 돋보기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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