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돋보기 >
세계 1위 기업인 마이크루도 1,000억 달러 수준이고 GF의 모든 계열사의 수익을 다 합쳐도 턱없이 부족한 괴물 같은 수준의 기업이다.
[야스다가 라이언 맨 보다도 부자가 되네요. 하지만 리벤져스와는 별개의 세계관으로 진행하니 문제는 없겠습니다.]
[관객들은 어차피 토리나 야스다나 현실감이 없는 부자들이라 딱히 언급만 하지 않으면 누가 더 부자인지는 인식도 못 할 겁니다.]
그건 그렇다. BC의 박쥐 히어로를 영화로 만든 사람은 그가 얼마나 부자인지 설정하고 영화를 만들었겠지만, 관객의 입장에서는 막연히 엄청난 부자일 뿐이고 그것만으로도 충분했다.
[히로인은 초안 그대로 한국인으로 할게요.]
함께 일하며 누가 느꼈지만, 레이첼은 처음 회의실에서의 모습과 달리 은근히 내 편을 들어주었다.
‘역시, 팔은 안쪽으로 굽는 법.’
본래의 미래에서는 일본인이지만, 우리 버전에서는 한국인으로 변경!
야스다의 죽음을 목전에 두고 작별 인사로 일본에 가는 설정 역시 한국인 여성과 사랑에 빠지면서 위기의 히로인을 구출하기 위해서 한국에 가는 것으로 바꿔버렸다.
이건 그냥 무턱대고 바꾼 것은 아니고, 울버렌의 일본사가 스토리가 원래 이런 형태였기에, 그 배경을 일본에서 한국으로 바꾸기만 한 것이다.
‘기존 스토리를 활용하는 편이 훨씬 자연스러울 테니까.’
다음은 촬영을 위한 배경이다.
그동안 서구권의 영화에서 한국이 등장하면 동남아와 같은 분위기의 연출이 되는 일들이 다반사였다. 뚜렷한 색채를 가진 중국과 일본에 비하면 특징이 없다시피 했다.
이참에 그런 느낌을 완벽하게 지울 수 있도록 한국의 새로운 모습을 사람들에게 각인시켜줄 생각이다.
[배경은 서울에서 시작해서 부산으로 내려가는 게 좋겠어요. 마땅한 교통편으로는 무엇이 좋을까요?]
[KTX면 됩니다.]
원래 울버렌의 영화에서도 신칸센을 타고 이동하며 전투하는 장면이 존재한다. 이것을 KTX로 바꿔서 적용했다. 또한, 여기에는 두 가지의 노림수가 있었다. 이를 작가진들은 바로 알아차렸다.
[한국의 수도인 서울의 모습과 제 1 항구 도시인 부산의 모습을 모두 보여줄 수 있겠네요.]
[당위성도 충분합니다. 한국 전쟁 때 서울에 살던 사람들이 부산까지 피난했었고, 그 흔적들이 남은 마을은 지금까지도 부산에 존재하니까요.]
배경에 스토리가 존재한다면 관객들은 훨씬 더 쉽게 몰입할 수 있을 것이다.
거기에 가장 중요한 포인트인 빌런의 설정이 나온다.
‘이 망할 새끼는 그대로 보여줘야지. 내가 같이 작업하면서 기를 쓰고 제대로 보여주려는 이유가 바로 이거니까. 말을 강경하게 하는 바람에 대모님한테 한 소리도 들었고. 하여간 이 자식들이 문제야.’
울버렌을 보면서 가장 짜증 났던 지점은 일본이 마치 히로시마 폭격에 의한 피해자처럼 그려진다는 점이었다. 민간인들이 폭격당한 것을 무시하는 건 아니다. 그러나 일본이 아무것도 안 했는데 미국에서 폭격한 게 아니지 않은가?
‘미국이 왜 일본에 핵폭탄을 투하했는가, 그들이 그 전에 어떤 짓을 하였는가, 최후까지 얼마만큼 지독하게 저항했는가, 그리고 이후에 그것을 어떻게 포장하고 있는가.’에 이르기까지 최대한 다뤄줄 것이다.
불편할 테니 아마도 일본에서는 불매운동이 일어나고 난리를 칠 게 눈에 선했다. 하지만 괜찮다. 어차피 이 사건을 알아주기 원하는 건 일본이 아니라 일본을 제외한 모든 나라이기 때문이다.
‘정치라는 게 원래 그래. 중도층을 노리는 거지 극좌건 극우건 상대방을 말로 설득하려는 게 아니거든. 현실에서는 패배를 인정하고 개과천선하는 일 따위 일어나지 않으니까.’
아마도 이런 형태로 영화가 만들어진다는 것을 알면 디지니에서 엄청난 반대를 할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이미 권한은 내 손에 들어온 뒤라 상관없고, 정 안 되겠다 싶으면 발생하는 손해액을 내가 모조리 메꿔주면 된다.
먹고 살만큼의 돈은 아득히 넘어섰으니 마음에 쏙 드는 작품 하나 세계에 떡 하니 던져주면 2,000억쯤은 날려도 상관없다.
이게 바로 재벌 회장님 클래스의 애국 콘텐츠다.
*
방망이 깎는 노인처럼 시나리오를 갈고 닦고 깎았다. 그 결과, 울버렌의 시나리오를 완성했다. 이제는 실질적인 촬영에 들어갈 차례다. 그러나 이번 영화는 이전 작품들보다 준비할 것들이 훨씬 많다.
일단 영화의 주요 배경이 미국이 아닌 한국이라는 점이 가장 큰 문제다.
영화, 야구, 경제, 군사력 등등 미국이 세계에서 1위를 하고 있는 것들은 손으로 세기도 힘들 정도로 다양하다. 그 가운데 영화 산업은 미국의 상징적인 산업이자 자부심이기에 미국 정부 역시 여타 국가에 비해 영화 촬영을 위한 배려가 상당히 많은 편이었다.
예컨대 도로를 봉쇄하고 촬영해야 하는 장면이라거나, 군부대가 등장해야 하는 장면을 촬영할 때 다른 나라와 비교하면 훨씬 수월하고 더욱 긴 시간의 촬영을 할 수 있다.
‘지난번에는 작가진, 이번에는 제작진들과의 회의군.’
이번 안건은 촬영 일정에 대한 부분이었다.
[울버렌의 촬영지가 한국인 만큼 다른 영화들보다 훨씬 일찍부터 허가를 요청하고 일정을 잡아둬야 합니다.]
[명확히 한국의 어디에서 어떻게 촬영하는 것이 효과적인지도 현장조사가 필요합니다. 이 부분에 대해서 회장님께서 생각해두신 바가 있으면 적극적으로 검토해보겠습니다만···]
[그 정도까지는 아닙니다.]
[사전 답사를 일정에 넉넉히 넣겠습니다. 그런데 휘 잭맨에게서 온 요구는 어떻게 할까요?]
울버렌의 주인공인 휘 잭맨이 요구해온 것은 답사 일정에 함께할 수 있겠느냐는 거였다. 세계적인 영화배우가 지금 뭐가 아쉬워서 영화 촬영지 사전답사를 함께 하고 싶다는지 참 모를 일이었다.
[그 사람은 할 일이 없답니까?]
[네, 회장님. 요즘 딱히 할 일이 없는 모양이던데요?]
[휘 잭맨은 인지도와 비교하면 꽤 영화를 자주 찍는 편으로 알고 있는데요.]
[그간 주연 배우로 매년 2편 이상의 영화를 찍기는 했죠. 그런데 바쁘기만 했을 뿐, 딱히 내세울 만한 작품이 없었습니다. 기껏해야 울버렌 전문 배우인 게 전부일 정도니까요.
[내세울 작품이 없다? 제가 아는 바로는···]
말을 하다가 멈췄다.
휘 잭맨이라고 하면 엄청난 대 스타이자 할리우드에서도 알아주는 남자 중의 남자라는 이미지가 강하다. 하지만 막상 대표작이라고 내세울 영화는 X팀 시리즈와 레미제라블이 전부다.
‘그런데 레미제라블은 아직 개봉을 안 했지. 왜 저렇게 달아올라서 열정적으로 임하려는 지 알겠구나.’
할리우드는 매일 같이 새로운 별들이 탄생하고 또 반대편에서는 별이 지는 치열한 전쟁터다. 휘 잭맨 본인이 가장 잘 알 것이다. 지금은 X팀의 울버렌이라는 간판 작품 덕분에 S급 스타를 유지하고 있지만, 이 작품이 무너지면 더는 S급 배우가 아니게 된다는 사실을 말이다.
‘연기력으로 보나 노력하는 것으로 보나 그럴 일은 없지만, 내가 아는 성공한 그의 미래는 지금 노력해서 훗날 이룩하는 결과물이나 마찬가지지.’
우리로서는 두 팔 벌려 환영할 상황이다.
[좋습니다. 같이 가지요.]
기왕이면 배우가 미리미리 확인하고 생각해두면 더 좋은 그림이 나올 것이고 꿈속 미래에서는 화면에서만 보던 스타와 친분을 다지는 경험도 소소하게 즐겨야겠다.
그렇게 스태프들과 휘 잭맨의 어색한 한국행이 결정됐는데.
[허락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여기 제 아내 드보라와 오르카, 데바입니다.]
[안녕하세요, 회장님.]
[잘 부탁드려요!]
[저도요!]
이 녀석이 아내, 아들, 딸까지 온 가족을 다 데려왔다. 나를 비롯한 스태프들 모두 황당할 따름이다.
*
울버렌은 이름 그대로 울버렌으로 시작해서 울버렌으로 끝나는 영화다. 그리고 이 울버렌이라는 영화가 제작될 수 있는 것은 휘 잭맨이라는 캐릭터와 울버렌의 완벽한 싱크로 덕분이다.
‘언젠가는 가능하겠지만, 지금은 휘 잭맨이 아닌 다른 배우의 울버렌은 투자부터 실패할 테지.’
이 때문에 스태프들 누구도 휘 잭맨이 가족을 몽땅 데리고 온 것에 대해서 아무런 말을 하지 못했다. 혹시나 자기 때문에 울버렌이 화나서 영화를 안 하겠다고 해버리면 괜히 말 꺼낸 사람이 독박이니 말이다.
그러니 어쩌랴. ‘너 얌체같이 진짜 이럴 거임?’이라고 세계 그 어느 국가보다도 해고가 쉬운 미국에서 감히 말하기는 어려우니 그 역할은 내가 해줄 수밖에 없다.
[가족 여행을 함께 하고 싶다는 말씀이신지는 몰랐군요.]
[미리 말씀드리지 못해서 정말 죄송합니다. 사실은 저도 혼자 오려고 했는데 가족들이 한국은 꼭 다시 가보고 싶다고 해서요. 더군다나 회장님이 계신 줄은 진심으로 몰랐습니다.]
내 핀잔에 말뿐이 아니라 진짜로 난처해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한편, 그의 말 중에 한 단어가 새삼스레 들렸다.
[다시? 혹, 한국에 이미 다녀온 적이 있는 겁니까?]
[물론이죠. 한국 분들이 잘 몰라봐 주셔서 제가 섭섭할 때가 많습니다. 서울시 홍보 대사가 저거든요.]
[정말이요?]
[정말입니다.]
이런 거로 난데없는 거짓말을 할 리는 없으니 진짜 그랬나보다. 전혀 생각지 못했는데, 의외로 한국이랑 인연이 있는 모양이었다.
‘이 자식. 살짝 마음에 들어졌어.’
원래 외국에 가면 죄다 애국자가 되는 법 아니랴. 우리나라 좋아한다는 데 까짓 가족 여행쯤의 배려는 해줘도 된다 싶어진다.
[아버지가 한국에서 파견 근무를 하셨습니다. 그 이후로 하루가 멀다 하고 한국을 칭찬하는 통에 ‘도대체 뭐가 그렇게 잘난 나라길래 그래?’라는 생각이 들었거든요. 그래서 몇 번 찾아가 보았습니다. 그리고 지금은 우리 아이들이 제게서 한국 칭찬을 들으며 크고 있죠.]
소위 ‘한국인들은 유난히 남의 시선에 신경을 많이 쓴다.’라고 하는데, 나는 이걸 틀렸다고 하는 주의다. 인간이 사회적 동물이라면 나의 마음뿐 아니라 대외적인 평가나 주변의 시선을 신경 쓰는 게 당연하다.
그런 걸 굳이 식민사관의 여파니, 평가에 연연하는 동양적 사고방식이니, 자긍심이 부족해서 그렇다느니 과장되게 말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다.
‘웃으면 좋고 찡그리면 기분 나쁜 거랑 뭐가 달라. 그것보다는 나를 좋아하는 거랑 우리나라를 좋아해 주는 것을 동일시여기는 게 오히려 경계할 부분이지.’
물론, 생각만 이렇게 할 뿐 나 역시도 아직은 나와 국가를 냉철하게 구분해서 보지는 못하는 형편이다. 그 이유는 지금의 상황만 보아도 잘 알 수 있다. 불과 1분도 안 되는 사이에 휘 잭맨이 데려온 가족들까지 애물단지가 아니라 바람직한 여행객으로 여겨졌기 때문이었다.
딸이 유난하리만큼 김을 좋아해서 잘 먹었다는 어떤 기사를 봤던 기억도 떠올랐고 말이다.
하지만 할 말은 하도록 하자.
[다른 스태프들은 일하러 가는 겁니다. 그러니 공과 사를 구별해주시기를 당부합니다.]
[물론입니다. 아내와 아이들은 따로 여행할 거고 호텔도 잡아 놓았습니다. 말씀대로 공과 사는 구분 해야죠.]
‘개념찬 녀석 같으니. 점점 마음에 드는데?’
유명 스타라고 하면 어깨에 힘이 한가득 들어가 있을 거라고 막연하게 생각했는데, 알버트도 그렇고 휘 잭맨도 그렇고 생각보다 괜찮았다. 게다가 가만히 있어도 화난 어깨를 가지고 있는 맨 오브 맨이라서 그런지 와일드할 거라고 생각했는데 이 역시도 편견이었다.
‘꽤 부드러운 성격 같군.’
오해가 풀린 후로는 그의 가족들과도 가볍게 인사를 했고 좌석으로 이동했다.
퍼스트 클래스로 이동하는 그의 가족들과 달리 나와 스태프들은 비즈니스 클래스였기에 그리로 이동하는데, 케인 파이기 사장이 내 앞을 황급히 막아섰다.
[회장님. 정말로, 진심으로 비즈니스에 가려고 하십니까?]
[뭘 새삼스레 그러십니까? 제가 언제는 퍼스트였나요?]
재벌들도 퍼스트는 잘 타지 않는다. 정확히 말하자면 여행을 갈 때는 퍼스트, 업무차 출장을 갈 때는 비즈니스다. 그리고 지금은 업무를 위한 이동이다. 당연히 비즈니스를 타고 이동할 생각이다.
그런데 케인 파이기 사장은 그러면 안 된다고 조언했다.
[평소에도 비즈니스를 애용하시는 건 잘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평소와 다릅니다.]
[어떤 면에서 말입니까?]
[스태프들과 함께입니다.]
상당히 많다고 해봐야 영화의 모든 스태프가 함께하는 것도 아니라서 고작 13명이 전부다.
[그러니까 제가 더더욱 솔선수범해서 함께 해야 하는 것 아닙니까?]
[무려 13시간 30분이나 되는 비행입니다. 그런데 비즈니스에서 함께 하시면 스태프들은 무려 13시간 동안 숨도 못 쉽니다. 비행 중에 단체로 질식사할지도 몰라요.]
‘아!’
스태프들을 위해 비즈니스석을 함께 하려고 했던 것인데, 반대로 그것이 스태프들을 괴롭게 만드는 행동인 셈이 되는 것이다.
‘이런 젠장. 내가 올챙이 적 시절을 깜빡했구나.’
케인의 말을 듣고 보니 툭하면 장병들을 위한답시고 악수하러 찾아오던 대대장의 모습이 떠오른다. 그는 장병들이 자신을 보고 사기가 충전될 거라 생각했겠지만, 현실은 대대장 때문에 청소만 빡세져서 사기가 오히려 떨어지곤 했다.
놀랍게도 그와 같은 정신 나간 짓을 내가 선의로 하려는 중이었다. 이토록 당연한 걸 까먹었다는 내 자연스러움에 스스로 깜짝 놀랄 지경이다.
[이해했습니다. 그런데 퍼스트는 아직 자리가 있습니까?]
[준비해뒀습니다.]
미소를 지으며 주머니에서 케인 파이기 사장이 티켓 두 장을 꺼냈다. 나 역시 웃고는 함께 이동했다.
< 돋보기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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