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끼리끼리 >
슈퍼 히어로 장르의 힘은 만화에서 나온다. 슈퍼 히어로들의 수익을 보면 늘 정해진 만화들이 차지하고 있다.
BC에서는 외계에서 온 최초의 히어로와 박쥐.
바벨에서는 X팀과 거미다.
안타깝게도 우리 바벨은 자신들이 보유하고 있는 가장 강력한 콘텐츠의 슈퍼 히어로를 영상으로 만들 권한이 없었고 디지니는 그중 한 가지를 가지고 있었다.
이 기회에 그걸 가져오는 편이 좋을 것이다.
[X팀을 저희에게 넘기십시오.]
[지금까지 동등한 거래네 뭐네 말하더니만, X팀을 달라고? 자네는 내 생각보다도 훨씬 염치가 없군. X팀은 지금까지 울프의 기둥 역할을 하고 있던 영화일세. 그걸 내놓으라고 하는 것이 정말로 동등한 거래가 될 거라 생각하나?]
[알고 있습니다. 거래의 저울이 맞도록 당연히 조건을 붙이겠습니다.]
[그게 뭔가?]
[앞으로 10년간 우리가 제작하겠습니다. 그리고 배급은 넘기겠습니다. 디지니든 울프든 당신들이 알아서 하시면 됩니다.]
에이든 회장이 코웃음 쳤다.
[10년간 바짝 벌어서 돈을 안겨 줄 테니 그다음부터는 손을 떼라, 이런 말이군.]
[그렇게 적나라하게 말씀하실 것까지야 있나 싶지만··· 뭐, 비슷합니다.]
[제작비나 여타 예산은 어떻게 할 생각이지?]
[돈을 벌어서 안겨다 주겠다는데, 제작비도 우리가 제공해야 합니까? 그 정도는 직접 하셔야지요.]
[만약 그렇게 한다면, 10년간 자네들이 X팀의 판권으로 영화를 전혀 제작하지 않아도 10년 후에는 자네들 것이 되는 게 아닌가?]
[그런 짓을 할 만큼 제가 악랄한 놈은 아닙니다.]
어디까지나 거래다. 물론 우리가 직접 제작비를 투자하고도 충분히 이득을 볼 자신이 있지만, 그렇게 돈을 쏟아부었다가는 우리 콘텐츠 제작이 늦어질 것이다. 그러니 이 부분을 양보할 수는 없었다.
판권을 되돌리는 조건만 제외하면 디지니가 스파이더 가이를 자신들의 영화에 출연시키기 위한 계약과 상당히 유사한 계약이었기에 손해를 본다는 생각하지는 않을 것이다.
‘게다가 10년이잖아.’
우리가 판권을 회수하는 시기가 10년 후다. 지금은 엄청난 인기를 가지고 있지만, 10년이 지난 후에도 X팀이 인기 있을 거라는 보장은 그 어디에도 없다.
‘어차피 가만히 둬도 막장으로 이야기를 끌어가면서 망하기는 하지. 그걸 보면 정말로 보장이 없긴 하네.’
그렇게 단물이 다 빠지고 나면 또 십수 년이나 지나야 X팀을 가지고 이득을 만들어낼 수 있을 텐데. 이 판권을 유지하려면 망하더라도 투자를 해서 영화를 제작해야 한다. 에이든 회장은 지금 이것을 두고 무엇이 더 이득일지 열심히 계산기를 두드려야 할 것이다.
[내쪽에서 조건을 좀 붙여도 되겠나?]
[말씀해보시죠.]
[10년간 X팀으로 8편의 영화를 제작하는 조건. 그리고 8편의 총 수익이 40억 달러를 초과할 경우에만 X팀이 바벨로 돌아가는 조건일세. 어떤가?]
X팀으로는 지금까지 총 4편의 영화가 개봉했다. 원래라면 X팀의 프리퀄 시리즈인 퍼스트 클래스까지 총 5편이 개봉했어야 했는데 디지니와 울프의 합병이 이루어지면서 다행인지 불행인지 퍼스트 클래스의 제작은 미뤄진 상태였다.
‘그리고 이 영화들 중 가장 높은 수익은 4억 5,000만 달러지.’
에이든 회장이 내게 제시한 조건은 영화당 5억 달러의 수익을 내야만 가능한 수치다. 나름대로는 쉽지 않은 조건을 붙인 것이다.
하지만 내게는 고마울 따름인 제안이다.
더 이야기를 끌 것도 없이 에이든 회장에게 손을 내밀어 악수를 청했다.
[잘해보세.]
잡은 손에 힘을 준 뒤 에이든 회장이 떠나갔다.
“놀러 와서 일만 하는 기분이군요.”
작게 푸념하는 내게 최종인 회장이 이상하다는 듯 말했다.
“저만의 착각이었을까요? 분명히 대화는 날이 서 있는데, 왠지 우호적이었던 기분이 듭니다.”
“회장님께서 능숙하게 협상하셨으니 그런 거 아니겠습니까.”
“글쎄요. 그보다는 애당초 들어줄 요량이 아니었나 싶었는데······.”
김유천 비서실장과 최종인 회장의 대화를 중간에 끊었다.
“업무 대화는 나중으로 미루도록 하죠. 어찌 됐건 파티이니 다들 즐겨야 손해를 안 보는 겁니다. 저 때문에 괜히 있지 마시고 다들 시간 보내십시오.”
“알겠습니다.”
이후는 잘 아는 바와 같았다. 참가자의 면면이 유명하고 TV를 통해서 얼굴은 아는 이들이라는 부분이 다를 뿐, 먹고 마시며 이런저런 잡담과 명함을 나누는 게 전부였다. 장소가 장소이니만큼 게임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는 일은 없었다.
이윽고 뒤늦게 등장한 파티의 주인공이 등장했다.
도란트 회장은 대통령으로 볼 때와는 느낌이 많이 달랐다.
‘TV에서 대통령으로 볼 때는 무조건 욕만 했고 그의 지지자들을 다들 바보로만 여겼었는데, 직접 보니 의외일 만큼 매력이 있네? 말도 잘하고 유머러스해.’
마피아 두목 같은 느낌을 풍기고는 있지만, 만만치 않은 사업가다운 그런 분위기를 가진 남자. 그의 최대 강점은 자신의 지지자들이 무엇을 좋아하고 무엇을 원하는지 확실히 안다는 것이었다.
본인이 이득을 볼 수 있다면 전 세계에서 욕을 먹어도 호탕하게 웃을 수 있는 그런 사업가의 화신 같았다. 특히나 에이든 회장과 친분이 상당해 보였다.
‘빌이 알려주기도 했고 정작 도란트는 내게 관심이 없는 걸 보면··· 에이든 회장이 자연스럽게 나를 보려고 한 게 분명하구나.’
미국 상류 사회로부터의 인정은 결국 GF의 윤태식이 일군 성과가 아니었다. 학연, 지연, 혈연으로 분류되는 한국사회의 인맥처럼 이곳에서도 아는 인물의 추천으로 그저 초대를 받았을 뿐이었다.
‘이런 이유였든, 저런 이유였든 그건 내게 중요한 게 아니니까.’
실망?
그런 건 전혀 없다. 애당초 기대를 해야 느낄 수 있는 감정인데 나는 저들의 인정이 불필요했고 있는 듯, 없는 듯한 취급을 받는 편이 오히려 낫다고 보았다.
자신과 자신의 지지자들을 위해서 미국 전체가 위험해지는 선택을 서슴지 않고 할 수 있는 인물이라면, 그 반대의 경우가 되었을 때 얼마나 잔인하게 여겨지겠는가. 내 편이라고 마냥 안심하기보다는 저런 극단적인 이와는 거리를 두는 편이 나았다.
그렇게 파티는 끝이 났고 우리는 X팀이라는 히어로들을 품에 안은 채 LA로 돌아왔다.
*
넷플렉스의 작가진과의 회의에서 처음 본 반응은 헛웃음이었다.
[깜짝 선물이라기보다는 폭탄 같네요. 갑작스레 X팀의 시나리오라니.]
[울버렌의 이야기가 필요하다?]
[회장님께서는 저희를 글 자판기로 생각하시는 것 같네요.]
[맞아요. 동전 넣고 꾹 누르면 바로 나오는 자판기. 그러지 않고서야 이렇게 바로 달라고 하지는 않을 테니까요.]
에이든 회장과의 거래를 듣고 한숨짓는 작가들이 한마디씩 했다. 잠시 후 레이첼이 이들을 대표하여 내게 말했다.
[정력적으로 움직이는 회장님 덕분에 지금 쌓아둔 일만 한가득이에요. 스페이스 워즈도 마무리를 못 하고 있는 실정이죠. 그런데 이 상태에서 울버렌에 대한 이야기를 구상하면 전부 다 미뤄질지도 몰라요. 그걸 감수할 건가요?]
[그렇지는 않습니다. 게다가 일정이 미뤄지지 않으리라고 생각합니다. 아무것도 없이 이야기를 짜내라고 말씀드리는 게 아니거든요.]
[더 듣고 싶네요.]
[울버렌은 스페이스 워즈와는 다릅니다. 원작 이야기가 다양하게 이미 존재하고 그 시놉시스를 바탕으로 우리에게 맞는 이야기를 골라내면 됩니다. 게다가 이미 원래 영화화하려 했던 극본도 완성은 되어 있죠.]
레이첼이 되물었다.
[그 극본이 마음에 들지 않아서 수정하시려는 것 아닌가요?]
[그근 그렇습니다. 하지만 스토리 자체가 문제 있는 건 아니거든요.]
X팀 3부작이 끝나고 이 중 가장 인기가 많은 울버렌은 따로 독립 작품이 1편 만들어졌다. 이른바 ‘울버렌의 탄생’이라는 첫 작품인데, 영화의 상태가 썩 좋지 못함에도 울버렌의 인기 덕분에 전 세계에서 4억 달러에 가까운 수입을 올렸다.
지금 안건으로 나온 시나리오가 바로 이 울버렌 2편이다. 울프가 1편의 인기를 몰아서 준비했었는데 내가 X팀을 가져와 제작하는 것에 관심을 가진 가장 큰 이유가 바로 이 2편 때문이다.
‘쓰레기 중에 이런 쓰레기가 없거든.’
울버렌 2편은 2차 세계대전에서 핵폭탄을 맞는 히로시마로부터 시작된다. 포로를 감금하고 고문하며 인권의 유린이란 유린을 다 한 일본의 군인들이 나오는데 놀랍게도 일본 군인들은 마치 사무라이 정신으로 정의를 수호하는 자들처럼 묘사된다.
벌써부터 기가 막힐 노릇이다. 그런데 이것만이 아니다.
전범들인 주제에 일본이 핵폭탄에 맞은 피해자처럼 보이는 연출!
‘지랄하고 자빠졌어. 아주 생지랄!’
절대 용납할 수 없는 부분이다.
본래의 미래에서는 이 부분에 대해 이런 변명을 해댔다. ‘당시에 원작을 배경으로 한 거니까. 어쩔 수 없었다’는 말이었다.
전부 틀린 소리는 아니다. 원작에서부터 울버렌은 일본과 떼려고 해도 뗄 수 없는 그런 관계다. 하지만 그렇다고 이해해줄 생각은 전혀 없다. 내가 바벨의 주인이 된 이상 이제 울버렌과 일본의 관계는 사라질 것이다.
‘그 자리에 한국을 넣으면 가볍게 끝나니까.’
오랜 세월을 살아온 존재. 그 때문에 2차 세계대전부터 한국전쟁까지 모든 것을 겪은 존재.
그것이 울버렌이다.
[이 히어로의 시선을 통해 당시 일본의 만행이 어떤 것인지 제대로 보여줄 계획입니다. 과장할 필요가 없이 팩트로만 조져버릴··· 말실수를 했군요. 죄송합니다. 진실들로 사건을 구성하면 그것만으로도 충분할 겁니다.]
[의도는 잘 알겠지만, 괜찮을까요? 일본의 반발이 꽤 클 텐데요.]
[그게 문제가 됩니까?]
[시장의 크기가···]
[어차피 걔들은 레이폰도 안 사고 우리 영화도 안 보고 우리 게임도 거의 안 합니다. 거기에 반도체조차도 우리 카이닉스의 것은 거의 안 씁니다.]
전 세계 점유율 24%를 보유한 카이닉스 반도체지만, 일본에서의 점유율은 고작 6%다. 그들은 거의 대부분의 반도체를 대만에서 구입하지, 한국의 것을 사용하지 않으려고 한다.
시장이 크면 뭘 하나?
한국보다도 작은 매출이 나는 곳의 눈치를 볼 이유는 조금도 없다.
[세계적으로 큰 영향력을 가진 나라···]
[우리는 거짓을 날조하지 않습니다. 거듭 강조하지만 세계인들이 잘 알 수 있도록 진실만으로 이야기를 구성할 겁니다. 그런데도 명분이 저들에게 있을까요?]
눈치를 보아야 할 이유는 조금도 없다.
반론에 재반박하는 내 모습을 보고는 레이첼이 말했다.
[이미 결단을 내리셨군요. 좋아요. 작가들에게 오직 진실이라는 칼을 휘두르라 하였으니 그 말대로 구성해볼게요. 그런데 그건 알고 있는 거겠죠?]
[무엇 말입니까?]
[울버렌의 공평한 시선이 일본의 만행만이 아닌 한국군의 만행을 볼 수도 있다는 것을요. 쉬쉬하고 있는 군 내부에서의 위안부를 볼 수도 있어요.]
비수처럼 파고든 그녀의 말은 한국인 중에서도 잘 모르는 이가 태반인 지적이었다. 나와 함께하며 우리나라에 대해 조사한 것인지, 레이첼이 본래부터 가진 역사지식인지는 알 수 없었다. 다만 한 가지는 분명했다.
그녀의 주름진 눈이 예리하게 나를 베었다는 것.
나는 순간적으로 할 말을 잃었다.
[무조건적인 가해자와 피해자, 일방적인 선과 악을 그려내라는 말씀인지 되묻고 싶네요. 이래도 회장님께서는 거짓 없는 진실을 허용할 수 있나요?]
[그건······.]
잠시 멈칫했던 나는 흔들렸다는 사실에 스스로 부끄러웠다. 말로는 공평과 정의를 언급하면서 지금 보인 이 꼬락서니는 도대체 뭐란 말인가.
갈등했다는 사실을 감추고자 더없이 단호한 태도로 대답했다.
[물론입니다.]
[좋아요. 그럼 시작하지요.]
레이첼이 작가진들을 추스르며 내게 무언의 추방령을 내렸다.
회의실에서 나온 뒤 나는 잠시 호흡을 가다듬었다. 그리고 언제나 그랬던 것처럼 최고의 작품을 만들어내기 위한 제반작업을 다져나갔다.
‘창작자들의 모든 능력을 제약 없이 구현한 작품.’
제작자이자 팬으로서 그런 작품들을 보고 싶다.
< 끼리끼리 > 끝
ⓒ (54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