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999년 게임 스타트-542화 (542/577)

< 끼리끼리 >

그 역시 그동안 불편하다고 생각하면서도 차마 입을 못 열고 있었던 것인지, 알버트의 말에 빠르게 지원 사격을 들어왔다.

그런데 최종인 회장의 말도 듣고 보니 확실히 맞는 말 같긴 했다. 워낙 자주 해외를 나가는데, 매번 비행기 표를 사서 움직여야 하니까. 뭐든 쉽지 않다.

[알겠습니다. 이참에 하나 장만하지요.]

[아냐! 하나로는 부족하다고 봐.]

[그럼?]

[한 세대 쯤 구매하는 게 어때? 출장 가는 사람들이 엄청 많잖아. 결국은 기껏 전용기를 구입해놓고는 못 타는 사람들이 여기저기 넘칠 거야.]

전용기 세 대는 지금 우리 회사의 규모에서 금액적으로 별문제 없는 대수다. 전용기 한대 가격이라고 해봐야 500억에서 800억 사이다. 운용비는 대략 1년에 200억 정도면 충분하다.

‘문제는 매물이지.’

마땅한 매물이 시기에 맞춰서 나온다는 보장이 없다. 그렇다고 직접 제작을 하자니 자동차도 한 대 구매하려면 완성되기까지 한참을 기다려야 하는데 전용기는 말할 것도 없지 않은가.

그래도 추진하다 보면 어떤 식으로든 결과는 나올 터.

[넷플렉스에서 1대. 그리고 GF에서 1대. 그리고 1대는 전세기로 준비하는 쪽으로 가봅시다.]

[DC에 도착하면 진행하도록 하겠습니다.]

이윽고 도착한 워싱턴 DC.

‘한국이라면 서울에서 부산까지 자동차를 타고도 5시간이면 가는데.’

프러쉬 호텔에서 초대장을 보여주니 평소에는 사용하지 않는 문으로 안내를 받았다. 문은 프러쉬 파티장을 위한 전용 장소로 이어져 있었다.

‘왠지 멀쩡한 극장 객석을 나누고 돈을 올려받는 거랑 비슷한 것도 같네. 여기부터는 아무나 못 들어온다고 광고하는 꼴 말이지.’

어느 나라를 가든 마찬가지겠지만, 공식적인 파티라는 건 부자들의 호화 파티든 한국의 일반적인 돌잔치든 별반 다를 게 없다. 부자들의 호화파티는 그저 그들보다 더 많은 돈을 들여  놓고는 돈 들인 것보다 사람에 더 관심이 많다는 것이 다를 뿐이다.

이런 걸 ‘메뉴랑 옷차림 좀 다른 게 끝’이라고 생각하니 내가 진수성찬이랑 같이 클럽에서 놀지 못하는 것 같다. 하나하나가 새로워야 하는데 냉소적으로 구니 유희도 유희가 아닌 것이다.

반대로 알버트와 사라는 달랐다.

[이런 파티에서는 제대로 즐겨야 한다고. 이리와, 사라~]

[응. 오너! 우린 그럼 파티를 즐길 테니까. 나중에 또 보자고~]

지루한 모습에 지루한 표정이 절로 지어지는 나와 이들 부부는 행복하게 축제의 가운데로 들어가 버렸다. 어딜 봐도 저렇게 신이 날 그런 분위기가 아닌데 정말로 즐기는 모습이다.

‘인종 차이려나?’

미국과 한국의 문화적인 부분을 가볍게 고찰하는 그때였다.

비싸 보이는 와인을 한 모금 마실 때 누군가 내게 다가왔다.

[요즘 통 얼굴 보기가 힘들더니만, 이런 곳에서 만나게 되는군.]

[오랜만입니다. 빌.]

언제나 세계 1위의 부자를 두고 싸우는 남자.

빌 게이트 명예 회장이었다.

[그동안 잘 지냈나?]

[요즘은 기사를 잘 안 보시나 봅니다. 제 이야기가 엄청나게 나왔을 텐데요?]

[그건 자네의 회사 이야기지, 자네의 이야기가 아니지 않나. 회사를 자네처럼 생각하는 자세는 좋지만 그렇다고 자네라는 존재를 회사에 묶으려고 하지는 말게.]

웃으며 대꾸했는데 의외로 묵직한 답변이 돌아왔다.

[자네가 만든 회사일세. 그 회사는 사라져도 다시 만들 수 있지. 하지만 자네가 없어지면 회사도 없네. 회사와 자네를 구분하지 못하는 실수를 범해서는 곤란하다는 걸세.]

그냥 스치듯 하는 말이지만 곱씹을 가치가 충분히 있는 말이었다. 아울러, 내가 한국에서 느낀 감정과도 일맥상통하는 바가 있었다.

[조언 감사합니다.]

[노파심에 한 말에 불과하니 너무 진지하게 받아들이진 말게. 지금도 자네는 충분히 잘하고 있거든. 내가 봐왔던 누구보다도 비범할 만큼 말이야.]

[고맙습니다.]

[그리 고마우면 자네를 초대한 이와 잘 대화해보게. 건전한 이야기가 오갈 수 있어 보이거든.]

[도란트 프러쉬 말입니까?]

[그가 아니야. 기다리면 곧 알게 될 걸세.]

그리 말하고는 묘한 표정을 짓고는 다른 이를 상대하러 이동했다. 나는 빌의 말을 추리하는 한편, 그의 행동을 눈여겨보았다.

‘미래를 알아도 연륜에서는 내가 못 미치는군.’

세계 1위의 부자.

그는 의자에 앉았다가 일어나기만 해도 화제가 되는 인물이다. 각계의 저명한 인사들이 모인 자리라고 하더라도 이 자리에 모인 다른 인물들과 빌 게이트는 또 급이 달랐다.

‘그동안에는 몰랐는데 이렇게 보니 닭장에 들어온 공작새 느낌이네.’

따로 만날 때와 이런 모습을 보는 빌은 또 완전히 다른 인물의 느낌이다. 미소를 짓고 있으면서도 이따금 날카로운 눈빛을 보이는 그를 섣불리 대할 수 있는 이는 아무도 없을 것이다.

그리고 그의 빈자리를 대신해서 새로운 사람이 다가온다.

[로키드 필름 이후 아주 오랜만이군. 윤태식 회장.]

어딘지 모르게 으르렁거리는 것 같은 인물.

그러면서도 익숙한 목소리의 주인과 눈을 마주쳤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에이든 회장님.]

나를 바라보는 에이든 회장의 눈에는 알 수 없는 감정들로 가득했다. 그저 눈을 마주쳤을 뿐인데, 그 안에서 느껴지는 감정은 셀 수도 없이 많은 감정이다. 너무 많은 감정이 느껴져서 오히려 그가 지금 무슨 생각으로 나를 보고 있는지조차도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가 ‘호오!’하며 감탄사를 내뱉고는 말했다.

[신성처럼 나타나서는 할리우드의 기존 틀을 다 부쉈어. 이후 새로운 틀을 만들어 냈지. 전무후무한 입장이 된 기분은 좀 어떤가?]

[특별할 게 있겠습니까? 옳으니까 옳은 길을 갔을 뿐인 것을요.]

[옳은 길? 정말 그렇게 생각하나?]

[확신합니다.]

거칠게 노려보던 그는 이내 못마땅하다는 듯 코를 씰룩였다. 소리 나지 않게 뇌까리는 말이 있었는데 거친 발음으로 봐서 대부분이 욕 같았다.

[대담하군. 참으로 대담해.]

[오해가 있으시군요. 저는 매일 고민하고 또 고민해서 혼자 끙끙대는 성격입니다. 대담함과는 거리가 멀지요.]

[헛소리 말게. 모두의 의견을 모아서 자네가 독단적으로 선택한다는 것쯤은 진작부터 江? 있으니까. 아예 그런 소리를 수도 없이 떠들어댄다면서? 하긴, 그럴 수밖에 없겠지.]

[이유를 아십니까?]

[알지. 못난 놈들이 헛소리나 지껄이니 다 아는 자네 같은 사람한테는 한심해 보인다는 것쯤은.]

[저에 대한 오해가 더욱더 깊어진 것 같습니다. 안타깝군요.]

에이든 회장이 콧김으로 불을 꺼트릴 수 있을 양 세게 내뿜었다. 뒤이어 붉으락푸르락하던 표정을 지우고 심드렁하니 말했다.

[나는 자네의 가치관을 혐오해. 혼자만 잘난 선택, 오만한 태도, 심기를 건드리고 아시아인 다운 예의까지 전혀 없는 언변까지! 모든 것들이 마음에 들지 않아.]

[그렇게 마음에 들지 않으시는 분이 파슘의 공주는 왜 그리  수정해서 내보내셨습니까?]

[자네는 싫지만, 능력은 인정하니까.]

‘갑자기 뭔 소리지?’

꼬장꼬장한 노인네의 질투 같았다.

[인정할 건 인정해. 시장을 읽는 예리한 눈과 무시무시한 판단력. 그것만큼은 졌어. 지금까지 그래왔듯 앞으로도 자네의 안목은 놀랍겠지.]

느닷없는 자기 고백은 그야말로 기습공격과 같았다. 지금까지 그가 보여준 감정들은 그의 입에서 전혀 이런 말이 나올 거라고 예상조차 할 수 없었으니까 말이다.

[자네를 만날 때는 늘 옆에 최 회장과 비서실장이 있더군.]

최종인 회장은 바벨의 회장 역을 하기 전인 마이코닉스에서부터 디지니와 경쟁을 해온 CEO다. 에이든 회장이 모를 수 없었다.

[나도 요즘 조나단과 월켄이라는 친구가 늘 옆에 있다네. 파슘의 공주를 살리고 디지니를 구한 이들이지.]

[그러셨습니까?]

필연적으로 망할 수밖에 없던 영화를 살려낸 인물들이다. 디지니의 동향을 조사하며 이들의 이름을 계속 들었던 만큼, 잘 알고 있었다.

[그들이 이렇게 말하더군. 넷플렉스가 완성시킨 슈퍼 히어로 장르는 앞으로 최소 10년간은 할리우드를 지배할 것이라고. 쉽사리 밀리지는 않겠지만, 그 과정이 가시밭길처럼 험난하리라고 말이야.]

[고마운 평가군요.]

[그러니 우리도 미래를 위해 넷플렉스와 함께 하는 건 어떻겠냐 하더군.]

[······]

[소감이 어떤가? 나는 그 말이 정말 끔찍하게 들렸는데. 앞으로 10년간은 내가··· 우리 디지니가 자네 하나를 넘어서지 못할 거라는 말이나 마찬가지였으니까 말일세.]

[안타까우십니까?]

[그랬지. 하지만 거듭된 보고를 받다보니 조금씩 생각이 달라졌어.]

분명 조금 전까지만 해도 침울하고 우중충한 눈빛을 하고 있던 에이든 회장의 눈에 급격하리만큼 밝은 빛이 돌아왔다. 그런 눈을 한 채로 에이든 회장이 내게 말했다.

[제안을 하나 하지. 우리 디지니의 영화들이 넷플렉스와 장기 계약을 맺도록 하겠네. 대신 앞으로 10년간은 함께 가세.]

비로소 알았다.

빌이 말한 초대자.

나를 이곳에 부른 이는 에이든 회장이었다.

*

나는 악감정 없이 담백하게 그의 제안을 되짚었다.

넷플렉스는 이름 그대로 언제 어디서든 인터넷만 연결된다면 바로 입장 가능한 인터넷 극장이다. 극장이 손님을 끌기 위해서는 당연히 손님의 기호에 맞는 콘텐츠가 필요하다.

디지니는 자신들이 보유하고 있는 압도적인 콘텐츠를 무기 삼아 우리와 함께하자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좋은 조건이야. 하지만 지금 넷플렉스와 디지니의 관계에서 더 우위에 있는 것은 넷플렉스지.’

아무리 매력적인 제안이라고 한들 이것을 바로 물어버린다면, 우위에 있는 것을 포기하고 동등한 위치로 내려가는 결과를 맞이하게 된다. 그러니 적절한 선에서 밀당을 하는 편이 옳았다.

조금만 과하게 나가면 저쪽에서 포기할 것이다. 기왕이면 우위는 유지하고 제안도 받아들이는 것이 좋다.

적절한 수위 조절이 필요한 순간이었다.

[회장님께서는 저희 넷플렉스가 어떤 상태라고 생각하십니까?]

[갑자기 그게 무슨 말인가?]

[단순한 질문입니다. 우리 넷플렉스가 과거처럼 콘텐츠가 부족해서 헉헉대는 것으로 보이시느냐는 거지요.]

자체 콘텐츠가 없던 시절에는 구걸해서라도 구작들을 모아오던 회사다. 그러다가 기껏 만들어낸 자체 콘텐츠도 그저 게임 방송일 뿐이었다.

게임 방송이 전 세계적으로 송출되는 방송이기에 수익성이 나쁜 것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영화나 드라마만큼의 파급력을 가지지는 못했다. 이것이 과거의 넷플렉스가 마이너한 방송의 이미지를 벗어날 수 없던 이유다.

하지만 이 모든 것을 내가 바꿨다.

작금의 넷플렉스는 바벨의 슈퍼히어로라는 엄청난 캐릭터들을 보유하고 있다. GF의 게임들이 가진 콘텐츠 역시 사용이 가능하다. 거기에 세계 투톱의 3D 애니메이션 제작사까지 보유한 강력한 콘텐츠 군단이 바로 지금의 넷플렉스다.

‘콘텐츠는 물론 많으면 많을수록 좋다. 하지만 그렇다고 스스로의 살을 깎아서 구할 상황은 아니다.’라는 메시지를 에이든 회장에게 전달한 것이다.

[과거와 다르다는 것은 잘 알고 있네. 알고 있으니까 이런 제안을 하는 걸세. 생각해보게. 우리도 엄청난 방송사들을 가지고 있어. 그런데도 자네들과 장기 계약을 하겠다는 이야기를 한 거야.]

[그 대신 향후 10년이라는 시간이 보여줄 흐름을 구매하는 것이지 않습니까? 지금 그 두 가지가 동등한 거래의 위치가 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십니까?]

[부족한가?]

[당연히 부족합니다.]

[그렇군.]

에이든 회장도 내가 자신의 제안을 쉽게 받아들일 거라고 생각하고 있지는 않았던 모양이다. 기이한 점은 표정은 한점의 변화도 없었지만, 눈동자에 비친 복잡한 감정들은 여전히 이글거릴 만큼 불타고 거센 압박감을 주고 있다는 점이었다.

‘남자에게 이토록 격정적인 시선을 받는 건 참 기묘한 일이군.’

그가 말했다.

[이렇게 말하는 것을 보니 거절하겠다는 의미는 아닌 것 같군. 말해보게. 내가 무엇을 더 내어놓으면 동등한 조건이 되겠나?]

어려서부터 슈퍼 히어로 만화를 보면서 동경의 감정을 키운 아이들이 어른이 되고, 그들이 이 영화의 수요를 계속 키워준다. 또, 그의 자식들은 아버지와 함께 슈퍼 히어로 장르를 보면서 동경을 키워간다.

‘월켄과 조나단이라고 했던가? 그들은 향후 10년간 슈퍼 히어로 장르가 대세를 이룰 거라고 봤다지?’

절대 아니다. 슈퍼 히어로 장르는 앞으로 블록버스터라는 명칭에 가장 어울리는 장르가 된다. 기술력이 뒷받침될 때, SF와 판타지를 능가할 수 있는 영상미와 쾌감을 보여주는 장르는 존재하지 않는데 슈퍼 히어로 장르는 이 두 가지를 모두 아우른다.

그런 미래의 청사진을 그릴 때 저들은 지금 우리가 천문학적인 돈을 안겨주더라도 절대 넘기지 않을 콘텐츠를 보유하고 있다.

‘X팀.’

< 끼리끼리 > 끝

ⓒ (5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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