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끼리끼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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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래의 디지니는 혁신에 성공한 기업으로 평가받는 중이다. 스트레스로 빠지던 머리카락이 제자리를 찾았고 그는 노년의 멋인 백발을 휘날리는 패셔니스타로 돌아왔다.
그 덕분일까?
윤태식에게 어떻게든 설욕해야 한다는 초조함에서 벗어났기 때문인지 요즘 그의 머리에는 묘한 화두가 내려앉아 있었다. 그것은 몇 주 전에 보았던 신문의 한 칼럼이었다.
【···반대편에서 함께 돌을 던지던 디지니 역시 올해 개봉한 영화 파슘의 공주를 통해 넷플렉스의 흐름에 동참하는 변화가 일어났다. 그리고 디지니와 넷플렉스의 선택은 파슘의 공주와 리벤져스의 대성공이라는 결과를 도출했다.
이들의 성공이 시사하는 바는 매우 크다. 새로운 성공의 공식이며 확실한 패턴이자 거대한 흐름을 선도했기 때문이다. 추후 다른 영화사들은 어떤 의미로 평등해야 할지, 단순한 이분법적인 남성성과 여성성을 벗어나야 한다는 것을 외면하려야 할 수가 없게 되어버렸다.···】
넷플렉스와 윤태식.
[확실히 난 놈은 난 놈이야.]
이른바 황무지에서 시작하여 세계가 놀랄 금자탑을 직접 쌓아올린 인물이다. 윤태식의 입지전적인 성공신화는 싫어하면서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물론, 자신과 디지니가 무력하게 당하기만 하고 왕좌에서 물러나게 되리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그러나 머릿속을 계속 맴도는 물음들에 대답하다 보면 자신감이 사라진다. 은연중에 자연스럽게 갖게 된 ‘쉽게 당하지는 않는다. 반드시 설욕하고 말겠어.’라는 이 다짐은 ‘자칫 잘못하면 무너질 수 있다.’라는 위기감에서 비롯하기 때문이었다.
‘게임과 미디어뿐만이 아니었지. 전혀 연관 없어 보이는 반도체에다가 다른 부분들에 대해서도 비범한 안목을 가졌고 모두에서 실적을 내고 있었어. 무섭게 치고 올라오는 그놈의 그룹 규모가 날이 갈수록 확장되리라는 건 확정적인 부분이다. 이놈과 계속 경쟁한다면······.’
지난 마케팅 경쟁만 떠올려도 쉽게 알 수 있는 부분이다. 비교적 적은 투자로 최고의 성과를 내는 홍보를 했지만, 달리 말하면 자신들이 확보할 수 있는 수익을 일정부분 덜어냈다는 뜻이기도 했다.
넷플렉스가 아니었다면 지금과 같은 변화는 없었을 테지만, 이는 지금의 결과로 과거를 재평가하는 것에 불과하다. 즉, 넷플렉스가 없었다면 파슘의 공주에 지금 같은 재투자를 할 필요도 없었고 굿즈를 통한 엄청난 이익을 더 볼 수 있었다.
‘죄다 뜯어고치느라 낭비되는 인력도 만만치 않고.’
윤태식과의 기 싸움과 감정 다툼을 덜어내자 냉철함이 돌아왔다.
[쉽지 않은 새끼. 찍어 누르려다가 내 쪽에서 자빠질 수도 있는 위험한 새끼.]
그는 누가 뭐라 해도 사업가였다. 작금의 고객들은 전례가 없으리만큼 높은 만족도를 보이는 중이다. 하지만 고객의 높은 만족도를 위해서 돈을 아낌없이 투자하는 건 히피들처럼 낭만주의에 빠져서 현실을 볼 줄 모르는 머저리들이나 하는 짓거리였다.
그렇다고 넷플렉스에게 밀릴 수는 없는 노릇이니 결국은 제작자들은 피눈물을 흘리고 고객들만 신바람 나는 마케팅과 퀄리티 높은 작품을 만드는 굴레에 처박히고 말았다. 이런 와중에 계속해서 대결을 벌이는 게 과연 옳은 일일까?
‘잘못하면 질 수 있고, 총 맞아 뒈져도 시원치 않을 그놈은 사업에서는 천재적이고, 나보다 훨씬 어려서 그놈보다는 내가 먼저 무덤에 들어갈 테고, 이런 식으로 경쟁하면 엉뚱한 놈들만 즐거운 상황이지. 그런데 이 기사의 방법을 쓰면 이야기가 달라진단 말이야.’
그는 수십 번 읽어서 외워버린 문구를 되뇌었다.
[넷플렉스의 흐름에 동참하는 변화가 일어났다. 그리고 디지니와 넷플렉스의 선택은 파슘의 공주와 리벤져스의 대성공이라는 결과를 도출했다.]
바로 이 부분이다.
심사숙고하던 에이든 회장은 최곤 자신의 오른팔과 왼팔이 되어버린 월켄과 조나단을 호출했다. 뒤이어 이들에게 물었다. 혹시라도 자신이 독단적으로 틀린 생각을 하는지 합리적으로 되짚은 것이다.
[자네들 생각은 그렇단 말이지.]
[장기적으로 볼 때는 그리 보고 있습니다.]
[특히나 리벤져스의 안정적인 시작이 가장 큰 문제입니다.]
침음하던 그가 이내 결단을 내렸다.
[윤태식의 일정에 대해 알아보도록.]
에이든 회장은 그를 만나기로 정했다.
*
영종 테마파크의 성공적인 개장을 보고 가족과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진수성찬이 술자리에서 언급한 발치곰과 이단 날라차기의 이야기를 기억하고는 규환이를 부르고 플레지 연맹을 통해서 이슈화시키는 중이었지만, 내게는 미국에서의 사업 일정이 더 중요할 뿐이다.
‘하여간 돈 많고 할 일없는 백수가 이상한데 꽂히면 죽도록 파고든다니까.’
이래서 백수의 심기를 함부로 건드리면 안 되는 거다. 물론, 그 백수가 건물주여야 한다는 조건이 따라붙기는 하지만 말이다.
미국으로 돌아온 나는 지겹게 듣던 ‘오빤 강남!’이라는 말 대신 리벤져스의 열풍이 거세게 부는 할리우드의 현 상황을 온몸으로 느꼈다.
“덕중에서도 양덕이 진리라더니 다들 입고 있는 퀄리티가 대단하네요. 짧게만 보면 한국의 테마파크나 여기나 다를 바가 없어 보입니다.”
그리 언급하던 김유천 비서실장이 이내 한쪽을 보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나 역시도 따라서 보고는 작게 한숨을 내쉬었는데, 그곳에는 함께 사진을 찍어주고는 관광객에게 돈을 요구하는 라이언 맨과 배낭을 멘 청년이 있어서였다.
“우리 히어로 이미지 망가트리지 말라고 한마디 하고 올까요?”
“놔두세요. 저쪽에서 랩 해주고 자기 시디를 강매하는 래퍼들도 그득하잖습니까. 여행지에서의 체험이니 큰 사기만 아니면 끼어들지 맙시다.”
“이래서 회장님이 로맨스가 없는 겁니다. 보통의 스토리에서는 예쁜 여자가 위험에 처하면 나타나서 도움을 주면서 연애가 시작되는 건데 회장님은 그냥 넘기시니까요.”
“결혼은 미친 짓이라는 유부남이 연애는 권장하는 건 모순 아닙니까?”
“말이 그냥 그렇다는 거죠.”
친구끼리 나누는 대화처럼 김유천 비서실장과 잡담을 나누었다.
진수성찬이 툴툴댄 것처럼 나쯤 되면 어디를 가도 보디가드가 항상 함께한다. 덕분에 소매치기나 어중이떠중이의 사기꾼이 얼씬도 못 하지만, ‘미국! 할리우드!’라며 눈 휘둥그레하게 뜬 여행객에게는 자잘한 사건과 사고가 비일비재하게 일어나는 중이었다.
그들 상당수가 리벤져스의 히어로들이라는게 헛웃음 나오지만 말이다. 하지만 저들뿐만 아니라 리벤져스 캐릭터는 도처에서 볼 수 있었다. 그만큼 전 세계에 슈퍼 히어로 영화의 시대가 개막했다는 분위기가 대세로 자리를 잡은 것이다.
‘귀 기울이면 한국 노래도 들려오고.’
한국인이 국뽕과 주모를 외치기 좋은 시절이라 하겠다. 그렇게 연일 기분 좋은 소식이 들려오는 가운데 내게로 웬 초대장이 도착했다.
“이게 뭡니까?”
“매년 이맘때 프러쉬 그룹에서 여는 파티가 있습니다. 그 파티의 초대장이라고 합니다.”
“프러쉬 그룹?”
조사했는지 김유천 비서실장이 메모한 것을 보며 말했다.
“리조트와 엔터테인먼트를 중심으로 사업하는 기업인데, 굳이 가실 필요까지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한국에서는 프로 레슬링의 팬이 아니라면 딱히 알려지지 않은 기업에 불과하거든요.”
대수롭지 않다는 투였지만, 내 생각은 전혀 다르다.
여기는 꼭 가야 한다.
“현재의 오너는?”
“프러쉬 그룹의 오너는 도란트 프러쉬입니다.”
“도란트 프러쉬······.”
“매우 허세를 중요시하는 인물로서 그 때문에 매년 호화 파티와 함께 각 계의 유명 인사들을 초대하는 것으로 소문이 파다하죠.”
맞다. 도란트.
그는 훗날 미국의 대통령까지 하게 되는 인물이다.
“회장님 역시도 세계적인 분인 만큼 이 파티에 초대되는 건 자연스러운 일이었습니다. 다만, 조건이 되어도 자존심상 초청하지 않았던 거로 아는데요. 이번에 온 걸 보면 리벤져스의 성공이 저들도 놀랍기는 했나 봅니다.”
내 재산은 이미 한참 전부터 세계적이었고 도란트의 재산을 뛰어넘은 것도 이미 한참 옛날 일이다. 그런데도 그에게 초대장이 날아온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시답잖은 거라서 신경을 안 썼었는데.’
타인의 인정을 받으려고 아등바등할 이유가 없다. 막말로 저들이 상류층으로 나를 인정하건 말건 내가 갑부라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고 수많은 미국인이 우리 게임, 우리 영화, 우리가 만든 제품과 문화를 향유하는 중이다.
‘먹는 것도 그렇고.’
호화 파티니, 뭐니 하는 것도 마찬가지다. 파티라는 건 그냥 호화로운 장식품이랑 비싼 음식을 쫙 깔아두고 예쁜 척, 예의 있는 척, 몸가짐 바로 하면서 조심스럽게 먹는 장소에 불과하다.
양손으로 스테이크 잡고 우걱우걱 씹어먹는 게 속 편한 나 같은 놈한테는 불편함만 가득한 장소였다.
‘원래 전 세계 어딜 가더라도 귀족들의 문화라는 건 품위니, 뭐니 따지면서 불편한 것만 강요하는 문화니까.’
하지만 이리저리 고민하는 건 초대자의 이름 때문이다.
도란트!
‘미국의 대통령인 건 물론이고, 이 사람은 뒤끝이 무진장 있는 스타일이잖아. 이런 사람의 자존심을 건드리면 좋을 게 전혀 없어. 게다가 나중에는 만나고 싶어도 만나기 어려운 사람이지만, 지금은 이 초대만 받아들이면 쉽게 볼 수도 있지.’
이런저런 생각들이 머리를 가득 채우고 있을 때였다.
“회장님. 저, 최종인입니다.”
다른 업무 보고를 위해 찾아왔던 최종인 회장이 슬쩍 내 고민의 이유를 듣고는 조언했다.
“각계의 저명한 인사들이 모이는 자리입니다. 굳이 친분까지는 아니더라도 한 번 쯤 얼굴을 비추어두시면 나중에 유리하게 작용할 수도 있습니다. 대다수의 사람은 돈을 트럭째로 가져다주어도 못 받는 초대장입니다.”
“인맥 없이도 사업은 잘 해왔습니다.”
더군다나 인맥을 잘 쌓아야 하는 건 각 계열사의 CEO들이지 내가 아니다.
“회장님께서야 물론 그러하십니다만, 일반적으로 초대장을 그리 여긴다는 점이 문제입니다.”
“일반적으로?”
“네, 회장님. 받아들이는 것이 자연스럽고 초대를 거부하는 편이 이례적입니다. 이는 승낙하면 보통은 가지만 거절하면 상대방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적극적으로 표현하는 것이 된다는 의미이기도 합니다. 무슨 사정이 있었다고 여기기보다는 모멸감을 느낄 겁니다.”
“거절이 단순하게 거절에서 끝나지 않는다는 거군요.”
“초대자가 대범하다면 다르지만, 저들의 자존심상 그럴 일은 드물지요.”
그 말이 나를 일깨웠다.
도란트라 훗날 SNS를 통해서 하는 정치들도 떠올랐다.
“갑시다.”
한국에서도 살아있는 권력에는 적당히 타협했는데 외국인인 내가 미국에서야 더 조심해야 하는 건 당연한 일이다.
*
파티가 열리는 곳은 워싱턴 DC의 프러쉬 호텔이다.
같은 나라라고는 하지만, 내 LA의 공항에서 이곳의 공항까지 비행시간만 5시간이나 걸리는 것을 생각하면 미국이라는 나라가 얼마나 큰지 자꾸만 떠오르게 된다.
[더럽게 큰 땅덩어리 같으니. 뭐만 했다하면 비행기로도 이렇게 시간이 걸려버리니.]
가까운 거리의 기준이 서울에서 부산을 왕복해야 할 수준이고, 조금 멀다고 하면 비행기를 타야 하는 대륙의 스케일에 마냥 불평스러울 뿐이었다. 하지만 오늘은 내 옆에 반가우면서도 수다스러운 인물이 있어서 덜 심심했다.
[그러게 내가 말했잖아. 전용기나 하나 사자고. 어때?]
프러쉬 파티에 초대를 받은 것은 나 혼자가 아니다. 알버트 역시 최고 화제성을 가진 인물로 유명 배우의 자격으로 초대장을 받았다고 한다. 오늘 나는 그와 함께 파티 장소로 가는 중이었다.
[그럴까? 있으면 확실히 편할 것 같기는 한데.]
[오오! 그래! 우리 촬영하고 그럴 때도 전용기 같은 거 있었으면 했었어!]
옆에서 함께 듣고 있던 최종인 회장도 알버트와 같은 생각을 하고 있는 모양이다. 그가 은근히 끼어들었다.
[전용기까지는 몰라도 전세기 정도는 준비할 필요가 있을 것 같습니다. 대부분의 임원이 한국과 미국 혹은 유럽에서 업무를 보는 일이 잦거든요.]
< 끼리끼리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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