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999년 게임 스타트-535화 (535/577)

< 다르다 >

가능성 있는 배우에게 행운과 같은 기회를 주는 것.

그 한 번을 낚아채 인생의 대역전이 일어나고 스타가 되는 일은 동화처럼 아름답다. 누구나 이런 꿈을 꾸기에 신데렐라와 같은 작품들이 두고두고 회자되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일은 동화나 영화 속에서만 흔할 뿐, 현실에서는 극히 드물다.

기회를 획득한 딱 한 사람만을 위한 판타지이기 때문이다. 당사자에게는 자신의 삶이 세상 전체지만, 세계는 그러한 시민들이 수없이 부딪치고 어우러지며 이루어지는 거대한 무대와 같다.

‘PC주의가 디지니의 이미지, 자본, 인력 등등과 송두리째 맞바꿀 만큼 대단하다면 모를까.’

모든 것을 걸어도 될 만큼 대단한 이념이라면 상관없지만, 에이든 회장이 정치적 올바름을 선택한 것 역시 자본주의의 일환에 불과했다. 윤태식과 넷플렉스라는 대항마는 디지니의 전략을 선회하게 해주었고 이 새로운 관점으로 봤을 때 작금의 페미니즘은 결함이 많았다.

이외에도 ‘익명으로 거침없이 지적해보라.’는 방식으로 정리된 보고서는 에이든 회장이 아직도 떠올리는 글귀가 가득했다.

- 시나리오가 부실함 : 도대체 존 가터가 누구?

- 존 가터가 화성을 구하는 이유를 시나리오에서는 알 수가 없음.

- 화성의 공주가 예쁘기라도 하면 첫눈에 반해서 목숨을 걸어볼만 할 텐데··· 이건··· 와우! 그냥 네가 지켜!

- 제목이 정말, 매우, 진짜, 믿을 수 없을 만큼 구려요!

가치 있는 의견들은 몽땅 수용했다.

‘배우를 바꿨지.’

남자 배우는 물론이고 여자 배우까지 북미에서 가장 섹시한 남성과 여성으로 꼽히는 이들로 변경했다.

‘제목도 바꿨고.’

‘존 가터 : 파슘 전쟁의 시작’은 ‘아레스 : 파슘의 공주’가 되었다. 이외에도 여러 가지가 있었지만, 반복되어서 나온 중심된 답변들은 에이든 회장에게 세월의 흐름을 실감케 해주었다.

‘이런 게 21세기이고 세대 차이인가. 존 가터를 모른다는 대답이 80%였으니.’

이유는 원작 소설 1권의 이름이 파슘의 공주인 탓도 있었다. 워낙 유명한 작품인 만큼 어디에선가 이런 제목을 들어본 미국인들은 많았다.

‘그러나 존 가터는 아니지. 1912년에 나온 작품의 주인공 이름을 아는 대다수는 무덤에 들어갔을 테니까.’

이번에 머리끝에서 발끝까지라고 할 만큼 모조리 바꿔버렸다는 자체평가는 괜히 하는 게 아니다. 영화의 겉 포장뿐만 아니라 윤태식이 그토록 떠들어대는 스토리에 어울리는 배역에 대해서도 디지니는 철저하게 분석하여 흡수했다.

[다시 생각해도 아찔해. 무언가에 모두가 홀려서 미쳤던 건 아닐까 봐 의심될 정도야. 그러지 않고서야 그런 혼란스러운 잡종을 버젓이 만들었을 리가 없잖나.]

[돌이킬 수 없을 때가 되지 않은 점이 천만다행이었습니다.]

페미니즘을 표방하고자 만든 과거의 배역은 공주에서 탈피한 전사와도 같은 여성이었다. 하지만 이건 첫 단추부터 완벽하게 어긋나버린 글러먹은 시도였다.

원작에서 파슘의 공주는 쉽게 말해 색기를 담당하는 역할이다. 애초에 남녀차별이 당연하던 시기에 나온 소설이었고, 공주의 역할은 보호받고 주인공이 아차 하는 사이에 납치당해서 ‘살려주세요!’와 ‘고마워요, 내 사랑!’을 외쳐대는 고전의 공주 수준밖에는 되지 않았다.

이 부분을 현시대에 맞춰서 새로운 해석을 해줄 필요가 있었기에 어제까지의 디지니는 진짜 여전사를 캐스팅했다. 그런데 ‘너네 아직도 그러면 또 우리한테 질걸?’이라고 놀리듯 넷플렉스가 여전사의 교보재를 보여주었다.

던 라이트2!

그 덕분에 온몸으로 깨달았다.

[우리의 선택은 옳았어.]

[맞습니다, 회장님. 사람들이 원하는 여전사는 외모가 여전사가 아닙니다. 그 배역과 행동 역할이 여전사인 거죠.]

대중이 생각하는 바는 다 거기서 거기다. 방송에 가수가 나와서 멋들어지게 피아노를 연주하는 것보다 축구선수가 나와서 피아노를 연주하면 훨씬 큰 감동을 받는다. 이미 강력하게 생긴 배우의 액션보다 아름다운 배우의 액션이 감동적인 게 당연하다.

즉, 작품에서 수정해야 할 것은 영화의 섹시함만을 담당하는 여배우의 옷차림과 역할이지 진짜로 여전사처럼 생긴 배우가 아니다.

[게다가 그런 튼튼하고 듬직한 여배우를 캐스팅해 놓고는 결국 성에 갇혀서 왕자님이 구출해주길 기다리는 공주와 완벽하게 동일한 포지션을 맡겼었습니다.]

가녀린 공주로 갈 거면 그렇게가던가, 여전사로 갈 거면 확실한 여전사를 만들어주던가 해야 했는데, 외모는 여전사, 역할은 성에 갇힌 공주였다.

이런 괴작을 누가 보랴.

[굳이 경쟁자가 없어도 스스로 무너졌을 병신을 만들 뻔했던 거였어. 이런 면에서는 윤태식 그놈이 아주 고맙군. 감사의 선물이라도 보내고 싶을 정도로.]

[대신 이전의 페미니즘에는 반발이 있을 겁니다.]

[하라고 해. 다 가질 수는 없는 데다가 그까짓 것보다는 얻는 게 더 크다.]

논란의 여지는 감수하겠다. 회사의 가치가 폭락하는 것보단 그냥 논란 좀 생기는 게 낫다는 것이 에이든 회장의 판단이었다.

여기까지는 한시름 놓은 부분이다. 그러나 앞으로의 일거리들을 생각하면 저절로 한숨만 나왔다.

[이제 다음 작품들도 수정해야겠지?]

[물론입니다. 가능하다면 애니메이션까지도 수정해야 합니다.]

[겨울 여왕도?]

[겨울 여왕은 예외입니다. 전체적인 스토리와 연출을 다 확인했는데 딱히 수정할 게 없었습니다. 단지, 작품에 등장하는 인물의 디자인이 전부 다 백인이라는 점에 대해서는 고려 중입니다.]

이건 생각보다 큰 문제긴 했지만, 과거 2D의 시절이었다면 모를까 다행히 3D로 전환한 지금은 충분히 교체가 가능했다.

[고려의 핵심은 예산이겠고?]

[회장님의 승인만을 기다립니다.]

약간의 제작비 상승에 내심 울며 에이든 회장이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네. 대신 실패한다면 그에 따른 책임을 각오해야 할 거야.]

[물론입니다.]

[성공한다면 확실한 보상이 있을 걸세.]

[예상하고 있습니다.]

[···역시 직진만 하는 참 강직한 사람이야. 나가 보게!]

[나가며 조나단에게 회장님이 찾는다 전하겠습니다.]

[자네가 조금만 무능했다면···]

[일찌감치 쫓겨나가겠지요.]

[······.]

빈말이 아니었는지 잠시 후 조나단이 들어왔다. 실력만 빼어난 월켄과 달리 그는 같은 말도 기분 좋게 할 수 있고 상대의 불만을 잘 수용할 수 있는 노련한 임원이었다. 자연스레 술을 마시게 되었고 이들은 의기투합했다.

[이게 다 그 새끼 때문입니다. 모든 사고의 원흉!]

[맞아! 그 썅놈의 새끼!]

[도대체 윤태식 그 새끼는 게임만 만들면 됐지 왜 이런 데까지 왔답니까?]

[맞아. 월켄···이 아니라? 엥?]

[이놈이고 저놈이고 하여간 그놈이 문제입니다! 동양인이 예의 있다는 것도 알고 보면 개소리였습니다.]

[그래! 맞아! 그 어린놈! 그 자식이 문제였어!]

[넷플렉스의 기세를 꺾고 윤 씨 놈의 콧대를 확 부러뜨릴 날이 멀잖았습니다.]

[크하하하!]

그렇게 디지니에서 준비 중인 수많은 영화가 빠르게 개편되고, 또 만들어져갔다.

*

“이번 작업은 생각보다 조금 빡셌네.”

‘아이고’하는 앓는 소리가 나오지만, 그래도 결과물을 보면 힘들어도 뿌듯한 게 이 업계의 일이다.

던 라이트2의 개봉!

여기서 살짝 우여곡절이 있었다. 여주인공의 성격이 너무나도 짜증 나는 덕분에 그것을 조금 고치려고 했더니 그 조금으로 인해 정말 많은 것이 변했기 때문이다. 1편은 그냥 액션이나 조금 수정하는 데서 그친 것에 반해 2편은 여주의 연출 전부가 변해야 했던 것이다.

과감한 절망을 보여주되, 원래 작가의 꿈을 투영한 여주인공의 민폐적인 행동들을 수정하는 것만으로도 엄청난 수정이 필요했다.

제작진의 고생이 말이 아니긴 했지만, 원래라면 바닥의 평점을 기록했어야 할 영화가 평점 78점이라는 기적과 같은 평점을 기록했다. 아울러 총 수익 7억 달러로 연속 성공을 보여준 것으로 우리의 노력은 충분히 보상받았다.

그러던 차에 디지니의 신작 소식이 온갖 미디어를 통해 나왔다.

“파슘의 공주?”

“이번에 디지니에서 창사 110주년 기념으로 만들었다는 영화입니다. 최소 4억 달러에 가까운 자금이 투자된 만큼 어마어마하리라는 예측이 지배적인 상황인데요.”

‘존 가터 그러고 보니 이게 나올 때가 됐었구나.’

업계의 경쟁자인 만큼 김유천 비서실장이 정보를 빠르게 모아서 내게 보고했다. 존 가터와 연관하는 설명을 듣고는 피식 웃어버렸다.

“어마어마하지. 아주 굉장하리만큼.”

“회장님께서도 그리 말씀하실 정도라면, 이번 경쟁을 피하게 된 게 다행이군요.”

“글쎄.”

1912년에 큰 충격을 안겨준 이 작품은 한국에서야 전혀 알려진 바가 없지만, 미국에서는 한 분야의 전설과도 같았다. 그리고 참으로 애석한 방식으로 이 영화는 그 전설의 계보를 이어가게 될 예정이다.

한편, 기겁하고 달려온 케인 파이기도 같은 소식을 전해왔다.

[정말 다행스럽게도 3월 8일 개봉이라 우리 작품과는 겹치지 않습니다.]

[겹쳐도 크게 상관없을 겁니다.]

[아무렴요. 하지만 거센 불길 속에 애써 들어가 진화작업을 할 필요는 없잖습니까. 더군다나 존 가터에 대한 미국인들의 향수는 회장님이 생각하시는 것 이상입니다.]

[하하하! 그 정도인가요?]

‘내가 미래를 아는데 그거 개 망한다~’라는 말을 할 이유가 없다. 그냥 적당히 웃으며 넘어갔다.

2012년 넷플렉스의 라인업은 이러하다.

1월, 던 라이트2.

4월, 캡틴 실드.

7월, 리벤져스.

10월, 배틀 게임2.

그리고 이외에 자잘한 저예산 독립영화와 다큐 4편이다.

‘영화 총 8편.’

극장 개봉은 6편뿐이지만, 1년에 한 개의 영화를 겨우겨우 내보내던 과거와 비교하면 이제는 정말 강력한 라인업을 가진 영화 배급사가 된 것이다. 이야말로 미래의 정보를 거머쥔 회귀자로서 마땅히 이룩할 성과라 하겠다.

‘대신 이제부터는 진짜 크게 뒤틀리겠어.’

존 가터가 망하는 것까지는 불변하는 진실이다. 대신 이 사건이라는 변곡점 이후부터는 나도 예언자처럼 마냥 느긋하게 있기 어려워진다. 본래의 디지니가 존 가터로 어마어마하게 망한 뒤 리벤져스로 흥행하며 회복하는 형태였기 때문이다.

그런데 지금의 바벨은 누구의 소유던가.

‘내꺼!’

그러니 리벤져스는 내 손으로 개봉하고 디지니는 존 가터의 천문학적인 실패를 만회할 대안이 없는 셈이었다. 그렇기에 매우 궁금했다.

이번 영화로 디지니라는 초거대 그룹이 망할 것인가, 만신창이가 될 것인가, 아니면 역사와 운명의 보정으로 의외의 기사회생할 신규 작품을 만들어 낼 것인가.

‘휘청거리면서 내부 구조조정에 들어간다면 인재뿐 아니라 디지니의 라인업을 모조리 씹어먹어서 단숨에 업계 1위에 등극할 수도 있지.’

잔챙이가 아닌 고래급의 몸집이 되었으니 미디어 업계에서 미래지식을 통해 홀랑 벗겨 먹을 마지막 대박 찬스였다. 나는 이번 기회를 최대한으로 활용하려는 방안을 모색하며 시간을 보냈다.

그런데 존 가터의 언론 시사회가 진행됐을 즈음, 내가 알던 것과는 사뭇 다른 평론가들의 평점이 사이트에 업로드되었다.

【이제는 잊혀진 기억의 명작. 파슘의 공주. 영화 존 가터로 새로 태어났다. (88점)】

【화려한 영상미, 기발한 상상력! 고전 소설은 잊어라! 이젠 영화로 다시 시작한다! (82점)】

【왜 파슘의 공주라는 부제를 사용한 지 알 수 있었다! (85점)】

【디지니의 흔들림은 확실한 도약을 위한 발판이었을 뿐. (89점)】

“뭐라고?”

예상하지 못했던 결과가 벌어지고 있었다. 원래라면 내가 개입하기 이전의 던 라이트2와 비슷한 평점을 받아야 했을 존 가터가 높은 평점을 기록하고 있는 것이다.

‘지겹고 지루한 클리셰로 백번도 넘게 까여야 하는데?’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상황이다.

강력한 호기심에 나는 영화가 개봉하기 무섭게 직접 극장을 찾아갔다. 그리고 팝콘과 콜라를 미처 다 먹지 못하는 상황에 직면하고 말았다.

“달라졌다고?”

영화의 시작은 내가 알고 있던 것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그가 어떻게 파슘으로 가게 되었는가? 그리고 파슘에 와서는 어떻게 적응하게 되는가? 이런 부분은 거의 그대로다.

하지만 딱 거기까지가 내가 알던 부분이었다.

‘저 외계인이 원래는 저러지 않았는데.’

이 영화에는 초록색 외계인들이 나온다. 곤충과 개구리 그리고 인간을 섞어놓은 것 같은 외계인들인데, 키만 조금 클 뿐. 딱히 강할 것 같다는 이미지 그런 건 전혀 없다.

하지만 내가 관람 중인 영화에서는 ‘존나 쎄!’라는 말이 저절로 나오는 헐커들이 설치고 있었다.

초록색의 강력한 힘을 가졌을 것 같은 외형.

외계인인 만큼 팔이 네 개인 이 헐커들은 흡사 아직 바벨에서 영화로 탄생하지 못한 상태인 헐커의 우주판을 재현한 것만 같았다.

그뿐만이 아니다.

“파슘 공주가 참 예쁘네요. 크으~”

김유천 비서실장이 옆에서 마냥 흐뭇하게 웃을 만큼 매력적인 그녀는 카렌 블랙우드였다. 미국에서는 최고 인기 드라마 미스터 후에서 미스터 컴패니언을 담당하고 있는 그녀는 가장 핫한 여배우들 중 하나다.

‘원래는 리벤져스 시리즈의 츤데레 로봇 여동생으로 명성을 얻게 될 예정이었는데.’

뺏겼다!

< 다르다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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