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999년 게임 스타트-533화 (533/577)

< 다르다 >

*

내가 잘 몰랐을 뿐이던 그녀는 생각 이상으로 대단한 영향력을 갖고 있던 모양이었다. 디지니와의 PC논쟁 이후 반걸음씩 전진하고 한 대씩 때려가며 쌓아가던 우리의 이미지를 샤론이 단숨에 격상시켰던 것이다.

【샤론 테를리즈 넷플렉스의 신작 드라마 주인공 출연!】

【건강한 페미니즘의 대표 배우 샤론 테를리즈. 그녀가 넷플렉스를 선택한 이유는 무엇일까?】

【샤론의 선택 넷플렉스. ‘배역을 찾아갔을 뿐이에요.’】

【넷플렉스는 여성을 위해주는 ‘척’만 하지 않는 기업!】

그녀가 우리의 작품을 선택했다는 것이 미국 전역에 알려지면서 폭발적인 반응을 만들어내고 있다. 신규 가입자가 대폭 증가했으며 이들의 성비는 압도적으로 여성이 많았다.

[넷플렉스를 향한 여론이 빠르게 반전되고 있습니다.]

지금까지의 영화들이 꾸준히 흥행을 이어가고는 있었지만, 넷플렉스의 반 PC주의에 대한 불만감을 표현하는 사람들도 굉장히 많았다. 그런데 작품의 흥행이 아닌 배우의 선택 하나만으로 그 불만이 상당수 줄어들고 있는 것이다.

‘엉겁결에 스타마케팅의 수혜를 제대로 보게 됐어.’

샤론이 갖고 있던 이미지는 어떤 면에서 보면 독보적인 수준이었다. 그녀는 스스로 페미니스트라 당당히 말해왔고 실제로 출연료를 받지 못하더라도 여성 인권에 도움이 될 수 있는 영화라면 웃으며 출연하는 언행일치를 실현해 왔다고 한다.

한편, 넷플렉스는 반 PC주의의 대표적인 기업이라고 소문이 도는 기업이다. 아니라고 하는 이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디지니에 비해서는 여러모로 언론전의 규모에서 밀린 터라 그간 나름 선방해왔을 뿐이라고 보는 편이 옳은 수준이었다.

그랬던 우리를 샤론이 선택했다. 이는 대중에게 ‘넷플렉스는 반 PC주의 기업이 아니라 건강한 기업입니다.’라고 도장을 쾅! 찍어주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샤론이 인정한 기업이라면서 심어진 좋은 이미지가 정말 대단한 수준입니다.]

[과연, 괜히 비싼 돈 들여서 고액의 배우들을 모델로 고용하는 게 아니었군요.]

[그간은 효율 때문인 줄 알았는데, 지금 보니 회장님께서는 스타 마케팅을 외면하다시피 하신 것도 같습니다. 혹시, 특별한 이유가 있으신지요?]

[별거 아닙니다. 그저 정말로 오래가는 건 포장지보다는 내용물이라는 생각을 했을 뿐이니까요.]

실제로는 ‘무조건 뜰 것들을 꿈속 미래보다 더한 마케팅 비용으로 더해줬는데, 뭘 스타까지 써? 게다가 그 작품 덕분에 스타들이 만들어지는데.’라는 게 진실이었지만, 이 말을 대놓고 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어쨌든, 때아닌 호재를 맞이한 김에 우리는 즐겁게 회의 시간을 가질 수 있었다. 아울러, 뜻밖의 선물이 되어준 대단한 배우님의 드라마 제작 과정을 구경하러 가는 시간을 가졌다.

‘난 이런 게 좋더라. 옛날 같으면 연예가 소식이나 온라인을 통해서만 볼 수 있는 거잖아. 그런데 지금은 촬영 현장을 직접 가서 유명 배우의 얼굴도 직접 볼 수 있지.’

뿐만이랴. 팬들은 사인을 기다려서 받고 사진 한 번 찍는 데만도 노력이 필요하지만, 나는 그럴 필요가 없는 사람이다. 단지, 회장님이 너무 가볍게 움직이면 볼썽 사나울까 봐 조금 자제하고 있을 뿐이었다.

게다가 우리 작가들이 그려낸 캐릭터를 현실에서 연기하는 생생한 현장 아니랴!

‘원하는 건 다 만들고 있으니 나보다 성공한 덕후는 세상에 없을 거다.’

그렇게 찾아간 촬영 현장은 빼어난 연기보다는 샤론과 헨리의 설전이 오가고 있었다.

[지금까지 수동적인 삶을 살아온 에바의 이야기가 무너지고 이건 캐릭터의 서사를 망치는 것과 같아요.]

현장에서 본 샤론은 자신의 역할에 굉장히 열정적이고 또 매우 강한 욕심을 가지고 있는 배우였다. 이기적으로 ‘내 배역이 차지하는 분량이 그만큼 많아야 해’라고 부리는 욕심이 아니라, 자신이 생각하는 캐릭터의 방향성과 맞아야 한다는 욕심이었다.

에바 에스터.

샤론의 배역인 언휴먼스의 주인공으로서 그녀는 미국의 수동적 여성상의 전형적인 스테레오 타입 캐릭터다. 그랬던 여성이 각성을 시켜주는 테라젠 크리스탈을 통해서 언휴먼스가 되고 여전사로 성장하는 이야기였다.

샤론은 이 과정에서 여주인공의 변화가 수동적인 모습이 마뜩잖다고 했다.

[에바가 여기서 테라젠 크리스탈과의 접촉이 생기고 각성을 하게 되는데. 힘을 얻고부터는 그냥 너무 전개가 빠르고 쉽게 되는 경향이 있어요.]

그녀는 능동적인 모습으로 변해가고 그 변화를 자연스러운 도전을 통해 극복해나가는 편이 훨씬 낫다고 적극 말했다.

이 부분에 대해 작가진과 연출진도 문제를 모르고 있던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일단 객석에 앉히기만 하면 돈을 버는 영화와 달리 드라마는 1편과 2편으로 시청자의 마음을 잡아서 그 이후까지 계속 보게 만들어야 한다.

그렇기 때문에 1억의 총예산이 집행된다면 보통 1편과 2편에서 2,000~3,000만 수준의 제작비를 사용하면서 시청자들의 눈길을 사로잡곤 한다.

이야기의 전개도 마찬가지다.

[캐릭터를 더 자세히 보여주어야 한다는 것은 저희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초반에 캐릭터 서사를 너무 보여주면 지루함을 견디지 못하고 떨어져 나가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초반에 빠르게 치고 지나가는 이야기를 통해서 시청자들이 지루함을 느낄 새도 없이 이 작품에 매력을 느끼게 만들어야 성공할 수 있기에, 전개를 빠르게 했던 것이다.

물론 이것을 얼마나 잘 연출하느냐를 통해서 극복할 수 있기는 하다. 그러나 가능하다는 것과 확실하게 해낼 수 있다는 건 전혀 다른 문제였다. 미래를 알고 있지 않은 한, 누구나 불확실성 속에서 성공을 위해 치열하게 고민하게 마련이고 아무리 뛰어난 연출가라도 무조건 확신을 가질 수는 없었다.

[서사가 무너진 캐릭터는 몰입감을 방해해요. 반면에 완벽한 구조를 갖추면 이야기의 힘으로 충분히 붙들어 둘 수 있죠.]

[마니아를 만드는 건 분명히 가능합니다. 그러나 포용할 수 있는 최대한의 폭을 시작부터 넓혀둬야 그 안에서 열성 팬을 최대한 뽑아낼 수 있다는 건 아시잖습니까?]

[주제 의식 자체가 사라지는 것만큼 위험한 건 없어요.]

[완벽했지만 망해버리고 실패한 작품을 원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완벽을 노리다가는 이도 저도 아닌 지루한 드라마가 될 수 있습니다.]

[그 완성도에 결정적인 역할을 하는 퍼즐이 주제 의식이고 캐릭터의 서사라는 걸 잘 알잖아요. 완성도가 떨어지면 몰입감이 떨어지면···]

[네. 저도 잘 압니다. 후반부의 드라마 하락세로 이어질 가능성이 정말 높다는 것쯤은 말이죠]

고민이 이어지는 이유는 상대방을 잘 알면서 양쪽의 말이 각각 타당성과 설득력을 갖췄기 때문이다.

‘리스크를 감수하고 무엇을 선택할 것이냐의 문제지.’

평행선을 달리는 이 갑론을박의 핵심 요소는 사실 별 거 아니다. ‘누가 책임을 질 것인가’에 대한 부분을 정해주면 아주 간단하게 해결할 수 있다.

그래서 바로 이럴 이런 때 쩐주가 나서는 거다. 상업적인 실패보다는 작품성을 추구해서 두고두고 회자하고 자꾸만 기억에 남는 걸작을 만드는 편이 낫다고 말할 수 있는 물주 말이다.

[이렇게 합시다.]

몰래 들어와서 조용히 지켜보고 있던 입장이었던 터라. 내 목소리가 들리자 모두가 화들짝 놀라며 시선이 몰려왔다. 나는 황급히 인사하려는 저들을 제스처로 그만두게 한 후 말을 이었다.

[샤론 배우님의 의견이 저는 마음에 듭니다. 그러니 특별히 시즌1은 캐릭터를 위한 1편을 추가 편성하도록 합시다.]

[추가 편성이요?]

[초반 1화에는 액션을 보여줄 수 있는 캐릭터들이 등장하고 그와 정반대의 삶을 살고 있는 에바의 모습을 보여주는 겁니다.]

내 말에 헨리가 이해했다며 대답했다.

[시청자들의 시선을 사로잡을 수 있는 화려함은 우선 다른 캐릭터들이 먼저 보여주고 그사이에 샤론의 캐릭터를 완성시킨다는 말씀이시군요.]

[그렇습니다.]

[알겠습니다. 그럼, 1화의 내용을 수정하고 에바의 스토리를 2화까지 완성한다고 하면···]

결단을 일단 내리기까지가 삐걱거렸을 뿐, 책임질 사람이 나타난 이상 저들의 상상력과 능력을 가로막는 장애물은 존재하지 않았다. 이들은 대화의 물꼬가 터지자 막힘없이 논의하며 수정안을 토론해나가며 순식간에 완성해나갔다.

[1화의 끝에서 에바가 각성하고 2화에서는 에바의 정신적인 변화가 시작되는 걸 보여주면 되겠습니다.]

[10화에서 에바가 자신은 더 이상 인간이 아닌 언휴먼스라는 것은 인지하게 되고. 마지막 화인 13화에서 새로운 변화를 느끼면서 종료로 가면 어떨까요?]

[아주 좋습니다. 딱딱 맞아떨어지니 그러면 되겠네요.]

[다행이네요. 안 그래도 샤론에게 맞는 액션 연출에 대한 고민을 더 하고 싶었는데, 이렇게 되면 여유가 조금 더 생기겠습니다.]

[액션 연출이요?]

[그날도 보셨지만, 발레를 워낙 오래했다보니까. 몸을 사용하는 선이 너무 아름답죠. 덕분에 우아한 몸짓이 매력적이지만, 그 반대로 과격한 액션과는 맞지 않습니다. 발레가 가진 장점을 최대한 살리면서 단점을 가릴 액션을 구상하고 있습니다.]

[춤추듯이 싸우는 그런 건가요?]

[그렇습니다. 다행히 샤론이 맡은 에바 역은 주먹다짐과 같은 싸움이 중요한 게 아니라. 능력의 활용도가 중요하지 않습니까? 나비처럼 날아서 벌처럼 쏘는 이미지의 액션이 조만간에 완성될 겁니다.]

[그거 기대 되네요.]

너무 빠르게 변해가는 그들의 대화는 도저히 무슨 말인지 따라갈 수가 없다.

‘이제는 한국어처럼 영어가 익숙해졌다고 생각했는데, 역시 원어민들의 대화는 아직 못 따라가겠군.’

어쨌거나 연출도 작가도 배우도 이 계통에선 완전히 도가 튼 사람들이라서 그런 것인지 속도가 정말 보통이 아니다.

*

한편.

[영화가 아니고 드라마? 도대체 왜?]

넷플렉스가 화기애애할 때 디지니의 팝 에이든 회장은 황당함을 숨기지 못하고 있었다. 이번 대결에서만큼은 ‘확실하게 무너뜨리겠다!’ 다짐하고 극단적인 PC성향이 있던 직원들을 싹 정리한 뒤 올바른 PC를 통해 제대로 입지를 다지고자 했었다.

그런데 지금까지 뚝심 있게 도전해오던 상대가 갑자기 종목을 바꿔버렸다. 여기에 더해서 샤론 테를리즈를 섭외하는 기상천외함으로 의표를 찌르기까지 하는 것이 아닌가.

[이 빌어먹을 놈이! 이번에는 정말 각색부터 모조리 제대로 만들었는데!]

감히 자신하건대, 단순한 장삿속이 아니라 정말로 정치적으로 올바름을 추구하려는 상식을 가졌다면 누구나 열광할 수 있도록 기획부터 싹 뜯어고쳤다. 추가 예산의 집행은 이제 거론할 필요가 없을 만큼 퀄리티를 높이는 데 주력했으니 이제 세상은 알게 될 것이다.

디지니가 구태의연함에서 벗어나 새로워졌다는 것을!

그런데 링에 올라가도 상대가 없다고 한다.

[모조리 다 마음에 안 드는 자식 같으니!]

이겨도 이긴 기분이 아니다.

에이든 회장에게 윤태식은 정말 다양하게 사람을 열 받게 만드는 재주가 있는 놈이었다.

*

샤론의 아이디어로 1편을 더 제작하기로 하면서 언휴먼스의 제작비가 1억 달러에서 1억 1,500만 달러로 상승했다.

새로 추가하는 장면은 퀄리티로 따지면 3,500만 달러 수준의 퀄리티다. 그러나 12편을 준비하면서 들어가는 비용과 겹치는 부분들 때문에 예산에서 상당 부분 절약할 수 있었다.

‘그 절약의 수준이 보통 사람들에게는 꿈과 희망이라는 복권 당첨금 단위지만.’

땅 크고 시장도 넓은 미국에 오니 현금 감각이라는 게 달라져 버린다.

[확실히, 에바의 액션 부분이 두드러지네요.]

춤과도 같은 우아한 동작으로 이루어진 액션을 준비하고 있다는 헨리의 말처럼 에바의 동작들은 우아하면서도 강력한 모습을 잘 담아주고 있었다.

‘태극권인데 마냥 체조 같고 느린 점만 강조하는 게 아니라 회전의 동선을 특히 부각시켜서 뽑아온 것 같군.’

그녀의 액션 장면들은 빠르게 끊어지는 스타일이 아니었다. 흘러가는 느낌으로 이어졌다. 하지만 그런 것과는 달리 진동이라는 힘을 이용한 충격파와 이후 벌어지는 후처리 효과들이 부드러운 동선 속에서 강력한 일격을 표현해주었다.

드라마로 제작되었지만, 거의 영화와 맞먹는 퀄리티라 하겠다.

‘돈 쓴 보람이 있어!’

들이부은 만큼 볼 맛이 난다. 물주로서 이보다 행복할 수는 없었다.

< 다르다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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