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다르다 >
170. 다르다
‘과연’과 ‘역시’라는 단어.
디지니는 나에게 이 두 단어를 정말 자주 떠올리게 만드는 상대였다.
【넷플렉스에 완벽하게 밀려버린 디지니. 해외에서 활로를 찾다!】
【캐리비안 중국, 러시아, 일본에서 압도적인 1위!】
【디지니. 국내에서 당한 설움 해외에서 완벽하게 갚아주다!】
대서특필된 기사들을 보고 비로소 미진함이 해결됐다.
“어쩐지. 10억 달러 넘기는 메가 히트작이 나 하나 때문에 저리된 건가 싶었는데 이게 빠져서 그랬던 거군.”
이기기를 바랐지만, 막상 너무 쉽게 이겨서 의아했었다. 그런데 이제 보니 처음부터 캐리비안의 주요 시장은 북미가 아니라 전 세계였던 것이다. 이럴 때마다 묘한 심정이 들고 사람은 참 이기적인 동물이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나한테 유리할 때는 꿈속 미래와 달라지기를 바라면서, 한편으로는 내가 알고 있는 미래와 너무 크게는 달라지지 않기를 바라기 때문이었다.
‘현대판 사자성어로는 이게 으뜸이야. 내로남불 말이지.’
어쨌건 흥행 성적은 양자 간에 모두 대단한 점수를 맞이하게 되었다.
【캐리비안 월드 박스 오피스 10억 달러 돌파!】
【넷플렉스의 배틀 게임은 8억 달러!】
최종적으로 북미 흥행 수익으로는 배틀 게임이 5억 달러, 캐리비안이 2억 5천만 달러로 2배의 차이를 보였다. 그러나 해외에서의 역전으로 총 수익은 캐리비안이 승리하였으니 디지니는 자존심을 되찾은 셈이다.
‘물론, 알짜배기 승자는 무조건 나지만.’
어디까지나 총 수익의 문제일 뿐, 순수익으로 들어가면 배틀 게임의 10%도 안 되는 수익이다. 그러니 제작비 대비 이득은 없는 셈이었다.
이 지표에 다시금 축배를 들고 상여금 겸 회사 전체가 축제의 시간을 가졌다. 뒤이어 충전을 확실하게 한 만큼 당차게 다음 행보를 이어나갔다.
모름지기 작품의 토대는 원안이 되는 스토리에서 나온다. 당연하게도 새 작품을 시작하는 만큼 내가 만난 이는 믿고 맡겨둬도 마음이 놓이는 그녀, 레이첼 작가였다.
[이런 형태도 꽤 근사하네요. 마음에 듭니다.]
언휴먼스와 스페이스 워즈를 두고 세계관 편입을 고민해보라고 작가진을 한자리에 모아뒀더니, 생각지도 못한 속도로 아이디어가 공유되고 다양한 에피소드들이 만들어졌다.
[그런데 언휴먼스의 에피소드가 엄청나게 많은데요?]
[많은 작가진이 모이다 보니 버리기 아쉬운 이야기가 흘러넘치더군요. 최대한 추려보았는데도 이 정도였어요.]
엉뚱한 문제가 있었다.
레이첼이 가져온 이야기는 많아도 너무 많았다. 어느 정도냐면 영화로 만들어도 10개 시리즈는 될 규모의 에피소드가 보일 정도다. 더 곤란한 것은 그 모든 에피소드가 마음에 든다는 점이다.
이야기가 별로면 버리면 되는데, 다 마음에 들어버리니까 버리기가 아까워서 문제가 생기고 있다. 그렇다고 이것들이 아깝다고 한 편의 영화에 욱여넣었다가는 이도 저도 아닌 스토리에 관객들은 혼란을 느끼게 되어버리고 결국 망한다.
[선택이 필요한 시점이네요. 윤 회장님은 어떤 에피소드가 마음에 들죠?]
미래의 치트키 덕분에 어마어마한 선구안을 가졌다고 정평이 난 내 안목.
그녀는 이를 믿고 어떤 것을 버리고 어떤 것을 취할지 결정해주기를 기대했다. 여기서 나의 선택은 아주 간단했다.
[다 해보죠.]
[다?]
한 편의 영화에 이것들을 다 욱여넣으면 분명히 망한다. 그것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기에 레이첼은 더더욱 당황하고 있었다.
[이 많은 이야기를 영화에 넣으면 오히려 혼잡해지는 건 알죠?]
[당연히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영화가 아니면 어떨까요?]
[언휴먼스를 드라마로 제작하려는 거군요. 그러면 상관없기는 해요.]
레이첼이 웃었다.
지금이야 영화는 영화, 드라마는 드라마지만, 시간이 많이 흐르고 나면, 영화와 드라마 사이의 벽이 허물어진다. 과거처럼 영화는 영화관에서 드라마는 TV로 보는 시대가 끝나기 때문이다.
게다가 이미 지금도 넷플렉스로 인해 영화와 드라마를 한 자리에서 검색하는 것에 많은 사람이 익숙해지고 있는 형편이다.
‘게다가 시대가 달라. 과거 영화와 드라마는 제작비의 차이로 인해 다른 필름을 사용했고 이것이 품질의 차이로 이어졌지만, 지금은 아니거든.’
기술의 진보 덕분이다. 작금은 전부 디지털카메라로 촬영하고 있는 만큼 품질에서의 차이나 격차가 사라지는 추세다. 즉, 드라마도 충분히 영화 같은 퀄리티를 뽑아낼 수 있는 세상이니 에피소드만 충분하다면 드라마로 완성하는 것이 조금도 어렵지 않았다.
레이첼이 내게 물었다.
[아쉽지 않으신가요?]
[아쉽다니요?]
[드라마로 간다는 건 영화의 세계관에 편입이 못 된다는 거니까요.]
[아닙니다. 편입시킬 거거든요.]
[드라마를요?]
[네. 드라마와 영화가 콜라보를 할 겁니다.]
바벨의 만화에도 히어로즈 워 에피소드가 있고, 영화에도 히어로즈 워 에피소드가 있다. 그리고 둘의 공통점은 둘 다 엄청난 명작으로 인정받는 에피소드라는 점이다.
‘차이점은 만화에는 엄청난 히어로들이 등장하지만, 드라마에서는 제작비의 한계로 히어로들이 많이 등장하지 못한다는 것이고.’
하지만 드라마의 히어로가 영화에도 등장한다면 어떨까?
영화배우보다 출연료가 매우 저렴한 드라마의 배우들은 저렴한 돈으로 영화에 출연이 가능하다. 이러면 만화와 같은 대규모 히어로 전투신이 만들어질 수 있고 훨씬 화려한 연출을 기대할 수 있게 된다.
[언휴먼스는 최소 3시즌. 최대 5시즌 분량으로 스토리 작업을 시작하세요. 다만, 이야기 도중에 시즌이 끝나는 형태가 아니라 5시즌 분량의 거대한 이야기여야 합니다. 또한, 그 안에서 각 시즌 별 이야기로 나눠서 가야 됩니다.]
한국과 달리 미국의 드라마는 시즌제다. 시즌제의 장점은 실패하는 드라마를 계속하지 않음으로 손실을 줄여 더욱 안심하고 투자할 수 있는 환경이 만들어진다는 점이다.
‘단점은 그걸 제외한 모든 것들이지.’
실패한 드라마라도 의외의 팬이 있기 마련이다. 팬 입장에서 제일 열 받는 건 이야기가 절정으로 치닫다가 끝나버리는 경우다. 한창 재미있게 보고 있었는데 더 이상 이야기가 이어질 가능성이 없어지면 이보다 더 화가 날 수가 없다.
그래도 이건 실패한 거니까 어쩔 수 없다. 이것 못잖은 다음 문제는 성공했을 때의 경우다.
성공한 작품만 살려서 이어가는 시즌제의 특성상 미국 드라마는 영광의 종영이 거의 없다. 흔히 ‘성공한 것만 이어가면 영광의 종영이 더 많아야 하는 것 아닐까?’라고 생각할 수 있지만, 성공한 것만 살리려니, 사골을 우리고 또 우려서 맹물이 나올 때까지 우리는 불상사가 일어난다.
여기에 시청자들이 지쳐서 외면하면 그제야 종영을 해버리니 그 탓에 영광을 잃어버리는 것이다.
‘시즌3이면 족히 끝날 내용을 가지고 시즌 10까지 가버리니 안 지치고 버틸 수가 있겠어?’
그래서 하는 소리다.
[한 시즌당 12편. 총 36편에서 60편 분량으로 드라마를 제작합시다. 그리고 이야기의 중심은 얘네로 해주세요. 쟤네들 이야기는 아껴두고요.]
작가들이 생각한 에피소드는 두 개의 줄기가 중심이다.
첫 번째 줄기는 언휴먼스의 이야기, 두 번째 줄기는 달에서 생존하고 있는 언휴먼스다. 이중에서 ‘얘네’는 지구 발생 언휴먼스이고 쟤네‘는 달의 언휴먼스였다.
*
보편적 진리를 거론할 때 인과관계가 있듯, 원인 없는 결과는 없다. 이는 극단적인 성향을 보이는 알 수 없는 이들에게도 통용된다.
[남자들은 쓰레기야.]
흔히 표현하는 월드 스타이자 빼어난 미모와 연기력으로 영화계에서 섭외 1순위를 자랑하는 대표 배우, 샤론 테를리즈.
그러나 거침없는 열렬한 페미니스트로도 유명한 배우가 그녀였다.
[내 말이 틀렸어?]
그녀가 남성을 혐오하게 된 데에는 부친의 영향이 컸다. 15살에 사망했으나 망나니라 불러도 전혀 손색이 없을 찰스 테를리즈는 어린 샤론과 자신의 아내를 상습적으로 구타하고 협박한 술주정뱅이였다.
폭력에 노출된 채로 불안하게 유지되어 오던 가정이 완벽하게 파괴된 것은 견디다 못한 샤론이 따지고 들자 분노한 찰스가 총으로 그녀를 죽이려 들었기 때문이었다. 그보다 먼저 맞고서 흐느끼던 모친은 도망치는 샤론과 그런 딸에게 총을 쏘는 찰스를 보고 그에게 달려들었다.
이후 엎치락뒤치락 한 끝에 당황한 찰스의 총을 빼앗은 모친은 그를 쏘아 죽였다. 하필, 그 날은 샤론의 생일이었기에 그녀는 망나니이던 아버지를 잃고 그나마 가족이랄 수 있던 어머니마저 사형수가 된 충격의 그날을 더욱 선명하게 기억하게 되었다.
이것이 샤론 테를리즈가 남자들을 거부하고 특히 아버지라는 단어를 혐오하게 된 이유였다. 하지만 배우의 길을 걷고 있을 만큼 미모가 뛰어난 만큼, 찰스 같은 망나니도 있지만, 자신의 호감을 사기 위해 순진하게 다가오는 이들도 여럿 만났다.
알 수 없는 미움만을 주던 부친과는 달리 사랑받기를 원하며 다가오는 남자들.
물론, 그들의 목적은 연애와 잠자리가 대부분이었으나 그렇지 않은 이들 역시 소수나마 존재했다. 이렇듯 폭력 없이 만나주기만 해도 행복해하는 이들의 순진함은 다른 의미로 샤론의 가치관에 영향을 주었다. ‘아닌 놈들도 조금쯤은 있어.’라는 것이었다.
[대부분의 남자들은 쓰레기야. 그리고 쓰레기는 어디에나 있어.]
무조건적인 증오에서 이유 있는 혐오로의 전환이다. 뒤이어 자신의 근거 있는 주장을 표현했고 인정받는 배우의 길을 걸어온 만큼 팬을 비롯하여 그녀를 지지하는 이들이 많았다.
여성은 물론이고 남성에게도 인정받는, 이른바 건강한 페미니스트의 선두주자가 된 것이다. 그러다 보니 그녀가 작품을 선택하는 기준은 다른 사람들과 꽤 달랐다.
[다들 말만 번지르르하지 이게 어디를 봐서 페미니즘이에요? 이런 건 그냥 차별주의잖아요.]
자신의 가치관인 페미니즘과 이념을 같이 할 수 있는 작품.
샤론 테를리즈가 원하는 작품은 그런 것이었다.
[내가 원하는 건 차별이 사라지는 거지 차별을 위한 차별이 아니에요. 이런 거 말고 좀 괜찮은 거 없어요? ]
[그 마음은 아는데, 그런 작품이 어디 쉽게 나오는 게 아니잖아.]
2003년 연쇄살인마를 연기하면서 원톱 주연급 최정상 배우로 올라선 샤론이었던 만큼, 그녀를 찾는 작품은 생각보다 많이 들어온다. 보통 이쯤 되면 출연료가 높고, 원톱 주연인 것을 고집하기 마련이다.
그러나 그녀는 조연이더라도 자신의 이념에 맞는 캐릭터를 찾았다. 그 탓에 까다로운 배우와 계약을 한 매니저는 늘 그녀의 입맛을 맞출 수 있는 시나리오를 찾아오느라 죽을 맛이었다.
‘가뜩이나 요즘은 페미니즘이 더 들고 일어나서 네가 찾는 그런 게 없어졌다고. 제발 이 중에서 좀 골라라! 제발!’
매력적인 얼굴이 미워질 지경이다. 매니저는 간절함을 담아서 보았다.
[미안해요. 딱히 내키는 게 없네요.]
애석하게도 신은 그의 기도를 들어주지 않았다. 이번에도 심사숙고 끝에 나온 결론은 모두 반려하는 거였다.
[이건 어때? 이 작품은 괜찮지 않아?]
[거듭하는 말이지만, 남자가 할 역할을 여자가 할 뿐이면 그건 페미니즘이 아니에요. 언제쯤이면 남성 위주의 할리우드가 평등하게 변할 수 있을까요? 그런 보석 같은 작품이 나와줘야 할 텐데요.]
읊조리며 한숨을 내쉬는 그녀를 보고 매니저 역시 티 나지 않게 이맛살을 구겼다. ‘디지니와 넷플렉스의 PC논쟁’을 접한 뒤부터 윤태식 회장의 인터뷰를 입에 담고 사는 그녀를 보니 마냥 짜증이 난다.
‘그 자식 때문에 우리 배우가 작품은 하지 않고 게임만 하면서 지낸단 말이야!’
스타의 외부 활동은 그 자체로 돈이 된다. 대중의 눈에 비치고 선글라스로 무엇을 썼는지, 구두, 핸드백을 비롯한 모두가 광고이자 홍보의 수단이 되기 때문이다. 그런데 주가를 올렸으니 부단히 활동해야 할 자신의 배우가 돈도 안 되는 게임에 취미를 가져버렸다.
자신이 원하는 캐릭터가 저곳에 있다는 등의 헛소리를 하면서였다.
[넷플렉스에서 나오는 영화라면 출연할 의사가 있는 거지? 예를 들면 던 라이트 같은 게 대형으로···]
[제정신 아니죠? 그런 배역을 나한테 권하다니요.]
[GF의 게임도 하고 윤 회장 인터뷰도 감명 깊게 읽었잖아.]
[하나를 잘했다고 전체를 좋게 보는 건 멍청한 일이에요.]
‘망할······.’
하지만 감정을 표출하는 멍청한 짓거리를 할 거라면 매니저 노릇을 할 수 없다. 그는 배우 못잖은 연기력으로 속마음을 꽉 눌러 담은 채로 샤론의 비위를 맞추고자 애를 썼다.
[알다시피 그런 작품은 보석처럼 귀하고 희소성이 커. 나름 괜찮게 보는 넷플렉스 조차도 게임이나 드라마에서만 들먹일 뿐, 영화에는 자기들이 언급한 PC는커녕 던 라이트 같은 거나 만들 뿐이야. 그렇다고 하찮은 드라마에 네가 출연할 수는 없잖아? 그러니 최대한···]
[잠깐만요. 드라마는 있는 건가요?]
[그야 있기는 한데··· 잠깐만. 설마 급도 떨어지고 돈도 안 되는 드라마 따위에 출연하겠다는 건 아니지?]
[인간이 동물에게서 배워야 하는 지혜 중 하나가 멈춤이란 건 알죠? 배를 채우고도 병이 생길 만큼 먹는 어리석은 짓을 할 수는 없어요. 혹, 그렇게 지내왔다고 해도 앞으로는 같은 실수를 저지르지만 않으면 되죠.]
‘뭔 개소리야?’
[제게는 이미 충분하리만큼의 돈이 있어요.]
‘그건 너 만이잖아.’
[중요한 건 가치와 이념이죠.]
‘아니야! 나는 아니라고!]
[그리고 실천하는 삶이에요.]
‘야!’
매니저는 마음속으로 샤론의 안부와 무사함, 가족의 평화에 대해 ‘What the fuck!’을 섞어 기도해주었다.
< 다르다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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