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999년 게임 스타트-529화 (529/577)

< 자립 >

영화 던 라이트는 원작을 뛰어넘은 작품으로 크게 칭찬받았고 꿈속 미래보다 큰 성공을 이루었다. 하지만 흥행의 그래프를 새롭게 바꿔버리는 정도에는 도달하지 못했다.

‘본래도 전체 수익의 80%가 1주, 2주 차에 나오고 이후에는 급격하게 기울었던 것으로 유명했지.’

우리가 달성한 성적표 역시 마찬가지였다. 다만, 차이점이 있다면 첫 주차에 굉장하리만큼 많이 벌었다는 것이었다.

던 라이트의 북미 스코어는 대략 2억 5천만 달러 정도로 추정하고 있다. 고작 8,000만 달러로 제작한 영화가 2주 만에 2억이 넘는 수익을 벌어들인 셈이고 해외 수익까지 합한다면 6억 달러를 윗도리라 추산된다.

“이 수입이면 라이언 맨과 동급이라는 거거든.”

잘 된 것은 당연히 좋은 일이지만, 개인적으로 던 라이트보다는 라이언 맨의 팬이라서 그럴까. 왠지 진 것 같고 자존심이 살짝 상하는 기분이었다.

대박이 났는데도 이런 미묘한 감정이 드는 것을 보면 ‘사람의 마음이란 참 간사하다’는 말이 진리는 분명한 것 같았다. 아무튼, 내 심사야 혼자만의 일탈일 뿐, 회사에서는 축제의 분위기가 가득했다.

나는 이 기쁜 소식을 라드 헤이스터스를 통해 들었다.

[다들 난리도 보통 난리가 아닙니다. 게다가 대부분의 수익이 2주 차 이내에서 발생한 덕분에 순수익도 엄청 높고요.]

[ACM에서는 뿔이 좀 났겠군요?]

[그렇습니다. ACM에서는 아무래도 아쉬운 소리를 많이 하긴 합니다.]

미국의 영화 배급 시스템은 한국과는 여러모로 다른 점들이 있다. 그중 하나가 바로 임대료와 부율이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임대료를 포함한 부율과 임대료를 제외한 부율을 나눠서 거론해야 하지만, 그까짓 거. 그냥 대충 쉽게 퉁쳐버리고.’

대략적으로 보자면, 미국은 배급사가 극장에 영화를 걸 때 매주, 임대료를 지불한다. 그 대신 첫 주와 둘째 주에는 배급사가 95%의 수익을 얻고 셋째 주에는 90%로 차츰차츰 조절하는 방식이다.

당연히 극장의 입장은 초반에 바짝 수익을 당기는 영화보다 잔잔하게 오래오래 수익을 뽑아내는 영화를 좋아한다.

그런데 던 라이트는 어떠한가?

달랑 2주 만에 수익 뽑을 걸 모조리 뽑아내고는 확 식어버렸다.

‘오래오래 함께 가야 할 텐데, 이렇게 되면 곤란하네.’

ACM은 지난번 슈퍼내추럴 액티비티에서 가장 많은 스크린을 차지하기 위해서 던 라이트와 배틀 게임에 500개나 되는 스크린을 제공하기로 약속했다. 500개면 ACM이 보유한 스크린의 10%나 되는 수치다.

한국과 달리 하나의 영화에 많은 스크린을 몰아주는 것이 불가능하고, 개봉 첫 주와 둘째 주에는 가져갈 돈이 없는 것을 생각한다면 하나의 영화에 10%나 되는 스크린을 몰아주는 것은 굉장히 이례적인 일이라 할 수 있다.

함께 일을 했는데, 한쪽에서만 이득을 가져간다면 반대쪽에선 불만이 나오는 것은 당연한 법이다.

[보상안에 대해서는 생각해둔 바가 있습니까?]

[굳이 심각하게 생각하실 필요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초반에 관객이 몰려들고 빠르게 빠진 걸 우리 탓이라 말할 수는 없으니까요.]

‘문화적인 차이려나?’

어딘지 모르게 마음이 불편해지는 걸 피할 수 없었는데, 라드는 그런 것에 조금도 신경 쓰지 않는 것 같다. 이런 부분이 한국인과 미국인이 가지는 마인드의 차이인 것도 같았다.

[배틀 게임도 그렇게 진행된다면 조금은 눈치가 보일 수도 있지만, 우리 영화가 이것들만 있는 것도 아니지 않습니까? ACM도 그 정도는 계산할 줄 알 겁니다.]

이 분야에서는 라드의 말이 더 맞을 테니, 약간은 품고 있던 양심의 가책을 덜어내기로 했다.

이제 흥행 가도를 꾸준히 이어가기 위한 다음 작품에 대한 이야기를 나눌 차례다. 한국인에게는 ‘일본 고딩들이 섬에서 서로 죽고 죽이는 영화의 서양 버전’정도로 잘 알려진 배틀 게임이었다.

[배틀 게임에서는 어떤 마케팅을 준비했습니까?]

[딱히 준비하지 않아도 된다는 것이 마케팅팀의 결론이었습니다. 전작인 던 라이트와 마찬가지로 배틀 게임 역시 비슷한 인지도를 가진 작품이니까요.]

전 세계 2,500만 부 가량의 판매고를 올린 베스트셀러, 10대 소녀가 주인공인 작품, 영화로 만들어지기 전부터 많은 기대를 받고 있다는 점에 이르기까지 닮은 구석이 정말 많은 작품이다.

하지만 이 둘에는 절대적인 차이가 한 가지 있다. 같은 10대 소녀이지만, 두 주인공은 처음부터 끝까지 완전히 다른 성향을 보인다. 던 라이트의 주인공이 신데렐라를 꿈꾸는 여성의 판타지라면 배틀 게임은 주체적이고 스스로 영웅이 되어가는 여성의 판타지이기 때문이다.

그 덕분에 던 라이트는 오롯이 여성층만을 타깃으로 한정한 작품이지만, 배틀 게임은 여성과 남성 모두를 만족시킬 수 있는 작품이라는 차이점이 생겨난다. 그리고 이 차이는 영화로 넘어오게 될 경우 훨씬 두드러진다.

‘그래도 너무 성공을 자신하고 마케팅을 소홀히 하는 건 아닌가?’라는 생각을 하는데 라드 헤이스터스 의장이 기색을 눈치챈 듯 부연 설명을 해주었다.

[흥행의 선구안에 대해서만큼은 입지전적인 회장님께서 성공을 확신하신 작품이니 우선 대중성과 기본적인 성공 정도는 데이터의 기반으로 깔아두고 고려했습니다. 여기에 던 라이트는 소녀들로 대변되는 원작의 팬들이 주요 고객이지만, 배틀 게임은 원작과 영화 쪽 팬 모두를 만족시킬 작품입니다.]

몇몇 추가된 논지의 결과는 ‘어지간해선 올해 개봉할 그 어떤 영화와 붙어도 패배할 일이 없다’는 이야기였다.

‘이제 슬슬 한국 직원들 못잖게 이 사람들도 나를 대놓고 믿어버리기 시작했구나.’

본래 대중의 선택을 받을지 여부는 개봉 전에 알 수가 없다. 외면받지 않고자 어떻게든 돈을 들이고 온갖 수를 쓰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하지만 이제는 영화의 완성도만큼이나 내가 ‘이건 됩니다.’라고 한 말에 높은 가치를 부여하는 중이었다.

‘딱히 틀린 게 아니기는 하지만.’

이래저래 설득하고 근거를 둘 필요가 없어지니 나로서는 편해진다만, 너무 자신감이 넘치는 것도 문제는 문제다. 탑다운 형식의 수직적인 운영구조는 선장이 실수를 범해버리면 송두리째 침몰해버릴 수 있다는 위험요소가 크기 때문이다.

물론, 이런 내 우려가 지금으로서는 기우라고 봐도 된다. 대박 날 작품을 가져왔고 때깔 좋게 잘 뽑았다. 그러나 마냥 안심할 수도 없었고 그 이유는 역시나 디지니에게 있었다.

【또다시 맞붙는 디지니와 넷플렉스. 디지니의 힘을 보여줄 차례?】

【신생 프랜차이즈 VS 완성된 프랜차이즈】

【배틀 게임 VS 캐리비안베이의 해적들4. 다시금 벌이는 정면승부!】

디지니의 영화는 디지니에서도 최고 인기 시리즈물이었다.

‘너무나도 대단해서 환장해버릴 것 같은 글로벌 기업 같으니. 얘들은 당초부터 가진 게 너무 많아. 자본에다가 작품들 등등!’

미래를 알고 차후의 대박 작품들을 갈퀴로 긁어모으는 치트키가 없었다면, 그 누가 헤비급 펀치를 연거푸 퍼붓는 디지니를 감히 상대할 수 있었으랴.

[언론에서 질리지도 않고 다윗과 골리앗의 구도를 자꾸 써먹게 되겠군요.]

[누가 뭐래도 캐리비안베이의 해적들은 올해 개봉하는 모든 영화를 통틀어서 가장 비싼 제작비를 자랑하니까요. 회장님께서도 아시겠지만, 요즘 영화계에서는 이 캐리비안 베이의 해적들을 제작하는데 정확히 얼마가 들어갔는지가 최고의 관심사라고 합니다.]

[추산하는 비용이 무려 제작비 4억 4천만 달러라던가요?]

[네. 대관절 디지니가 돈 벌 생각을 하기는 하는지 의구심이 들 정도의 돈이죠. 마케팅 비용을 포함한 금액이겠지만 말입니다.]

‘본래의 미래에도 돈을 퍼부은 작품으로 유명했는데, 현실에서는 나 때문에 훨씬 더 쏟아부었군.’

할리우드의 메이저 배급사에서도 그해에 메인으로 밀어주는 영화를 제외하면 총 수익이 4억 달러만 되어도 대성공인 것들이 대부분이다. 즉, 이건 어지간해선 이익을 얻는 것이 불가능한 영화다.

물론, 제작비가 작품의 전부는 아니다. 제작비로 흥행하는 거면 던 라이트는 이미 한참 전에 밀렸어야 한다.

‘이렇게 생각은 하지만, 캐리비안베이의 해적 4는 내 기억에 10억 달러를 돌파하는 영화 중 하나였지.’

이들이 돈을 벌었든 안 벌었든 일단 영화계를 씹어 먹어버린 영화였다. 그러나 이런 미래를 알고 있다고 해서 딱히 뾰족한 대응책이 있는 건 아니었다.

[어떻게 해서든 배틀 게임의 스크린을 더 잡을 수 있도록 해보세요.]

[알겠습니다. 보증금을 많이 내서라도 최대한 잡아보겠습니다.]

할 수 있는 최선의 수단들을 나태하지 않게 꾸준히 이어나갈 뿐이다. 이렇듯 방심하지 않은 강적을 상대로는 묘수가 없었다.

*

팝 에이든은 ‘총력을 다한다.’와 ‘전심전력’이라는 말을 떠올렸다. 그만큼 후회 없을 정도로 일사불란하게 움직였다. 그 이유와 목표는 단순했다.

[이번에도 질 수는 없다.]

동등한 선상에서 거론되는 것만으로도 자존심이 상하는 상대에게 여러모로 패배의 쓴맛을 보았다. 한 번, 두 번은 이해할 수 있었지만, 그 숫자가 세 번, 네 번을 넘어가리만큼이 되었다. 이래서는 곤란하다.

[무조건 이겨. 지원을 아끼지 않을 테니!]

가능한 모든 방법을 총동원했다. 간직했던 강점들도 아쉬움 없이 활용했고 극장들의 호응 역시 긍정적이었다.

미국은 영화의 나라다. 매년 듣도 보도 못한 영화까지 굉장히 다양한 영화들이 만들어진다. 그리고 이런 ‘듣보잡’ 영화들도 뉴욕의 메인 극장에 걸리는 것이 미국이라는 나라이고 영화마다 스크린을 할당받을 수 있는 것에 한계가 있었다.

이런 마당에 캐리비안베이의 해적이라는 초대박 프랜차이즈가 나왔으니 극장주 입장에선 어떻게든 이 영화의 개봉관을 밀어주고 싶을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과정들은 언론에서 실시간으로 보도했다.

【개봉관의 수는 디지니가 승리!】

【4,000 VS 3,000의 시작. 캐리비안베이의 해적4와 배틀 게임의 대결!】

5월 마지막 주.

대망의 개봉일이 다가오기 전까지는 개봉관을 확보하기 위한 물밑싸움이 치열했다.

이윽고 그날에 도달했다.

【4,160개 스크린으로 시작하는 캐리비안과 3,660개의 스크린을 확보한 배틀 게임.】

【디지니는 넷플렉스에게 설욕할 수 있을 것인가?】

【영화계의 자존심을 건 승부가 시작 됐다.】

만만치 않은 수완을 보이며 제법 따라왔지만, 넷플렉스는 아직 자신들만 못하다. 디지니만이 아닌 위너와 울프까지 영화들을 내놓고 있으니 차이가 벌어지는 것은 당연했다.

이제 남은 일은 대중의 선택일 뿐!

개봉 첫날 수익에 세간의 이목이 쏠렸다.

팽팽한 긴장감이 사무실을 감돈다. 힘들고 스트레스를 받았더라도 마지막에 승리를 확정 짓는 다면 짜릿함은 배가 되기 마련이다. 이를 고대하며 팝 에이든이 기다리던 그때, 결과가 나왔다.

【디지니 vs 배틀 게임. 개봉 첫날 승자는?】

【캐리비안 3,400만 달러. 배틀 게임 6,700만 달러.】

【완성된 프랜차이즈 vs 신규 프랜차이즈. 예상을 깨고 배틀 게임의 압승!】

【다섯 배나 큰 골리앗을 이번에도 다윗이 이기다!】

혈압이 올라서 정신이 어질어질할 정도다.

그의 눈썹이 크게 솟구쳤다가 분노로 피부색이 붉어질 정도로 달아올랐다.

[빌어먹을!]

팝 에이든은 최근 회사에서 얼굴을 붉힐지언정 찌푸려본 일이 없었다. 아무리 안 좋은 일이 있더라도 그는 최대한 평온한 표정을 유지했다. 하지만 지금은 도저히 참을 수가 없었다.

그는 보고 있던 신문을 와락 찌그러트리고는 바닥에 내팽개쳤다. ‘환하게 웃고 있는’이라는 문구와 함께 싱글벙글한 지면의 얼굴들을 구둣발로 밟고 또 밟았다. 그러나 울화는 도저히 풀리지 않았다.

[입이 있으면 말을 해 봐.]

이를 악물며 물으니 침을 꿀꺽 삼키고 주저리주저리 떠드는 잡소리가 되돌아왔다.

[그··· 배··· 배틀 게임은 신작이긴 하지만, 이미 엄청난 팬층을 보유하고 있는 영화입니다.]

[무시할 수 있는 상대가 아니었고···]

[이 지점에 대해서는 회장님께서도 주지해주시고 독려해주셨던 데다가··· 그게···]

[그랬었지.]

순간 에이든의 눈이 마치 먹이를 보는 포식자의 눈처럼 변했다가 이내 안정을 찾았다. 그는 ‘맞아. 만만한 상대가 아니니 이번에는 반드시 이겨보자고 했었어.’라고 인정하고 낮게 웃었다.

[알아. 세상에 100% 승리를 자신할 수 있는 일은 없어. 때론 이기고 때론 질 수도 있지. 그런데 스크린도 더 적은 영화에게 거의 두 배의 차이로 밀렸다는 건 문제가 있지 않겠나? 팬층의 규모나 작품성을 논하기에는 대표 프랜차이즈 영화였다는 대답을 할 수 있지 않겠고?]

그는 말을 바로 이어서 하지 않고 ‘게다가······.’라며 숨을 크게 골랐다. 담배를 피운 것도 아닌데 긴긴 연기를 내뿜듯 호흡을 내뱉었다. 그 모습에 에이든의 앞에 사열해 있던 임원진들은 그 짧은 찰나를 마치 영원과 같이 느끼며 침을 삼켰다.

[두 영화의 제작비 차이에 대해서는 뭐라 떠드는지 알고 있나?]

[다섯 배입니다.]

[맞아. 다섯 배야. 무려 다섯 배라고. 이기기만 한다면 관계없으니 아낌없이 써도 된다고 해서 막힘없이 쓰고 아낌없이 썼으며 시원스럽게 쓴 돈이 다섯 배다.]

[저쪽은 마케팅 비용을 제외하고··· 그··· 저희는 마케팅 비용이···]

[지금 그런 사소한 것까지 다 따지고 싶어? 진심으로 그러기를 바라는 건가?]

[아닙니다.]

비교는 공평해야 하니 마케팅 비용을 다 계산해서 비율을 말하는 게 맞긴 했지만, 이런 타이밍에 굳이 할 대답은 아니었다. 아울러, 에이든이 전달하려는 건 무조건적인 책임 전가와 책망이 아니었다.

[방심하지 않으면 된다, 제대로 하면 된다는 것이 오만이었음을 인정할 때가 되었군.]

정면승부로도 밀렸다는 경각심.

[최선을 다했다, 이보다 더 준비할 수 없다··· 여기에서 그친다면 우리는 지금까지 그래왔듯 이후로도 같은 결과를 보게 될 거다. 그러니 앞으로는 넷플렉스의 움직임. GF의 행보를 비롯한 모두에 민감하게 반응하고 정해놓은 합격점 그 너머를 노려야 한다.]

단순하게 ‘한 방이 있는 상대’이자 ‘만만치 않은 놈들’이라는 수준을 넘어설 정도의 위기감을 심어주기 위해서였다.

‘막연하게가 아니야. 정말로 심각할 만큼 위험한 놈들이다.’

< 자립 > 끝

ⓒ (527)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