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999년 게임 스타트-528화 (528/577)

< 자립 >

*

앤드류 제이슨은 미국 영화 평론계에서 악명이 높은 평론가다. 프로페셔널인 만큼 입금을 해주면 정해진 기한을 지켜 확실하게 어떤 작품이라도 평론해준다. 그러나 마찬가지의 의미로 프로페셔널이기에 자신의 소신을 담아서 비평해주는 인물이었다.

아무리 많은 돈을 안겨주어도 작품이 별로라면 결단코 좋은 평을 얻을 수 없다. 반대로 그를 움직일 수 있는 최소한의 돈만 지급해도 작품이 훌륭하다면 극찬을 아끼지 않았다.

그렇기에 자신 없는 영화는 그에게 평론을 부탁하지도 않았고 대중 역시 앤드류 제이슨의 평론은 믿고 보았다. 다만, 그가 신랄하게 비평한 작품 못잖게 극찬을 받는 작품은 피하는 편이었다.

이유는 영화광들이 자체 해석하는 앤드류 제이슨의 평점을 보면 알 수 있다.

- 앤드류가 이번 영화에 60점을 줬어.

└ 그거 볼만 하겠는데?

- 이번 영화는 무려 70점이야!

└ 와우! 그럼 무조건 봐야지!

- 신이시여··· 92점 영화가 나왔습니다···

└ 넘겨! 90점대라면 나는 안 봐.

└ 겁나게 예술적이겠네. 평론가들만 빨아주겠구만~

└ 인정. 90점대 영화는 그들만의 리그야. 철학적 깊이는 있을지 몰라도 난 좀 지루할 거 같아.

└ 보다가 무조건 잘 거니까 같이 가서 내기할 사람? 안 자고 오래 버티기~

└ 불면증 환자들에게 이 영화를 추천합니다!

이렇듯 기본조차 지키지 못한 미달작품은 거론할 필요도 없지만, 앤드류 제이슨에게 90점 이상의 고평가를 받은 작품은 작가주의에 심취하여 지나치게 예술적인 작품일 때가 대다수였다.

그런 그에게 나는 던 라이트의 평론을 의뢰했고, 곧 앤드류 제이슨의 평론은 핵심 논점이 되어 온라인에 던져졌다.

【판타지 로맨스계를 휩쓸었던 화제작 던 라이트! 넷플렉스의 영화로 태어나다!】 = 81점.

영화 ‘던 라이트’는 평범한 인간 소녀와 잘생긴 뱀파이어의 운명 같은 사랑을 그린 판타지 로맨스다. 뱀파이어 일족에게 존재가 노출되며 목숨을 위협받게 되는 소녀, 소녀를 지키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뱀파이어. 과연 이들은 무사히 살아남아 사랑을 이어갈 수 있을까?

처음 영화가 만들어진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필자는 정말 우려가 컸다. 이는 나만의 걱정이 아니라 원작을 읽어본 이라면 모두가 공감하리라 본다.

밑도 끝도 없이 시작되는 러브스토리, 독자의 상상력에 기대는 빈한한 작가의 필력, 외모를 제외하면 멋이라고는 도저히 표현할 줄 묘사, 방향을 잃었지만, 그따위와는 상관없이 행복해서 죽어버릴 것만 같은 연애담 등등을 잘 알 것이라 그렇다.

씨앗이 엉망진창인데 싹이 자라서 열매를 맺어봐야 무슨 기대가 되겠는가. ‘과연 끝까지 지켜볼 수 있을까?’라는 의심과 한숨만이 거듭 나왔다. 하지만 직업이 직업인 이상 나는 봐야만 했고 글을 써야만 한다.

단단히 마음먹고 영화관 좌석에 앉았다. 이후 나는 놀라운 체험을 하게 되었다.

의심? 인내? 자괴감? 고뇌? 그런 건 없었다. 정확하게는 그런 의문이 전혀 떠오르지 않았다는 말이 알맞으리라 본다. ‘던 라이트’의 로맨스는 원작이 아닌 영화로서 완성되었으며 이 안에는 여성의 판타지가 고스란히 표현되었다.

한편으로 떠오르는 건 디지니다. 정치적 올바름이라는 안건을 토대로 격렬하게 충돌해온 넷플렉스와 디지니의 관계를 모르는 이는 드물 것이다. 하지만 양자 간에 그려지는 여성의 모습은 다소 차이를 보인다.

기존의 남자 캐릭터가 가진 배역과 역할을 여자도 대신할 수 있는 것, 여자 캐릭터에게 맞는 역할과 그들이 원하는 판타지적인 서사를 보여주는 것.

무엇만이 필요하다, 무엇만이 옳다고 할 수는 없다. 단지, 스토리적인 연출과 캐릭터의 역할이라는 측면에서 볼 때 무게 중심을 어디에 주어야 하고 어느 쪽이 완결성 있는 작품으로 완성되는지는 관객의 눈이 판단할 것이다.

└ 맙소사! 81점!

└ 이건 무조건 믿고 보는 거!

└ 잘 모르는 분을 위해 설명하자면~ 앤드류는 상업적인 영화는 절대로 85점 이상을 주지 않음. 70~84점까지의 영화들은 대부분 상업적인 성공에 긍정적이지만, 85점에 들어가면 작가주의 작품들임.

└ 근데 배운 놈들은 이래서 싫어. 그냥 마시멜로 같다고 해버리면 되는데 뭔 PC고 정치래?

└ 이건 앤드류가 틀렸지. 어디 깨지면 큰일 나는 꽃병 취급하는 영화랑 디지니를 얽어? 여자라고 맨날 보호만 받냐?

└ 너야말로 눈은 어디 있냐? 장르랑 작품 내에서의 역할이라잖아. 억지로 성별만 바꾼 게 평등이냐?

└ 너네 둘 다 바보지? 앤드류는 뭐가 좋다고 안 했거든?

└ 의도도 모르는 병신들.

└ 지는 잘난 줄 알아~

└ 아이고. 말이 안 통하니 상대할 수가 없네~

└ 지는~

평점 81과 평론!

그런 상황에서 던 라이트의 평점 81점은 매우 고무적인 일이었다.

‘어째 정치가 살짝만 끼어들면 난장판이 되기는 한다만, 나로서는 화제가 되면 될수록 좋지.’

괜히 정치인들이 잊힐만하면 터무니없는 소송을 걸고 ‘무플보단 악플이 낫다’라는 말을 하는 게 아니다. 흔들리지 않는 정신력만 보유하고 있다면 현대사회에서 어떤 방식으로든 관심을 끄는 건 마케팅의 좋은 수단이 된다.

당연히 넷플렉스 내부에서도 아주 난리가 났다.

[앤드류의 81점이면 충분합니다. 따로 홍보를 할 필요도 없으리라 봅니다.]

[뒤의 평론은 깎아내고 81점을 강조하면 흥행은 전혀 문제가 없을 거 같습니다.]

한편, 우리의 라이벌 역시 가만히 있지 않았다.

[디지니의 영화, 졸업 파티의 마케팅이 어마어마합니다.]

[부딪치지 않으려고 해도 그럴 수가 없는 게, 디지니는 매년 제작하는 작품들이 워낙 많기도 하니까요.]

넷플렉스의 신작 반응이 너무 좋으니 이런 분위기를 일단 한 번 환기해야 한다고 생각했던 것일까. 디지니에서 자신들의 영화에 대한 광고를 공격적으로 뿌려대기 시작했다. 그 탓에 정면승부의 분위기가 조성되었다.

관전 포인트는 둘 다 로맨스 장르끼리 붙었다는 점이다.

디지니의 영화, 졸업 파티는 이름처럼 ‘졸업 파티를 준비하는 학생들과 졸업 파티의 파트너를 구하려는 학생들의 이야기’가 나온다. 한국인들에게는 문화적으로나 정서적으로 낯설게 느껴질 수 있으나 미국의 학생들은 졸업 파티에 큰 의미를 가지기에 대중의 공감을 사기 좋았다.

‘소고기 넣어서 만든 짜장라면을 외국인들이 바로 체감하지 못하는 거랑 비슷하지.’

나 역시 ‘캠핑가면 마시멜로를 구워 먹는다며?’라는 호기심을 가지고 집에서 해본 적이 있었다. 결과는 ‘맛없어’라는 평가였고 한 봉지를 산 마시멜로를 몽땅 버렸던 기억만 있다. 이렇듯 문화와 상식의 차이는 디테일하게 들어갈수록 적나라하게 드러난다.

이런저런 생각을 하는 내게 김유천 비서실장이 말했다.

“회장님. 미국의 쇼핑몰이란 쇼핑몰은 전부 디지니와 광고 계약을 맺었다고 합니다.”

“고작 하이틴 로맨스 영화로 말입니까?”

이건 정말 정신 나간 짓이다. 누가 뭐라고 해도, 영화계의 핵심은 블록버스터 액션 혹은 재난이다. 이 장르가 아니라면 어지간해선 엄청난 흥행수익을 가져오지 못한다. 그래서 대부분의 투자금도 이쪽 장르에 몰린다.

로맨스 영화 쪽은 어떠한가. 냉정하게 볼 때 대박이라고 해도 미국 내에서의 흥행 수익이 2억 달러를 넘기지 못하는 것이 대부분이었다. 그런데 미국의 모든 쇼핑몰과 계약을 하면 이건 밑지고 장사한다는 말과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여기에서 디지니의 저력을 다시금 볼 수 있었다.

“일반적이면 마케팅 비용도 회수 못 할 게 뻔하지만, 디지니는 다르다고 합니다. 실제 비용이 크게 들지 않았거든요.”

“어떻게 말입니까?”

“우리 영화의 개봉 전까지만 계약한 것이고, 그 보상으로 해당 기간동안 디지니 굿즈의 할인 행사를 진행한다더군요.”

‘정말이지 디지니라서 가능한 마케팅이군.’

대단하다는 말밖에 할 말이 없을 정도다.

외국인에게 한국의 PC방 문화가 놀라움의 대상이듯, 한국인이 잘 모르는 미국의 문화에는 쇼핑몰이 있다. 이를 이해하려면 우선 미국의 학생들은 의외로 놀 거리가 너무 없어서 심심해한다는 사실을 알아야만 한다.

반추하여 미국 영화의 장면들을 떠올려보자. 미국의 학생들이 하는 일에 무엇이 있던가?

자전거 타고 돌아다니기, 집에서 게임을 하기, 친구 집에서 파티하기가 대부분일 것이다. 이것 외에는 나오지 않는데 그 이유는 정말로 그것들을 제외하면 할 게 없기 때문이다. 이러다 보니 미국의 학생들에게 쇼핑몰은 최고의 유흥거리다.

‘이래서 나중에 케이팝이 빵빵 터진 거려나?’

미국 학생들은 할 일이 없으면 이들은 주말에 쇼핑몰로 간다. 딱히 뭔가를 하고 싶어서가 아니라 괜히 시간을 보내는 게 목적이다. 이게 일상일 정도로 핫한 장소가 쇼핑몰이었다. 디지니가 여기를 꽉 잡은 것이 대단한 이유가 바로 이것이었다.

“제대로 선순환이 이뤄지겠군요.”

“네, 회장님. 디지니 굿즈의 할인행사 때문에 쇼핑몰에 사람들이 몰릴 것이고, 사람들이 쇼핑몰을 더욱 찾으니 이번 영화 광고에 노출되는 사람도 많아지리라 봅니다.”

“하여간 굿즈만 가지고도 남들한테는 어려운 일들을 너무 쉽게 해내 버립니다.”

솔직히, 이렇게 세게 나올 줄은 몰랐다. 경쟁 작품이 하이틴 로맨스라서 그 수익에 맞는 마케팅을 하리라 예상했고 그러면 뭘 해봐야 우리가 이기기 때문이었다.

나는 바로 회의를 소집해 의견을 물었다.

[개봉까지 이제 2주 남았는데, 우리가 할 수 있는 방법은 있습니까?]

[시일이 촉박하여 대단위의 이벤트는 불가능하리라고 생각합니다.]

[대단위가 아닌 다른 방법들은 있다는 말 같군요?]

[배우들을 통한 소규모 이벤트는 어떨지 회장님의 재가가 필요합니다.]

[던 라이트의 배우들은 홍보 스케줄이 꽉 잡혀 있지 않습니까?]

[네. 하지만 잠깐씩만 참여하도록 해주신다면 효과는 충분할 겁니다. 대부분은 잘생긴 모델들로 채우면 되거든요.]

디지니만 마케팅 전문가들이 있는 게 아니다. 내가 획기적인 미래의 묘책을 매번 가져오지 않더라도 넷플렉스의 임원들 역시 베테랑이며 디지니의 움직임에 대응하는 수단을 강구하고 있었다. 나는 이들의 의견을 들은 뒤 흔쾌히 허락했다.

그리고 그 결과는 곧바로 인터넷을 통해 확인할 만큼 즉각적이었다.

「오늘 대박!!! 학교 끝나고 집에 가다가 꽃미남 뱀파이어 카페에서 무료로 커피 나눠 줌. |-D」

「너도? 나도! XD」

「아! 나도 거기서 커피 받음! 매일 있었으면 좋겠다. 진짜 황홀했어. =)」

「어딘데!? 어디였는데?」

「영화 던 라이트 때문에 홍보용으로 오늘 하루 왔었다던데. 어딘지 알아도 소용없을 거야. 내일은 다른 곳에서 한다 그랬어. :-P」

「나만 운 없어!! :-<」

전 세계 어디를 가더라도 미남·미녀 마케팅은 통하는 법이다. 로맨스물은 일단 여성 관객을 사로잡는 것이 중요하기에 미녀는 이번 마케팅에서 제외됐다.

오로지 꽃미남!

시리도록 창백한 꽃미남들이 무료로 커피를 나눠주는 행사를 실행했다.

【디지니의 굿즈 마케팅 VS 넷플렉스의 카페 마케팅】

이른바, 지루한 미국의 일상에서 뱀파이어와의 로맨스를 꿈꾸는 소녀들의 판타지를 이뤄주는 게 목표다. 소녀들의 꿈을 더욱 키워주면 그녀들은 자신들의 꿈을 대신 이뤄주는 영화를 보러 오게 될 거라는 것이 이번 마케팅의 핵심이었다.

이렇게 나름대로 저들의 강수에 대응하며 노려보았고 이제는 성적을 확인하는 일만이 남았다.

【판타지 시리즈 던 라이트! 흥행 돌풍!】

【뱀파이어 로맨스의 새로운 신화가 시작된다!】

【화제작 던 라이트! 오프닝 스코어 8,000만 달러!】

던 라이트의 제작비는 8,000만 달러다. 그걸 오프닝 스코어에서 벌어들였다.

심지어 아직도 반응은 폭주 중!

그런데 여기에서 예상하지 못했던 방식의 스포트라이트가 이루어졌다.

「다들 하도 원작이랑 비교하길래 찾아봤거든? 그리고··· 우와··· 진짜 기절하는 줄 알았음.」

「달라. 이건 그거 아니야. 절대로 내가 본 게 그거 아니더라.」

「역시 작품은 감독이 만드는 거임. 원작자는··· 아, 몰라!」

「연출이 원작을 초월해 버린 것이다! 이것이 초월 연출!」

「여자 마음은 여자가 아는 거라고.」

「연기력이 부족해서 어색한 배우의 연기마저도 ‘철저히 계획된 것이 아닐까?’ 이런 생각이 드는 미친 영화임.」

「하··· 진짜··· 어디 이런 뱀파이어 없을까요?」

일반적으로는 ‘원작을 정말 잘 현실에 반영했다.’라는 식의 평가가 이뤄진다. 독자가 상상하는 바를 영상미로 잘 뽑아내는 것만으로도 합격점수를 추고 치하하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던 라이트는 다른 의미로 주목받았으며 여기에서 주목받은 인물이 생기고 말았으니 그 대상은 사라 다우니였다.

【소녀의 꿈을 모두 버무린 소설과 천재 영화 제작사가 만났을 때 벌어지는 일.】

【원작을 뛰어넘은 초월 연출의 주인공. 사라 다우니를 만나다.」

【화제작 던 라이트의 프로듀서, 사라 다우니. 그녀의 인터뷰 역시 화제!】

【알버트는 남성들의 판타지를, 사라는 여성들의 로망을 완벽하게 실현하다!】

일반적으로 이렇게 큰 흥행을 하게 되면 배우들이 큰 관심을 얻게 된다. 그런데 지금은 배우보다 이 영화의 제작사에 수많은 스포트라이트가 모여들었다. 나는 이 소식을 접하자마자 사라 다우니에게 부탁했다.

[저보다는 윤 회장님의 아이디어가 대부분이었는데요? 정말 언급하지 말아요?]

[네. 저는 이미 미다스의 손으로 유명하거든요. 칭찬 몇 개 더해지는 건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그보다는 천재 프로듀서와 함께하는 편이 훨씬 좋지요.]

일부러 넉살 좋게 말하며 그녀를 천재라고 추켜세우자 사라 다우니 웃으며 받아들여 주었다. 알버트와 함께 사연으로도 이슈화되기 좋고 실제로 그녀의 능력이 부각되는 면이 나았기에 이번 화제는 예상을 웃돌만큼 화끈하게 터져버렸다.

그리고 던 라이트에 열광하는 사이, 디지니의 졸업 파티는 어디론가 사라져 이미 보이지 않게 되어버렸다. 많은 사람은 던 라이트와 졸업 파티가 경쟁을 했다는 사실조차 모르고 넘어가는 것 같다.

< 자립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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