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999년 게임 스타트-527화 (527/577)

< 자립 >

[그러면 주인공은 은하계에 새로운 황제가 되려나요?]

[황제의 자리에 오르더라도 스페이스 워즈의 은하로 한정해야겠죠.]

[글쎄요. 주인공이 황제가 되는 건 재미없지 않겠습니까? 그보다는 황제가 될 인물이 따로 있고, 그가 황제가 되는 과정에서 중요한 수행을 해내는 인물이 나을 것 같습니다.]

나 역시 마지막 의견에 동감한다. 스페이스 워즈도 진 주인공이라 불리는 인물도 본래는 밀수업자였기 때문이다. 그런데 진행되어가는 대화를 듣다가 문득 의문이 들어서 레이첼에게 물어보았다.

[이러면 슈퍼 히어로물이라기보다는 기존 스페이스 워즈와 같은 SF 장르물 스토리가 아닙니까?]

돌아오는 답변은 ‘당연한 소리를 왜?’라는 것이었다.

[그렇죠. SF 장르를 기획하는 거니까요.]

[네?]

[세계관이 합쳐진다고 하더라도 우리가 만드는 것은 스페이스 워즈입니다. 그 기본을 놓치면 이도 저도 아닌 영화가 만들어질 뿐이에요.]

[그러면 세계관을 합쳤을 때 문제가 되는 것 아닐까요?]

[문제 될 건 없어요. 어차피 이야기가 상호작용만 하면 되니까요. 굳이 꼭 같은 슈퍼히어로들끼리 상호 작용이 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해요.]

기존의 망작들을 개선할 때는 여태 내가 레이첼의 입장이었는데, 없었던 신작을 새로이 창조하는 상황이다 보니 내가 따라가기 어렵다. 하지만 이 낯설음은 기분 좋은 체험이었다.

더군다나 확신 어린 레이첼의 대답을 그녀의 말이 진리라는 생각 이외에는 다른 의문이 떠오르지 않게 된다. 이런 게 듬직한 선장 밑에 있는 선원의 심정일 것이다.

[알겠습니다. 믿고 기대하겠습니다.]

내 말에 그녀는 웃음으로 대답해 주었다. 나는 문을 닫고 나오며 속 시원한 한숨을 내쉬었다.

‘이곳은 더 이상 내가 개입할 것이 없다.’

레이첼과 그의 작가 팀이면 충분히 모두가 만족할만한 이야기를 만들어낼 것이다.

*

스페이스 워즈의 진행이 순조롭다면 그다음은 던 라이트다.

‘레이첼과는 달리 여기는 내가 반드시 개입해야만 하지.’

알버트의 아내인 사라 다우니가 프로듀싱을 맡은, 소설 원작의 판타지 로맨스.

하지만 레이첼이 ‘믿고 맡긴다’의 표상이라면, 던 라이트는 대척점의 끝에 선 작품이랄 수 있다. 그만큼 큰 성공은 이루었으나 문제 요소가 많은 작품이기 때문이다.

“여성 팬들의 판타지를 충족시켜주는 것을 빼면 전부가 다 말이 안 되거든. 상식적으로 본다면.”

이른바 할리우드의 유행을 잠깐 주도하며 어덜트 소설 원작 영화들의 붐을 일으킨 최고 흥행작이기는 했으나, 꿈속 미래의 던 라이트는 구설이 정말 많았다. 쉽게 예를 들자면 잘 지은 건축물이 아니라 아이가 상상으로 그려낸 동화 속 마녀의 집이라고 보면 된다.

뿌리가 얕고 기둥은 얇은데 정작 가지는 무성하고 그 끝에 6층짜리 오두막이 큼직하게 놓여있는 그런 상상의 세계 말이다. 그 이유와 원인은 딱 한 마디로 정의할 수 있다는 점도 재미있다.

‘로맨스물.’

뱀파이어의 고유 성격은 쏙 빠진 채 치명적인 매력 딱 한 가지의 요소만 가진 매끈한 주인공이 나온다. 이러니 뱀파이어가 뱀파이어다워야 하는 다른 모든 부분은 원작에서 표현되지 않았다. 실장님이건 의사건 변호사건 그 어떤 직종이 나와도 오직 연애만 하는 한국형 드라마처럼 말이다.

‘여주인공의 역할을 맡았던 배우의 인성 문제 같은 건 작품 외적인 것이니 논외로 치고.’

원인과 과정 없이 예쁘장한 결과물들은 ‘너님이 행복해할 것들로 준비했어~!’라면서 콕콕 박혔다. 그래서 작품 속 인물들의 행동들은 개연성과 당위성에서 정말 따로 논다.

하지만 상업적으로는 대성공한 작품이다. 그래서 나는 상품성과 작품성의 균형을 꼭 맞추고 싶다. 완벽한 균형까지가 안 되더라도 그럭저럭 말이 되는 작품이 되기를 소망한다. 그런 각오로 요구했던 바를 확인하고자 사라 다우니에게 찾아갔다.

[어때요? 원하시는 대로 장면이 잡히는 것 같으세요?]

그녀는 아직 제대로 편집이 된 것도 아니었지만, 내가 오자마자 미리 준비했던 몇몇 장면들을 보여주었다.

[강조해주신 부분이기도 하고, 원작에는 전혀 없는 액션 장면들이라서 정말 공을 많이 들였어요. 특히 그 말이 참 인상 깊기도 했죠.]

[그 말이요?]

[영화를 보고 원작을 찾아 읽은 모든 팬이 영화에 의존하게 만들라는 거요. 그런데 알고 보니 그건 너무 쉬운 일이었죠.]

[텅텅 빈 부분이 너무 많아서 개입할 요소가 많은 작품이니까요.]

우리는 어깨를 으쓱이며 웃음을 지었다. 그도 그럴 것이 던 라이트는 주인공의 위기와 뱀파이어들의 뛰어난 신체 능력을 보여주기 위해서 많은 액션 장면이 있지만, 정작 그 수많은 액션 장면의 묘사는 생략한 작품이다.

뱀파이어와 뱀파이어의 전투를 읽으면 ‘뱀파이어들이 춤을 추듯 움직인다.’로 드물게 알려주고 대부분은 이 정도의 표현조차도 없다. 소위 말하는 ‘까무룩’을 정말 자주 써먹는다. 정신을 잃었다가 깨어나 보니 상황이 끝나 있었다는 식이다.

여주인공이 기절했다가 깨어나면 멋쟁이 뱀파이어 주인공은 깔끔하게 해결해놓고 ‘우리 잠꾸러기, 지금 깼니?’만 하니까 이 얼마나 한 사람에게만 행복한 세상이 아니랴!

문제는 이런 원작으로 영화 제작자들이 시각적인 작품을 만들어야 한다는 거다.

‘그래서 꿈속 미래의 던 라이트가 그 모양이었고 이건 감독을 탓할 수 없는 일이었지. 하지만 내가 끼면 달라진다는 말씀!’

나는 남자다. 여자들의 심리를 모르고 그녀들의 판타지인 로맨스물로 대작을 만들만한 자신도, 실력도 없음을 인정한다. 그러나 그녀들이 어떤 식의 비주얼적인 판타지를 염원하는지 대충은 안다.

나는 바벨과 BC의 스피드스터들이 등장한 영화와 드라마. 더 나아가 한국 드라마인 별이 보내준 그대와 도깨비 신부까지 전부 알고 있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여자들이 바라는 액션이면 돼.’

남자들이 원하는 액션 스케일은 필요 없다. 주요 고객들이 여성인 만큼 여성이 원하는 장면만 집약하면 된다. 그리고 의외겠지만 이런 장면은 정말이지 하나도 어렵지 않다.

초반 씬인 여주인공에게 향하는 트럭을 막아서는 남주인공!

이것은 X팀의 프리퀄 시리즈에 등장하는 스피드스터의 액션 장면을 활용하면 된다. 즉, ‘1. 느려진 세계. 2. 그 속에서 유일하게 움직이는 뱀파이어. 3. 남주인공은 여주인공을 지켜낸다.’는 거면 충분하다.

길지도 않은 시간이고 약간의 비용이면 충분히 멋진 장면의 연출이 가능하다. 이유는 CG가 들어가지 않다시피 하기 때문이다. 느려진 세계에서 혼자만 빨리 움직이는 연출은 바꿔 말하면, 다른 배우들이 느릿느릿하게 연기하고 혼자만 빨리 움직이는 식으로도 연출할 수 있다.

‘원래는 이런 부분에 죄다 CG가 들어갈 줄 알고 제작비를 3,000만 달러가 아닌 8,000만 달러로 높여줬었는데.’

지금의 편집본은 CG가 전혀 들어가진 않은 장면임에도 은근히 비슷한 느낌이 나고 있었다. 내 돈처럼 아껴서 잘 써주는 사라 덕분에 여러모로 돈이 쓰여야 할 때 쓰이게 될 예정 같았다.

[여기에 CG로 덧칠하면 훨씬 더 자연스러워질 거예요.]

이런 장면을 위해서 일부러 느릿하게 움직이는 배우들은 얼마나 힘이 들었을까? 같은 엉뚱한 생각에 괜히 웃음이 났다.

[감정선 부분은 어떻게 됐습니까?]

원작을 보면 두 남자 주인공이 도대체 왜 여주인공을 좋아하는지 그 누구도 이해할 수 없다. 그냥 작가가 그리 설정했으니 그런 것으로 여겨야만 하고 책의 그 어디에도 이유는 알려주지 않는다.

‘환상적으로 예뻐서 반해버린 것조차도 아니지.’

원작에서 여주인공은 외모 콤플렉스로 계속 고통받는 묘사가 나온다. 이런 여자한테 이유 없이 반하고 헌신적인 매력 남자들이 나오니 10대 소녀들에게 사랑받는 작품인 것이다.

그래서 나는 던 라이트 영화의 개선점으로 액션성 개선과 감정선 추가 중 사라에게 후자를 정말 크게 강조했다. 기존의 팬들도 좋고 또 새로운 팬들도 유입될 수 있는 작품으로 만들어지기 위해서다.

[너무 경고해서 오히려 겁먹었었는데, 막상 보니 별일 아니었어요.]

그녀는 어려울 게 없었다며 대답했다.

[원작에서 감정선에 대한 묘사는 없지만, 결국 왜 사랑하게 되는지에 대한 소스는 명확하게 있었잖아요?]

[정신 방어 말이군요?]

[네. 그것만 잘 표현해주면 사랑하게 되는 이유의 정당성은 충분하죠. 남자 주인공은 다른 존재의 생각을 읽을 수 있으니 여기에서부터 오는 상처와 공허함을 연출해주는 거예요.]

[생각을 읽을 수 없는 여자 주인공이 일종의 피난처가 되겠습니다.]

[그녀와 함께할 때 오는 평안함은 곧 사랑스러움이 될 수 있어요. 여기에 시각적인 설득력으로 미모의 배우를 섭외하면 충분하고요.]

이래서 적재적소에 맞는 인재가 필요한 거구나 싶다.

‘문제를 아는 것이 문제 해결의 첫 요소라고 하지. 내 역할은 딱 이 정도로도 충분해.’

이렇듯 생각보다 빠르면서도 꽤 마음에 드는 연출과 함께 던 라이트는 완성이 되어갔다.

*

뉴욕 ACM 극장.

【넷플렉스의 신작 던 라이트!】

【원작의 유명세로 개봉도 전에 이미 흥행?】

영화 던 라이트의 개봉 전 사전 시사회의 포토월 앞.

사진기자들부터 방송 카메라를 든 VJ들은 물론이고, 경호원들로 북적거렸다. 몇몇 기자들은 먹이를 쫓는 하이에나마냥 혹시라도 기삿거리가 생기진 않을지 여기저기 쑤시고 다녔다.

[유명 배우가 출연하는 영화도 아닌데, 생각보다 사람들이 엄청 많네. 뭐야 이거?]

[배우는 유명하지 않아도 원작이 워낙 흥행한 거니까.]

[그래서 유난스럽게 여자 팬들이 많은 거구만?]

[저기 보라고. 몰려온 거 보이지?]

[확실히 여자들 비명은 귀를 찌른다니까.]

[똑같이 몽둥이에 털 달린 것들보다는 백배 낫지 뭐.]

동료 기자들과 낄낄 거리는 사이, 영화배우를 보고 싶어서 찾아온 인파 속에서는 유난히 꺅꺅거리는 소리가 다시금 이들의 잡담을 집어삼켰다. 이에 발맞춰 제대로 된 장비가 있는 것도 아니었지만, 기자들은 앉은 자리에서 노트북으로 재빨리 기사를 작성했다.

【넷플렉스의 신작 던 라이트 개봉!】

【던 라이트의 소녀 팬들. 극장을 점령하다.】

여기에 좋아서 어쩔쭐 몰라하는 팬을 찰칵, 찰칵 촬영해주면 짧은 시간 만에 기사가 완성된다. 이 기사가 인터넷을 통해서 뿌려지는 데까지는 불과 몇 분도 걸리지 않았다. 영화 한 편을 완성하는 데에 들어가는 시간과 돈에 비하면 기사의 양상 속도는 너무 쉽게 빨랐다.

하지만 이토록 쉽게 다룰 수 있는 기사와 달리 제법 집중해야 하는 기사도 있기 마련이다. 그 중심이랄 수 있는 인물이 지금 막 등장했다.

[잠시만요! 잠시만요!]

기자들의 눈에 윤태식 회장이 들어왔다. 자세를 달리 한 이들이 소녀팬들의 환호를 찍어누를 기세로 돌변했다.

[한 마디만 부탁드립니다!]

[회장님! 인터뷰 한 마디만 부탁드···!]

윤태식 회장에게 달려들던 기자들은 비명과 함께 경호원에게 밀려 튕겨져 나갔다. 이제는 한 나라를 대표하는 기업인에게 붙은 경호원을 기자 정도가 쉽게 뚫을 수 있을 리 만무했다.

앞서 용감하게 나선 일부를 보고 혹시라도 누군가가 독점 인터뷰를 하게 되는 건 아닐까 노심초사하며 지켜보던 경쟁자들은 바닥을 뒹구는 기자들을 보며 유쾌한 웃음을 터트렸다. 그러는 사이 카메라 플래시만 번뜩이는 사이로 윤태식 회장의 뒷모습이 저 멀리 떠나고 말았다.

[젠장! 젠장!]

볼썽사납게 나뒹군 이들이 침과 욕설을 내뱉었다.

[대답하는 게 뭐가 그리 힘들다고!]

[한 마디조차 안 해 주냐? 망할 새끼 같으니!]

[두고 봐. 영화가 재미없기만 해봐. 내가 아주 가루가 되게 씹어주겠어!]

아무리 잘 만들어진 영화라도 기자들에게 밉보였다간 그 한 방에 무너지는 경우들이 허다하다. 그런 만큼 몇몇 기자들이 윤태식 회장을 보며 이를 갈았다.

하지만 동조하는 이들은 없다시피 했다.

[그러지 마. 괜히 건드렸다가 큰일 난다.]

[뭐? 왜?]

[지금 GF에서 가지고 있는 광고가 몇 개인 줄은 알아? 너희 회사가 GF에게 연간 받는 광고비가 얼만 줄은 아냐고. GF 광고 하나만 빠져도 휘청하는 언론사 넘친다.]

[그래도 아직 GF에서 뭐만 했다 하면, 안 좋은 기사들 내는 언론도 많잖아?]

[걔들이야 와플이랑 디지니에서 직접적으로 광고비를 뿌리잖아. 우리랑 같냐?]

[······.]

[이런 말이나 하고 있는 나도 참 속상하네. 데일리 잇 같은 곳은 초반에 GF랑 친하게 지낸 덕분에 요즘 좋은 기삿거리도 우선으로 받고 그런다던데. 난 왜 그때 안 그랬던 건지······.]

[별수 있냐? 저 동양인이 저렇게 될 줄 누가 알았겠어? 죄다 무시하고 안 좋은 기사들만 냈었다고.]

[그래도 걔들은 가장 먼저 좋은 기사 내주고 그랬잖아.]

[···젠장!]

돈에 굴복할 수밖에 없는 현실의 맛은 정말 씁쓸했다.

이맛살을 찌푸렸던 기자는 머리를 신경질적으로 긁고는 십자가 액세서리를 구매했다.

[내가 이번 주부터 교회 나간다! 주님께서 들어주실 거야!]

진심으로 간절하게 기도 문구를 정했다.

망해라! 윤태식!

망해라! 넷플렉스!

외치는 구호와 함께 그의 카메라 한쪽에서 십자가가 흔들거렸다.

< 자립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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