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견주기 >
당연히 회사 전체가 싱글벙글했다.
[회장님. 요즘 인터넷이 매우 뜨겁습니다. 에이전트 오브 가디언이라는 새로운 스파이 액션 시리즈가 탄생한 것 같다면서 말이죠.]
스파이 액션 시리즈는 잘 나가는 영화사의 필수 시리즈다. 009시리즈, 제임스 본 시리즈, 임파서블 시리즈 등 제대로 만들기만 하면 쭉 흥행해온 역사가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내 관심사는 달랐다.
[스파이 액션은 이번 시리즈로 노하우를 쌓은 뒤에 제대로 준비합시다. 지금은 그런 것보단 바벨 시네마틱 유니버스를 완성하는 것에 더 집중해주세요.]
[그래도 제대로 된 작품이 나왔는데 그렇게만 보는 것은 아깝지 않을까요?]
[지금의 배우들로 시리즈를 얼마나 만들 수 있을 것 같습니까?]
늙지 않는다는 설정을 가진 히어로물이라 해도 영화화되면 그 캐릭터는 배우의 연령과 생명력을 공유하게 된다. 초인물이 이럴진대 스파이물은 또 오죽하겠는가.
‘이렇게 빵 터지는 것까지는 상정하지 않고 섭외한 배우들이란 말이지.’
괜한 욕심을 부리다가는 모조리 놓쳐버리는 실수를 범하게 된다. 그러니 이들로 시리즈물을 만들기보다는 세계관을 확고히 하는 게 이득이다.
[시간도 많고 캐릭터도 많습니다. 그때 가서 만들어도 안 늦어요.]
[네, 회장님.]
얻어걸린 스파이물보다는 본격적으로 디지니와 승부할 영화를 쏟아내는 방향을 회의할 차례다.
[이제부터 다들 바빠지셔야 할 겁니다. 그동안 판권 사둔 것들을 쏟아내어 영화를 많이 만들어 봅시다.]
[그렇다면 저희도 제대로 투자자 모집해서 영화를 제작하는 겁니까?]
지금까지는 투자를 받지 않고 온전히 우리의 자금만으로 영화를 제작해 왔다. 이럴 수 있었던 이유는 기껏해야 1년~2년에 영화를 한 편씩 만들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제부터는 다수의 영화를 제작할 것이고 현재 넷플렉스의 운용자금으로는 불가능했다.
상식적으로는 말이다.
[그럴 생각은 없습니다.]
[네?]
‘미래를 알기 때문에 할 수 있는 일이지. 하나도 빠지지 않고 오직 성공만 하는 도미노를 시작할 거거든.’
현재 우리가 보유한 판권은 로키드 필름의 인디아나 잡스와 스페이스 워즈, 바벨의 슈퍼히어로, 던 라이트, 배틀 게임, 슈퍼내추럴 액티비티, 블루 워터, 쏘우리스트다.
[일단 슈퍼내추럴 액티비티부터 개봉할 준비를 하십시오.]
슈퍼내추럴 액티비티는 페이크 다큐멘터리로 만들어진 공포 영화다. 제작비 15,000달러로 북미 2억 달러의 흥행 수익을 올리며 역대 영화 흥행 수익률 1위로 기네스에 오르게 될 미친 영화다.
즉, 이 영화 하나면 어느 정도의 자금이 생긴다.
[그리고 우선 던 라이트를 제작합니다.]
던 라이트는 미국에서 엄청난 흥행 돌풍을 일으킨 뱀파이어 로맨스 소설이다.
3,700만 달러로 제작해서 약 4억 달러의 흥행 수익을 올리게 될 영화인데 이건 중소 영화사에서 만들어서 그랬을 뿐이니 우리는 더 써서 볼만하게 만들 요량이다.
‘뱀파이어랑 늑대인간이 호쾌하게 싸우는 줄 알고 예매했다가 진짜 대차게 낚였었지. 홍보씬에서는 그럴듯하게 싸우던데 막상 보니 그런 건 개뿔도 없었어.’
입술 꽉 깨물고 여자들의 감성 포인트가 얼마만큼 남자들과 다른지 뼈저리게 느낄 수 있는 시간이었다. 물론, 이런 내 기분을 반영해서 박진감 넘치는 액션물로 만들 계획은 전혀 없었다. 로맨스 원작을 쥐꼬리만큼도 모르고 예매해버린 내가 실수했을 뿐이니 말이다.
중요한 건 우리가 선보이는 모든 작품이 차곡차곡 성공의 빌드업을 확실하게 쌓아나간다는 거였다.
[던 라이트, 배틀 게임. 이 두 영화의 견적은 다른 바벨의 영화 제작비의 절반도 안 되었다는 것을 기억하실 겁니다.]
가성비가 아주 좋다는 소리!
[회장님 말씀은 일단 저렴하게 만들 수 있는 작품으로 수를 늘리고 그렇게 들어온 수익으로 영화 제작을 늘린다는 거군요?]
[그렇습니다.]
[중간에 하나라도 예상한 만큼의 수익을 보지 못한다면 도미노처럼 무너질 수 있겠지만···]
회의에 참석한 이들이 서로 시선을 교환하고는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내 목소리에 확신이 있다. 이럴 때는 무조건 성공한다는 생각을 하고 있는 것이다.
[알겠습니다.]
[바로 진행하겠습니다.]
*
한편, 디지니의 회의실에서는 고요함이 감돌고 있었다. 패배하고 돌아온 장수처럼 차마 시선을 마주치지 못하는 임원들을 보며 에이든 회장이 먼저 입을 열었다.
[다들 고개 좀 들지. 죽을죄라도 지었다고 생각하는 건가?]
넷플렉스에게 크게 한 방 먹은 디지니 픽쳐스의 임원들은 그제야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다행스럽게도 에이든의 목소리에는 별다른 분노가 담겨 있지 않았던 것이다. 이는 마음 한구석에 의문문이 생기는 부분이기도 했다.
최근 로키드 필름을 빼앗긴 에이든이 얼마나 분노했는지 디지니에는 모르는 이가 없다. 마케팅 역시 대대적으로 시행하지 않았던가. 결과적으로는 넷플렉스의 수법들이 기발하면서도 한 발씩 앞서는 바람에 기대만큼의 성과를 이루지 못하게 되었지만 말이다.
임원들의 어깨를 짓누르는 요인은 두 개였다.
에이든 회장의 분노를 감수해야 한다는 것과 총력전을 벌였음에도 패배했다는 자신들의 감정이다. 그런데 노발대발이 아니라 에이든 회장은 더할 나위 없이 차분한 모습이었다.
[미흡함은 있었으나 방심하지는 않았어. 큰 실수 역시 없었지. 그저 놈들이 예상을 웃돌만큼 잘했을 뿐이다.]
임원들은 곧 그 이유를 들을 수 있었다.
[결과는 모두가 잘 아는 바와 같다. 바르샤의 왕자는 넷플렉스에게 확실하게 패배했지. 그런데 그게 이 정도로 고개를 숙이고 낙담할 일이라고 보나? 하나만 묻지. 바르샤의 왕자가 졌다고 우리 디지니가 넷플렉스에게 진 건가?]
당장 직접 맞붙은 경쟁의 영화가 패배했다는 것은 속이 쓰리다. 꽤 아픈 곳을 찔린 느낌이었다. 그러나 과연 디지니에게 치명적인 공격이었을까?
[그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그래. 맞아.]
디지니는 지금까지 4편의 영화를 개봉했다.
3월에는 거울 나라의 앨리스를 개봉해서 전 세계 10억 2,546만 달러라는 엄청난 수익을 기록했다.
10억 달러를 넘긴 영화!
이는 일반적으로 1년에 한 작품이나마 나올까 말까 한 엄청난 대성공이다.
그런데 여기서 그친 게 아니다. 올해에는 플레이씽 스토리3까지도 10억 달러를 돌파하면서 한 해에 두 작품을 10억 달러 클럽에 올리는 영화계 최초의 업적을 이루어냈다.
윤태식이라는 인물에 대한 반감을 덜어내고 사실만으로 보면 답은 쉽게 나온다. 현재 상황에서 고개를 숙이고 있는 것은 말이 안 되는 것이다.
[에이전트 오브 가디언은 확실히 대단했지. 그런데 이토록 대단한 영화가 등장했음에도 전 세계 영화 점유율은 우리가 압도적이야. 이런 상황에 왜 다들 기뻐하지 않는 거지? 한 번의 실패에 계속 연연할 텐가? 다들 계속 그렇게 고개를 숙이고 있는 게 맞을 것 같나?]
자리에 앉은 임원진들에게 그야말로 희망의 동아줄과 같은 목소리였다. 에이든의 말에 이끌리듯 임원진들 전부가 고개를 들고 어깨를 폈다. 임원들을 짓누르던 걱정거리 두 가지가 말끔히 사라졌다.
[고작 하나 패배했을 뿐이야. 하지만 지금처럼 그렇게 고개만 숙이고 있다면 앞으로도 계속 패배하게 되겠지. 그걸 원하는 건가?]
[아닙니다!]
[좋아. 이제 제대로 회의를 시작해보자. 윤을 필두로 한 넷플렉스가 호락호락한 놈들이 아니라는 사실을 우리는 실감했어. 그러니 어떻게 해야 저들의 추격을 누를 수 있을지 논의해 보자고.]
날카로운 창을 든 후발주자를 물리치고 일인자의 자리를 굳건히 지키기 위해 그들이 합심했다.
[넷플렉스가 가진 가장 한계점은 경험이 부족하다는 것과 영화에 대한 인력이 부족하다는 것입니다. 이들은 본래 직접 영화를 제작하던 회사가 아니었으니까요. 반면에 이들의 약점은 우리의 강점이기도 합니다.]
디지니와 비교한다면 관련 경험이 바닥이나 마찬가지라는 의견이었다.
그러나 설득력 있는 이 말을 듣고 에이든은 고개를 저었다.
[그 부족한 경험의 결과물들을 모두가 보았을 테지. 넷플렉스는 연속으로 성공하는 영화를 만들었어. 그들의 경험 부족을 이야기하는 건 의미가 없다.]
그러자 이번에는 또 다른 임원이 입을 열었다.
[넷플렉스가 엄청난 매출을 올리긴 했지만, 이는 엄청난 출혈 경쟁을 통해 올린 매출입니다. 그들은 여전히 대량의 영화를 찍어 낼 여력을 갖추지 못했을 겁니다.]
[그래서?]
[많은 영화를 찍어내지 못한다면 일단은 성공하고 있는 프랜차이즈에 집중할 가능성이 높습니다. 그리고 아마도 성공해낼 겁니다.]
[확신하나?]
[네, 확신합니다. 과장되었기는 하지만 불패의 사업가라고 불리는 윤의 전적과 현재의 모습이 이를 뒷받침 해 줍니다.]
그는 에이든 회장이 먼저 인정했던 만큼 적을 쓰러뜨리기 위해 저들의 장점을 거론하는 데 서슴지 않았다.
[저는 에이전트 오브 가디언을 파악하기 위해서 영화를 세 번 보았습니다. 그리고 이 영화가 디지니에 주는 가장 큰 위협은 영화의 연결성에 있다고 판단했습니다.]
[가디언이라는 단체와 리벤져스의 연결성 말이군.]
[예, 회장님. 영화는 그 자체만으로도 굉장히 재미있었지만, 가디언을 통해 리벤져스가 어떻게 구상되었는지를 보여주었고, 특히나 그 마지막 쿠키 영상에 등장한 페르의 모습은 모든 팬의 기대감을 끌어내기에 충분했습니다.]
가장 큰 문제는 그런 영화가 9억 달러를 넘기는 매출을 올렸다는 점이기도 했다.
[특별한 실수가 나오지 않는 한, 프랜차이즈로의 완벽한 준비를 끝마쳤다는 말은 잘 알았다. 그렇다면 이에 따른 대책도 생각했겠지?]
[물론입니다. 넷플렉스가 성공 이후 무엇을 노릴지를 생각한다면, 그들에게 크게 한 방 먹일 방법이 있습니다.]
잠시 말을 끊었던 임원이 강직한 어조로 말했다.
[20세기 울프입니다.]
[20세기 울프?]
[네. 외람된 물음일 수 있으나 현재 20세기 울프에서 가장 유명한 영화가 무엇인지 아십니까?]
보통 할리우드의 배급사들 중 최상위 6개 배급사를 6대 메이저 배급사라 부른다. 하지만, 디지니 정도 되면 그 6개 배급사 전부를 경쟁자로 생각하지 않는다. 이들은 딱 두 개의 배급사만 경쟁자로 쳐준다.
위너와 울프였다.
그만큼 울프는 거대한 배급사이고 당연히 유명한 영화도 많았다.
[아비터?]
[죄송합니다. 확실히 현시점에서는 아비터가 가장 유명하긴 하군요.]
아무래도 역대 박스오피스 1위로 올해 초까지 극장을 지배하고 있었던 영화니까.
[하지만 프랜차이즈에 성공한 영화로는 X팀이라 단언하고 싶습니다.]
[X팀이라면··· 오호라.]
에이든 회장이 옅은 웃음을 짓자 임원 역시 같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맞습니다. 현재 바벨 코믹스에서 가장 많은 인기를 누리고 있는 코믹스를 기반으로 한 영화입니다. 이 판권은 울프가 가지고 있고 바벨은 성장 후에 분명히 그것을 노릴 겁니다. 영화 캐릭터는 결국 수명을 갖기 때문이지요.]
캐릭터에는 수명이 없지만, 배우에게는 해당 캐릭터를 연기할 수 있는 수명이 존재한다는 점을 그가 짚었다.
라이언 맨은 물론이거니와 가디언도, 나중에 나오게 될 페르도 배우 교체의 시기가 분명히 오게 될 것이다.
[만화라면 모를까, 영화의 팬들은 배우와 히어로를 동일시할 겁니다. 같은 캐릭터에 다른 배우로 이어가는 건 불가능하죠. 즉, 그들은 새로운 캐릭터를 찾을 것이고 가장 매력적인 캐릭터가 남의 집에 있는 상황입니다. 우리가 그것을 차지한다면!]
임원이 주먹으로 낚아 채는 제스쳐를 취했다.
[제대로 그들의 미래를 공략할 수 있게 되는 겁니다.]
[현재를 살면서 미래를 공략한다. 훌륭하군. 그런데 X팀은 울프에서 가장 유명한 영화야. 그런데 X팀의 판권을 우리에게 넘길 것 같나?]
[절대 안 넘길 겁니다.]
[절대로 넘기지 않을 거라면 지금의 말이 무슨 의미가 있지?]
[판권이 아니라 울프 전체를 인수해야 합니다.]
[뭐?]
[울프 전체를?]
에이든 회장만이 아니라 회의실의 다른 임원들도 자신도 모르게 되뇌었다. 거대한 규모도 그렇거니와 당장 올해 아비터가 제대로 터지면서 한창 자신감이 넘치는 회사가 울프였다. 이런 회사를 인수하려면 도대체 얼마가 필요하겠는가.
[현재 울프의 부채를 포함한 인수 규모는 600억 달러 수준이 될 것으로 판단됩니다.]
로키드 필름 같은 회사 10개는 인수할 수준의 규모였다.
[넷플렉스는 당장 자신들의 오리지널 콘텐츠가 부족하기 때문에 다른 영화사의 작품들을 받아서 스트리밍하고 있습니다. 이는 우리가 울프를 인수하고 디지니와 울프 두 배급사의 영화 계약을 끊어버린다면 그들을 지지하는 시청자층을 확실하게 도려낸다는 뜻입니다.]
600억 달러.
막대한 돈이다. 그러나 확실한 미래의 승자가 되기 위한 비용이라고 본다면 하지 못할 투자 역시 아니었다.
[우리가 직접 넷플렉스와 같은 인터넷 채널을 만드는 것도 나쁘지 않겠군.]
울프와 디지니의 연합이라면 할리우드의 나머지 배급사 전부와도 승부해볼 만한 규모다. 그런 규모의 회사라면 자신들의 콘텐츠만으로도 충분히 매력적인 채널이 만들어질 것이다.
[마음에 들어. 진행하도록.]
[예!]
그렇게 잠재적이면서도 위협적인 경쟁자를 자각한 디즈니의 움직임이 이루어졌다.
< 견주기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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