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견주기 >
168. 견주기
천둥 군주 페르의 캐스팅을 시작했다.
[주연은 이 배우들로 거의 좁혀지고 있습니다.]
제대로 된 영화라고는 아직 라이언 맨 하나 밖에는 없는 회사였지만, 그 라이언 맨이 세계적인 흥행을 한 작품이다. 덕분에 영화에 출연하고 싶어 하는 배우들은 넘치고 넘쳤다.
‘익숙한 얼굴들이네.’
케인 파이기가 가져온 자료에는 내 기억 속 원작의 배우들이 모두 있었다. 개인적인 생각이지만, 나는 배우 이전에 감독과 시나리오 자체의 힘을 더 믿는다. 저들이 연기의 기본 이상만 잘해준다면 한층 업그레이드된 작품의 힘으로 능히 뛰어난 결과물이 나오리라 확신한다.
‘연기자는 죄가 없지.’
작품이 구린 건 절대로 배우의 탓이 아니다. 정말로 연기력이 시궁창인 배우가 나온다면 그런 얼간이를 쓴 놈이 욕을 먹어야 한다.
[좋군요. 영화 촬영은 차질 없이 잘 진행될 거라 믿습니다.]
[네, 회장님. 그 부분은 전혀 걱정하실 필요 없으실 겁니다. 특히, 감독들 사이에서 우리 넷플렉스는 최고의 제작사라고 말이 많고 사기도 고취되어 있습니다.]
[그래요? 별다른 이유라도 있답니까?]
[예산을 저희처럼 깔끔하게 주는 제작사가 없거든요. 반면에 넷플렉스는 미리 2억 달러를 손에 쥐여주고 시작하니 감독이 생각했던 그대로 영화를 제작해도 문제가 생기지 않습니다. 이러니 다들 꿈의 제작사라고들 하죠.]
[그거 좋은 소식이네요. 그럼 기대하도록 하겠습니다.]
[믿고 맡겨주신 것에 맞는 결과물을 보여드리도록 하겠습니다.]]
통상적으로 영화를 제작할 때는 미리 예산을 정해둔다. 그러나 그만한 투자금을 먼저 확보하지는 못하는 경우가 대다수다. 그렇기에 일단 시나리오와 감독을 정한 후, 주연을 뽑고 그다음에 투자자들을 끌어들여서 영화 제작의 진짜 예산을 뽑는 방식을 사용한다.
즉, 처음에 2억 달러짜리 영화라고 예산을 뽑는다고 그 영화가 2억 달러에 만들어진다는 보장이 없는 것이다. 후반부에 가서는 울며 겨자 먹기로 1억 5천만 달러에 겨우겨우 촬영을 해야 하는 경우도 다반사다.
‘처음에는 의외였지. 이런 건 한국에서나 벌어지고 할리우드에서는 볼 수 없을 줄 알았거든.’
비교적 나은 부분이 있고 선진화되었을 뿐, 하나부터 열까지 모든 요소가 완벽할 수는 없는 법이다.
여기까지가 페르의 촬영 전 마지막 점검에 대한 안건이었다. 아직은 시일이 남았기에 이번에는 당면한 작품의 홍보와 관련하여 케인 파이기에게 화제를 꺼냈다.
[에이전트 오브 가디언은 상황이 어떻습니까? CG 작업에 들어갔다는 이야기까지는 들었었는데?]
[CG 작업은 깔끔하게 진행되고 있습니다. 이제 마무리 단계이고 일정에 차질은 없을 것으로 사료됩니다.]
[다음 라인업도 충분하게 되고 있는 거겠지요?]
[네, 회장님.]
[그렇다면 개봉은 언제쯤으로 생각하고 있습니까?]
[아직 확정 짓지 못했습니다. 아무래도 이번 디지니의 개봉작들을 조금 더 파악한 후에 타이밍을 노려야 할 듯해서요.]
단순히 흥행여부 때문에 이런 대화를 나누는 게 아니었다. 지난 PC논쟁을 시작으로 GF는 디지니와 대결 구도가 된 상황이다. 한편, 에이전트 오브 가디언은 디지니와 대결 구도가 만들어지기 전에 촬영이 이미 끝난 영화였다.
‘문제는 대중들이 그런 시간 차이는 신경 쓰지 않는다는 거지.’
대결 구도가 만들어지고 처음으로 제작되는 영화가 페르지만, 대중들은 자신들이 알게 된 시점부터 디지니와 GF를 양쪽 저울에 올려두고 비교할 것이다. 즉, 지금부터의 행보는 모두가 대결이며 기삿감이자 기업의 이미지가 된다.
여기서 피해간다면 덤빌 배짱도 없는 주제에 큰소리만 친 회사로 이미지가 각인 될 수도 있는 문제다.
[파악한 후에 디지니를 피해서 개봉을 할 예정이다, 이겁니까?]
[아무래도 당장 디지니라는 이름이 지닌 무게와 비교하면 상황에 따라 선택해야 한다고 판단했습니다.]
[지금 분위기가 그렇게 했다가는 비웃음만 살 수도 있다는 건 알고 있으십니까?]
[네, 회장님. 하지만 리스크를 참작하면 이게 더 안전합니다.]
냉정하게 현재 상황을 평가하자면, 스페이스 워즈와 인디아나 잡스를 가지고 있는 로키드 필름을 우리가 인수한 상태이기는 했다. 하지만 디지니는 그런 게 없어도 이미 2013년까지의 라인업을 확고하게 구축하고 있었다.
그에 비해 GF는 이제 고작 리벤져스의 솔로 무비 몇 개만 정해두고 당장 CG 작업을 하고 있는 에이전트 오브 가디언조차도 개봉일을 제대로 잡지 못한 상황이다.
‘이런 걸 보면 아직 영화 분야에서는 디지니의 탑이 견고하다는 점을 자꾸만 실감하게 된단 말이야.’
미디어 업계의 신흥 세력으로 급부상하고 있는 우리였지만, 오랜 세월 쌓아온 디지니의 아성은 쉽사리 넘어서기 어렵다. 물론, 짧은 시간에 저들에게 칼이라도 겨눠볼 만큼 성장한 GF를 세계는 경이적으로 쳐다보고 있긴 하지만 말이다.
그래도 나한테는 아쉽다.
미래의 정보라는 강력한 무기를 쥐고 있는데도 넘어서지 못한다면 그게 오히려 부끄러운 일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이건 단순한 자존심 싸움이 아니다. 기술의 발달로 세계화가 보편적으로 이루어지고 있기에 시장을 석권하지 못하면 그냥 이인자가 되는 게 아니라 잡아먹혀 버리게 된다.
그리고 나는 승리하고 싶었다.
[동양의 격언으로 적을 알고 나를 알면 위태롭지 않다고 했습니다. 힘에 힘으로 맞서서 불필요한 손해를 보기보다는 디지니의 강점을 피하고 약점을 공략하는 편이 좋다고 봅니다.]
‘맞는 말이지.’
이길 수 있는 상황을 만들어 놓고 싸워야 한다. 이건 참으로 옳다. 그러나 전문가들이 심사숙고하여 내리는 GF가 이길 수 있는 시기는 과연 언제일까?
우리의 전문 인력이 합리적으로 판단하는 만큼, 저쪽의 전문가들도 자신들의 기업을 위해 최적의 상황을 고려하고 냉철하게 판단해서 움직인다. 그러니 이성적인 사람들끼리의 수 싸움에서는 서로의 역량에 걸맞은 합리적인 결과물만 나오게 된다.
‘아주 현명한 탁상공론.’
디지니에서 준비한 2010년의 라인업은 그야말로 무시무시하다. 디지니의 간판이라 할 수 있는 공주 시리즈 중 3D 애니메이션으로 만들어지는 첫 공주인 라푼젤, 전 세계 10억 달러 이상의 수입을 거두어들이는 영화 플레이씽 스토리 3, 그리고 거울 나라의 앨리스도 있다.
한 해에 10억 달러 돌파 영화를 두 작품이나 내놓는다는 것부터 디지니의 위상을 알려준다.
‘그런데 그것뿐이거든. 디지니에서 준비한 영화라고 해서 그것들이 무조건 다 성공만 하는 게 아니야.’
정밀한 분석을 통해 결과물을 내놓아도 대중의 사랑을 받을지 외면을 받을지는 100% 장담할 수 없다. 그렇기에 전문가들이 내놓은 기대치와 결괏값과는 다른 뜻밖의 작품도 있었다.
미래를 알기에 공략할 수 있는 타이밍이자 확실한 타깃!
그것들은 대작으로 사람들이 한창 기대하고 있는 영화, 바르샤의 왕자와 멀린의 제자였다.
[이건 케인 파이기 사장보다는 라드 의장과 이야기해야 할 부분 같군요. 자세한 내용은 주요 인원들과 함께 합시다.]
나는 인터폰을 통해 최종인 회장과 라드 의장을 호출했다.
갑작스럽게 내 사무실로 불려온 두 사람은 먼저 들어와 있는 케인 파이기에게 지금 무슨 상황인지 알려달라는 눈짓을 보냈다. 나는 이들에게 작게 고개를 끄덕여 보이고는 말했다.
[그렇게 당황해서 서로 눈치 보고 그럴 필요 없습니다. 내년 영화 스케줄에 관해서 이야기 좀 하려고 하는 거니까.]
[영화 스케줄이요?]
[케인 파이기 사장과 이야기를 좀 했는데 현재 상황이 이러하더군요.]
간략하게 지금까지 둘의 대화 내용을 설명해주었다. 두 사람은 저마다 고민하다가 최종인 회장이 먼저 되물었다.
[지금 이렇게 저희를 부르셨다면, 회장님께서는 이미 결정하신 바가 있으시다는 의미 같습니다. 그리고 짐작하건대 회장님의 결정은 디지니와 정면승부를 하자는 것이 아닐지요?]
역시 한국에서부터 잘 알고 지냈던 만큼 그는 나를 이해하고 있었다. 나는 ‘그렇다’고 수긍하며 대답했다.
[이미 잘 알고 있겠지만, 기업의 이미지라는 것은 생각보다 꽤 많은 부분을 차지합니다. 그런데 지금 우리가 피하는 이미지로 남게 된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또한, 그런 회사의 주력 영화가 슈퍼 히어로 장르라면 어떨 것 같습니까?]
[하지만, 자칫 패배의 이미지로 귀결될 수도 있습니다. 누가 뭐래도 디지니가 미디어 분야에서 가진 힘은 강력하니까요.]
[그 점은 저도 충분히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에겐 디지니가 가지지 못한 것들이 있지요.]
[디지니가 가지지 못한 것이요? 그게 뭐죠?]
[돈입니다.]
[네?]
저들이 황당해하는 건 당연한 반응이다.
기업의 전체 규모나 자본으로 보자면 아직 디지니는 GF보다 더 위에 있다. 심지어 자체 자금으로 영화를 만드는 GF와 달리 디지니는 수많은 투자자의 투자를 받아서 영화를 제작한다. 그러니 훨씬 더 큰 규모의 자금을 운용할 수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우리의 강점이자 저들에게 없는 게 돈이라고 한 데는 다 이유가 있다.
[투자자들은 영화의 제작비가 올라가는 것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그게 자기 돈이든 남의 돈이든 제작비 자체가 올라가는 것을 싫어하죠.]
1,000만 원자리 영화에 100만 원을 투자했다면 10%라는 지분을 가지게 된다. 그런데 후에 이 영화의 제작비가 2,000만 원으로 늘어난다면 100만 원을 투자한 사람은 투자금은 그대로인데 지분은 반 토막이 난다.
이래서 싫어한다. 훗날 이익분배에서 분배도 늦어질뿐더러 이득도 줄어들게 되기 때문이다. 까. 그렇기에 디지니는 우리만큼 홍보비를 마음대로 늘릴 수 없다.
이것이 우리와 디지니의 차이다.
이상의 설명을 해주자 저들의 표정에서 당혹감이 사라졌다.
[회장님의 말씀은 이해했습니다. 그렇다면 홍보비 예산을 얼마나 추가하는 것이 좋겠습니까?]
[얼마가 됐든 상관없습니다. 필요한 만큼 추가하겠습니다.]
이미 결정을 내린 만큼 내 목소리와 얼굴 표정에는 확신이 담겨 있었고, 그것을 본 세 사람은 머리가 아프다는 표정을 내게서 숨기지 않았다.
[회장님. 페르의 예산을 5,000만 달러나 올린 지 며칠 지나지도 않았습니다. 이미 넷플렉스의 주주들이 소식을 듣고 걱정을 많이 하고 있어요.]
[자기들이 걱정을 하면 뭐 어쩔 겁니까? 기껏해야 주식을 팔기나 하겠지.]
이 역시 디지니와 넷플렉스의 구조적인 차이점이다.그들과 우리는 절대 같은 수준의 돈을 사용할 수 없다. 우리 회사들에 대한 나의 지배력은 공고함 그 자체라서 걱정거리라고는 주주들의 실망으로 주가가 떨어지는 부분밖에 없다.
그러나 디지니는 아니다.
GF는 영화가 흥행에서 실패한다면 주가가 떨어지는 것으로 끝이지만, 디지니는 CEO가 잘릴 수도 있다.
이건 완전히 다른 문제다.
‘떨어진 주가는 어차피 내가 다시 사면되는 거고. 또 올리면 되거든.’
이미 예전부터 내 독단적인 선택에 실망한 주주들이 툭하면 주식을 팔아댔고, 그렇게 시장에 나온 주식들을 전부 내가 수거함으로 지금도 상당히 많은 이득을 본 상태다.
또 버려주면 나야 고마울 따름이다.
[왜요? 우리 영화에 자신 없으십니까?]
[자신이야 있습니다만, 세상일이라는 게 계획대로 이루어지는 게 아니니까요. 일말의 불안감은 있었습니다. 그런데, 회장님. 영화 흥행에 실패해도 정말 상관없으신 겁니까?]
나는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내가 상관없는 포인트는 그 부분이 아니라는 의미였다.
[돈은 못 벌어도 좋습니다. 홍보비를 무제한으로 사용해봐야 얼마나 쓰겠습니까? 1억 달러? 2억 달러? 그 정도야 상관없지요.]
우리 돈으로 환산하면 약 2,300억 원.
크다면 큰돈이고 어지간한 중견기업의 규모는 된다. 그러나 GF는 이제 저 정도 돈을 허공에 뿌린다고 흉터가 생길 그런 그룹의 수준은 일찌감치 넘어섰다.
[돈을 아무렇게나 막 날려도 된다는 말이 아닙니다. 얼마를 써도 좋지만, 디지니는 이겨야 한다는 이야기입니다.]
[이해했습니다. 그럼 일단 디지니의 라인업을 확실하게 알아봐야겠군요.]
그러자 잠자코 듣고만 있던 라드 의장이 말했다.
[회장님의 의도가 그러하시다면 디지니와 꾸준히 정면승부를 해보겠다고 홍보하며 이슈를 만들어보는 건 어떨까요?]
[글쎄요. 우리가 먼저 공표하면 왕좌에 앉은 드래곤에게 도전장을 내미는 시골 기사 꼴밖에 더 됩니까?]
당당하게 맞대결을 벌이는 대등한 이미지가 폼 나지 않느냐는 말이었는데, 저들의 반응은 의외였다. 다들 ‘그게 뭐가 문제죠?’라는 표정이었다.
[우리가 지금 그렇게 보일 레벨은 아니라고 생각하지 않습니까?]
[물론, 그렇게 생각합니다. 하지만 세간에 보이는 이미지는 회장님의 생각과 여러모로 다를 겁니다. 누가 뭐래도 디지니는 무려 100년을 이어온 기업이지만, GF는 고작해야 10년이거든요. 이름이 가진 무게가 다릅니다.]
‘어라? 그러네?’
듣고 보니 일리가 있었다. 아울러 덕분에 알 수 있었다. 내가 ‘쫄지 마!’라면서 너무 우리의 자존심만 이야기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말이다.
돈이 많아졌고, 규모가 커지면서 자존감이 높아지다 보니 다른 회사들을 너무 아래로만 보고 생각하는 버릇이 들은 것 같다. 이 부분은 내가 조심하고 고쳐야 할 부분이었다.
[알겠습니다. 그 부분은 두 분이 계획을 세워주시고 일단은 디지니의 라인업을 확인해서 가져다주세요. 파이기 사장은 페르의 진행을 꾸준히 보고해 주시고요.]
[알겠습니다.]
그렇게 페르의 제작과 동시에 본격적으로 디지니와의 마케팅 승부에 돌입했다.
< 견주기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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