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999년 게임 스타트-519화 (519/577)

< 센터 >

그러니 오답 노트를 보여주고 정답은 능력 있는 저들이 찾아내도록 이해시키는 중이다.

[우리의 목적은 단독 영화가 아닙니다. 팀업 무비인 리벤져스가 진짜 목적이지요.]

준비해온 비장의 무기인 졸라맨 스케치북을 꺼냈다.

‘부족한 말빨을 대신하는 내 애장품이지.’

새하얀 도화지에는 매직으로 직접 그린 졸라맨 들이 그려져 있다. 지금까지 게임과 애니 등 다양한 미디어 분야에서 함께 작업을 해오다 보니 이것으로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 구성을 사람들에게 설명하는 스킬은 나름 경지에 올랐다고 자부한다.

만화가 수준은 발끝에도 미치지 못하지만, 예능 프로그램에서 간혹 퀴즈코너로 나오는 짧은 단어 설명하기 같은 건 자신감을 보일 수 있을 정도였다.

‘이런 건 예능 프로그램인 러닝맨에서 퀴즈나 미션용으로 자주 봤었는데. 스피드 퀴즈도 그렇고. 그러고 보니 지금은 출연진들이 창창할 때라서 이름표 떼기도 잘 나올 때잖아. 롱런할 방송이니까 기왕 테마파크 만드는 김에 세트장도 맞춰줄까? 왕년의 팬으로서 살짝 출연도 하는 건··· 회장님이라서 민폐겠지.’

객쩍은 생각을 하다가 내심 웃어버렸다. 능력자 콘셉트를 가진 출연진과 실제로 초능력을 갖고 있는 내가 겨뤄보는 것도 재밌겠다 싶었서다.

물론, 이건 나만 재밌을 뿐이지 프로그램은 물론이고 시청자들에게도 불쾌감만을 주는 유치한 도전에 불과했다. 지면 기분 나쁘고 이기면 접대받았다는 소리가 나올뿐더러 괜히 잘 잡힌 능력자 캐릭터에도 흠집만 낼 뿐이라서다.

그러니 굳이 옛날 팬으로서의 희망을 실현하고 싶다면, 그룹 회장실에 가서 뭔가를 가져오게 하는 방식의 미션을 방송에 추가하는 편이 나을 것이다. 두둑한 금일봉을 하사한다거나 말이다.

‘생각난 김에 출연진들 건강도 잘 챙겨서 텀을 두고 뛰어다니게 해야겠어. 이름표를 안 떼니까 영 재미가 없어지더라고. 작가들한테 이쪽도 예산 신경 쓰지 말고 마음껏 테마를 만들어보라고 밀어주면 더 좋겠지. 휴가 때 게임 말고 이쪽도 해볼 걸 그랬나? 월요 커플은···’

그때였다.

[회장님?]

[괜찮으십니까?]

완전히 생각이 삼천포로 빠져버렸던 나를 현실로 붙잡는 목소리가 들렸다. 졸라맨 스케치북 하나를 가지고 별의별 망상에 빠졌었구나, 반성하며 헛기침했다. 그리고 마치 중요한 아이디어를 떠올리던 중이었던 것처럼 진지한 얼굴로 말했다.

[제가 이번 영화에서 중요하게 생각하는 핵심 이벤트들이 있습니다. 이 이벤트를 두 시간 안에 넣어야 하고 길어도 두 시간 반을 넘기면 안 된다고 생각하고 있지요.]

영화가 길어지면, 그만큼 하루에 상영할 수 있는 횟수가 줄어든다. 그리고 상영 횟수가 줄어든다는 것은 스크린이 줄어드는 것과 같으니 극장도, 영화사도 영화가 길어지는 걸 좋아하지 않는다.

[또한, 블록버스터다운 액션 등의 돈 좀 썼구나! 하는 장면들도 넣어야 하죠. 즉, 우리는 해야 할 게 아주 많습니다. 많은 만큼 관객들이 크게 관심 없을 내용을 다 도려낼 겁니다. 또한, 각각의 배경과 이벤트에 집중하여 캐릭터를 완성하는 겁니다.]

모두 뛰어나다면 더할 나위 없겠지만, 중요하고 그렇지 않은 것은 어디에나 있기 마련이다. 장르 영화를 거론하자면 가장 중 중요한 것은 캐릭터다. 액션이나 서사 모두 캐릭터의 개성을 보여주기 위해 헌신해야 하지 스토리의 완결성을 위해 존재해서는 곤란하다.

나머지를 놓쳐도 개성 만점에 매력 있는 캐릭터만 구축할 수 있다면 그 장르 영화는 성공한 작품이다.

[작품 내의 구성요소들이 갖는 의미들을 잊지 마십시오.]

그걸 못한 꿈속 미래의 페르가 이 오답 노트에 고스란히 담겼다. 그러니 모두 숙지하기 바란다면서 상세히 전달했다.

[무슨 말씀이신지 이제야 이해가 됐습니다.]

[이렇게 구성하면 나중에 나올 리벤져스와도 딱 맞아떨어지고 단독 영화로서의 재미도 충분히 보장할 수 있겠군요.]

개떡 같이 말해도 찰떡같이 이해하기를 바라는 내 염원이 통했는지 두 사람은 ‘지금의 구성을 하고 작가진들과 협의하겠습니다.’라고 한 뒤 내 사무실을 빠르게 나가버렸다.

그리고 이주가 지났을 즈음, 초안으로 만들어진 영화의 스토리가 내 손으로 들어왔다.

[회장님이 말씀하신 구성으로 뼈대를 잡고 진행하니 스토리 진행 속도가 말도 안 되게 빨라졌습니다.]

[그리고 이 구성 덕분에 리벤져스의 스토리도 빠르게 만들어질 것 같습니다.]

최종인 회장과 신바람이 난 케인 파이기가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며 말했다.

확인해보니 과연 이들의 말대로였다. 새로이 구성된 천둥 군주 페르의 스토리는 원래의 페르보다 훨씬 속도감이 붙어 있었다. 게다가 가장 중요한 부분이자 본래의 스토리에서 가장 많은 비판을 받은 지점인 블록버스터로 시작해서 졸작으로 끝나는 허망함이 사라져 있었다.

[대신 문제가 하나 생겼습니다. 감독이 정해지고 제대로 산출을 해봐야하겠지만,  도드라지는 개성을 위해 아마도 2,000만 달러 정도가 더 필요할 것 같습니다.]

2,000만 달러면 약 230억 원.

현재 페르의 제작 예산은 1억 5,000만 달러다. 이것만으로도 이전 작인 라이언 맨의 제작비를 뛰어넘는 예산인데 거기에 2,000만 달러를 더 추가해야 한다는 소리다.

전 세계 수익으로 따졌을 때 약 4억 달러 수준이면 본전. 그 이상 되어야 이익이 남는 것을 계산한다면 2,000만 달러 추가는 수익을 포기하고 제작해야 하는 상황이나 마찬가지라는 말이다.

하지만 나는 이런 현실적인 문제와 맞닥뜨렸을 때, 더할 나위 없이 큰 카타르시스를 느낀다. 이 말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잘 아시잖습니까. 우리 GF는 작품을 위해 타협하지 않습니다. 2,000만 달러? 쓰십시오.]

영화사는 영화를 통해 수익을 얻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그걸 생각하면 절대 있을 수 없는 결정이겠지만, 나는 문제없다.

‘죽을 때 함께 나랑 같이 파묻을 돈도 아니잖아. 저승에서 쓸 노잣돈도 아니고.’

나는 이미 충분하리만큼 갖고 있다.

그러니 이외의 돈은 아낌없이 재투자해도 되고 얼마든지 직원들이 창의력을 발휘해주기 바란다.

‘달라는 만큼만 챙겨주면 섭섭하잖아.’

자고로 곳간이 든든해야 창의력도 무궁무진하게 샘솟는 법!

[최대 5,000만 달러까지 추가로 예산을 배정하겠습니다. 그러니 확실하게 볼거리를 제공해 보십시오. 거듭 강조하지만, 돈 걱정보다는 재미를 걱정하시는 겁니다. 아시겠습니까?]

급격하게 표정이 밝아진 케인 파이기.

[넵!]

그는 우렁찬 대답과 함께 다시 작가들을 소집하러 나섰다.

*

천둥 군주 페르의 감독은 케인 파이기가 점 찍은 케레스 브레서였다. 이 부분에 대해서 나는 아무런 코멘트도 하지 않았다. 영화를 관람한 관객으로서 스토리와 아쉬운 점은 알았지만, 각 작품을 누가 제작했는지까지는 모르는 수준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직접 왔지.’

케레스 브레서는 작가진들이 구상한 초반의 콘셉트를 토대로 초반 회의 시간을 가졌다. 나는 이 일정을 듣고 감독이 쓸만한 인물인지, 페르를 어떤 식으로 구상했는지 확인도 할 겸 그 자리에 참석해 보았다.

우선 본 것은 난색을 표하는 표정이었다.

[초반부터 이렇게까지 대규모 전투 장면을 넣으시겠다는 말씀이십니까?]

[무슨 문제라도 있습니까?]

[아닙니다. 문제는 없습니다. 다만, 이번 영화의 총 제작 예산을 얼마로 잡고 계신 것인지 아직 듣지를 못해서요.]

말쑥한 외모의 영국 남자, 케레스 브레서의 말에 나는 의아했다.

‘기본적인 것도 안 듣고 계약서에 사인을 했다는 말인가? 보통은 어느 정도 예산을 잡고 그 예산 안에 만들 수 있는지 그걸 먼저 물어보지 않나?’

의혹의 시선을 케인 파이기와 최종인 회장 쪽으로 보내니 그들은 나와 눈을 마주치고는 해맑은 표정으로 미소를 지었다. 그 얼굴을 보고 단박에 이해했다.

‘감독이 얼마를 요구하든 우리가 생각한 예산을 넘기지 않을 거라고 확신했다는 거군.’

페르에 약 2억 달러의 예산을 집행했다. 가장 많은 돈을 들인 영화는 아니지만, 그래도 어지간해선 한 해에 이것보다 높은 예산을 배정받은 영화는 몇 작품 나오지 않을 거다. 아니나, 다를까, 이 넉넉한 총알을 바탕으로 케인 파이기가 말했다.

[지금 저희가 생각하고 있는 총예산은 1억 8,000만 달러입니다.]

2,000만 달러는 일종의 예비비 정도의 개념인 것 같다.

[1억 8,000!]

자신에게 맡기는 영화의 규모가 예상 밖이었던 모양이다. 그는 처음에는 놀라움을 표하더니 그다음으로는 들뜬 기색으로 말했다.

[그래서 초반부터 이렇게 화려하게 시작을 하는 거였군요. 확실히, 초반에 시선을 확 잡아끌면 여러모로 영화를 이끌고 가기가 쉬워지는 법이죠. 그럼 이 장면 연출에서는 전사가 아닌 투사의 이미지로 특히나 망치를 부각하는 게 어떻겠습니까? 만화 원작에 나오는 망치의 액션을 최대한 적용해서 말입니다.]

눈을 빛내며 그는 재빠르게 자신이 구상한 장면 연출들을 말로 설명하기 시작했다. 들으며 실실 웃음이 나왔는데 그 이유는 케레스 브레서가 말하기에 앞서 원작 만화의 어떤 장면에서 페르가 망치를 벼락처럼 던졌는지, 부메랑처럼 회수하지 않고 포탄처럼 활용했는지를 만화 스토리와 함께 연설했기 때문이었다.

‘이 사람이 왜 감독으로 발탁된 지 알겠어. 완전히 페르 덕후잖아.’

모르는 사람이 지켜보면 페르 영화 제작을 위한 미팅이 아니라 페르 팬 모임이라고 착각할 수 있을 것 같은 모습이었다. 열정적인 모습을 작가들이 흐뭇해하며 보고 있었는데, 보는 재미는 있지만 저러다가는 회의가 며칠은 더 걸릴 것 같았다.

투머치토커의 전형이었기에 내가 슬쩍 제재했다.

[그만. 여기 페르에 대해서 모르는 사람은 없으니 더 설명 안 하셔도 됩니다.]

[아! 죄송합니다. 바벨 소속의 분들 앞에서 페르에 대한 지식 자랑이라니, 부끄러운 행동을 했습니다.]

나는 괜찮다고 말하며 그에게 말했다.

[사실 제가 이곳에 온 이유는 꼭 확인해보고 싶은 것들이 있어서입니다. 지금 보신 것처럼 스토리 콘셉트의 맨 끝부분을 보면 대규모 전투가 나옵니다.]

[네.]

[일단 꽤 멋지게 포장된 대규모 전투를 기획하는 것이 마음에 들어서 승인은 했는데, 저는 정확히 어떤 연출로 보일지 감이 잘 안 오더군요. 시간을 드릴 테니 이 부분의 연출에 대해서 조금 상세하게 구상하고 알려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케레스 브레서라는 인물이 페르의 덕후라는 점은 알았지만, 감독으로서의 역량을 나는 알지 못했다. 그런 이에게 디지니와 제대로 격돌을 해야 하는 상황에서 일을 맡기는 게 조금은 불안했다.

‘추가해준 예산만큼 퀄리티를 뽑아낼 실력이 있는 사람이냐.’

기대하는 마음으로 내준 문제였다.

[구상할 시간은 얼마만큼 주실 겁니까?]

[두 시간입니다.]

[두 시간 씩이나요?]

의아해하는 그에게 나는 회의실 안의 사람들을 가리켰다.

[텍스트만 보고 연출을 구상하는 건 어려울 겁니다. 그러니 여기 계신 분들의 도움을 받아 보십시오. 그럼 편히 구상하시라고 저는 두 시간 동안 자리를 비워드리겠습니다.]

받아들이는 처지에게는 폭탄이나 다를 바 없는 미션을 주고 나는 적당히 시간을 보냈다.

이윽고, 시간을 맞춰 다시 회의실로 들어가니, 그동안 함께 머리를 맞대고 이야기하면서 많이 친해진 듯 저들은 전우애로 똘똘 뭉친 결연한 표정을 짓고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어디 한 번 들어볼까요?]

뒤이어 갑자기 회의실의 불이 꺼지고, 스크린이 떠올랐다.

‘오호! 회의실 인원들의 능력을 가능한 한 모두 활용했구나. 연출할 것들을 만화로 그려냈어.’

아주 바람직한 모습이었다. 영화사와 만화사가 함께 존재한다는 것과 이 두 개의 기업이 같은 작가진에게 도움을 요청할 수 있다는 것은 생각보다 훨씬 큰 메리트였다. 이를 잘 간파하고 촉박한 시간 속에서 활용했으니 케레스 브레서는 실력 있는 감독이 분명했다.

케레스 감독의 설명이 시작된다.

[제가 대략 확인한 시나리오는 이렇습니다. 배신당했던 페르가 다시 선택을 받은 장면부터 희생을 통해 진정한 슈퍼 히어로로 돌아가는 장면. 그리고 마지막 대규모 전투죠.]

원래라면 이 장면에 등장하는 것은 디스트로이어라는 강철 골렘 하나다. 큰 덩치 덕분에 꽤 위용이 있긴 하지만, 그래서일까? 주변 인물들 그 누구도 활약하는 장면이 없었다. 게다가 덩치 크고 힘만 센 골렘의 등장 탓에 액션의 매력도 떨어졌다.

내 조언에 힘입어 케인 파이기가 바꾼 지금 버전의 페르는 이러하다. 그는 과감하게 디스트로이어와의 전투에 빙하 거인들을 추가시켰다.

[제가 이 시나리오를 보면서 가장 안타까웠던 부분은 페르를 제외하고는 그 어떤 신들도 생명력을 가지지 못했다는 부분이었습니다. 특히나 페르의 친구들은 ‘도대체 뭐 하는 존재이기에 이토록 왕자와 친한 걸까?’라는 점이 의문이었고 그 해답은 시나리오에 전혀 없었습니다.]

맞다. 주인공의 친구라는 것은 알 수 있지만, 이들의 역할이 고용된 용병 수준에 지나지 않았다. 이는 3편에 등장하는 발키리와는 엄청난 격차이고 저들을 있으나 마나 한 병풍으로 보이는 이유이기도 했다.

[그래서 장면을 이렇게 구상해 보았습니다.]

케레스 브레서는 각 친구의 콘셉트에 맞는 병과를 지정했다. 그리고 각 병과에 따라서 그에 배정된 부하들이 등장했다.

‘개성이 확실하게 구분되는군.’

본래의 영화에서는 그저 잡졸들이나 몇 상대하던 것과 확연히 달라졌다. 소드맨들을 지휘하는 팬더러는 강력한 검술과 마법을 보여주었고 시프는 암살자들을 지휘하며 순간이동과 같은 기술을 사용했다.

이 외에도 신들의 방패군단은 신들의 군대답게 방어 마법을 보여주었다. 특히, 대지를 울리는 철퇴도 상당히 매력적이었다.

‘그래! 이게 판타지지.’

백미는 디스트로이어와 페르였지만, 꼭 그게 아니라고 해도 나머지 부대의 전투 역시 상당히 박진감 있게 표현된다. 다섯 부대 전투에서의 느낌도 났으며 각 배우들의 시간 배정도 디테일하게 설정했다.

두 시간 만에 이 정도의 결과물!

“좋습니다.”

이거 쉬어가는 편이라고는 하나도 없는 시리즈물이 될 것 같다. 이대로 잘만 진행하면 장대하면서도 완벽한 대작이 나오리라는 확신까지 들었다.

< 센터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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