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센터 >
“털어서 먼지 안 나는 기업 없다는 말 아시죠?”
“모를 리가 없죠. 하지만 그건 저희도 마찬가지입니다. 저희가 홈애드를 털면 그들도 우리를 털려고 할 것이고, 그럼 괜한 나머지 기업만 이득입니다.”
“국내 홈애드 말고. 영국 본사. 페스코를 털어봅시다.”
“네?”
“지인들에게 페스코가 회계 조작으로 몸집 부풀리기를 하고 있다고 넌지시 귀띔해주십시오.”
사업이라는 것이 조금만 부정을 저지르면 상당한 이득이 돌아오다 보니, 완벽하게 정직한 기업은 존재하기가 불가능에 가깝다.
그렇지만 회계 조작은 또 다른 문제였다.
당시 페스코는 회계 조작이 들통나면서 하루아침에 무려 27조라는 엄청난 주가 하락을 맞게 되었다. 그보다 빨리 터지면 충격의 크기가 줄어들 테지만, 그래도 만만한 수준은 아닐 것이다. 당장 홈레버를 인수할 때 투자한 자금 때문에라도 현금 유통이 쉽지 않으리라 본다.
“회계 조작이라면, 이야기가 달라지는군요.”
세간에서는 나를 여러모로 오해하지만, 내 측근들은 잘 안다. 윤태식이라는 인물은 금융계의 전문적인 지식이 있지 않다는 것을 말이다. 그러나 지금까지 비범한 안목과 본능적인 사업 감각으로 여겨지는 선견지명을 여러모로 보여 왔기에 곽지원 부사장은 날카로운 눈빛을 보였다.
“그럼 본격적으로 일에 착수하겠습니다.”
새로운 먹잇감을 찾았다는 듯 웃으며 나서려는 곽지원 부사장에게 물었다.
“그런데 만약 페스코가 홈애드를 매물로 내놓는다면 다른 기업들을 다 제치고 차지할 자신은 있습니까?”
“물론입니다. 다른 대형 유통사야 독과점 문제 때문에 분할이 아니면 절대 홈애드를 인수할 수 없을 겁니다. 게다가 그 외의 기업들은 아무리 욕심을 낸다 해도 저희와 비슷한 수준의 입찰이 불가능합니다. 한국에서 오성 그룹 정도가 아니면 감히 우리의 상대가 되지 못하지요.”
“좋습니다. 시일은 얼마나 걸릴까요?”
“회계 조작이 확실하다면 그것이 터지기까지는 약 한 달, 조작이 터진 후 페스코에서 어떻게든 수습해보려고 노력하는 시간이 또 몇 달 정도 걸릴 겁니다. 다만, 우려되는 문제가 하나 있습니다.”
“그게 무엇입니까?”
“여러 작업 끝에 페스코를 인수하기로 했는데 그 전에 영종도에 누군가가 들어오는 것은 아닐지에 대해서입니다.”
곽지원 부사장의 우려는 내가 해결해 줄 수 있다.
따로 무슨 조치를 취해서가 아니다. 그냥 내가 아는 미래가 확실해서다.
“그건 걱정하실 거 없습니다. 편하게 진행하세요.”
“알겠습니다, 회장님.”
*
중소기업과 달리 GF는 하나의 히트 상품과 프로젝트만 가지고 목매다는 작은 규모가 아니다. 또한, 큰 규모의 사업은 게임 속의 시간 스킵 기능처럼 눈 깜짝할 사이에 이뤄지지 않는다.
‘만약 그런 게 가능했다면 달랑 몇 개만 이룩하고서 나는 환갑이 훌쩍 지나버렸겠지.’
게임에서는 주인공이 메인 퀘스트를 진행하지 않으면 시간의 흐름이 없다시피 한다. 그래서 서브 퀘스트를 돌고 여관에서 수십 일을 숙식하면서 지내도 큰 상관이 없었다. 하지만 현실은 복잡하고 동시다발적이며 여러 가지가 얽혀 있다.
사업 역시 그러하다. 영종도의 테마파크를 짓기 위해 물밑작업을 순조롭게 진행해나가며 스페이스 워즈의 제작도 병행해나가는 사이, 우리는 또 다른 결과물을 세상에 선보일 준비를 마쳤다.
그리고 지난 PC 논쟁으로 시작하여 스페이스 워즈로 확실하게 적대관계가 된 디지니는 다시금 경쟁을 시작했다.
【넷플렉스의 화제작 데들리 스페이스 시즌2 촬영 시작!】
열성 팬을 토대로 SF계의 걸작 시리즈물이 되리라는 기대와 함께 대중의 관심이 모두 넷플렉스에 쏠렸다. 이 현상이 눈꼴사나웠는지 디지니도 나섰다.
【디지니! 플레이씽 스토리3 2010년 6월 개봉 확정!】
이건 진짜 만만치 않은 수다.
‘플레이씽 스토리3라니. 무려 10억 달러 클럽에 가입한 영화잖아.’
스티븐 잡스가 와플을 살릴 수 있도록 만들어준 무기가 와이팟이었다면, 플레이씽 스토리는 와플에서 쫓겨났던 스티븐 잡스가 재기에 성공할 수 있도록 해준 무기다.
그 이름 자체가 브랜드로 전 세계의 동심을 사로잡은 영화!
그것이 바로 플레이씽 스토리다.
“어지간한 영화로는 경쟁도 못 하겠는데.”
라이언 맨이 전 세계에서 엄청난 흥행을 했다고는 하지만 그래봤자 전 세계 6억 달러 수준이다. 아직은 플레이씽 스토리와 비교조차 할 수 없었다.
마이코닉스 역시 마찬가지이고 당장 넷플렉스에서도 이것과 견줄 수 있는 영화는 단 하나도 없다. 그러나 디지니랑 맞싸움을 벌이기로 한 내가 여기에 대비하지 않았을쏘냐.
“최종인 회장님. 숨겨두었던 것을 공개하십시오.”
“알겠습니다!”
오늘의 대답을 학수고대했다는 듯, 뭐가 그렇게 신난 건지 그는 재빨리 사무실을 벗어나 ‘드디어 허락이 났다!’라며 동네방네 자랑하며 떠들고 다녔다.
이튿날.
플레이씽 스토리3의 개봉일보다도 훨씬 더 많은 사람을 충격에 빠트린 소식이 인터넷과 신문을 통해 퍼져나갔다.
【2012년 개봉 목표로 바벨의 리벤저스 제작 확정!】
【바벨! 라이언맨을 넘어서 슈퍼히어로로 이루어진 팀업 무비 만든다!】
【슈퍼 히어로가 한자리에 모이는 영화! 드디어 그것이 현실로 이루어지나?】
한국이었다면 ‘바벨이 공개한 리벤저스. 그것이 무엇이기에 미국은 이렇게 열광하는가?’와 같은 기사가 나오겠지만, 이곳은 미국이다. 그 누구에게도 리벤저스에 대해서 알려줄 필요가 없었다.
‘모르는 사람이 없으니까.’
한국에서는 둘리를 예로 들면 대충 비슷할 것이다. 둘리는 1983년에 만들어진 애니메이션으로 90년대 후반에 태어났다면 전혀 상관없는 세대가 되는 데에도 불구하고 모르는 사람이 정말로 드물다.
미국에서는 리벤저스가 이러하다. 둘리와 같은 파급력을 가지고 1963년부터 현재까지 연재되고 있는 만화이기 때문이다.
‘플레이씽 스토리는 언젠가는 다음 편이 나올 거라 기대하고 있었던 영화지만, 리벤저스는 팬들조차 포기하고 있던 작품이거든.’
각 작품의 주인공급들이 모여서 함께하는 영화이기에 실사에서는 등장하기 어렵다는 것이 세간의 판단이다. 그랬는데 그 영화가 제작될 거라는 소식이니 10억 달러 클럽에 가입할 영화의 소식조차도 묻어버릴 만큼 강력했다.
뒤이어 본격적인 제작을 검수했다.
‘꿈속 미래에서 바벨의 기본적인 영화 순서는 이렇지.’
라이언맨 개봉 이후 헐커를 개봉했으나 대차게 말아먹는다. 이렇게 헐커의 실패를 겪으면서 리벤져스나 다른 히어로보다는 당장 성공한 라이언 맨2에 많은 집중을 하는 방향이 되어버렸다.
즉, 원래라면 내년에 개봉하는 영화는 라이언 맨2여야만 했다.
‘그런데 그건 바벨의 입장이고. 나는 케인의 BCU가 무조건 대박을 터트릴 거라고 확신하거든.’
한편, 바뀐 현실에서는 본래 개봉해야할 라이언 맨2가 아닌 이글아이와 퍼플 위도우를 주인공으로 한 에이전트 오브 가디언이 영화 개봉을 위해 CG작업을 하는 중이다.
또한, 지금은 내후년에 개봉 예정인 퍼스트 리벤져와 천둥군주 페르의 스토리 라인을 잡고 있었다. 그런데 이 부분에서 내가 간섭하고 조언이라는 이름으로 강력하게 밀어붙이는 스토리가 케인 파이기에게는 영 불안하게 보이는 모양이다.
[다시 한번 생각해보시는 게 어떻겠습니까? 언급하신 페르는 기존의 페르와는 너무나도 많이 바뀌는 것 같습니다.]
[그다지 바뀐 게 많지는 않은 것 같은데, 뭐가 그렇게까지 걱정이십니까?]
[사람들이 알고 있는 천둥 군주 페르, 로버트 브레이브는 절름발이의 의사입니다. 그런데 이 스토리의 페르는 너무나도 멍청이입니다. 원작과의 괴리감이 이러면 너무 커서 팬들의 반발을 살 겁니다.]
페르 영화를 볼 때 페르가 말버릇처럼 하는 소리가 있다. ‘나는 올마이티.’라는 것인데 이는 전능하다는 이야기이다.
일반적으로 전능이라는 단어는 그 앞에 ‘전지’를 함께 붙여서 사용하곤 하며, 실제로 코믹스에 묘사된 페르의 지능은 여타 슈퍼히어로들의 평균보다 조금 높은 정도였다.
하지만 내가 언급한 페르이자 케인 파이기가 우려하는 영화 속 천둥 군주는 근육 멍청이였다.
[그 걱정에는 한 가지 큰 오류가 있습니다.]
[오류라니요?]
[일단 페르는 인기가 없습니다. 자고로 기대가 커야 실망도 큰 법이라 했습니다. 천둥 군주 페르는 반발을 할 만큼의 팬조차도 없지요.]
[······.]
너무 직설적이었을까? 망연자실한 표정으로 케인 파이기가 입을 다물었다. 그를 대신해서인지 최종인 회장이 말을 이었다.
[그래도 1962년부터 이어져 온 명망 있는 캐릭터입니다.]
[인정합니다. 그나마 우리에게 남아 있는 캐릭터들 중에서 꽤 매력적이고 나름대로 인지도가 있는 캐릭터이긴 하죠. 하지만 잊지 말아야 할 건 남아 있는 애들 사이에서라는 겁니다.]
일전에도 속빈 강정이라며 쓴 웃음을 지었던 부분이었으나, 바벨의 가장 인기 있는 캐릭터들은 전부 남의 회사로 팔려나간 상태이고 5,000개 이상의 캐릭터 판권을 몽땅 합쳐봐야 스파이더 가이와 Z맨 두 개의 판권보다 떨어지는 것이 현실이다.
그다음은 헐커인데 이 캐릭터조차도 단독 영화로는 배급이 불가능하다.
물론 우리야 디지니처럼 꽉 막힌 회사가 아니라서 유니버스 스튜디오가 배급할 수 있도록 하고 단독 영화를 만들 수는 있다.
‘근데 헐커는 애초에 성공한 영화가 없거든.’
이상하게 영화로 나오기만 하면 그대로 쫄딱 망해버리는 시리즈다. 심지어 인크레더블 헐커는 꽤 재미있게 만들어진 오락영화였음에도 본전을 겨우 건졌다. 그렇기에 헐커는 ‘팀업 무비에서는 자유롭게 쓸 수 있으나 단독 영화에서는 망하는 캐릭터’라는 평에 수긍할 수밖에 없는 히어로다.
이렇듯이 이런저런 사정을 다 생각해서 사용할 수 있는 몇 안 되는 히어로 중 가장 인기 있는 캐릭터를 건지면 달랑 라이언 맨과 페르가 남는다.
[인정할 건 인정하고 잘 생각해보세요. 천둥 군주 페르는 애초에 만화에서 인기가 별로 없습니다. 인지도도 밑바닥이지요. 이것 이하의 히어로들이 수두룩한데 우리는 그 캐릭터를 활용해야 합니다. 맞습니까, 아닙니까?]
[그게··· 맞습니다.]
[그럼, 만화가 아니라 영화의 세계관으로 재해석하는 작업은 필수인 겁니다. 만화는 보통 몇 년에 걸쳐서 한 가지 이야기를 연재합니다. 세계관을 다시 정립하게 되는 새 시즌이 올 때까지 이어지는 이야기 속에는 캐릭터가 가진 서사가 충분히 들어갈 여력이 되는 거지요. 하지만 영화는 어떻습니까?]
[아! 그렇군요. 두 시간 안에 그걸 다 넣어야 합니다.]
[즉, 우리는 최대한 압축해서 대중들에게 만족감을 주어야 합니다. 그리고 이 이야기에는 핵심이 너무나도 많아요.]
꿈속 미래의 원작을 보자면 페르 시리즈의 첫 영화인 천둥 군주 페르는 지루하다는 평가와 함께 그저 리벤져스를 위한 떡밥 뿌리기밖에 되지 못했다는 비판을 많이 받았다.
이유는 굉장히 단순하다.
신계에 살고 있던 페르가 인간계에 떨어진 이유부터 시작해서 인간계에서의 적응과 함께 인간을 이해하는 과정, 자신의 도끼에게 자격을 인정받지 못해 도끼를 들지 못하면서 좌절하고 그 좌절 속에서 성장하는 이야기.
‘이후 마지막 전투에서 희생을 통해 자신의 정체성을 깨닫고 힘을 되찾으며 해피엔딩으로 이어지는 마무리였는데, 이 중요한 키워드들을 죄가 한 영화에 넣으려고 했으니 엉망으로만 만들어질 수밖에 없지.’
긴 서사를 보여주기에 120분은 짧은 시간이다. 위의 이벤트가 벌어질 때마다 페르는 아주 빠르게 성격의 변화가 나타났고 그 탓에 관객은 주인공에게 감정이입을 하지 못했다. 이입이 안 되었으니 그의 성장이나 변화를 납득하지 못하게 되는 결과로 이어지는 건 당연한 순서다.
‘이야기는 나쁘지 않았어. 담겨있는 메시지도 좋았고 그 과정이 성격을 변화시킨다는 것도 설득력 있었지.’
문제는 큰 줄기가 아니다.
디테일의 부족이었다.
< 센터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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