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늙었다더라 >
[그런 형태로는 스페이스 워즈는 물론이거니와 인디아나 잡스도 제대로 지켜지지 못할 것이오.]
[그렇다면 디지니에서는 제대로 지켜질 거라 생각하십니까?]
이번에는 그의 동공이 커진다. 등장하기 무섭게 내 의도를 모조리 간파하며 나를 당황시켰던 것처럼, 이번에는 흉중에 품은 뜻을 내가 알아차렸기 때문일 것이다. 지금의 대화와 현재 상황 그 어디에도 디지니가 거론될 이유가 없었으니 말이다.
하지만 놀라움은 잠시 확장된 동공 정도가 끝이었다.
[그런 식으로 며칠 조사했다고 알아낼 수 있는 정보가 아니었을 텐데. 대단하구먼.]
혼잣말하고는 씁쓸하게 웃을 뿐, 애써 부정하지 않았다.
[로키드를 매각할 마음이 없다고 하시는 게 아니라 우리 GF가 로키드를 품을 수 없다고 하셨으니까 말입니다. 그렇다면 누군가는 품을 수 있을 거로 생각하시는 건데, 그 대상이 디지니 말고 또 누가 있겠습니까?]
[맞소.]
[그런데 말입니다. 과연 디지니가 스페이스 워즈를 제대로 표현할 수 있을 것 같습니까?]
[디지니는 오랜 역사가 있소. 또한, 미디어의 다양한 분야에서 수많은 경험과 기술이 축적되어 있지. 그들은 잠시 주저앉을지는 몰라도 무너지지는 않소. 하지만 넷플렉스는 다르지. 짧은 시간에 성공한 회사는 강한 바람이 불면 한 순간에 무너질 수 있다고 생각하오.]
내 질문에 맞춰서 해석하자면 ‘당장에 스페이스 워즈를 품지 못하더라도 오랜 역사를 가진 디지니는 결국 품게 될 것이다. 그러나 GF는 그 전에 무너질 수 있다.’로 해석할 수 있겠다.
이는 분명한 거절의 의사로 보이지만, 일말의 끈은 남겨두었음을 알 수 있었다.
‘굳이 이런 말을 할 거라면 조용히 통보했으면 끝이었을 테니까. 그나저나 늙으면 이런 식의 대화나 수수께끼를 즐기게 되는 공통분모들이 있나보군.’
마이크루의 빌을 떠올리며 나는 조이 로키드가 몸소 출두했다는 점에 주목했다.
[최근 디지니와 저희 GF가 소소하게 분쟁 중이라는 건 알고 있으시지요?]
[전 세계에 떠들썩하게 말싸움을 해놓고 소소한 분쟁이라고 말하는 것이오?]
[말로만 싸웠으니 아직은 소소하지요.]
[그 말은 이제는 말로만 싸우지 않겠다는 뜻으로 들리는구먼.]
[잘 아시면서 그러십니다. 맞습니다. 저는 로키드 필름을 두고 제대로 붙어볼 요량입니다. 그런데 실질적인 대화에 앞서 한까지 여쭙겠습니다. 만약 로키드 감독님은 인디아나 잡스가 갑자기 여자로 바뀌어서 전개된다면 기분이 어떨 거 같습니까?]
조이 로키드는 시답잖은 농담이라며 되물었다.
[무슨 소린가? 잡스가 왜 여자로 바뀌어?]
[하나 더 보태어서 인디아나 잡스의 성별은 여성이고 피부색이 흑색으로 바뀐다면? 스토리적인 전개에는 큰 차이가 없는 채로 인물이 바뀌는 정도로 생각하시면 됩니다.]
[무슨 되지도 않는 소리를 하는 것이오? 설마 떠들썩하면서도 소소하게 벌였던 그 말싸움을 나와 해보자는 건 아닐 텐데?]
[이런! 여성과 흑인에 대해 바르지 못한 생각을 품고 계신 건 아닙니까?]
[대단한 성공을 거둔 것 치고는 유머의 질이 형편없이 떨어지는구먼. 웃기지도 않으니 당신이 말했던 바를 나도 읊어주겠소. 나는 인디아나 잡스의 주인공이 흑인이거나 여자이기에 부정하는 것이 아니오. 이미 백인 남성으로 만들어졌고 인기를 얻었으며 충분히 개성 있는 캐릭터로 완성된 녀석을 왜 바꾸겠냐는 뜻이오.]
[잠시의 무례를 부디 용서해주시지요. 저 역시 같은 생각입니다. 그러나 감히 장담하건대 디지니로 넘어가면 그런 변화가 자유와 평등이라는 이름으로 일어날 겁니다.]
[이토록 대놓고 벌이는 이간질은 참으로 생경하구먼. 윤 회장, 당신이 디지니를 얼간이들의 집합소로 보다간 크게 낭패를 겪게 될 것이오. 편견이란 지혜의 눈을 가릴 뿐이거든.]
나이가 들었지만, 그의 판단력은 여느 젊은이들 못잖았다. 그는 디지니와 우리의 논쟁에 대해서 상세히 알고 있었고 점잖으면서도 냉소적인 말을 내뱉었다. 뒤이어 대화의 수준이 떨어진다고 여겼는지 자리에서 일어나 돌아갈 채비를 했다.
그런 조이 로키드에게 내가 말했다.
[익숙하기에 간과하고 넘어가는 것 역시 편견입니다. 그리고 상식은 보편적이지가 않지요. 사람마다 다르고 그 기준점도 명백히 차이를 보입니다. 저는 적이기 전에 조금의 친분도 없는 외인이지요. 때론 한 걸음 떨어져야 바르게 볼 수 있습니다.]
[더 말해 보시오.]
[디지니는 인권 약자에 위치한 배우들이 주인공을 할 수 있도록 바꾸기를 원합니다. 여기에는 남자를 여자로, 백인을 흑인으로 변경하는 선택도 서슴지 않을 겁니다. 미디어의 발달에 따른 시장의 외연 확장은 기존의 남성이 아닌 여성을 넘어 가능한 한 모든 인종을 수용하도록 강요하기 때문이지요.]
[당신이나 나나 그들 모두 사업하는 이들이지. 뻔한 이야기는 시간 낭비이니 그만하시오. 내가 듣고자 하는 건 디지니를 확신하며 얼간이 취급하는 그 태도의 저변이오. 인디아나 잡스를 바꿔버린다고? 이보시오. 새로운 캐릭터를 만들지 왜 기존 캐릭터를 바꾸겠소?]
조이 로키드는 검지로 자신의 머리를 가볍게 두드렸다. 머리가 있으면 그럴 리 없다는 제스처였다.
‘이쯤에서 짜잔 형님을 등장시키고 싶어지는군. 그런데 생각 있는 디지니가 진짜로 그걸 다 갈아 엎어버린답니다, 라면서.’
물론 내가 아는 기억 내에서는 인디아나 잡스의 성별이나 인종을 갈아엎는 일은 벌어지지 않았다. 하지만 그런 가능성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
[바꿀 겁니다. 디지니는 이미 가지고 있는 아이피가 매우 많기 때문이지요.]
[그게 뭐 어때서?]
[그중에 인권 약자에 위치한 주인공이 얼마나 되겠습니까? 그리고 그 반대는 얼마나 되겠습니까?]
수도 없이 많은 캐릭터. 이들 캐릭터의 비율을 맞추려면 굉장한 숫자의 주인공을 갈아엎어야 한다.
[사기꾼의 전형적인 수법이로군. 만약을 팔고 가정하니 말이오. 거듭 말하거니와 이미 인기 있는 시리즈물의 주인공을 변경하는 무리수는 상식적으로 선택할 리가 없소. 확실한 카드를 버리고 도박수를 두는 건 초심자들이나 요행을 바라며 저지르는 실수거든.]
[기존으로 충분하다고 보는 것이 바로 시각의 차이입니다. 더 큰 시장을 확보하기 위한 전략적이면서 합리적인 선택이라 확신한다면 어떻겠습니까?]
[자기들 건 놔두고 새로 확보한 것만 건드릴 것이다?]
[반대입니다. 인기가 넘치는 공주도 바꿀 겁니다. 그러니 인디아나 잡스야 어려울 것도 없지요. 담백하게 말하자면 인디아나 잡스는 남의 나라 유적지 찾아다니면서 화려하게 부수는 영화가 아닙니까? 기왕이면 백인보단 다른 인종이 안전하다는 발상이 마냥 터무니없지는 않은 것 같습니다만?]
여기까지 들은 로키드는 잠시 생각에 잠기는 모습을 보였다. 성별과 피부색을 바꾼 허무맹랑한 장면이 의외로 타당한 근거를 갖출 수 있다고 보는 듯했다.
그렇게 확 나갈 것만 같던 조이 로키드와의 대화는 두 시간 가량 더 이어졌다. 나는 처음의 충격요법에서 벗어나 실제로 미래에 디지니가 제작한 작품들의 이야기를 적당히 버무려 알려주었다.
[진정한 의미로 세계 제일이고 세계를 직접 대면하게 되는 겁니다.]
중요한 건 이 모든 선택은 큰 부와 성공을 이루게 됨을 결코 빠뜨리지 않았다는 점이다.
대신 잃는 것은 확실했다.
코어 팬과 정체성, 기존작품의 캐릭터 및 고유한 색깔들이다.
[돈이라······.]
[그냥 돈이 아닙니다. 아주 큰돈입니다.]
절대다수를 만족시키는 마법의 단어.
빅 머니!
[더할 나위 없이 매력 있는 말이군.]
[누군가에게는 추억과 맞바꾸어도 되는 말이기도 하지요.]
[살아갈 날이 살아온 날보다 짧을 나 같은 처지에게는 무서운 말이로군. 늙은이에게 추억은 새로 쌓을 수 있는 기억이 아니고 인생의 전부거든.]
실제로 이루어질 가능성이 있다는 걸 슬슬 인지한 조이 로키드는 심각한 표정으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무엇을 말하고자 하는지는 이해했소. 하지만 한 쪽의 이야기만 듣고 판단할 수는 없소이다. ]
[옳으신 말씀입니다.]
[윤 회장의 성의는 충분히 보았으니 이제 에이든에게도 똑같은 기회를 줄 것이오.]
보통 영업의 귀재라고 불리는 사람들의 말을 들어보면 이럴 때 절대로 시간을 주어서는 안 된다는 말을 많이 한다. 시간을 주게 되면 생각을 바꿀 틈이 생기는 것이고 가능성이 급격하게 낮아지는 탓이다. 그런 면에서 나는 확실히 영업에는 재능이 없는 인물이 틀림없는 것 같다.
[알겠습니다. 연락을 기다리겠습니다.]
주름졌지만 손아귀 힘은 굳건한 그와의 악수를 끝으로 뒷모습을 배웅했다.
이유는 알 수 없지만, 돌아가는 그의 발걸음이 꽤나 무겁게 느껴졌다.
*
일주일 후.
조이 로키드에게서 연락이 왔다.
[에이든과도 대화를 꽤 오래 나누었고 그에게는 그 나름의 스페이스 워즈와 미래에 대한 구상이 있다는 걸 알게 되었소.]
혹시나 이대로 디지니에게 회사를 넘기겠다는 소리일까? 잠시 고민했지만, 그의 목소리 톤에는 분명 반전이 있을 것 같았다.
아니나 다를까, 그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래서 말인데, 두 회사에서 가지고 있는 우리 IP의 청사진을 한 자리에서 확인해 봐도 되겠소?]
역시. 디지니 쪽으로 완전히 넘어간 건 아니었다.
이런 방향은 내 입장에서 나쁠 것이 전혀 없었다.
[그렇게 하시죠. 시간은 언제쯤으로 생각하십니까?]
[다음 주 수요일쯤이 어떨까 싶은데, 어떻소?]
오늘은 목요일이니 6일 만에 청사진을 완성하여 보여 달라는 뜻이다. 당장 시작해도 늦는 게 보통이다. 그러나 나는 그의 연락을 기다리는 일주일이라는 시간을 허투루 낭비하지 않았다. 이런 일이 있을지 모른다는 생각으로 미리부터 준비하고 있었던 만큼 수요일까지는 확실하게 끝마칠 수 있었다.
[알겠습니다.]
[그때 봅시다.]
조이 로키드와의 통화를 마치고 몸소 움직였다.
‘이쪽에서도 잘 준비가 되고 있는지 확인해 봐야겠지.’
*
넷플렉스의 영상 작업실 복도에 들어가자 마이코닉스의 권문수 상무가 재빨리 내게 달려왔다.
“그렇게 뛰어오시면 작업하시는 분들에게 방해되는 거 아닙니까?”
“에이. 저희 작업실 환경이 얼마나 좋은데, 그런 섭섭한 말씀을 하십니까? 밖에서 어지간히 시끄럽게 굴어도 내부에서는 모릅니다.”
“그렇군요.”
익숙한 너스레를 가볍게 웃어 넘겼다.
“뭐, 그런 건 지금 중요한 게 아니고··· 작업 진행은 어떻습니까?”
“염려하실 거 없습니다. 이르면 내일 중으로 작업이 끝날 것 같습니다.”
“내일이요? 생각보다 엄청 빠르군요?”
“대상이 스페이스 워즈라서 그렇습니다.”
그는 노동자가 아닌 오래된 팬이자 성공한 덕후의 눈을 보였다.
“이 직업을 목표로 하는 사람 중에는 스페이스 워즈를 동경하지 않았던 사람을 찾는 게 더 힘든 수준입니다. 그러다 보니 취미로 만들고 놀면서 제작하는 등 정말 다양한 소스가 회사에 넘치도록 쌓여 있었습니다.”
“아주 좋군요.”
“그런데 굳이 이렇게까지 할 필요가 있습니까?”
“이렇게까지 라면?”
“회장님이 저희에게 주신 그 콘셉트면 누구나 설득할 수 있을 텐데 굳이 이런 작업을 할 필요가 있나 싶어서요. 그걸 본 직원들이 전부 난리였거든요. 회장님 콘셉트만 그림으로 그려도 조이 로키드는 물론이고 모두가 경탄하리라 확신합니다.”
“완벽을 추구해서 손해 볼 건 없으니까요.”
“그야 그렇지만요.”
권문수 상무가 언급하는 건 로키드 감독과 에이든 회장 사이에 관계가 있다는 것을 확인한 후부터 내가 준비한 것이다. 로키드가 디지니에게 자신의 회사를 맡겼다면 그만큼 디지니의 기획을 신뢰했다는 의미였다.
이러한 생각을 뒤집으려면 디지니보다 우리 GF가 더 뛰어난 기획력을 가지고 지금보다 더욱더 높은 곳까지 오르게 해줄 수 있다는 믿음을 주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기억의 끄트머리에 있는 모든 것을 끄집어내서 가장 스페이스 워즈다운 콘셉트를 떠올렸다.
그뿐이랴. 이 원안을 레이첼 등의 작가들에게 가져가서 날카롭게 벼리고 벼려 15분짜리 이야기로 다듬었다.
< 늙었다더라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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