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늙었다더라 >
*
토론을 마무리한 뒤 언론과 대중의 반응에 주목했다. 관망하던 중도층에서는 과연 어떤 의견과 선택이 이루어졌을까?
【여전히 인권 약자들에게 잔혹한 말을 쏟아내기만 하는 GF.】
【약자보호와 기회균등의 디지니. 공평한 약육강식의 GF식 생태계.】
【확연하게 갈린 토론의 방향성. 그들의 결말은 어떻게 될 것인가?】
【변해가는 세상을 무시하는 GF.】
기사는 여전히 우리에게 공격적이다. 우리를 욕하던 인권단체들 역시도 자신들의 주장을 강화하고 목소리가 더욱 커졌을 뿐, 바뀐 건 없었다.
‘내가 저들을 이런 눈으로 보듯이 저들도 나를 꽉 막힌 이기적인 새끼로 보겠지.’
선과 악이라는 개념은 정말 모호하다. 옳고 그름 역시도 입장에 따라 모순점이 정말 많다.
저들은 모를 것이다. 혹자는 ‘자신들의 품안에 들어오지 않은 자들의 인권을 무참하게 무시하는 자들이 인권단체에서 가장 활발하게 활동하는 사람들’이라고 여긴다는 사실을 말이다.
그러니 서로 이해하려고 노력은 하되 공감하고 순응하기까지 애 쓸 필요는 없다.
“썩 좋은 여론이 보이지 않는데도 웃으시는 걸 보면, 회장님께서는 다음에 또 생각하고 계신 것이 있으신 것 같습니다.”
최종인 회장이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내게 질문하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원래는 없었는데 최근에 생겼습니다.”
“어떤 계획인지 들어볼 수 있겠습니까?”
“당연히 들어보셔야지요.”
이번 계획에서 가장 바쁘게 움직여야할 분인데 안 들으시면 곤란하지.
“일단, 헤이스터스 의장님도 함께 들어야 할 것 같은데요?”
내 말이 끝남과 동시에 최종인 회장이 사무실을 뛰쳐나갔고, 라드 헤이스터스 넷플렉스 의장을 데리고 돌아왔다.
‘어지간히도 빨리 듣고 싶은가보네.’
비서실을 통해서 연락을 취해도 될 것을 저리 직접 뛰어간 거 보면 말이다.
[찾으셨습니까?]
[네. 두 분 다 이쪽으로 일단 앉으시죠.]
이제부터 중요한 대화가 시작 될 텐데 서서 이야기를 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훌륭한 작가 분들이 있으니 우리의 오리지널 신작을 만들어내는 것에 어려움이 없다는 건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기존에 이미 힘을 축적해둔 아이피를 가져오는 것보다 효율이 좋기는 어려울 거라는 생각이 듭니다.]
지금 내가 하는 생각과 비슷한 생각을 한 적이 있는 것인지 헤이스터스 의장이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최종인 회장은 내 말에 오히려 갸우뚱 거리고 있었다.
[최종인 회장님은 뭔가 다른 생각이신가요?]
[아이피라면 저희 바벨이 이미 충분할 정도로 보유하고 있지 않습니까?]
[그 바벨이 가진 아이피가 전부 회수되려면 2020년은 되어야 합니다. 게다가 그 중 가장 힘이 있는 Z맨과 스파이더 가이는 영영 돌아오지 못할 수도 있고요.]
Z맨의 판권을 가지고 있는 회사는 20세기 울프. 디지니와 위너에 밀리긴 해도, 세계에서 세 번째로 큰 영화 배급사다. 언제가 크게 마음먹고 인수하려면 할 수도 있겠지만, 아직은 아니었다.
스파이더 가이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더군다나 20세기 울프와 달리 거기는 영화사를 인수하면 될 문제가 아니다. 모 회사를 인수해야 판권을 회수할 수 있는데 일본의 마지막 자존심인 기업을 외국계 기업이면서도 한국인이 대표인 곳에서 인수한다?
이성적으로 보나 정서적으로 보거나 모두 가능할 리 없었다.
‘바벨은 속 빈 강정이라고 봐도 돼.’
무려 5,000개가 넘어가는 엄청난 아이피를 자산으로 갖고 있다. 그러나 당장 힘을 보유한 아이피는 전부 외부 기업에 팔려나간 상황이므로 지금 말한 조건에는 들어가지 못한다. 2014년 이후가 되면 이야기가 달라지겠지만, 아직은 아니고 말이다.
[마음에 드는 회사가 있으신 것 같습니다.]
[있습니다. 로키드 필름이라고 말이지요.]
[로키드!]
로키드라는 말에 둘 다 두 눈이 휘둥그레진다.
스페이스 워즈를 만들어 낸 전설적인 감독 조이 로키드가 1971년에 세운 회사.
주요 사업은 영화보단 스페이스 워즈의 브랜드 관리라 할 수 있는 회사로서 이곳은 영화를 제작하지 않고도 영화 제작사 중에서는 매번 상위권에 랭크되는 특이한 회사였다.
‘스페이스 워즈라는 아이피가 주는 막대한 수입도 있지만, 사실은 CG 때문이지.’
현 시점에서 할리우드의 CG 중 60%를 책임지는 회사가 바로 이 로키드 필름인 탓이다.
[회장님! 이건 진짜 무리입니다!]
[무려 로키드 필름입니다. 자금난에 시달릴 이유가 없고 오랜 시간 지켜온 회사를 매각할 이유 역시도 전혀 없다는 걸 잘 알고 있으시잖습니까?]
맞다. 그래서 두 사람이 놀라는 것이다.
인수할 가망이 절대로 없을 것 같은 회사의 이름이 나왔으니까. 하지만 내 의지는 이미 확실하게 굳었다.
[돈이 얼마가 들어도 좋습니다.]
[회장님. 그게···]
[얼마의 시간이 들어도 괜찮습니다.]
[부디 다시 한 번 생각해 보셨으면···]
[무슨 방법을 써서라도 로키드를 인수할 방안을 마련해 오십시오.]
당황한 두 사람이 재빨리 나를 만류하려 하였지만, 그들이 말린다고 멈출 거였으면 이렇게 불러다가 방법을 찾으라고 지시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애초에 디지니에서 인수를 했다는 건. 이들이 그 밑으로 들어갈 만한 이유가 있었다는 이야기일 테니까.’
안타깝게도 로키드 필름에 대해서는 그 자세한 내막을 알지 못한다. 그 때문에 이들에게 그것을 알아내어 방법을 강구하라는 지시를 내린 것이다.
[전 충분히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더군다나 우리는 이미 SF로 성공적인 시작을 알리지 않았습니까? 우리는 분명히 서로에게 좋은 시너지를 만들어낼 수 있을 겁니다. 자. 여기까지! 빨리 가서! 방법을 찾아오도록 하세요!]
무브! 무브!
아직 멘붕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는 두 사람을 재빨리 사무실에서 쫓아내고 문을 닫아버렸다. 이럴 때에는 지금처럼 차라리 확 내몰아 버리는 것이 오히려 더 빠르게 정신을 찾는 방법이다.
166. 늙었다더라
미래를 알기에 확신을 갖고 지시했다. 외부로는 건실해 보일지라도 반드시 틈이 있으리라.
그런데 돌아온 모습은 난색을 표하는 헤이스터스 의장의 표정일 뿐이었다.
[회장님. 이 문제는 정말로 다시 재고해보셔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여러모로 로키드 필름에 대해서 조사해보았지만, 도저히 약점으로 보이는 것을 찾아내지 못했습니다. 전혀요.]
[인수할 만한 약점이 조금도 없습니까?]
[네. 로키드의 사업 수완은 인정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는 타고난 사업가입니다. 로키드 필름은 이전의 바벨이나 넷플렉스와 달리 매우 건실한 회사입니다.]
말로하는 핑계가 아니라며 그는 자신이 조사한 것들을 차례차례 보여주었다. 헤이스터스 의장의 설명을 듣고 있으니 정말로 로키드 필름을 인수하는 것은 불가능해 보였다. 참으로 기이한 일이 아닐 수 없다.
분명히 미래에는 디지니가 인수 했다.
‘이유가 있으니 그런 일이 생겼는데 왜 나는 전혀 찾아내지 못하고 있는 걸까? 그럴만한 이유가 따로 있는 것인가? 만약, 회사가 아닌 개인의 문제라면?’
정해진 결과를 토대로 여러 가지 추리를 해보았다.
[하나만 묻죠. 조이 로키드 감독과 디지니 사이에 무슨 관계가 있습니까?]
[로키드 감독과 디지니요? 그야, 로키드 필름은 콘텐츠 제작사고 디지니는 영화 배급과 방송국을 모조리 가지고 있으니 관계는 이래저래 차고도 넘칩니다.]
[그렇게 당연한 것 말고 다른 건 없습니까? 공적이건, 사적이건?]
[음··· 회장님께서 자꾸만 물으시니 하나 떠오르는게 있기는 합니다. 예전에 이런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습니다. 그게··· 3D 애니메이션에서는 팩스···와 마이코닉스를 최고로 치지 않습니까?]
헤이스터스 의장은 묘하게 말을 늘어뜨렸다. 마이코닉스가 우리 회사이니 함께 말하다가 본인 스스로 무안함을 느낀 모양이다. 사실, 마땅한 경쟁자가 없는 상황이라서 마이코닉스를 팩스의 유일한 대항마 혹은 경쟁사로 치고 있을 뿐 객관적으로 볼 때 여전히 팩스는 넘사벽의 존재였다.
[그런데요?]
[그 팩스의 3D 아티스트들이 로키드 필름 출신이라고 하더라고요.]
원래 이 분야에 있는 사람들은 한 회사에 뼈를 묻으려 하지 않는 경우가 잦다. 한 회사에만 있으면, 그 회사의 특징만이 손에 익어서 나중에 새로운 프로젝트를 따라가기 힘들어지기 때문이다.
현재의 마이코닉스가 GF의 다양한 그래픽 작업을 도맡아 하는 이유 역시도 그런 문제를 해결함으로 아티스트들의 이탈률을 줄이기 위함이다. 그러니 팩스의 아티스트들이 로키드 필름 출신이라는 건 딱히 흥미로운 이야기는 아니었다.
[단순한 이직이 아닙니다.]
내 표정에서 별 관심이 없다는 것을 느꼈는지. 헤이스터스 의장의 말이 빨라진다.
[아티스트들이 먼저 이직을 선택한 것이 아니라, 로키드 필름에서 먼저 제의했고 팩스와 아티스트들이 그걸 받아들이면서 이직을 하게 된 경우입니다.]
이러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그 외에는 더 없습니까?]
[팝 에이든 회장과 친분이 있는 거로 알고 있습니다.]
이런 것들이 중요한 정보인데, 이걸 몇 차례나 추궁한 뒤에야 떠올리다니. 아마도 기업 인수라는 관점으로 정말 로키드 필름에 대해서만 조사를 했던 모양이다.
[친분이라면? 원래 가까운 사이였다는 겁니까?]
[에이든 회장이 ABN 대표로 있던 시절에 로키드 필름의 인디아나 잡스가 드라마로 만들어졌습니다. 그때 함께 작업을 하면서 친분이 쌓였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별 것 아닌 퍼즐들이다. 그러나 이 퍼즐이 합쳐지면서 왜 로키드 필름이 디지니에게 인수 되었는지에 대한 답을 볼 수 있게 되었다.
[로키드 필름 말고 조이 로키드에 대해서 더욱 자세히 조사해보십시오.]
[조이 로키드 감독의 약점을 파헤치라는 말씀이십니까?]
[그런 의미가 아닙니다. 로키드 필름은 건실해서 어디에 넘겨지고 그럴 회사 아니라고 했었지요. 그런데 이 로키드 필름의 창업주인 로키드 감독은 지금 나이가 어떻게 됩니까?]
[조이 로키드는 1944년생이니 올 해로 예순 여섯··· 아! 슬슬 은퇴를 생각하고 있을 수 있겠습니다!]
사람이라는 게 그렇다. 나이를 먹으면 마음이 약해지기 마련이다. 지금까지 힘들게 일해 온 만큼 이제는 조금 내려놓고 쉬고 싶다는 생각이 들기 마련이다.
*
라드 헤이스터스가 로키드에 대해 조사를 시작하고 일주일이 지났을 무렵, 뜻밖의 인물이 찾아왔다.
[안녕하시오? 조이 로키드라고 하오만.]
[반갑습니다. 윤태식이라고 합니다.]
깜짝 놀랄 수밖에 없는 이름이다. 대체 왜 이 타이밍에 이렇게 찾아 온 것일까?
예고도 없는 방문이었지만, 우선 환대하고 보는데 조이 로키드의 눈썰미는 이런 내 감정을 단박에 알아차린 모양이다.
[많이 놀란 모양이구려. 왜? 사람을 붙이기는 했어도 먼저 찾아 올 줄은 몰랐소?]
[···!]
[요 며칠 부쩍 주변에 사람들이 늘어나더군. 딱히 누군가에게 원한을 살만한 잘못을 한 적은 없었는데 참 이상한 일이었지. 하여 역추적을 하고 그 꼭대기를 캐보니 여기가 나오더이다.]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주변에 사람이 붙었다면, 누구라도 불쾌할 상황이다. 여기서 나는 시작부터 어긋났다는 생각이 들었다. 건실한 회사인 만큼 말이 통할 다른 단서들을 찾아내고자 애쓰는 중이었는데 정작 당사자의 분노를 사게 되었으니 말이다.
‘영화감독이면서 영화감독 빼고는 다 잘하는 인물이라더니 그 소문이 정말이었군. 헤이스터스 의장이 남의 뒤를 캐는 방면으로는 썩 재주가 없는 것도 같고.’
조이 로키드가 영화계에서 전설적인 인물인 만큼 감독으로의 능력도 좋다고 흔히 착각하지만, 사실 그는 남들이 생각하지 못하는 상상속의 세계를 만들어내는 것에 특화된 인물일 뿐이다. 이 노인네는 정작 자신이 상상한 이야기를 영화로 풀어내는 데에는 전혀 재능이 없었다.
‘스페이스 워즈 후속작도 감독판은 너무 엉성했었다지.’
너무 형편없어서 편집자들이 다 뜯어고쳤고 그 덕분에 대박을 냈다는 사연이 있었다. 이렇듯 영화감독 빼고는 죄다 잘하는 이 노인네는 내 움직임을 알아차리자 단판을 보려고 몸소 출두하기까지 했다.
[이 타이밍에 굳이 내게 사람을 붙인 거라면, 이유야 뻔할 터.]
나는 아무런 대답을 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는 이미 알고 있다는 듯 먼저 선언하듯 대화의 종결을 고했다.
[GF. 보다 정확하게 윤 회장 당신은 로키드 필름을 제대로 이끌어갈 수 있는 경영자가 아니오. 허튼 행동은 이쯤에서 그만 두시오.]
[이유가 있습니까?]
[미다스의 손, 넷플렉스, 마이코닉스, 그리고 바벨. 손만 대었다 하면 히트작을 만들어내는 괴물 사업가. 거기에 이번에는 SF 호러 드라마까지도 성공으로 이끌었다 들었소.]
[그렇습니다만, 아직 부족한 점이 있다 보시는 것 같군요.]
[우리 로키드의 작품들은 다들 각자의 생명이 살아 숨 쉬고 있소. 그런데 내가 알아본 GF는 조금 다르더군. 각자의 생명이 아니라 전체가 합쳐져서 하나의 생명으로 살아가는 형태요.]
그의 말이 맞다. 애초에 개개인보다 단체를 중요시하는 동아시아 특유의 문화 때문이라고 할까? 한국인 경영자인 내게는 개별적인 사업체가 유기적으로 움직이기보다는 하나의 덩어리로 움직이는 것이 훨씬 매력적으로 느껴진다.
그렇기에 GF그룹은 그의 말처럼 모두가 뭉쳐서 하나의 생명으로 살아간다. 조이 로키드는 바로 이점을 짚었다.
< 늙었다더라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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