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999년 게임 스타트-511화 (511/577)

< 하나의 다양함 >

[둘이 다릅니까?]

[다릅니다. 영화 산업에서 가장 큰 규모의 기업이시니까 잘 알고 계실 텐데요. 일명 블록버스터라 불리는 영화들은 주요 장르가 무엇입니까?]

[액션 영화지요.]

[그 액션을 남배우보다 여배우가 잘 합니까?]

[톰 레이더와 같은 영화를 보면 충분히 동등할 수 있습니다.]

[그럴 리가요. 관련 장르에서 성공했을 뿐, 수익은 남자가 주인공인 영화의 성공작과 비교하면 절반도 안 됩니다. 상업 영화는 인종에 대한 복지를 위해 만드는 게 아니라 상업적으로 돈이 되느냐를 중요하게 봅니다. 그리고 돈이 되려면 작품이 재미있게 잘 만들어져야 합니다.]

바람직한 결과를 위한 최선의 선택이 이루어져야 한다.

올바름을 위한 불공정함이 아니라 틀린 것을 바로잡는 공평함이 바람직한 것이다.

[액션 영화는 무엇보다도 액션이 중요합니다. 만약, 액션을 남자 배우들과 같은 조건으로 동등하거나 그 이상의 퀄리티를 낼 수 있는 여배우가 있다면 그런 영화는 일찍부터 제작되었을 겁니다. 그런데 모두가 잘 알다시피 그런 영화는 만들어지지 않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여자에 대한 차별 때문이 아니라 남배우와 동급 이상의 액션을 소화할 수 있는 여

배우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직함에 맞는 능력을 갖췄다면 감투를 씌워주는 일에 누가 불만을 표하겠는가. 여자라는 이유로 탈락했다면 그런 사회는 지탄을 받고 철저하게 반성해야 한다. 단지, 서너 명이 달려들어도 범죄자 하나를 검거하지 못하는 무능한 경찰이 할당된 빈자리를 위하여 채워서 넣는 것이 문제일 뿐이다.

[고난도의 액션을 소화하는 여배우가 없으니 그런 시나리오를 쓰는 사람이 없고, 그런 시나리오가 없으니 영화가 안 나오는 겁니다. 그런데 억지로 그 비율을 맞추기 위해서 영화를 만든다고 하신 겁니까? 맙소사. 그럼 그 영화에 투자한 투자자들의 돈은 누가 책임집니까?]

맡은 바 임무를 다 할 수 있는 실력자면 된다. 이건 어떤 분야건 공평하게 통용되는 이야기다. 무능한 사람 말고 유능한 사람을 쓰자는 것!

[당신의 가치를 위해서 차별받게 된 이들이 있군요. 투자자들과 그들의 돈 말입니다. 제작사로서 돈에 대하여 책임감을 느껴야 하는 줄 알았는데, 그렇지 않은 부류도 있기는 한 모양이군요.]

방청석이 야유를 멈추고 자기들끼리 대화를 하느라 스튜디오 전체가 소란스러워졌다. 그러나 에이든의 표정에는 당황의 기색이 없었다. 그도 알고 나 역시도 잘 아는 까닭이다. 방송에서의 토론은 우호 세력을 공고히 하고 적대 세력을 완파하기 위해 이루어지는 게 아니라는 것을 말이다.

논리와 이성으로 무장한 채 승패를 인정하고 깨끗하게 물러나는 아름다운 모습은 현실에서 존재하지 않는다고 보면 된다. 승자라 하여 영광적이지 않고 패자라 해서 무조건 참회하는 일은 없다.

‘극악무도한 살인마조차도 자신의 살인에는 합리적인 이유가 있다고 하지. 사기꾼도 피치 못할 사정이 있는 법이고. 개과천선이 쉬운 일이면 책에 실렸을 리가 없잖아. 기록으로 남겼다는 건 그만큼 드문 일이라는 증거야.’

에이든과 나 역시 마찬가지다. 이 자리는 비즈니스의 일면 중 하나에 불과했다. 인간은 누구나 이익을 위해 움직이니 ‘저놈보다는 나를 선택하는 편이 너에게도 이익이 될 거다! 우리 편이 되어 달라!’고 하는 일 말이다.

다만, 내게 유리한 점은 에이든이나 현시점의 여러 사람에게는 지금과 같은 주제의 토론 경험이 없다시피 하다는 것이다. 반면에 나는 변형된 페미니즘을 비롯하여 장차 일어나는 여러 가지 사태를 똑똑히 목도했다.

‘이건 탱고나 무협 영화의 비무나 마찬가지야. 이 말을 하면 저 말로 대응하고 또 다음에는 무엇이 이어지는 지가 뻔하게 정해져 있지. 할 수 있는 논리는 어차피 거기서 거기고 죄다 논파하는 대응 방식이 존재해.’

이윽고 예상했던 대로의 답변이 에이든으로부터 흘러나왔다.

[그 말씀은 결국 넷플렉스에서는 인권 약자에 있는 사람들을 위한 영화를 제작하지 않으시겠다는 말씀이시군요?]

[제 말이 그렇게 들렸을 줄은 몰랐습니다. 우선 대답부터 드리자면 아니라고 하겠습니다.]

[아니라고요? 그럼, 앞에 말씀하신 것들은 뭡니까?]

[당장 그런 영화를 제작하지 않겠다는 말이지 앞으로도 계속 제작하지 않겠다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예컨대 식량부족으로 영양소가 부족한 사람들이 많다고 해봅시다. 이들에게 산에 있는 멧돼지와 사슴을 닥치는 대로 잡아서 주면 어떨까요? 당장이야 좋을 겁니다. 그런데 그게 길어지면 어떤 결과가 생기겠습니까?]

에이든이 어처구니가 없다는 듯 조소를 지었다.

[영화 산업에 대한 이야기에서 갑자기 식량부족 이야기로 빠집니까? 이건 논점이탈이 아닌지?]

[논점이탈이라니요. 상관이 있으니까 하는 말입니다. 주는 대로 받아먹던 사람들은 결국 그대로 얻어먹는 것에 익숙해질 거고 결국 멧돼지와 사슴은 멸종하게 될 겁니다. 사슴이 멸종하면 그 사슴을 잡아먹던 포식자도 멸종하게 되고 이런 식으로 생태계는 단계적으로 망가집니다. 이 현상을 가시적으로 발견하였을 때는 이미 되돌릴 수 없는 결과만이 우릴

기다리는 시점일 테지요.]

말을 잠시 멈추고 주변을 둘러보았다. 길게 계속 설명을 하는 것보다 이렇게 잠시 시간을 두는 것이 훨씬 주목을 받는 것에 효과적이다.

[산업도 똑같습니다. 인프라가 완성된 후 다시 되돌리려면 몇 배의 자원과 시간이 필요하게 됩니다. 즉, 처음부터 제대로 된 인프라를 구축해야 합니다. 저는 처음부터 무리하게 인권 약자를 위한 콘텐츠를 찍어내고 싶은 마음 따위는 없습니다.]

‘그러나’라며 이 말을 강조했다.

[억지로 그 자리에 앉혀두지 않아도 그 자리에 오를 재능이 있는 사람. 이러한 이들을 찾아내어 재능을 피울 수 있는 인프라를 만들 겁니다.]

[참으로 장황한 예시였으나 의도는 이해했습니다. 결국 우리는 서로 같은 이야기를 하고 있고 GF도 디지니와 함께 하리라 확신하게 되는군요. 언급하신 그 인프라를 구축하려면 우리 같은 대형 미디어 기업에서 인권 약자들을 위한 콘텐츠를 꾸준히 만들어주어야 가능하니까요.]

에이든은 ‘너희와 우리는 달라’라는 기색을 역력히 보이며 말했다.

[우리 디지니 역시 지금까지는 백인 공주 위주의 시리즈를 다루어왔습니다. 하지만 이제부터는 다양한 공주들을 만날 수 있도록 할 예정입니다.]

‘오! 맙소사. 그 얘기로군.’

아직은 나오지 않았으나 미래에는 보게 될 변형된 동화의 장면들이 뇌리를 스쳤다.

[어떤 식으로 다양한 공주를 할 계획입니까?]

[제가 그걸 여기서 밝힐 이유가 있습니까?]

[우려되는 점이 있어서 그러는 겁니다. 아마도 새로운 공주의 이야기를 만들거나 이미 있는 공주의 피부색을 바꿔서 만드는 것. 이 둘 중 하나겠지요.]

따지고 보면 디지니는 저 두 가지를 전부 한다. 그 덕분에 흑인 인어공주를 보면서 ‘내가 아는 인어공주 아니야!’라고 울음을 터트리는 아이들이 나오곤 했으니까.

‘누가 보면 내가 흑인을 무진장 싫어하는 줄 알겠네.’

흑인이라서 다른 감정이 있고 백인, 황인이라고 특별하다는 투의 잡담이 아니다. 디지니가 보이는 선택들에 대해 비판을 하려는 것이다. 이들은 흑인 인어공주 작품을 만들었다. 그 내용은 인권운동가들에게 보여주기식의 콘텐츠였기에 괴리감이 있고 완성도 역시 구설에 올랐다.

한편, 그리 선택했으면서도 여전히 굿즈는 상품성이 좋으면서도 익숙한 붉은 머리의 백인 인어공주로 제작해서 판매했다.

내 가치관으로는 이렇게 생각한다. 최소한 흑인 인어공주를 준비했다면 그때부터라도 모든 굿즈의 디자인을 바꾸었어야 했다. 하지만 굿즈는 전혀 다른 캐릭터를 판매해놓고 갑자기 영화에서는 흑인이라고 하는 건 얄팍한 상술에 불과하다.

소비자에 대한 기만이며 사기행위라고까지 볼 수 있을 것이다.

‘해당 캐릭터가 어떻게 만들어지든 자신들이 추구하는 이념에만 맞으면 무조건 오케이인 인권단체의 입맛에 맞춰주느라 정작 그 캐릭터를 사랑하고 아끼는 팬들을 무시하는 행위.’

미디어가 그따위로 돌아가는 것이 꼴 보기 싫은 거다.

[많은 사람에게 사랑받는 금발의 신데렐라가 있습니다. 인권 약자들에게 힘을 주기 위해서 그녀를 흑인으로 바꾸었다고 가정합시다. 훌륭하신 선택이지요. 그런데 이를 어찌합니까. 의도가 좋았던 이 작품이 시장에서 외면을 받아버린 겁니다.]

[당신의 그 발언 속에서 지독한 편견과 아집이 보이는군요. 금발 미녀가 흑인으로 바뀌면 무조건 망한다고 봅니까? GF가 빠져있는 심각한 이념이 진심으로 우려됩니다.]

[앞서 언급한 한 단어를 빠뜨리지 말아주십시오. 그렇게 가정해 보자는 겁니다. 실제로 망하는 이유가 흑인인 것이 아닐 수도 있을 겁니다. 하지만 사람들에게 익숙한 신데렐라가 아닌, 다른 모습의 신데렐라라면 조금의 실수도 큰 실망감으로 다가올 겁니다. 위험요소가 훨씬 크다는 것. 이 가능성조차 부정하지는 않으시겠지요?]

[그렇다고 칩시다.]

[만약 이렇게 영화가 망하고, 또 망한다면 인권 약자를 위한 영화가 나올 수 있겠습니까?]

한국의 예이기는 하지만 성냥팔이 소녀의 강림과 제8광구를 떠올려 보면 된다. SF와 괴수물에 대한 투자를 꽁꽁 얼리고 영구동토에 박아버리는 데 지대한 업적을 이루었다. 못 만든 작품이란 이렇게 무섭다.

[시장은 잔인합니다. 결국 대형 영화를 위해선 투자자가 필요하고, 그건 디지니 역시 다르지 않습니다.]

디지니가 거대한 회사이긴 하지만 1년에 수십 개의 영화와 드라마를 만드는데 그 모든 자금을 직접 댈 정도로 돈이 넘치는 건 아니다. 또한, 할 수 있다고 하더라도 사업가라면 그런 선택을 해서는 곤란하다.

나처럼 미래를 장담할 수 있는 사람이 아니라면 사업실패의 리스크는 항시 존재한다고 봐야 바람직하다. 즉, 확신 없는 작품은 리스크 분산을 위해서라도 투자를 받아야만 한다.

그런데, 계속되는 실패를 보이는 분야가 있다면?

그런 실패를 거듭하는 작품의 회사에 누가 투자를 할까?

‘물론, 내 눈앞에 있는 이 거만한 자식은 떵떵거리며 잘 나가지만.’

공격을 위해 말을 이렇게 했을 뿐, 사실 디지니의 미래는 창창하고 광명이 비춘다. 망작 따위는 씹어 먹을 만큼 훌륭한 아이피들을 모조리 보유하고 있는 회사인 데다가 걸작을 만들어 낼 모든 역량을 갖춘 곳이기 때문이다.

‘생각하니까 열 받네. 이 승승장구하는 디지니가 내 유년 시절의 추억을 송두리째 날려버렸단 말이지. 그런 주제에 돈은 잘 벌고.’

대표적으로는 스페이스 워즈가 있다. 광선검과 포스로 잘 알려진 이 작품!

스페이스 오페라 장르 역사상 최고의 시리즈물이라 할 수 있는 영화를 디지니는 화끈하게 망쳐 버린다. 그러나 엄청난 수익을 매년 갱신했다. 기술력 끝내주는 이놈들이 정작 작품에 대한 존중이 없는 녀석들임을 거듭 느끼게 되는 부분이 아닐 수 없었다.

‘맞아. 그러고 보니까 아직 로키드 필름은 얘네가 인수 안 했지?’

좋다. 기왕 이렇게 된 거 로키드 필름도 인수해버리는 방향으로 가는 게 좋겠다. 내가 원래 이 일을 잘해서 지금의 위치에 오르지 않았던가.

안 될 놈 되게 만들고, 될 놈은 더 화끈하게 성공 시켜 버리는 일.

스페이스 워즈도 그 대열에 포함해서 미래의 그 졸작은 꼭 막아내고 말겠다.

[인권 약자들은 분명 도움을 받아야 합니다. 하지만 당신들의 방법은 그들이 스스로 능력을 발휘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들은 진짜 약자의 새로운 공간으로 몰아넣는 방법입니다.]

[약자는 당장 홀로 서지 못하였기에 약자입니다. 스스로 능력을 발휘하기 위해서는 우선 그 기회를 주어야 합니다. 새로운 공간은 고립이 아닌 선택의 발판이 될 것이며 저들에게도 가능성을 주는 배려의 일환입니다.]

무대에서의 춤처럼 그와 나는 서로의 차례마다 필요한 대화를 이어나갔다. 여러 통계와 논리들이 언급되었으나 이것 하나만큼은 결코 변함이 없었다.

[당신의 방법에 절대 동의할 생각이 없습니다.]

나는 맞고 너는 틀렸다는 것이었다.

무조건!

< 하나의 다양함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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