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999년 게임 스타트-507화 (507/577)

< 하나의 다양함 >

*

최고의 작가를 모시고 지금은 잊힌 과거의 할리우드 스타들이 참여하여 쏘우리스트의 감독이 직접 연출한 데들리 스페이스가 비로소 대망의 비공개 시사회를 가졌다.

어두운 극장의 객석에는 진행된 관계자들과 소수의 언론인만을 초대했다. 이윽고 시사회의 관객들은 드라마가 전개되면 될수록 침묵 속으로 빠져들어 갔다.

[으악!]

[깜짝이야!]

가끔 들려오는 소리는 낮은 신음과 여러 감정이 뒤섞인 탄식이었다. 좌석에서 몸을 떠는 이들이 많았고 혹은 너무 놀라 소스라치며 비명을 지르는 이도 있었다. 제작자의 심정으로 이보다 마음에 쏙 드는 진풍경은 없을 것이다.

‘배우를 폄하하는 건 아니지만, 역시나 작품은 대본과 감독이 만들지.’

빙의했다고 여겨질 만큼의 완벽한 연기.

메소드라 하는 깊은 몰입의 단계를 이루고 극 중 인물을 100% 살려내는 배우의 연기는 물론 칭찬받아 마땅한 전문가의 영역이다. 그러나 한글을 소재로 한 미래의 ‘나랏말씀’이라는 사극 영화를 통해 나는 크게 실감한 적이 있었다.

아! 끝내주는 배우가 환상적으로 연기해도 대본과 감독이 저래 버리면 답이 안 나오는 거구나!

처음에는 ‘왜 저 배우는 저런 걸 찍은 걸까?’라는 의문이 가득했었지만, 잠시 후 알게 된 건 연출하는 이들의 중요성이었다. 완벽한 작품에는 모든 요소가 완벽해야 하지만, 중요도의 순서를 따지자면 극작가, 연출가, 배우의 순서다.

“맞다. 게임 캐릭터와는 여러모로 다른 여배우 때문에 제법 실망한 워쳐도 있었지. 이걸 보면 배우의 역할도 엄청 중요하고.”

정정한다.

다 중요하다. 전부 다.

아무튼, 제이스는 사람들을 깜짝 놀라게 만들려면 어떠한 연출을 사용해야 하는지 천부적인 감각이 있는 연출가다. 그랬기에 관객들이 지루할 것 같으면 바짝 긴장의 끈을 죄는 연출을 넣어주고 또 긴장하다가 ‘별것 아니었잖아?’라며 방심하는 순간, 괴수가 튀어나와 간담을 서늘하게 만들었다.

긴장과 방심 그리고 놀람이 적절하게 배분되어 있는 완전체라 감히 말하겠다.

[어? 뭐야? 왜 여기서 끝나?]

[오늘 4편까지 보여준다고 하지 않았어?]

[···지금 4편까지 본 거야.]

[뭐?]

한 기자는 옆 사람의 말에 깜짝 놀라며 자신의 시계를 확인했다.

[맙소사! 벌써 6시간이나 지났잖아? 전혀 그런 느낌을 못 받았는데.]

[나도 깜짝 놀랐다. 벌써 시간이 이렇게 지났을 거라고는 생각지도 못했어.]

[이게 게임으로 만든 드라마란 말이지? SF라고는 창립하고 처음으로 만든 회사의 작품이고?]

[믿을 수가 없다. 이게 말이 되나 싶고. 정말 처음으로 만든 작품의 수준이 이렇다니. 누구를 섭외했니 뭐니 하며 홍보를 자신만만하게 한 이유가 있었구나.]

[의외로 다시 볼 게 정말 많아.]

[과연 거장이다. 레이첼은 정말 이름값을 톡톡히 했어. 반가운 얼굴들도 보았고.]

[나는 제이스 완이 한물간 줄 알았거든. 솔직히 쏘우리스트 빼고 그가 제대로 한 게 뭐가 있기는 해? 그런데 반짝스타였다는 평가가 이번에 왕창 무너지겠군.]

[이거 나가고 나면 사람들이 그 평가 수정하느라 정신없겠다.]

[으으! 빨리 기사 쓰고 싶다. 이건 내가 먼저 써서 내보내야 하는 건데!]

소수의 언론인만 초대한 만큼 기사를 내보내는 것은 넷플렉스의 철저한 통제 속에 나갈 수 있다. 엄중한 약속을 하고 진행한 시사회이니 이 약속을 어긴다면 앞으로 다시는 이런 초대를 받을 수 없게 된다.

기자들은 아쉽더라도 당분간은 입을 닫아야 한다는 점을 속상해했다.

[그래도 약속만 잘 지켜주면 며칠 후 있을 인터뷰에서 질문 우선권 주겠다고 했지?]

[그거 믿고 기다려 보자.]

오늘 드라마를 관람한 기자들은 모두 이 드라마의 대박을 확신하고 있었다. 그 말은 이후 진행될 제작진 인터뷰 역시 꽤 큰 화제를 부를 수 있다는 이야기가 된다.

“아무렴. 나한테 그리 재밌었는데 남들한테도 끝내줬겠지.”

내가 좋고 네가 좋으면 세상의 절반은 좋아하는 거다.

시사회를 마치고 돌아가는 기자들은 각자 오늘 본 드라마를 어떻게 기사화해야 다른 기자들보다 더 많은 반응을 이끌어 낼 수 있을까를 고민해야 할 것이다. 저들 사이의 경쟁에서 이길만큼 훌륭한 문구가 많이 나와주기를 기대한다.

*

넷플렉스의 휴게실.

그곳에는 잘 차려입은 남성이 초조한 모습으로 앉지도 못하고 뱅글뱅글 한 자리를 맴돌고 있었다.

[누가 이렇게 불안 증세를 보이나 했더니, 마크 아냐? 왜 그러고 있어?]

[알버트.]

드라마 데들리 스페이스의 주연급인 마크 마르티네즈.

그와 알버트는 이번 데들리 스페이스를 통해 안면을 튼 후 지금까지 친분을 이어가게 되었다. 이는 전적으로 알버트가 특유의 능글맞은 성격으로 두루두루 인맥을 다져놓은 덕분이기도 했다.

함께 하면 좋고 유쾌하며 즐거움을 주는 인물이 알버트인 만큼 다른 이들도 흔쾌히 반겼다.

[조금 있으면 데들리 스페이스 시즌 2에 대한 발표가 있잖아. 그게··· 어떨지··· 으아아! 진짜 불안하지 않을 수가 없다고.]

[에이. 당연히 풀 시즌으로 확정 나는 거지. 뭘 그런 걸 가지고 걱정을 하고 있어.]

[그렇게 낙관적으로만 생각할 수 없다니까?]

마크는 잘생긴 외모 덕분에 데뷔 초부터 전형적인 바람둥이 꽃미남의 역할로 빠르게 할리우드에 자리를 잡았던 배우다. 하지만 배우 생활이 길어질수록 오히려 이 부각된 장점들이 그의 발목을 잡기 시작했다.

‘마크’라고 하면 ‘꽃미남 바람둥이’라는 이미지가 지나치리만큼 확실하게 각인된 것이다. 그러니 이미지의 소모가 막심했고 이와 유사한 배역만 주야잔천 하다 보니 연기력이 썩 훌륭한 편이었음에도 ‘마크는 어디에 나오건 다 똑같지.’라는 조롱과 함께 발연기의 상징이 됐다.

대중이 가장 원하는 모습이자 감독들이 그에게 요구했던 역할이라는 말은 조금도 변명거리가 되지 못했다.

덕분에 2000년대에 들어서면서부터 마크에게는 제대로 된 작품 제의가 들어오지 않았다. 또한, 이러한 추락에는 그의 작품 보는 선구안이 형편없다는 점도 크게 한몫했다. 어찌어찌 영화에 들어가면 전부 망해버리기 일쑤였다.

그 결과, 1990년대에는 꽃미남 배우로 나름 유명했으나 현재는 먼지와도 같은 인지도를 가진 왕년의 할리우드 배우 중 하나가 되었다.

넷플렉스의 드라마인 데들리 스페이스는 이런 마크에게 들어온 기회이자 진짜 제대로 된 작품이었다. 그는 어떻게든 이 작품을 통해서 자신의 새로운 모습을 보여주고 싶은 마음이 굴뚝과도 같았다.

[알잖아. 이번에 풀시즌으로 확정되지 않으면 가장 먼저 리타이어하게 될 배역이 나라는 거.]

머리를 감싸고 자꾸만 머리칼을 쓸어넘기게 된다. 불안하고 초조하다.

마크는 말만 주연급일 뿐, 실상 주인공은 아니었다. 시즌 2가 어떠한 형태로 진행되는지에 대해서는 배우들에게도 제대로 알려지지 않았지만, 그래도 기본적인 스토리의 틀 덕분에 배우들 사이에서 퍼지는 소문들이 있다.

그중 가장 유력한 것은 ‘시즌2가 짧아지면 짧아진 분량 안에서 스토리를 다 담기 위해 배역을 줄일 것’이라는 소문이다. 마크가 맡은 배역인 라몬은 데들리 스페이스 속의 이야기보다는 라몬이라는 캐릭터가 가진 액션성과 성격에 더 많은 집중을 하고 있으니 버려진다면 1번 타자는 무조건 그가 맡아놓은 셈이었다.

정말 열심히 했다. 마크가 아닌 라몬의 삶과 정신세계를 만들며 미칠만큼 몰입했다. 인생 연기라도 해도 좋을 온 힘을 다했다. 그래서 걱정이 없어진 게 아니라 더욱 커졌다.

이래도 실패한다면, 앞으로 자신은 뭘 해도 성공하기 어려울 테니까.

더 잘할 자신이 없다는 느낌은 후련함 대신 암담함을 줄 것이다.

[에이~ 그런 걱정 할 필요 없다니까 그러네? 다른 건 몰라도 GF의 실력은 믿어볼 만 하다고. 여기 회장이라는 친구가 놀랍게도 실패랑은 태평양만큼 거리가 멀거든.]

[알지. 그래도 혹시 모르니까.]

[화려하게 부활할 거야. 나를 보라고.]

[아아··· 제발 그랬으면 좋을 텐데··· 느낌이······ 아아······.]

알버트는 마크의 기분을 풀어보려 어떻게든 밝게 이야기를 해주었으나 시간이 다가오면 다가올수록 더욱 초조해지는 마크에게는 더 이상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그리고 10분 후, 결국 올 것이 왔다.

회의장과 휴게실의 거리는 매우 가까웠다. 회의장이 문이 열리는 소리가 휴게실까지 다 들렸던 것이다. 마크의 귀가 토끼처럼 쫑긋 세웠다.

[제이스! 축하해요~!]

[거 봐. 이번에는 제대로 만들어졌다고 했잖아!]

[만장일치라니!]

[이 분위기면 시즌 5까지는 거의 무난하게 제작되는 거 아냐?]

하하하하-!

샴페인 터지는 소리만 없었을 뿐, 웃음이 복도를 쩌렁쩌렁 울릴 정도였다. 더 들을 필요도 없다. 시즌 2는 풀 시즌으로 제작 예정이 된 것이다.

[감사합니다. 오! 감사합니다.]

순간 다리에 힘이 풀린 마크가 두 손을 모으며 알 수 없는 미지의 존재에게 깊이 고마움을 전했다. 지금, 이 순간에는 종교의 차이나 민족 구분도 그에게는 상관없었다. 마냥 고맙고 감사할 따름이다.

[축하해.]

자리에 주저앉은 마크를 ‘내가 그 심정 잘 알지’하는 눈으로 알버트가 보았다. 실제로 마크의 뇌리로는 지난 10년의 어려움과 서러움이 스치고 있었다.

추락, 조롱, 질시, 노력의 배반과 실패.

그 세월이 10년 만에 종지부를 찍었다. 자신이 참여한 작품이 제대로 인정받았다. 그 사실이 은근히 움츠렸던 어깨를 당당하게 펼 수 있도록 만들어 주었다. 이제 자신은 실패자이자 왕년의 배우가 아니다.

그로부터 10일 후.

회색톤에 체크무니가 있는 정장에 하얀 셔츠를 정성스레 차려입은 마크는 조심스레 시사회장으로 향했다. 이전의 비공개 내부 시사회와는 달리 VIP와 다양한 언론사에 초대장을 보낸 후에 진행하는 진짜 시사회다.

제대로 대중들에게 이번 작품을 공개할 기회에 그의 심장이 마구 요동쳤다. 하지만 10일 전의 두근거림과는 다르다. 긴장과 불안감은 티끌만큼도 없었다. 지금 수군수군하는 반응만 보아도 여실히 알 수 있다.

[이번 시사회에 처음 초대된 기자들은 다들 물 먹은 거라며?]

[그렇다니까? 이미 넷플렉스와 친한 기자들은 전에 초대받아서 한 번 관람하고 오늘 써낼 내용을 죄다 정리한 후라고 하더라.]

[망할 새끼들. 이딴 식으로 일을 진행해도 되는 거야? 차별이라니!]

[웃기지도 않아. 이 자식들이 나름 배려랍시고 이번 시사회 전에는 관련된 내용으로 기사를 못 쓰게 막았단다. 진짜 눈물 나게 고맙지?]

[고마워서 내 주먹이 부들부들 떨리는 거 보이냐?]

[젠장! 기사가 먼저 나가지 않도록 막으면 다 되는 건가?]

[보나 마나 병신 같겠지. 제이스 완은 초심자의 행운으로 첫 작에 대박 하나 내고는 그 이후로 영화판에서 완전 망작만 찍어내던 감독이잖아. 출연진들도 죄다 똑같은 부류들이고. 이렇게 보니까 완전 웃긴데? 어떻게 짧은 한때만 유명했던 사람들로만 구성한 거지?]

[GF에서 자선단체라도 만들었나보지. 아니면 동양인이 갖는 할리우드의 환상을 이런 식으로 풀거나. 유명한 배우는 못 쓰니 한물간 싸구려들을 모아서 수프를 만드는 거 말이야.]

[그거 기사 제목으로 딱 좋네. 버림받은 자들의 작품! 추락에는 끝이 없다!]

[기대해도 좋아. 이거 끝나면 내가 빛의 속도로 작성해서 전 세계에 웃음거리가 될 수 있도록 만들어 줄 테니. 여기 출연진들이 망한 전적만 모아도 다들 기절할 거라고.]

시사회장으로 들어가는 마크의 귀에 선택받지 못한 기자들의 울분 섞인 대화가 들려왔다. 저주나 다를 바 없는 마구잡이 잡담에 불쑥 화가 치밀었지만, 그는 입을 꾹 닫았다. ‘뭐 하나라도 걸리기만 해봐라.’라고 눈을 까뒤집고 있는 이들에게 괜한 기사 소재를 줄까 저어된 것이다.

게다가 이제는 그도 확신이 생겼다. 저속한 자들이 어떤 악감정을 품고 있더라도 이 모든 것을 박살 낼 만큼 훌륭한 작품이 완성되었다는 것!

눈알이 제대로 달려 있고 상식이 존재한다면 오늘 시사회를 보고 나면 칭찬 말고는 할 말이 없을 것이다.

그렇게 들어간 시사회장.

‘저분이시다.’

객석의 맨 앞 중앙에는 마크에게 새로운 기회를 준 윤태식 회장이 앉아서 웃음 가득한 표정으로 무대를 보고 있었다. 그의 시선에 마크가 들어오지는 않았지만, 마크는 혼자서라도 그에게 고개를 숙여 인사를 하고는 자리에 앉았다.

이윽고 드라마가 시작됐고 시간을 뭉텅이로 지워버린 것과도 같은 마법이 발휘되었다.

< 하나의 다양함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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