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하나의 다양함 >
165. 하나의 다양함
한국에서 첫 모습을 보인 GF콘이 온갖 화제와 뜨거운 후기를 남기며 성황리에 마무리가 될 즈음, 미국에서는 데들리 스페이스의 촬영이 끝났다는 보고가 들어왔다.
‘영화는 주연 배우가 큰 영향력을 가지지만, 드라마는 배우보다는 스토리와 연출의 영향력이 훨씬 큰 장르지.’
모든 곳에서 통용되는 말은 아니나 북미에서만큼은 확실히 그랬다. 이런 면에서는 아주 다행스러운 점이 레이첼의 존재였다. SF 판타지계의 거장이 직접 스토리를 집필한 만큼 데들리 스페이스는 스토리적인 측면에서 조금도 걱정할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멋진 드라마를 만들기 위한 남은 필수 요소는 연출뿐인데, 이 부분에서도 나는 아주 깊이 믿음직한 보증수표를 사용했다.
제이스 완.
쏘우리스트부터 나와 인연을 맺었던 그에게 데들리 스페이스의 연출을 맡겼다.
“우리 회사는 내가 놀아도 아주 잘~ 돌아간다는 말씀.”
인사 배치를 제대로 한 과거의 나에게 아낌없이 칭찬해주자.
나는 국내 일을 일단락 짓고 데들리 스페이스의 중간 결과를 점검하고자 미국으로 향했다. 그리고 제이스 완의 편집실에 들어섰다가 코를 잡고 말았다.
[맙소사. 분위기가 이게 뭡니까?]
편집실 내부의 풍경부터 거주민의 몰골에 이르기까지 그야말로 가관이었다. 햄버거 및 빈 콜라들을 비롯한 패스트푸드 껍질부터 생활패턴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쓰레기가 난잡하게 깔려 있었고 의자는 기름칠을 새로 해야 할 몰골로 비명을 지르는 중이었다.
‘왜 여기서 진상 짓이래?’
수면실을 비롯한 다양한 휴게 공간이 고작 10걸음 거리에 있건만, 제이스 완은 휴게실에 가는 것조차 외면하고 오로지 편집실에서 숙식을 모조리 해결하고 있었다. 당연하게도 편집실 내부는 음식 냄새와 한국인에게는 정말 낯선 이국적인 땀 냄새가 풀풀 풍겼다.
환기조차 않는 바람에 고약하기는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였다.
[그게······.]
[솔직하게 말해 보십시오. 얼마나 여기서 지낸 겁니까?]
[일주일 정도 됐습니다.]
대답 없이 응시했다. 그가 머리를 긁적이며 대답했다.
[괜찮습니다. 저는 원래 늘 작업을 이렇게 하거든요.]
내가 안 괜찮다.
[이 꼬락서니를 해 놓고는 그런 말이 나옵니까? 됐으니까 당장 여기서 나가세요.]
[네? 회장님! 제발 한 번만 봐주세요. 이제 청소도 꼭 하겠습니다. 더럽게 써서 정말 죄송합니다. 꼭 한 번만 기회를 주세요.]
편집실에서 나가라는 말이었는데, 제이스는 내 말을 해고로 받아들인 모양이다. 방금까지의 태도는 온데간데없이 필사적으로 말했다. 차마 지적하게 꺼려지는 어마어마한 침과 입 냄새가 뿜어져 나오니 구토가 날 지경이다.
나는 그의 앞에서 코를 막고 고개를 돌리지 않는 엄청난 에티켓을 발휘하며 간신히 말했다.
[잘렸다는 게 아니라 당장 샤워실 가서 씻고 오시라는 말입니다. 열심히 일하는 것도 좋지만, 이게 뭡니까? 건강한 사람도 폐병에 걸릴 지경입니다.]
[아닙니다. 저는 폐병 같은 건 조금도 무섭지 않아요.]
내가 무섭다고!
[그 말이 아니잖습니까. 적어도 사람 몰골은 하고 살아야 하지 않겠느냐는 겁니다.]
[제가 그럴 주제가 못 되고··· 또 사정이 좀··· 그래서······.]
자존감이 매우 떨어져서 자책하기까지 했는데, 일견 이해가 된다. 제이스 완의 전성기는 오래가지 못했기 때문이다. 쏘우리스트 1의 성공 이후로 2, 3, 4, 5 등의 시리즈 각본을 꾸준히 쓰면서 큰 매출을 달성했으나, 그는 새로운 시리즈 영화에 도전했고 처절하리만큼 무너졌다.
반면, 함께 쏘우리스트를 제작한 친구이자 각본가인 레이 워넬은 승승장구했으니 무능하다는 자신의 이미지부터 친구와의 비교에 이르기까지 돌파구가 절실했을 것이다. 데드 스페이스는 제이스 완에게 재기의 발판이며 놓칠 수 없는 기회인 셈이다.
‘장편 보장이거든.’
총 8편으로 제작된 데들리 스페이스는 이번 시즌의 성공 여부와 상관없이 2시즌의 제작을 보장받았다. 비록 결과에 따라서 시즌 2의 편수가 그대로 8편이 될 것인지 더욱 늘어나서 12편이 될 것인지는 결정하지 않았지만, 이를 초라하다고 누가 감히 말하랴.
‘이래서 추락해본 사람이 더욱 성공을 절절하게 갈구하는 건가.’
두 개의 영화를 연속으로 말아먹은 제이스 완. 그는 실패가 반복되는 악순환을 타파하고 본때를 보여주고자 이번 드라마에 모든 것을 갈아 넣고 있었다. 그에게서 내가 느낄 수 있는 건 일종의 집착과도 같은 기운이었다.
[다행입니다. 아무렴! 고작 이런 일로 회장님이 저를 해고하실 리가 없죠. 하하하! 그럼, 목욕은 딱 이것만 마무리하고 다녀오겠습니다.]
[안 됩니다. 당장 씻고 오십시오.]
[지금의 집중도를 그대로 이어가야 합니다. 이렇게 느낌이 딱 유지될 때가 많지 않아요.]
[지금 나와 대화하면서 드라마에 대한 집중력까지 유지하고 있다는 겁니까?]
[······.]
[말을 정정하지요. 1화 편집본은 확인했습니다. 충분히 만족스러우니 씻고 올 생각 마시고 당장 집에 가서 하루 푹 쉬십시오.]
1편부터 8편까지 한 번에 촬영한 데들리 스페이스는 현재 CG 작업과 편집을 함께하고 있다. 이 중 4편까지의 마무리 작업이 끝이 나게 된다면 그때 시사회를 열 계획을 세운 상태였다.
[하지만···]
[내가 보장합니다. 1편을 보기 전에도 제이스의 연출력을 충분히 믿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1편을 확인한 지금은 완벽하게 신뢰합니다. 제이스. 자신감을 가지세요. 데들리 스페이스는 반드시 성공할 겁니다.]
콘텐츠라는 분야가 다 그렇지만, 드라마는 1편에서 얼마나 많은 시청자의 마음을 끌어당길 수 있느냐가 아주 중요한 콘텐츠다. 그 때문에 일반적으로는 200억의 예산이 투입된다고 한다면 1편과 2편에 거의 절반에 가까운 예산을 쏟아낸다.
하지만 제이스가 누구인가, 그는 적은 예산으로 최고의 긴장감을 뽑아내는 데에 특화된 연출가다. 내가 확인한 데들리 스페이스는 1편부터 8편까지 거의 균등한 비율의 예산을 활용했음에도 놀랍기 그지없는 퀄리티의 1편을 만들었다.
장담하건대 감히 2009년 최고의 대작이라고 부를 만 했다.
[알겠습니다. 무려 미다스의 손께서 그렇게까지 말씀해주시니 이제야 안심이 되네요. 제가 이러고 있을 수는 없죠. 지금보다는 사람 같은 꼴을 하고 돌아오겠습니다. 감사합니다, 회장님.]
결국, 내 설득을 이기지 못한 제이스가 휴식을 취하기 위해 2주 만에 퇴근했다.
그가 떠난 편집실에 우두커니 있다가 나는 슬쩍 주위를 살피고는 조용히 화면으로 다가갔다.
‘편집이 얼마나 진행됐나 볼까?’
미디어 회사를 가지고 있는 것의 최고 장점!
남들이 보기 전에 가장 먼저 결과물을 확인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미 1편을 보고 굉장한 재미를 느꼈기 때문에 이후의 내용이 궁금했던 터다. 어찌 보면 미리 감상하고 싶은 마음에 제이스 완을 집에 돌려보낸 건지도 모르겠다. 다만 하나의 큰 장벽이 있었으니 비위생적인 환경이었다.
나는 문을 활짝 열고 사람이 앉을 만한 공간과 맡을 수 있는 최소한의 신선한 공기를 주입했다. 그리고 문을 꼭꼭 잠근 뒤 은근슬쩍 자리를 잡아 작업 중이던 제이스 완의 결과물을 확인했다.
‘4편을 편집 중이었구나.’
이 말은 2편까지는 확실하게 마무리되었고 3편은 CG 작업 마무리가 미흡한 상태라는 의미였다. 즉, 2편을 미리 볼 수 있는 것이다. 나는 기대감을 안고 2편을 재생했다.
드라마 데들리 스페이스를 기획할 때 가장 중요하게 여긴 부분이 게임과 연관성을 두되, 게임을 몰라도 재미있게 볼 수 있도록 제작해야 한다는 점이다. 이따금 원작의 팬을 지나치게 의식한 나머지 장면의 압축 및 생략으로 아는 사람들만 즐길 수 있는 작품이 나오곤 한다.
그러나 작품은 그 작품 내에서 완결성을 가져야 한다고 믿는다.
게임을 해보지 않으면 이해할 수 없는 드라마, 드라마를 보지 않고서는 이해할 수 없는 게임.
이것들은 나태하게 만든 실패작이다. 작품은 그 작품 내에서 완결성을 갖고 복선을 비롯한 추가적인 요소를 디테일하게 알기 위해서 다른 지식과 정보가 필요해야 좋은 작품이 된다.
그런 만큼 드라마를 보지 않아도 시리즈물이 안정적으로 이어갈 수 있도록 부탁했고 레이첼은 내가 원하는 바를 반영해 주었다. 즉시 데들리 스페이스 게임이 되는 배경을 중심으로 ‘왜 그러한 현상과 사건이 만들어졌는가?’를 상상하기 시작한 것이다.
데들리 스페이스의 프리퀄.
그 결과물이 바로 이것이다.
‘그래. 이 좋은 걸 꼭 보고 싶었고 다 같이 즐기고 싶었다고. 단순히 한정판에 당첨되는 정도로 성공학 덕후가 되는 게 아니야. 직접 만드는 내가 진짜 진짜 성덕이다!’
1편은 괴수의 첫 등장과 괴수가 가지고 있는 미묘한 공포감을 잘 표현했다. 직접적인 괴수와 인간의 접촉은 1편의 마지막에서나 등장하고 대부분의 내용은 괴수가 내뿜는 특별한 신호를 발견한 주인공이 신호를 따라 괴수를 찾아 나서는 내용이다.
전체 스토리 자체만으로 보자면 특별할 것이 없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레이첼 특유의 스토리텔링과 제이스의 완벽한 연출력이 합쳐지니 인물에 빠져들고 연출에 빠져들면서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보게 된다.
이후 마지막 씬에서는 괴수에 둘러싸인 주인공이 자살하고 마는데, 이건 내게 충격 그 이상의 감정을 선사했다.
“여태 주인공인 줄 알았는데, 걔를 가차 없이 죽여버렸어. 이러면 쫄깃하지!”
분명 주인공이었다. 누가 봐도 이 인간은 주인공이 틀림없었다. 그런데 주인공이라고 생각하고 감정 이입했던 인물이 1화 만에 자살로 사라졌다.
시체와 그 옆에 괴기스럽게 서 있는 괴수.
마지막으로 괴수의 시선을 따라간 방향에는 인간들의 도시가 있었다. 이 연출은 묘한 공포감과 함께 다음 화를 빨리 보고 싶게 만드는 매력을 물씬 풍겼다.
괴수의 등장이 많지도 않았다. 괴수와의 액션신은 한 장면도 없었다. 그런데도 이런 연출을 이루었으니 제이스 완의 실력은 진짜배기다.
‘2편은 연구원이 아니라 요원이네?’
1편에서 액션이 많이 담길 수 없었던 결정적인 요인은 주인공의 직업이 연구원이라는 점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2편은 시작부터 요원을 보여주는 것이 1편과는 다른 액션을 보여줄 거라는 기대감을 준다.
2편은 중심 스토리는 괴수가 내뿜은 신호에 따라 정신 이상을 일으킨 인간들 탓에 일어나는 혼란이 중심이었다. 괴수와의 피 튀기는 싸움보다는 이유도 모른 채 미쳐버린 요원들끼리 서로를 죽고 죽이는 미궁과도 같은 사건과 파국이 이어졌다.
여기서 여지없이 볼 수 있는 건 폐쇄된 공간감과 극단으로 치닫는 인간의 광기였다. 쏘우리스트를 만든 사람답게 제이스의 완의 연출력은 참으로 기막힐 정도로 좋았다.
“괴물이 엄청나게 등장할 줄 알았지만, 이번에도 없다시피 하군. 진짜 영리하면서도 친절하게 풀어나가고 있어.”
데들리 스페이스는 복잡하고 거대한 세계관을 보유한 게임이다. 하지만 의도하고 거대한 세계를 만든 것이 아니다. 그냥 별생각 없이 에이리언을 따라 만들다 보니 생겨버린 설정의 구멍이 정말 많았다.
이 공백들을 레이첼이라는 대가가 섬세하게 채우며 굉장히 거대하고 복잡한 형태로 완성했으니 현실과는 다른 독자적인 세계가 창조된 셈이다. 당연히 이러한 이야기를 시청자가 바로 이해하고 보기는 어려울 터.
그래서 1편과 2편은 사람들이 관심을 보일만 한 에피소드를 넣어 자연스럽게 세계관을 설명해주고 있는 것이다.
‘좋다. 아주 좋아. 레이첼과 제이스 완에게 맡긴 건 진짜 신의 한 수였어.’
10억을 주면 10억에서 만들 수 있는 최상의 퀄리티를 뽑아내고, 1,000억을 주면 또 1,000억에 맞는 최상의 퀄리티를 뽑아내는 초일류 연출가.
그의 재능이 데들리 스페이스에 벌써부터 드러나고 있었다.
나는 선물을 보따리에 잔뜩 담은 산타클로스의 심정으로 얼른 알버트를 찾아갔다. 그리고 다짜고짜 데들리 스페이스의 1화, 2화를 함께 감상했다.
[알버트. 이거 어떤 거 같아?]
[어떠긴 뭘 어때? 최고지. 젠장. 이런 드라마가 제작될 줄 알았으면, 게임에 등장 안 했을 거야. 괜히 거기 나온 바람에 여기에는 발도 못 들이대고 있잖아.]
드라마는 게임보다 훨씬 이전의 시대가 배경이다. 당연하게도 알버트가 연기한 게임의 주인공인 아서 클라우드는 아직 태어나지도 않았다. 그렇기에 드라마에서 주연으로 활약할 수 없게 된 알버트가 아쉬운 소리를 하는 것이다.
[그래도 출연은 하잖아.]
[출연만 하잖아. 딱! 출연만!]
툴툴거리듯 말하지만, 알버트의 역할은 출연만 하는 정도가 아니다. 그가 맡은 배역은 아서 클라우드의 할아버지인 아이작 클라우드로서 드라마에서는 꽤나 중추의 역할을 하고 있는 인물이었다.
‘위로라는 2편에서 요원으로 등장했고.’
그녀뿐만이 아니라 다른 게임 속 배우들도 드라마에서 마치 카메오처럼 게임 캐릭터의 할머니 혹은 할아버지 등의 역할로 중간마다 등장할 예정이다.
[솔직히 그냥 얼굴마담으로 들어온 거지. 게임 속 주인공을 맡기도 했고 내가 출연하는 자체만으로 지금 홍보가 되는 상황이니까.]
그 말에 나는 어깨를 으쓱하고는 말았다. 이렇게 들으면 무슨 넥플렉스가 알버트를 이용해 먹는 집단으로 보일 수 있는데, 어디까지나 알버트 이 오지랖 넓은 양반이 직접 출연하겠다고 선언하고 들어온 거다.
‘만나면 좋은 친구~’
국경과 나이를 초월한 우리의 우정은 변치 말도록 하자.
< 하나의 다양함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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