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999년 게임 스타트-500화 (500/577)

< 켠 김에 끝까지 >

플레이어가 아이템의 증거를 통해 추론해야 하는 모든 내용을 불의 신녀는 알고 있었고 저들을 애도하고 있었다. 그런데도 미리 언급하지 않고 그들을 죽여달라 한 이유는 순수한 데몬의 소울과 사명자의 그릇이 필요하기 때문이었다.

- 불살루트 같은 건 없나요?

- 응~ 안 돼~ 희망 따윈 드소엔 없어~

- 흠냥~ 가차없구마!

- 그런데 성녀가 알게 되었다는 진실이 뭔가요? 성녀가 용사들 척살령을 몸으로 때우게 된 그거.

- 그건! 비제이님이 이제 알려줄 것임.

- ㅋㅋㅋ

이건 불의 신녀에게 한 번만 더 말을 걸면 아주 친절히 말해준다.

「용사님도 이제 진실을 마주하실 자격을 가지셨네요.」

「성녀의 교단이 섬기는 신과 파멸로 향하는 드래곤은 사실 같은 존재입니다.」

「자신들이 떠받들고 구원을 바라는 그 신이 자신들을 파멸로 이끌고 있었다는 진실을 마주하고 성녀는 큰 충격을 받은 거였어요.」

- ㅇㅋ 그래서 아까 데몬으로 변한 거였구나.

- 데몬이 드래곤의 수하니까 자기 사람들을 구하려면 스스로가 드래곤의 수하가 돼야 한다고 믿은 거네요.

- 하지만~ 없죠~ 결국 아무도 못 구했어요~

- 신민들 포함 우리 비제이 용사가 몰살시켜버림. ㅋㅋㅋㅋ

- 알고 보니 주인공이 존나 사악한 놈이었다는 그런 스토리 아냐?

- ㄴㄴ 애초에 나쁜 건 드래곤이다~ 이 말이야~

이제 드래곤 소울의 마무리를 지을 스테이지가 왔다.

“정말로 끝이 보인다.”

마지막 스테이지!

이곳부터는 별다른 몬스터도 없다. 거의 보스급만 몇 마리 사냥하고 나면 바로 최종 보스의 방으로 진입하게 된다.

「사명자의 그릇과 위대한 소울이 모두 모였습니다. 비로소 신들의 회랑으로 통하는 문을 열 수 있지요. 지금 바로 가시겠습니까?」

『문을 열어달라고 한다. / 기다려달라고 한다.』

여기에서 선택지는 ‘기다려달라고 한다’였다. 바로 가도 얼마든지 클리어할 수 있지만, 보는 시청자들은 보스 몬스터도 잡았겠다, 소울도 많이 모았겠다, 장비 업그레이드도 하고 능력치도 올리는 성장의 재미를 보고 싶어 할 게 분명해서다.

「알겠습니다. 이 자리에서 기다리겠으니 언제든지 준비가 되시면 말씀해주시기 바랍니다.」

장비를 강화하고 능력치를 올리는 활동을 마무리 지은 뒤 상태창을 열어 시청자들에게 보여주었다.

「이름 : YT

성별 : 남

태생 : 부랑자

총합 레벨 : 73

체력 : 27 지력 : 15 강인함 : 20 근력 : 26

기량 : 22 마력 : 18 신앙 : 18 운 : 7」

「저물어가는 두 개의 달 +8

공격력 +126

주술력 +98

화염속성 +8

뇌전속성 +8」

최종 업그레이드를 마친 캐릭터에 대한 평가는 ‘ㅋㅋㅋ’의 도배였다.

- 이게 뭐얔ㅋㅋㅋ 엄청 잘 키운 줄 알았더닠ㅋㅋㅋ

- 솔직히 소울 노가다를 안 하면서 여기서 이런 레벨을 올릴 수 있다는 게 신기한데 그 완성체가 희대의 잡캐네?

- 지력도 애매, 마력도 애매, 신앙도 애매, 기량도 애매. 우와. 어떻게 이 정도로 애매하게 키울 수가 있지?

- 존나 센 줄 알았는데 이 캐릭터가 센 이유는 비제이의 피지컬 빨이었다는 거임. ㅋ

이건 어쩔 수 없는 결과였다.

“이것저것 다 보여주려다 보니 능력치를 잡다하게 올릴 수밖에 없었다고.”

신성 마법에 흑마술, 각종 무기는 장착해서 제대로 쓰기 위한 최소 능력치가 있다. 이 모두를 다채롭게 보여주려면 이런 캐릭터가 나오는 게 당연했다.

*

「이제 준비가 되신 모양이군요.」

‘문을 열어달라고 한다.’를 선택하자 불의 신녀가 마지막 스테이지로 안내해주었다.

두 개의 달을 손에 들고 들어선 곳은 비밀 통로였다. 이곳을 통해서 이동하면 태양의 신전으로 향하게 되는데 여기에서 플레이어는 드래곤 소울의 마스코트인 지그문트를 마지막으로 만나게 된다.

이른바 해피 엔딩이냐 배드 엔딩이냐의 갈림길!

이 통로에 존재하는 허접한 몬스터들을 모두 쓸어버리면 지그문트의 스토리는 해피엔딩으로 끝을 맺고 메인 길을 따라서 그저 이동해버리면 배드 엔딩이 된다.

“사람들이 개발진의 의도를 물었으니 그걸 보여주는 거겠지.”

각자만의 대답이 있을 테지만, 나의 답변은 이러하다.

- 아아 ㅜㅜ

- 태양찡 ㅠㅠ 역시 ㅠㅠ

- 아니. 대체 왜? 앞에서 다른 것들 다 밝힌 거 보면, 여기서 해피엔딩 루트도 다 알 텐데. 왜 굳이 배드엔딩으로 가는 건데?

- 해피 엔딩이요? 게임에 해피 엔딩과 배드 엔딩 기점이 여기서 정해지나요?

- 아뇨. 게임 엔딩 부분이 아니라··· 에잇!

- 우리 태양 만세가 행복할 수 있는 기회가 여기에서 주어지거든요. ㅠㅠ

역시나 이미 해피 엔딩에 대한 루트를 알고 있는 사람들이 여기저기서 안타까움의 채팅들을 올렸다. 하지만 그런 채팅이 이미 올라오고 있다는 점. 그것에서부터 나는 그 루트를 플레이할 이유가 없는 셈이 된다.

‘그런데 찾던 희망을 찾았으니 오히려 이쪽이 해피 엔딩 아닌가?’

해석하기 나름의 결과지만, 이는 드래곤 소울의 세계관이 꿈도 희망도 없기에 그렇다. 이런 세계에서 진짜 해피 엔딩 따위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냥 유저들끼리 ‘이 이후로 지그문트는 행복한 결말을 찾아냈습니다.’라는 사실에 만족하며 꿈꿀 뿐이다.

- 그럼 태양 아저씨 등판하나요?

- 그건 아님. 조금 전에는 분기점이 나왔던 거고 지금은 보스전임당.

- 바로 보스전?

- 넹. 마지막 스테이지는 보스전의 연속이거든용.

잡졸이라 부를만한 몬스터 몇 마리를 잡고 전진하니, 바로 시네마틱 영상으로 이어진다.

신들의 회랑!

그러나 이름과 달리 내부는 사이비 종교의 제단과 같은 형태로 이루어져 있다. 심지어 여기저기에 흩뿌려져 있는 것들은 인간의 신체 일부들이고 닳아서 뼈만 남은 조각들이었다.

어찌 보면 계승의 제단과도 비슷한 디자인이지만 내부에서 풍기는 느낌은 훨씬 음침하고 잔혹했으며 기괴했다.

「아아! 우리의 왕이시여! 우리의 신이시여!」

「지금 우리들의 기도가 들리십니까?」

「당신을 기다리는 이 여린 존재들의 목소리가 들리십니까?」

「이런! 아직 부족해! 제물이 부족해!」

제단의 중앙에는 백골이 되어버린 외형을 가진 존재가 금빛의 화려한 제사복을 입고 기도를 하고 있었다.

「제물을 채워야 해! 그 누구도 우리 신의 강림을 막을 수 없다!」

「당신께서 아둔한 존재들을 데몬으로 다시 살게 만드셨듯이 우리들에게도 새로운 부활을 내려주소서.」

「오오! 이 냄새는 재물의 냄새로구나! 어디··· 어디··· 거기구나!」

황망히 주변을 둘러보던 존재는 텅 비어버린 눈에 붉은빛을 뿜어내며 플레이어를 보았다. 그리고 더할 나위 없이 크게 반기며 미친 듯이 달려들었다.

이 보스 몬스터의 이름은 ‘복수의 노신관 하레아스’였다.

복수의 노신관!

드래곤 소울의 스토리와 세계관을 해석하는 것에 익숙해진 눈치 빠른 누군가라면 이 이름에서 정체를 알 수 있을 것이다.

이 존재가 바로 고대 용사의 무덤에 징벌자를 보냈던 노인이었다.

- 헐. 노신관이라매! 근데 격투가 스켈레톤임?

- 우와. 몽크 할배다! 존나 잘 싸워!

- 장님이면 더 간지 났을 거 같은데.

- ‘오직 나만이 용의 분노를 견딜 수 있소.’ 이분처럼?

- ㅋㅋ 위에 대사 미쳤냐고. ㅋㅋㅋㅋㅋ

인간형 보스이기 때문에 뒤잡기가 가능한 보스다. 하지만 어디까지나 가능할 뿐. 절대 그것이 쉽지는 않았다. 마법이나 술법을 써야 할 것 같은 노신관이라는 이름 대신 박력 있게 공격해오고 상대의 가드를 무너뜨리는 차기, 주먹에 신성한 힘을 두르고 폭발적으로 후려치는 전사의 모습을 보여주는 탓이었다.

상시 백스텝을 발동하는 것 같은 쾌속한 이동속도 역시 갖췄다.

- 인간형이면 패리 가능 아닌가요?

- ㄴㄴ 노신관 평타 공격은 그냥 평타가 아님당. 때릴 때마다 충격파 나오는 거 봐요.

- 가능했음 비제이님이 벌써 보여줬겠죠.

- 어쩐지, 내가 엄청 해봤는데 패리가 안 걸리더라······.

꿈속 기억에서는 포스 넘쳐야 할 보스 몬스터가 단지 인간형이라는 이유로 패리 후 앞잡기 공격에 농락당하는 사태가 참 많았다. 중간 보스면 모를까 최종 보스마저도 그러는 바람에 맥이 빠지곤 했었다.

그래서 드래곤 소울을 만들며 그런 일이 없도록 각별히 신경을 썼다.

‘무투파 노신관 콘셉트가 그래서 나왔지. 주먹으로 회개하라는 마초!’

혼란을 겪을 사람들이 있을 거 같아서 일부러 무기도 없애고 공격마다 화려한 공기 떨림을 효과로 넣은 보스인데, 눈치 못 챈 고개도 있기는 한 모양이다.

“괜찮아. 죽으면서 즐기는 게 드래곤 소울이라고.”

현실에서는 죽음을 멀리해야 하지만 게임에서는 이 또한 매력이다.

하레아스의 공격 판정을 회피하고 막아내며 유효타를 거듭 입혔을 무렵, 노신관의 메시지와 공격이 함께 섞여서 들렸다.

「이번 산 제물께서는 제법 힘을 낼 줄 아는 군! 마치··· 그래. 아주 오래전의 그와 같아.」

「퀘르쿠스를 꿰어내서 여왕을 살해했을 때가 있었지.」

「너는 마치 그 시절의 퀘르쿠스를 보는 것 같구나.」

「흐하하하! 아주 좋아! 탁월한 제물이구나!』

체력이 60% 정도로 남으면 물어보지도 않은 것들을 지 혼자 대답해주게 되어 있다. 여기서 대놓고 퀘르쿠스를 언급하니 눈치 없던 이들도 알 수밖에 없다.

- 얘가 그 비석에 나와 있던 눈먼 노인이었구나!

- 근데 이 할배는 눈에서 빛이 나잖아요. 근데 왜 장님임?

- ‘오직 나만이 용의 분노를 견딜 수 있소.’

- ㅋㅋㅋ 퀘르쿠스는 존나 거인이고 주인공은 그에 비하면 난쟁이인데 비슷하다는 헛소리를 하고 있잖슴. 저게 다 눈이 안 보여서 그런 거.

- 하나 더 있습니다. 처음에도 주인공을 발견하는 걸 눈이 아니라 냄새로 발견했다는 거죠.

안타깝다.

“확 말로 풀어줄까보다.”

오해가 거듭 쌓였다. 일단, 대신관이 비석의 눈먼 노인과 동일 인물이라는 건 맞다. 그러나 지금도 장님은 아니다. 지금 눈이 있을 자리에서 버젓이 붉은 빛이 흘러나오고 있질 않던가.

저건 본래 장님이었던 하레아스가 용의 힘을 받아 시력을 되찾았다는 설정이 있다. 그렇기에 현재는 장님이 아니다.

‘하지만 이 정도 오해야 하건 말건 게임 스토리에 별 상관이 없으니까.’

보스 몬스터의 체력이 줄다보면 신체 역시 점점 변형되어간다. 그나마 지금까지는 인간의 골격을 유지하고 있었지만, 이제는 신체가 데몬화 되었다.

「보아라!」

「이것이 바로 용이다!」

일순간 바닥을 크게 발로 내리찍은 하레아스가 양손을 모아서 무시무시하게 내질렀다.

- 와! 존나 개간지.

- 대사랑 동작은 그냥 중2병 걸린 할배인데, 진짜 용처럼 보이네.

중거리 공격기.

이는 새로운 페이즈에서 처음 등장하는 기술이다. 데몬으로 변해버린 신체 때문에 정말로 용의 아가리가 플레이어를 집어삼키려는 것 같은 포스를 보여주고 브레스와 같은 강력한 에너지가 뻗어 나왔다.

- 저거 한 번 맞으면 무조건 사망이라는 사실!

- 원킬 기술?

- 정확히 말하면 원킬은 아닌데, 맞으면 경직이 오~래 감. 그래서 후속타에 노출되고 무조건 죽게 됨.

고인물의 저 말 역시 틀렸다. 성녀의 기사로부터 획득한 어둠의 늪 기사 세트를 입고 체력에 많은 투자를 한다면 후속타 전체를 맞아도 살아남는다. 다만, 중갑을 착용하면 특유의 둔탁함 때문에 본래는 맞지 않았을 브레스에 맞을 확률이 매우 높아진다.

그래서 살기는 하되 흠씬 두들겨 맞으며 힘든 싸움을 벌여야 하니 이모저모로 참 밸런스를 잘 맞춘 게임이었다.

“피하기도 쉽고.”

하레아스가 발휘하는 용의 숨결은 화려하지만, 그냥 왼쪽으로 돌면 절대로 맞지 않는다는 맹점이 있다. 하지만 이게 끝이면 최종장 직전의 보스 몬스터치고는 너무 만만하지 않겠는가.

이럴 때를 대비한 두 번째 스킬이 있다.

「새로운 세계의 새로운 힘이 세상에 균열을 가져올 것이다!」

시전자의 주변의 공간들이 뒤틀리고는 그 뒤틀린 공간의 틈에서 암흑의 화살들이 유도 미사일처럼 쏟아져 나왔다. 시차를 두고 작렬하는 소나기 같은 공세를 달리고 구르며 회피했다.

< 켠 김에 끝까지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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