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999년 게임 스타트-499화 (499/577)

< 켠 김에 끝까지 >

「용 사냥꾼의 창

볼테라의 최정예, 용 사냥꾼이 애용하는 창.

신들의 시대에 용들에게 치명적인 상처를 남긴 벼락의 힘이 새겨져 있다. 벼락이 가진 강력한 힘은 용의 강인한 피부를 뚫고 큰 피해를 입힐 수 있지만, 인간은 그 강력한 힘을 버틸 수 없기에 바로 튕겨 나간다.

공격력 +150

뇌속성 +85」

- 공격력 150에 뇌속성 85? 미친.

- 강화 불가임~

- 그래도 존나 좋다!

그간 사용하던 볼테라의 쌍검과 비교하여 시청자들에게 보여준 뒤 이 아이템을 착용하기로 했다.

「저물어가는 두 개의 달 +5

공격력 +83

주술력 +65

화염속성 +8

뇌전속성 +8」

무기의 종류가 다르기 때문에 비교하긴 힘들지만, 저물어가는 두 개의 달은 +5까지 강화해도 능력치로는 한참 떨어지는 것을 확인할 수 있으며 대략적인 DPS는 둘이 비슷할 것이다.

사거리의 이점까지 생각하면 사실상, 이 타이밍에는 용 사냥꾼의 창보다 좋은 무기가 없는 셈이다.

‘간지는 쌍검이 으뜸인데 볼테라의 쌍검은 너무 구려서 슬슬 피곤해.’

게다가 무엇이든지 반복되면 익숙해지고 식상함을 느끼기 마련 아니겠는가. 일식의 화려한 이펙트도 이 정도면 구경할 만큼 구경했다.

*

이번 스테이지의 보스 몬스터는 아드리아의 성녀다.

볼테라에서부터 신민들을 이곳 아드리아 시까지 인도한 인물이며 그들을 보호하기 위해 스스로 데몬이 된 여인이니 능히 영웅이라 불러도 손색이 없다.

그녀가 자리한 곳은 밝게 꾸미고 화려하게 유지되고 있는 아드리아 시의 중심부가 아니다. 자신의 신민들을 위해 스스로 희생한 성녀는 가장 낮은 곳인 하수구에 자리를 잡고 있다.

더러운 오물들이 흐르는 하수구의 중앙!

그곳에서도 아드리아의 성녀는 여전히 신민들을 위한 기도를 올리는 중이다. 이번 이벤트 씬은 두 손을 모으고 촛불에 기대어 기도하고 있던 성녀와 한 기사가 방문자인 플레이어를 보고 고개를 끄덕이는 장면이었다.

「돌아가십시오. 데몬을 사냥하는 자여.」

「이곳은 신에게 버림받은 자들이 마지막까지 도망쳐온 피난처일 뿐입니다.」

그녀의 말을 증명하듯이 이 하수구에는 넝마로 이루어진 옷을 입고 비루한 모습으로 어딘가를 향해 절실하게 기도하는 데몬들이 구석구석에 자리를 잡고 있다.

여기에서 선택지가 떠오른다.

『다가간다 / 물러난다』

나의 선택은 ‘다가간다’였다.

성녀는 여전히 눈을 감은 채 호소하듯 말했다.

「이 땅에는 당신이 빼앗아 갈 만한 것이 아무것도 없습니다.」

「다시 한번 부탁드립니다. 그만 돌아가 주십시오.」

『다가간다 / 물러난다』

이번의 선택 역시 ‘다가간다’였다.

- 상남자! 남녀평등! 약자건 뭐건 다 죽인다 이 말이야~

- 여기까지 와서 그냥 돌아갈 수는 없지!

- 아··· 난 불쌍해서 봐줬었는데. 지금 이 비제이님이 하시는 게 정석 스토리 플레이라고 했죠? 그럼 이게 본래의 드소 스토리라는 거네요?

- 진짜는 피도 눈물도 없는 거임!

플레이어의 캐릭터가 컷 씬에서 발을 내디뎠다.

그 순간, 작은 바람에 촛불이 춤을 추었고 일부가 꺼져버렸다. 성녀는 자세를 낮추고 기도하던 것을 풀고 몸을 일으켰다. 옆의 기사 역시도 끼고 있던 팔짱을 풀었다.

성녀가 옆의 기사에게 말했다.

「미안했어요. 그리고 감사합니다, 영웅이시여.」

싸우기 전의 대사로는 너무나도 나긋나긋하고 고백하는 것과 같은 성녀의 말.

여러 가지로 해석 가능한 목소리를 듣고 기사는 고개를 끄덕인 뒤 촛불 너머의 어둠에서 검을 꺼냈다. 그렇게 성스러운 종과 탈리스만을 들고 백색의 빛을 발휘하는 성녀와 의문의 기사가 플레이어를 적대하는 가운데, 침입자인 플레이어 역시 싸울 준비 자세를 취했다.

여기까지의 컷 씬이었다.

이후, 보스 전이 시작된다.

“연출로는 여자부터 죽이는 쪽이 더 보는 재미가 있겠지.”

1차는 둘을 상대하지만 2차에는 죽은 자의 힘을 흡수하여 다른 한 명이 강화되는 형태다. 기사를 먼저 죽이면 성녀가 각성하고, 성녀를 먼저 죽이면 기사가 각성해서 세지는 식인데 연출 컷의 차이는 뚜렷하다.

기사의 죽음을 본 성녀는 지그시 눈을 감았다가 무릎 꿇고 기도하며 기사의 소울을 흡수하는 것으로 끝.

‘반면에 기사는 아무 말 없이 우두커니 서 있다가 몸을 부르르 떨며 알 수 없는 비명을 내지르지.’

표현하지 않지만, 곁에서 지켜주기로 했던 대상을 끝끝내 지켜내지 못한 수호기사의 절망과 분노인 셈이다. 그러니 여자부터 죽이기로 했다.

- 원딜에 힐러, 법사 기능까지 다 해주는 성녀+근딜 기사의 조합!

- 대부분은 까다로운 패턴에 x빠지게 고생한다···는 말은 이제 하기도 지겹구만!

- 이 비제이 진짜 개잘해 ㅋㅋㅋ

- 나도 저 칼 꼭 먹을 거야. 완전 부럽드아 ㅠㅠ

- 쌍검 뽕 오지고 지리고!

저물어가는 두 개의 달이 자랑하는 화염과 뇌전의 춤.

투사체인 마법을 가볍게 회피하고는 스턴 상태에 빠질 만큼 기사를 연거푸 베어버렸다. 일방적인 타격이 10여 차례를 넘기자 앞잡을 넣기 딱 좋게 한쪽 무릎을 꿇어버리는 기사였다. 그러나 이를 외면한 채로 성녀로 타깃을 변경했다.

‘체력이 줄어들면 공격 대신 무조건 회복부터 하려고 드니까 성녀한테 딜 넣기 아주 좋은 타이밍이지.’

모양새가 약자를 폭행하는 건달패와 유사하게 되었으나 일방적인 전투라는 건 이런 양상이 되기 십상 아니겠는가.

『THE DEMON WAS DESTROYED』

성녀의 몸이 쓰러지고 1페이즈가 마무리되었다. 그리고 준비된 이벤트 컷과 함께 바닥에 흥건하게 피를 적시는 성녀의 시체로 기사가 다가왔다.

- 이렇게 보니까 비제이가 세상에서 젤 나쁜 놈 같음.

- 우리 사랑하게 해주세요!!!!

- 야. 쟤 운다. ㅋㅋㅋ 투구 벗겨보면 콧물도 흘릴걸?

- 우리 솔로들은 너님들이 꽁냥꽁냥하는 거 못 봐준다!!!!

- ㅉㅉㅉ 인성하고는

- 솔로들이 솔로인 데는 다 이유가 있음.

울분의 마무리는 폭주였다.

마지막으로 부여잡고 있던 인간성을 내려놓은 기사는 품에 안은 성녀를 힘껏 껴안아 뼈가 으스러지는 소리를 내고 말았다. 그리고 그녀의 소울을 흡수하며 온몸이 기괴하게 부풀었다.

갑옷이 산산이 부서지며 거대화된 데몬으로 변이한 괴물.

두 눈이었을 자리에서 뚝뚝 흐르는 녹색의 액체가 바닥에 닿자 매캐한 연기가 피어오르며 땅이 녹았다. 이는 성녀가 흘린 흥건한 피를 타고 보스 룸 전체를 짙은 독 안개로 휩싸이게 했다.

- 딱 봐도 맹독이죠. 맵도 그지 같이 업그레이드!

- 이전 불길한 골짜기에서는 쫄몹들이 독을 던지는 거랑 비교하면 곤란합니다.

- 2차 때 성녀 잡는 게 편하지만, 그건 정석 루트가 아니었다는 거구낭.

- ㅋㅋ 드소는 무조건 어렵게 해야 진또배기임.

잔잔한 호수의 문자를 사용한 이유가 이것이다. 중독을 피하기에 어려운 맵 구조이고 보스 몬스터의 공격과는 별개로 전장의 독 안개가 불규칙하게 이동하며 맹독 상태에 빠져들게 만든다.

‘대신 독에 대한 내성을 키워주는 잔잔한 호수를 사용하면 난도가 아주 빠르게 내려가지.’

물론, 컨트롤이 되는 이들에 한해서 해당되는 이야기일 뿐이다. 지금까지의 정석적인 기사의 패턴과 달리 데몬의 발톱, 꼬리, 깨물기에 독 웅덩이에서 뒹굴며 사방에 산성독을 튀어 버리는 범위 형태의 공격은 분명히 까다롭다.

단지 이것보다 더욱더 어려운 버전을 나는 테스트 당시에 일찌감치 클리어했을 따름이다.

“게다가 이게 끝이고.”

엔딩이 멀지 않은 시점에 다다를수록 더욱 악명을 떨치는 드래곤 소울.

「우리가··· 원한 것은··· 오직 조용한 삶···」

「이토록··· 작은 평화조차··· 핍박한다면···!」

「영원히··· 썩어 문드러지리라··· 모두의··· 묘비가 되리라···!」

2페이즈 후 사방에 흩뿌린 독을 모조리 흡수하여 날뛰는 최종장에 접어들면 3페이즈는 얼마나 더 치를 떨게 될까 싶겠으나 바로 여기서 훌륭한 도우미가 등장한다.

「흐음. 기사의 명예를 저버린 자로군.」

「타락한 기사도에 어둠이 깃들었으니 햇님께서 이리 찌푸리실 수밖에.」

「도움을 주겠네, 친구.」

「혼탁함에 물든 기사. 인간이기를 저버린 그대여. 이만 미련을 버리거라.」

- 태양 만세!

- 나도 만세!

- 그냥 만세!

플레이어들의 영원한 친구, 지그문트의 난입.

모든 곳에서 이 NPC가 난입하는 것은 아니지만, 이렇게 몇몇 장면에서는 지그문트와 무조건 함께하도록 설계가 되어 있다. 이유는 간단하다.

- 크흑. 여긴 진짜 우리 태양형님 아니었으면, 못 넘어가.

- 안 그래도 독 때문에 정신없는데, 태양 형님이 도와준 덕분에 살았음.

- 구원자 등판이시다 이말이야!

다들 태양만세를 외치는 이유가 이거였다. 튼튼하게 버텨주고 보스 몬스터의 공격 패턴을 끌어내는 데 지대한 역할을 지그문트가 해준다. 플레이어는 그가 만들어준 빈틈을 따라서 공격하면 된다. 물론, 변칙적인 몇몇 공격에 대응해야 하고 지나치게 오래 싸우면 지그문트가 사망해버리는 불상사가 일어나기는 했다.

그래도 이 정도의 도움이 어디랴!

『THE DEMON WAS DESTROYED』

「순수한 데몬의 소울」

「사명자의 그릇」

「어두운 늪 기사의 투구

* 깊은 대지의 어두운 늪에서 끝까지 성녀를 지키고자 했던 의지.

물리 방어 +14

마법 방어 +11

화염 내성 +10」

「어두운 늪 기사의 갑옷

* 일찍부터 성녀와 성녀를 지키는 기사에 대한 이야기는 수많은 시의 근원.

물리 방어 +30

마법 방어 +20

화염 내성 +15」

「어두운 늪 기사의 팔 보호대

* 아련한 맹세의 자락은 비극으로 꽃피울지니.

물리 방어 +16

마법 방어 +12

화염 내성 +10」

「어두운 늪 기사의 신발

* 나락의 끝을 알면서도 맹세하는 자들의 처연함이 가련하구나.

물리 방어 +15

마법 방어 +15

화염 내성 +8」

「어두운 늪 기사의 방패

* 비극의 무게는 타오르는 정염의 불꽃이어라.

물리 방어 + 70

충격 내성 + 50」

추도문처럼 성녀와 수호기사의 구절이 완성되는 이 방어구 세트는 무겁지만, 방어력이 우수하며 강력한 화염 내성의 효과를 가진 장비였다.

그리고 드래곤 소울의 종장을 바라보는 이즈음에 함께 싸워서 승리를 만끽해야 할 지그문트는 허탈한 한숨을 내쉰다.

「이렇게 머나먼 길을 찾아왔음에도 없는 것인가?」

플레이어에게 하는 말이 아닌 그만의 독백이었다.

- 우리 태양찡 실망함.

- 왜 실망하는 거예요?

- 스토리상 태양 형님이 모험한 기간은 주인공보다 몇 배나 깁니다. 이미 여러 나라를 돌고 이곳이 마지막 나라인 셈이죠. 그런데 온 맵을 샅샅이 뒤져서 더는 갈 곳이 없는 지금에도 태양을 찾지 못해서 그러는 겁니다.

- 자신의 사명을 다할 희망이 없다··· 는 그런 야그죠.

- 그럼 시드처럼 태양 형님도???

- ㄴㄴ 태양찡은 다르심.

만세를 하지 않고 가만히 하늘을 올려다보던 지그문트는 플레이어를 향해 말했다.

「아니! 아직은!」

「난 아직 포기할 수 없네! 그렇지 않은가 친구!」

「자네의 여정이 남았듯이 나 역시도 조금 더 힘을 내어 전진하겠네. 함께 하세, 친구!』

- 크으··· 태양찡. 더 말하고 싶어도 이건 말을 할 수가 없네.

- 왜요? 왜? 뭐 있어요? 스포 해도 강퇴 없잖아요.

- 다른 건 몰라도 태양찡은 노노.

- 비제이님이 보여주는 정석 스토리를 봐야 제대로 느낄 수 있습니다. 이건 다들 같은 심정일 거라고 감히 확신합니다.

- 태양찡은 소중하니까. 비제이님은 지켜줄 거라고 믿고 있음!

채팅창의 흐름을 차분히 지켜본 뒤 계승의 제단으로 돌아왔다. 곧, 불의 신녀가 다가와 말을 건넸다.

「아드리아의 성녀를 만나셨군요. 그녀는 평안히 보내주셨나요?」

「버림받은 볼레타의 신민들을 구원하려던 성녀의 마지막을 지켜주셨군요. 세상에 기록된 그녀의 선택은 저주받은 골짜기에서 타락했다는 것. 하지만 신민들이나마 구원하려던 최후의 발버둥이었죠. 진실과 마주한 끝에 선택한 유일한 선택······.」

「아드리아의 멸망은 데몬을 받아들여 타락한 성녀를 징벌하려는 용사들을 통해 이루어졌어요. 전쟁의 화마가 끊이지 않는 지옥 속에서 신민들은 정의로운 용사들에게 고통받았지요.」

「신민을 위해 데몬을 받아들인 성녀. 그런 성녀를 지키기 위해 스스로 데몬이 되어버린 아드리아의 신민들. 서로가 서로를 위하며 자신을 포기한 끝에 이루어진 가냘픈 평화의 마을. 그 거짓된 평화는 누구의 잘못이기도, 누구의 잘못이 아니기도 하겠죠.」

< 켠 김에 끝까지 > 끝

ⓒ (497)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