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999년 게임 스타트-491화 (491/577)

< 아 몰라 >

이교도들의 성전사가 왼손의 방패를 올려 들고 방패 차징을 준비했다. 이 공격 패턴은 기사형 몬스터들이 사용하는 가장 위력적인 기술 중 하나지만, 회피할 수만 있다면 이것보다 고마운 공격이 없다.

‘피하면 뒤가 그냥 아주 허허벌판이거든.’

화면이 약간 일그러지며 공기가 뒤로 밀리는 것 같은 효과가 나왔다. 무시무시한 포스를 풍기며 돌격하는 성전사의 공격!

이때 놈과 닿기 직전을 정확히 노려 깔끔하게 회피한 후 뒤를 잡았다.

- 바로 뒤잡인가?

- 푸욱! 하고 발로 뻥~!

시청자들이 들을 수는 없겠지만, 재언급 하겠다.

“뒤잡 안 쓴다고.”

스테미나를 모조리 소모하며 쌍칼로 연거푸 베기 시작했다. 저무는 두 개의 달은 오른손, 왼손 그리고 후속타로 이어지는 양손 공격과 동시에 특기를 사용하면 빠르게 회전 공격을 하게 되는데 이 때의 화려함과 찰지는 타격음은 보는 이의 눈길을 사로잡기에 충분하다.

- 엥? 실수?

- 뒤잡 실패! 이 비제이도 실수라는 걸 하는구낭.

- 근데 뒤잡 실패하고도 엄청 쉽게 잡네요. 피가 그냥저냥 썰리네요.

- 실수한 게 아니라 원래 이렇게 잡으려고 했던 거 같습니다.

- 에이. 누가 뒤를 잡아놓고 뒤잡이 아니라 평타를 치냐?

- 방금 봤잖슴. 뒤잡해서 치명 공격 넣었으면 안 죽었을 거임. 근데 콤보로는 죽였음. 둘 중 뭐가 효율적으로 보임?

- 아! 글쿠나!

- 나는 오늘 경제전문가가 되었다.

- 뭔 소리?

- 뒤늦게 깜짝 놀랐다는 것이다!!!

- ㅋㅋㅋㅋㅋ 하긴. 전문가들은 예측 못 하고 뒤늦게 분석만 잘하더라. ㅋㅋㅋ

상대를 죽일 수 있는 패턴과 죽일 수 없는 패턴. 그 두 가지를 두고 고르라면 당연히 죽일 수 있는 패턴이 우월하다. 그런데도 대다수가 조금 전의 내 모습을 실수로 판단한 것은 그만큼 앞잡, 혹은 뒤잡이라는 공격법이 드래곤 소울에서는 당연하고 강력하다는 인식이 깊이 박혀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직접 보여주었는데도 이를 부정하는 사람은 없었다. ‘의도된 평타공격’이라는 사실을 인정하기 시작한 이후, 나는 뒤잡 대신 콤보로 적을 무참히 쓰러뜨리며 게임을 진행했다.

- 진짜 빠르다. 쌍도 이거 사기 아님?

- ㄴㄴ 절대 아님. 지금 이건 정말로 이 비제이니까 가능한 거. 아마 지금 방송하는 비제이들 중 진짜 컨트롤 좋은 비제이들은 따라할 수 있을 거 같은데, 우리 같은 일반인들은 안 될 듯.

- 쟤는 여러방. 나는 한 방이면 누움.

- 비제이님이 막 하시는 게 아닙니다. 공격속도와 데미지, 피격범위를 계산하고 공략하는 겁니다. 그래서 지금까지 한 대도 안 맞은 거고요.

- 게임을 공부하면서 해야 하는 세상이라니요. 즐기다 보면 잘하는 게 게임 아닌가요?

- 현실이나 게임이나 빡세게 하는 놈이 잘나가는 거임.

- 이런 현실반영 노노노노노노노

- 인정. 완전 노노노노노노

그렇게 한창을 진행하여 이교도들의 교단 2층에 올랐을 무렵이었다. 채팅창의 채팅이 뚝 끊겼다. 정확하게는 나름 고수라고 하는 이들이 조용해진 상태였는데 이는 대다수가 고생하는 함정 구간이 나올 차례이기 때문이었다.

‘내가 무조건 잘 하는 모습보다는 한 번쯤 걸려서 고생하는 모습을 보고 싶은 심리인가 본데.’

영웅의 등장만큼이나 영웅의 추락을 기대하는 마음도 존재하는 법이다. 그런데 헛된 소망일 뿐이다. 지금까지 골수팬들조차 알지 못하는 생경한 공략을 보여주는 콘셉트가 바로 내 방송 아니겠는가.

이른바 공략왕이랄 수 있는데 그런 내가 함정에 걸려서 고생할 거라고 생각하다니.

“걸려주면 나름 재미있기는 할 테지만, 굳이 그래 줄 이유가 없잖아.”

복층의 구조로 만들어진 실내.

2층 몬스터의 인식범위에는 내 캐릭터가 들어간 상태였다. 그러나 놈은 절대 나를 공격하러 이동하지 않는다. 이럴 때는 드래곤 소울의 공식이 적용된다.

‘몹이 인식 범위에서도 공격하러 오지 않으면? 그건 함정이다.’

눈치채는 건 누구나 할 수 있다. 하지만 드래곤 소울이 유저들에게 악명 높은 이유는 저곳이 함정이라는 것을 알더라도 무조건 올라가며 겪을 수밖에 없는 맵 구조 탓이다.

길이라고는 그것밖에 없어서 그렇고 이래서 이번 함정에 더 쉽게 당하게 된다.

내가 맞닥뜨린 함정의 기본 구조는 몬스터를 공격하러 녀석이 있는 곳으로 움직일 때, 그 뒤쪽에 숨어 있던 놈이 등장해서 플레이어의 뒤를 치는 것이었다.

‘이걸 해결하는 건 거리 조절을 잘하는 거지.’

한 번의 구르기 정도면 해당 몬스터에게 다가갈 수 있을 만큼 근접했을 때, 나는 바로 백스텝을 사용했다. 곧, 플레이 캐릭터의 앞으로 뒤따라오던 몬스터의 칼이 훅 치고 지나갔다.

- 방금 몬스터를 보지도 않고 공격을 피한 건가요?

- 이제는 감탄도 식상할 정도네.

- 타이밍을 완벽하게 외우고 있거나 개발자가 옆에서 훈수 두고 있는 게 분명함.

오해다.

“하다 보면 누구나 다 할 수 있어.”

드래곤 소울은 플레이어들이 이런 함정에 익숙해질 수 있도록 게임을 디자인했고 함정을 활용하는 몬스터들은 의외성을 가졌을 뿐, 수수깡처럼 허약한 체력으로 만들어 밸런스를 맞췄다.

즉, 함정만 잘 피하면 몬스터를 처리하는 건 잡몹 중에서도 잡몹을 없애버리는 정도의 난도인 셈이다.

‘경직도가 낮은 이 쌍도에조차 경직을 먹어버릴 만큼 약해.’

기왕 처리하는 것. 멋지게 특수기술인 회전 베기로 마무리했다.

이제 다음 구간은 좁은 도로다.

- 돼지 새끼다!

- 뚱띵이들 넘 싫어.

- 갑옷 돼지 개개꺄!

길이 좁다는 건 움직일 반경이 좁다는 의미다. 이런 맵에서 플레이어를 골치 아프게 만드는 최적의 선택은 공간을 꽉 채울 정도로 큰 진격의 멧돼지를 상대하도록 만드는 건이다.

시청자들은 혐오스럽다는 반응을 보이는데, 사실 이 녀석은 별거 없다. 기사가 방패 들고 돌격하는 방패차징과 동일한 돌진 공격. 오직 이것 하나밖에 없는 녀석이고 엉덩이를 제외한 모든 부위에 갑옷을 입고 있는 돼지라서 정도만 차이 날 뿐이다.

“엉덩이만 노려야 하지.”

갑옷 부분은 공격해도 먹히지 않는다.

공략법은 어떨까?

앞의 기사를 상대한 것과 똑같다. 그냥 돌진을 피해 주고 가려워 보이는 엉덩이를 살살 긁어주면 좋아서 죽다가 나중에는 몸부림치며 죽어가게 된다.

‘딱히 멋진 연출을 해주기도 어려우니 후딱 해결하자.’

쿵쾅쿵쾅!

육중한 무게 때문에 돼지가 뒤에서 돌진하는 소리가 들려온다. 이를 감각적으로 백스텝 사용! 물론, 정직하게 뒤로 스텝을 밟으면 동선에 휩쓸려 돼지에게 그대로 얻어맞으니. 방향을 아주 살짝 틀어서 사용했다.

“이런 게 말하자면 구구절절하지만, 꼭 필요한 것. 센스라는 거지.”

아슬아슬하게 옆을 스치고 지나가는 멧돼지.

푸짐한 엉덩이를 쌍칼로 화려하게 베어주었다.

뀌이이익-!

역시나 이 녀석도 많이 가려웠는지 아주 좋아 죽는다. 몸을 홱 돌리고 큰 머리를 좌오루 세차게 흔드는 등 발악하지만, 의미 없다. 한 줌의 소울이자 플레이어의 경험치로 흡수될 뿐이다.

“다음!”

간헐적으로 등장하는 함정 수수깡, 성전사, 멧돼지들을 처리하고 지나가면 이제 드래곤 소울의 마스코트를 만날 수 있다.

- 태양 만세!

- 태양 만세!

- 태양 만세!

- 태양 만쉐이!

- ??? 저기요. 태양 만세가 뭔가요?

- 이 게임 최대 종교인 태양 신교의 기도법이자 인사법입니다. 나도 태양 만세!

한창 뜨거운 채팅창의 반응은 한쪽에서 꾸벅꾸벅 졸고 있는 기사 NPC를 향했다.

-저 기사가 이교도들에게 진정한 신의 뜻을 알려주겠다고 여기까지 찾아온 태양 신교의 성기사이자 광신도입니다.

- 기사이자 광신도?

- 하프하프? 좋은 거랑 안 좋은 거가 반반?

초심자들이 이해 못 하는 열렬한 반응은 드래곤 소울의 후반부까지 가서 위대한 양파 기사의 모습을 보아야만 이해할 수 있다. 아무튼, 지금까지는 스토리에 꼭 필요하고 세계관을 설명해주는 NPC들과만 대화했으나 이번에는 저 기사를 소개해주기 위해 말을 걸었다.

양파갑옷은 드래곤 소울의 마스코트니까.

「음. 흐으음~」

「오오! 어!? 이런. 손님이 계셨군!?」

「미안하오. 오늘 햇님이 너무나 따사로운 은총을 내려주셔서 기분 좋은 사색에 잠겨 있느라 손님이 찾아온 것도 몰랐구려.」

이웃집 아저씨 같은 목소리. 약간은 술에 취한 듯 말끝을 약간 올리는 유머스러움이 느껴진다. 망자들이 돌아다니는 절망스러운 세계관에서도 희망을 찾아가는 이의 모습을 상징하는 이가 바로 이 NPC였다.

「본인은 태양신교 볼테라 지부의 성기사 지그문트라 하오. 사실 아주 사소한 문제가 한 가지 생겨서 이곳에 이렇게 자리 잡고 있었소이다.」

「저기 뒤에 보이는 문이 있지 않소? 저게 도무지 열릴 생각을 하지 않는다오.」

「한참이나 기다렸건만, 진전이 없으니 여러모로 괴롭소이다. 그래서 고민하다 보니 햇님이 참 따사롭더군. 그 은총을 받으며 사색에 잠겨 있는 건 참으로 행복한 일이었소.」

「햇님은 항상 따뜻하시지. 하하하하하!」

일반적이지 않은 사고방식을 보여준다. 하지만 유쾌함이 전해지는 건 모두가 동감하는 바였다.

- 문이 열리지 않으면 열쇠를 찾는 게 인지상정 아닌가요?

- 태양 만세는 아님! 햇님이 다 해결해주심!

- 원래는 백퍼 자다가 깨서 안 잔 척 핑계 대는 거라는 것이 학계의 정설~

- 근데 처음 본 사람한테 뭐 하러 안 잔 척을 함?

- 다들 중요한 걸 놓치는데, 조금 전까지만 해도 여기는 몬스터가 많았었죠. 비제이님도 열심히 썰면서 올라왔고요. 그런 괴물들 옆에서 아무렇지도 않게 잠잔다는 건 존나 강하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강력한 태양 만세!

일반적인 RPG라면 여기서 퀘스트가 발생할 것이다. ‘태양신교의 성기사 지그문트가 건물 내부로 들어가길 원하고 있지만, 문이 열리지 않는다. 문을 열어서 그가 들어갈 수 있도록 해야 한다. 보상 경험치 삼백, 아이템 추가 획득.’ 같은 안내문이 떠오르고 말이다.

하지만 드래곤 소울은 그런 거 없다.

「으음. 음.」

「여전히 안 열리는군.」

「여전히 좋은 햇살··· 아~ 졸려온다······.」

친절한 퀘스트와 안내 지침표 같은 건 물론이고 퀘스트 자체가 없다. 이 앞의 문 역시 마찬가지였다. 아무리 열어보려고 쇼를 해봤자 열리지 않는다.

그냥 이곳의 이벤트는 지금처럼 이렇게 말만 걸면 끝이다.

- 뭐야? 그냥 가?

- 네.

- 왜 그냥 가요? 여기서 뭐 하는 거 아니었음?

- 아니었음. 이 게임에는 그런 거 기대하면 그냥 시간 날리는 거임.

- 여기는 방금 저 대화 한 번 나누려고 오는 곳임. ㅋㅋㅋㅋㅋㅋ

이제는 시청자가 물어보고 시청자가 대답하는 것이 너무나도 자연스러운 채팅창이다.

- 진짜 어처구니없겠지만 진짜임.

- 헐... 대체 왜요?

- 저 대화를 해야만 나중에 도움을 받을 수 있게 됩니다. 결과적으로 이미 보상을 받은 상태라고 봐야 하죠.

- 근데 ‘미션 클리어!’ ‘달성!’ 같은 걸로 안 알려주니까. 괜히 시간 낭비하게 만들고 어떻게 진행해야 할지 고민하다가 엉뚱한 곳에서 죽게 돼. 드소는 그런 게임이고 소울 월드는 그런 세계지. ㅋㅋㅋㅋㅋ

이제부터는 주욱 보스까지 진행하면 된다.

보스에게 향하는 길목에 있는 회랑에는 목 없는 데몬이 길을 막고 있다. 꽤 빠른 공속과 긴 리치, 거기에 뒤를 잡았다가는 꼬리에 얻어맞는 탓에 고생하는 플레이어들이 상당하다.

- 보스보다 어려운 중간 보스!

- 얘 강화석 주는데, 못 잡아서 패스하고 지나감.

- 하지만 썩은 물 비제이한테는 그냥 잡몹일 뿐.

왼쪽 옆구리만 살살 긁어주면 꼬리에도 맞지 않고, 오른손 잡이라 창을 아무리 휘둘러도 공격 범위에 들어가지 않는다. 그렇게 옆구리를 살살 긁어 주다 보면 딱 한 가지. 피격 범위에 들어오는 공격 패턴이 있다.

바로 점프해서 내려찍기.

‘이건 가볍게 굴러서 피해 주고.’

특기를 활용해서 회전공격을 먹여주면. 깔끔하게 끝.

- ㅋㅋㅋ 엄청 세야 정상인뎈ㅋㅋ

- 역시 쉽죠?

- 이 방 시청자들 컨트롤 수준 다 드러나죠?

- 이 비제이가 말도 안 되는 거야.

데몬의 강화석을 주웠지만, 제단으로 돌아가서 강화하지는 않았다. 부족한 공격력은 컨트롤로 해결할 수 있고 그편이 진행에 편해서다.

‘등산하듯 교단 건물 오르기.’

층층을 오르니 어느덧 종탑의 마수와 마주했다. 친절하게도 세모꼴이 아닌 평지처럼 평탄한 교회의 지붕이 전장인데 이 지붕의 양옆과 끝에는 석상들이 무시무시한 외형을 풍기며 세워져 있다.

대부분의 석상은 회색의 바위로 만들어져 있지만, 두 개의 석상은 어딘지 모르게 불길한 핏빛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바로 이 녀석들이 이번에 상대할 몬스터들이다.

“역시 우리 게임은 친절해. 컷씬만 봐도 공략법을 알 수 있게 잘 만들었잖아.”

하나의 석상이 플레이어를 향해 날개를 펼치고는 포효를 내지르는데, 이게 그냥 멋짐을 보여주는 것만이 아니다. 인트로 컷 씬에서 두 개의 석상만 색이 다른 것을 확연하게 보여주었는데 이건 처음에 한 마리만 덤벼들지만, 나중에 다른 한 마리가 추가로 덤벼들 거라는 걸 플레이어들에게 알려주는 것이다.

‘자세히 봐야 예쁘다는 말처럼 자세히 보면 보인다.’

빠른 진행을 위해 컷 신을 스킵한다면 손해를 보니 애써 만든 연출도 꼭 감상해주시라.

< 아 몰라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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