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거 괜찮은데? >
161. 이거 괜찮은데?
드래곤 소울의 플레이어 캐릭터는 과묵하다. NPC와 상호작용이 일어났을 때 ‘······.’와 같은 식으로 대응한다는 게 아니라, 아예 대답 자체가 없다. 또한, 여타 게임에서는 악당이 ‘여기까지 오다니 범상치 않은 놈이로구나!’라거나 ‘내 계획을 망가뜨리다니!’라며 대사를 하지만 드래곤 소울에서는 이조차도 없다.
보스 몬스터들은 자신의 영토나 보스 룸에 있다가 묵묵히 침입자를 제거하려 들 뿐이다. 묵직하면서도 인상적이며 강력한 연출과 함께였다.
말 없는 주인공 콘셉트.
그러나 아무런 감정표현조차 불가능하면 답답함을 줄 수 있기에 넣어 준 요소가 있으니 제스처라는 것이었다. 앉기, 인사하기, 손 흔들기 같은 기본 제스처를 주고 게임을 진행하며 오만한 자세, 눕기, 만세! 건배! 등등을 획득할 수 있다.
‘말 없는 진행자인 나한테도 이건 제법 쓸 만하지.’
드래곤 소울에서 자주 사용하는 제스처는 보스 몬스터를 죽이고 나서 어깨를 으쓱으쓱하는 동작이나 엄지를 아래로 향하며 누르는 몸짓이었다. 둘 다 ‘이게 어려워? 별거 아닌데?’라는 의미다.
하지만 나는 이를 사용하지 않았다.
“건방짐이랑 멋짐은 종이 한 장 차이거든. 잘하는 놈이 잘하는 티를 자기 입으로 말할 때만큼 재수 없어 보일 때도 없었어.”
특별한 능력으로 실력자가 되었을 뿐, 지난 내 삶은 지금 감탄하고 있는 저들과 같은 처지였다. 그렇기에 소위 말하는 건방 떠는 자세는 보이지 않고 시청자들의 채팅을 엿보고 제스처로 대답해주었다.
잘못된 정보가 오가는 게 보이면 그것 말고 다른 공략법이 있다는 사실을 증명해서 보여주고 말이다.
- 대답해 줬다! 지금 하는 방패 플레이 내가 물어봤던 거임!
- 뭐냐. 드소가 방패 들고 반시계방향으로만 돌면서 때리면 저렇게 쉽게 이기는 게임이었어?
- 컨트롤 개쉽네 ㅋㅋㅋ 투척단검으로 몹 끌고 1대 1로 때려잡기.
- 비제이님! 기왕 보여주는 거 전용 기술들로 잡아 봐요!
초반부터 화염검으로 쓸어버리는 모습만 자꾸 보여주면 식상하다. 괜찮은 요구이기도 해서 웨펀 마스터처럼 다양한 무기들을 사용해주고는 인사하는 제스처를 보여주었다.
그런데 여기서 이상한 오해가 생겼다.
- 으아~ 내가 저렇게 하고 싶었는데 바로 잡아버려 주네. 맞아. 나도 저러고 싶었다구.
「Diego 님이 1,000원 후원하셨습니다.」
「Fring Eric 님이 1,000원 후원하셨습니다.」
- 근데 리액션조차 말이 없네요? 제스처로만 하고?
- 혹시 말을 안 하는 게 아니라 못하는 거 아님?
- 아! 벙어리 비제이?
- 설득력이··· 있다!!
처음에는 난무하는 여러 드립이나 장난 중 하나로 알았다. 그런데 대응을 하지 않으니 자기들끼리 이것을 확정적으로 몰아가는 것이었다.
- 그러네. 겜잘알이 말못할 일수도 있는 거지.
- 비제이님. 벙어리가 맞으면 오케이 제스처를 보여주세요.
- 지랄. 입 병신이면 손가락도 병신이냐? 키보드 칠 줄 몰라?
- 불쌍한 사람 괴롭히지 마라.
- 벙어리라고 하지 마요. 농아인이라고 해요.
- 네가 더 나빠. 말 병신을 귀병신으로까지 만들었잖여.
- 아~ 여기 왜 이러나요. 저 선수들 저러다 레드카드 받는 거 아닌가요?
「Minsoo님이 강제퇴장 처리되었습니다.」
「단단한냉면님이 강제퇴장 처리되었습니다.」
- 저럴 줄 알았다능
- 문화인답게 언어장애가 있다~고 합시다들~
- 벙어리가 욕도 아닌데 왜들 그래? 게다가 그게 뭐가 중요하냐?
- ㅇㅇ 말못할이면 어때. 겜잘할이면 됐지.
의외의 응원 메시지들이 올라왔다.
“화장실 다녀오거나 잠깐 쉬러 갈 때는 짧게 한 마디 정도 하려고 했는데, 그것조차 못하게 됐네?”
다양한 사람이 모이니 저들의 생각 역시 내가 짐작하지 못한 방향으로 뻗어나갔다.
이뿐만이 아니었다. 시청자들의 숫자가 천 명을 넘었다는 건 1,000개의 다양한 성격이 모여들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중 대다수는 방송을 보는 것에만 관심을 가지지만 또 다른 누군가는 방송에 참여하길 원하거나 도전하고자 하는 이들도 있었다.
그리고 그들이 움직였다.
- 보다보다 웃음만 나오네. 몹 상대로 무쌍 찍는 거 누가 못하냐?
- ㅇㅇ 패턴만 알면 개나 소나 다 하는 거임. 진짜는 PvP지. 실력은 거기서 나온다고.
- 여기 입고수님 등판이요~
- ㅈㄹ 내가 보여줄까?
- 보여주다니요?
- 봐라.
『당신의 세계에 암령 thecoco가 침입했습니다.』
- 엌ㅋㅋㅋㅋㅋ
- 난입이다!
드래곤 소울은 기본적으로 싱글 플레이를 지향하지만, 특정 상황에서는 멀티 플레이를 할 수 있었다. 일반적으로는 플레이어가 아군을 소환하기 위해 영혼의 종을 사용할 때 활성화가 되는데 가끔 영혼의 종을 사용하는 몬스터가 존재하는 구역에서는 플레이어의 의도와 별개로 암령의 침입이 가능하다.
- 와. 이 타이밍에 바로 치고 들어온 거 보면, 이거 저격이네.
- 캬! 방송 보다가 준비하고 타이밍 맞춰서 대답한 뒤에 들어왔어. 존나 끈기 있다.
- 깡도 좋네. 벙제이 엄청 고인물 같은데 여기에 침입한다고?
- 벙제이는 뭐냐?
- 벙(어리) (비)제이.
- 구려. 어벙해보이잖아.
- ㅇㅇ 완전 개구려!
나로서는 헛웃음만 나올 따름이다.
“확실히 PvE랑 PvP는 다르지. 그런데 나는 예외거든.”
GF의 테스터들은 전 세계적으로 유명세를 타고 있다. 이들은 프로 게이머들처럼 경기하는 선수들이 아닐 뿐 업계에서는 이미 프로 게이머와 같은 명성을 얻고 있을 정도로 실력이 출중하다.
그리고 그런 테스터들조차 2대 1로 이기지 못하는 사람이 바로 나다. 개발자들 사이에서 회장님 모드를 제작한 뒤 이를 헬 모드 또는 지옥 난이도로 이름 붙여서 공개한다고 할 정도다.
- 척!
제스처를 선택하자 팔짱을 낀 캐릭터가 오만하게 서서 기다렸다. 내 선에 도망치는 일 따위는 없다.
- 피하지 않아. 패기 넘친닼!
- 간다! 간다! 암령 발견!
- 헐. 장비 저거 뭐야? 중갑? 엄청 딴딴해 보이는데? 간지 개쩜!
- 용 사냥꾼 세트네요. 강화 불가 장비지만 기본 성능은 압도적입니다.
- 저걸 이 타이밍에 입고 있다고? 저거 보통은 60리빌 전후에 맞추는 건데?
- 암령 침입 조건은 같은 회차이기만 하면 되니까 물론 가능합니다. 비제이님 레벨이 33이니 저 암령은 53레벨 이하라는 거고요.
- 순수하게 여기서 침입해서 사람 잡으려고 만든 캐릭터네.
- 나름 고인물은 맞는 듯. 낮은 레벨로 상위 아이템을 갖추고는 이곳에서 대기하고 있었으니 아무나 할 수 있는 건 아님.
드래곤 소울의 PvP는 별다른 규정이나 룰이 없다. 그러나 레벨의 차이가 20 이하이면서 아이템의 강화 수준이 상대보다 높지 않을 때라는 조건이 붙는다.
일단 용 사냥꾼 세트는 이 조건에 최적이라 할 수 있는 장비라 할 수 있다.
후반부로 가면 강화 아이템을 사용하므로 점점 그 가치가 떨어지지만, 이곳에서 저 장비를 착용하고 침입하면 일단 장비 빨 덕분에라도 압도적으로 유리한 위치를 지키게 된다.
“너 같은 녀석들 때문에 뉴비들이 게임을 포기하는 거야.”
참교육의 시간이다.
- 까딱, 까딱.
서로 마주했을 즈음, 암령 캐릭터가 검지를 움직이며 도발해 왔다. 저 제스처에 나 역시 어깨를 으쓱해 보이는 것으로 대꾸해준 뒤 서로 잠시 대치했다.
외관적인 위용은 상대편이 압도적이다. 튼튼한 중갑에 뇌전 속성이 부여된 창에서는 번개가 흘렀기 때문이다.
애초에 세계관 최강의 종족인 용을 사냥하던 집단이 용 사냥꾼이고 용 사냥꾼 세트는 이들을 처치해야 획득하는 장비다. 그런 만큼 눈앞의 암령은 그 위용만으로도 플레이어가 아니라 마치 보스 몬스터를 마주하고 있는 것 같은 착각마저 일어날 정도다.
‘그런데 그걸 플레이하는 건 사람이거든.’
상대의 기량을 조금도 알지 못하는 나와 달리 상대는 내 방송을 보면서 어느 정도 파악해 두었을 가능성이 높다. 그러니 우선해야 하는 건 적을 파악하는 것이다.
“정신없이 움직이는 스타일.”
아이디 thecoco를 사용하는 유저는 마치 3D 격투게임을 하는 것처럼 한시도 쉬지 않고 스탭을 밟으면서 내게서 타이밍을 빼앗으려 눈치싸움을 걸고 있었다.
‘고수는 개뿔. 그런 식으로 촐싹거리면 안 돼.’
드래곤 소울은 격투 게임이 아니다. 축 이동 따위로 상대의 공격을 피해내는 일 따위는 벌어지지 않는다. 괜한 스탭은 그 패턴을 상대에게 읽힐 경우 더 곤란한 상황에 직면하게 되는 법이다.
바로 지금처럼.
‘거리 파악. 딜 캐치.’
암령이 옆으로 이동하는 타이밍에 맞춰서 약 공격을 찔러 넣었다. 이로써 움직임을 봉쇄하고 연속으로 공격하자 처음 걸린 경직 때문에 그대로 콤보를 모조리 허용해버렸다.
- 나는 저렇게 움직이면 공격을 어떻게 하지? 그랬는데···
- 왼쪽으로 움직이는 모션을 보고 바로 찌르기로 따라가네.
- 이러면 스탭 못 밟지.
채팅창의 반응대로 상대는 스탭을 포기한 채 창의 긴 리치를 활용해서 싸우기로 바꿨다.
현실이나 게임 모두 싸움에 있어서 리치는 굉장한 이점을 갖는다. 그러나 장점이 있으면 단점도 존재하는 법.
‘리치가 길다는 건 필연적으로 한 번의 공격이 큰 동작을 만들어낼 수밖에 없다는 뜻이지.’
공격 동작이 크면 패리 판정도 커진다.
- 텅!
찔러오는 공격을 정확하게 쳐내자 상대의 가슴이 그대로 열렸다. 이를 앞잡으로 깊이 칼을 쑤셨다.
- 와··· 이건 진짜 지렸다. 창으로 찌르고 들어오니까. 기다렸다는 듯이 패리.
- ㅋㅋㅋ 스탭도 못 밟아, 공격도 함부로 못 해, 진짜 이러면 어떻게 상대하냐?
- 원래 PvP에서 패리가 저렇게 쉬운가요?
- 아닌데, 상대가 병신이라서 그래요. 저렇게 찌르면 그건 패리해달라는 거랑 똑같죠.
- ㄴㄴ 보고 입만 터니까 쉬워 보이는 거지 다른 사람이었으면 꼼짝없이 당해야 했던 공격임.
- 네~ 다음 초보님~
- 님 방금 말한 거 증명해볼 수 있음?
- 당연하지. 하수 앞에서만 센 척 한 저런 놈이랑 난 달라.
논쟁이 오가는 사이에도 나와 마주한 암령은 철저하게 유린당하고 있었다.
- 앞잡이 들어갔는데 피가 20%도 안 줄어드네요.
- 개 딴단. 진짜 너무 차이가 큰 거 아닌가? 심각한데?
- 그럼 뭐해요. 한 대도 못 때리고 계속 맞기만 하는데.
- ㅋㅋㅋ 하긴.
게임은 아무리 현실을 반영하더라도 자유도에 한계가 있다. 움직임 역시 제한적이며 공격기술은 어떤 장비를 착용했느냐에 철저히 구속당한다. 그리고 날카로운 감각과 반응속도 못잖게 드래곤 소울에 대해 가장 깊이 있게 이해하고 있는 사람이 바로 나다.
상대의 움직임을 모조리 간파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 크어억!
『DARK SPIRIT DESTROYED』
외마디 비명과 함께 중갑을 입은 전사가 무릎 꿇고 쓰러지더니만 사라져버렸다. 단 한 대도 맞지 않은 노 데미지로의 승리였다.
- 크··· 지가 쳐들어와 놓고는 한 대도 못 때려보고 쳐맞고 감.
- PvE만 잘하는 줄 알았는데, PvP도 지리네.
- 우리 벙어리 함부로 건드리지 말라~ 이마리야~
- 죽었으니까 이제는 키보드 두드릴 수 있으실 듯. 님~ 소감 한마디 해주실?
- ······대답 음따?
- 갔나본데?
- 튀었나 봄.
- ㅋㅋㅋㅋㅋ
일반적인 상황이었으면 이 정도의 반응은 아니었을 것이다. 채팅으로 당당하게 선포하고 도발했는데 당하니 시청자들이 더욱 관심을 드러냈다. 나 역시 ‘꾸벅’ 고개 숙이는 제스처를 보이고 마저 공략 방송을 이어나가고자 했다.
하지만 상처 입은 자존심은 또 다른 누군가를 불렀고 나의 승리 역시도 더욱 많은 이들의 호승심을 일으켰다.
『당신의 세계에 암령 bascobasco가 침입했습니다.』
『당신의 세계에 암령 onhit가 침입했습니다.』
『당신의 세계에 암령 blahblah가 침입했습니다.』
- 뭐야? 암령 축제네?
- 이거 PvP가 1:1로 이루어지는 게 아니에요?
- 드소 세계관이 그렇게 친절한 세계가 아닙니다. 그냥 비정한 세계에요.
- 3명이 쳐들어오면 2:2가 되는게 아니라. 걍 3:1임.
- 헐···
< 이거 괜찮은데?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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