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999년 게임 스타트-476화 (476/577)

< 목표는 너로 정했다 >

레이드의 시작은 당연히 구운몽부터다. 이내 기르가스의 시선이 내게 잡혔고 그사이, 엘프들은 자신의 자리를 찾아 이동했다.

“검기사!”

기르가스의 어그로가 확실히 잡혔다고 판단할 즈음, 나머지 검기사들이 달려와서 기르가스를 에워쌌다.

“5시에 두 자리 빕니다. 위에서 방황하지 말고 아래로 내려가십시오.”

워낙 고전 게임인지라 이렇게 누군가 따로 봐주지 않으면 이런 레이드에서는 비어있는 공간을 찾기도 어렵다.

“창기사 붙습니다!”

검기사들이 자리를 다잡은 직후, 공격 거리가 2칸인 창기사들이 재빨리 달려들었다. 각자 자신의 자리를 확보하고 기르가스를 향해 창을 내지른다.

“엘프들 공격 시작!”

일제히 당긴 활시위에서 모두가 하나의 동작처럼 화살을 날렸다.

“매지션들은 자신이 맡은 격수들 뮨 확인! 제대로 해주셔야 합니다! 미리미리 클릭 가능하도록 세팅!”

- 네!

플레지를 하면서 가장 힘들 때가 바로 지금 같은 상황이다. 이토록 좁은 공간에 단체로 모여 있는 상황이 오면 특정 대상을 공격하거나 그에게만 힐을 주기가 대단히 어렵다. 캐릭터를 분간하기도 어려울 정도이니 마우스 클릭을 정교하게 하는 건 더더욱 힘들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는 충분히 연습했고 모두가 플레지의 베테랑이다.

훈련한 만큼 꽤 안정적으로 레이드가 진행됐다.

[기르가스 : 크으··· 귀찮은 놈들!]

[기르가스 : 사라져라!]

기르가스가 양손으로 바닥을 내리찍었다.

“광역기입니다.”

이번 스킬은 기르가스가 쓰는 모든 기술 중에서 가장 약한 부류에 들어간다. 물론, 그 약하다는 정도도 뮨 없이 맞을 경우에는 즉사할 정도의 위력을 지니고 있기는 했다. 대신 이를 시작으로 긴장을 늦출 수 없는 진짜 레이드가 시작된다.

[기르가스 : 영혼만 남겨두고 모두 소멸하리라!]

[기르가스 : 크하하하!]

“전원 카운터 매직!”

기르가스의 대사가 나오고 약 5초 후, 기르가스의 두 눈에서 붉은 섬광이 터져 나왔다. 레이드 중인 모든 멤버의 머리 위로 카운터 매직 마법이 소멸했다는 붉은 고리 표시가 떠오른다.

‘좋아. 200명이나 되는 인원인데 아직까지는 완벽해.’

카운터 매직으로 방어할 수 있다는 말은, 카운터 매직을 사용하지 않을 경우 뮨을 받든지 못 받든지 한 방에 모조리 즉사한다는 뜻이기도 하다.

[기르가스 : 크하하하하!]

[기르가스 : 죽어라! 모조리 죽는 거다!]

레이드를 시작하고 아직 2분도 채 되지 않았을 때, 세 번째 스킬이 나왔다.

“격수 전원 귀환!”

지난번 지옥검과 담덕 형님을 눕게 만들었던 원 킬 패턴이다. 나 역시 죽기 십상이라 재빨리 돌아왔고 서둘러 전장으로 복귀하며 다급히 말을 이었다.

“제가 복귀할 때까지 진수가 지휘합니다.”

- 네!

“격수 붙었습니까?”

-지금 어그로 잡았고, 검기사 돌격합니다. 됐다. 창기사 자리 잡으세요!

진수가 안정적으로 해주고 있었다.

예전 드래곤 레이드를 하던 그 시절보다도 한층 더 나아졌다는 게 여실히 보일 정도였다.

‘하긴. 그때는 뮨이고 뭐고 없이 그냥 몸 빵으로 버티고 힐로 버티면서 그냥 잡았는데 지금은 뮨도 있고, 카운터 매직도 있지.’

예전에 비하면 공략을 위한 전략이 더 중요해졌지만, 전략만 확실하다면 훨씬 안정적인 레이드가 되는 것도 어쩌면 당연한 일일지 모른다.

‘그나마 즉사 스킬을 한 번 사용하면 꽤 오래 다시 사용하지 않는다는 게 다행이라면 다행인가?’

기르가스가 있는 저주받은 다크엘프의 성소는 생각보다 거리가 꽤 된다. 격수들이 마을에 돌아와서 재정비하고 다시 그곳까지 가는 데에는 꽤 시간이 소모되는 편인데, 그 안에 기르가스가 다시 즉사기를 사용하면 굉장히 난감해질 수밖에 없었다.

[기르가스 : 크하하하하!]

[기르가스 : 죽어라! 모조리 죽는 거다!]

- 격수! 전원 귀환!

‘뭐야? 이걸 또 쓴다고?’

빠르게 정비하고 기르가스가 있는 곳으로 달려왔을 즈음, 채팅창으로 기르가스가 전멸기를 발동할 때 나오는 메시지가 올라왔다.

조금만 늦었어도 난감해질 뻔했다.

“격수 돌입합니까?”

- 잠깐! 아직··· 됐다! 돌격해도 돼!

기르가스의 스킬에서 피해를 보지 않으려면 아예 자리를 비워두는 편이 나았기 때문에 진수의 신호를 기다린 후, 다시 진입하여 자리를 잡았다.

『Hit Point : 1164/1400』

『Hit Point : 731/1400』

···

『Hit Point : 1356/1400』

매지션들의 마나를 최대한 아끼기 위해서 그들은 체력이 절반 이하로 떨어지지 않는 수준에서만 힐을 사용한다. 그 외에는 최대한 물약으로 버티면서 탱킹을 해야만 했다.

- 대체 물방이랑 마방이 몇이 되어야 저 정도로 버티는 걸까?

- 일단 100은 넘어야겠지? 지난번에 뱀 대가리 잡을 때도 혼자서 엄청 버텼잖아.

- 그때 진짜 무시무시했는데.

- 우리는 스킬 한 방에 죽네 사네 그랬는데 혼자 절반 아래로 떨어지는 일이 없었을 정도니까.

강화한 보람이 느껴지는 감탄사들이 들릴 때, 기르가스의 메시지가 올라왔다.

[기르가스 : 모두 녹아버려라!]

[기르가스 : 크하하하하하!]

‘얘는 뭐가 저리 신났다고 다구리 얻어맞으면서 계속 저리 웃는 거야?’

어쨌거나 우리 역시 맞대응했다.

“올 카운터.”

기르가스가 한 손을 크게 휘두른 후 바닥을 내리찍었다.

땅에서 활활 타오르는 불이 솟구쳐 올랐다.

이 스킬 역시 카운테 매직으로 방어하지 않으면 즉사다.

‘뭔 놈의 스킬이 하나 빼고 전부 즉사야.’

이러니 한 방에 즉사하지 않는 맨 처음 스킬이 제일 약한 것이다.

[기르가스 : 크하하하하!]

[기르가스 : 죽어라! 모조리 죽는 거다!]

“격수 귀환!”

번쩍하는 소리와 함께 우리는 또다시 다크엘프의 성소로 이동했다. 이다음은 상황과 장면을 복사해서 붙여 넣는 것과 마찬가지의 반복이었다. 때릴 수 있을 때 공격하고 죽기 십상인 공격이 오면 귀환 한 뒤 재합류한다.

반복할수록 익숙해졌다. 그러나 방심하면 죽어버리니 긴장의 끈을 놓칠 수 없는 장기전이기도 했다.

몇 번을 귀환하고 돌아왔을까?

기르가스의 체력이 꽤 떨어진 게 분명하다. 사전답사 때에는 보지 못했던 스킬이 등장했기 때문이다.

‘이것도 브레스랑 똑같군. 멘트가 전혀 없어.’

기존 사전 답사의 인원으로는 기르가스의 체력을 떨어뜨릴 수 없었기에 보지 못했던 패턴. 나 이전의 공략대들은 여기까지 오지조차 못하고 전멸해서 그 누구도 알지 못한 스킬은 다름 아닌 보호막이었다.

그리고 효과는 여지없이 즉사라는 결과로 우리에게 돌아왔다.

기르가스를 둘러싼 붉은 막이 생성되자 앞라인에 있던 2그룹 격수 전원이 죽어 나자빠진 것이다.

- 뭐야?

“왜 다 죽었어?”

급하니까 존칭이고 뭐고 없다.

소통이 먼저다.

- 몰라.

- 딱히 뭐에 맞은 거 같지도 않았는데, 체력이 팍팍 달더니 죽어버리네?

방어막이 생기고 갑자기 격수들이 죽었다. 심지어 격수들을 향한 공격 애니메이션도 없었다. 그렇다면 예상할 수 있는 패턴은 한 가지다.

‘카운터 배리어.’

플레지의 나이트들이 보유한 최고의 스킬.

일정 확률로 상대의 공격을 피하고 반격하는 스킬을 기르가스 역시 보유하고 있는 것 같다. 하지만 추측만으로 지휘할 수는 없기에 확신이 필요했다.

“격수들 빨리 재정비해서 돌아오시고 우리 조는 일단 중앙대기. 저 혼자 진입합니다.”

아까처럼 즉사 스킬 이후의 교대가 아니었기 때문에 그냥 진입만 하면 된다.

‘어디 한 번 볼까?’

일단은 녀석의 앞에 서서 가만히 공격을 맞기만 했다.

『Hit Point : 1400/1400』

『Hit Point : 883/1400』

『Hit Point : 1388/1400』

붉은 보호막이 생기기 이전과 달라진 게 없었다.

이번에는 공격을 해보았다.

『Hit Point : 1400/1400』

『Hit Point : 787/1400』

『Hit Point : 331/1400』

『Hit Point : 87/1400』

‘깜짝이야. 죽는 줄 알았네!’

『Hit Point : 563/1400』

오래 때린 것도 아닌데, 이전과 달리 체력이 순식간에 빠져나갔다.

그래도 덕분에 확실해졌다.

“붉은 막은 카운터 배리어입니다. 이때 근접 공격하면 반격당해서 죽으니 붉은 막이 있을 때는 격수들이 공격하면 안 됩니다.”

- 그런 거였어?

- 어쩐지 갑자기 딜이 너무 세졌다 했네.

- 근데 엘프들 활질은 반사 안 되나 봅니다.

만약 그것도 데미지 반사가 됐다면, 엘프들 역시 전멸했을 것인데, 잘 살아서 활질을 하고 있었다. 그렇기에 나는 앞에서 혼자 기르가스의 공격을 맞아주고만 있었고 원거리 데미지만 꾸준히 입히는 시간이 이어졌다.

‘뭔가 방법이 있긴 할 텐데······.’

생각이 날 듯 말 듯 했다. 그즈음, 붉은 막이 사라졌고 다시 격수들이 자리를 잡는 도중, 이번에는  기르가스의 몸이 붉게 타올랐다.

가장 위험하고 크게 경각심을 가졌던 바로 그 스킬이 온다는 징조였다.

“귀환! 전원 귀환합니다! 엘프들도 매지션도 전부 귀환!”

화면 내의 모두에게 스턴을 건 후 광역 미티어를 떨어뜨리는 스킬이다.

맞으면 당연히 전원 즉사!

매지션이 앱솔루트 실드로 잘 버티고 있어주기를 바라며 오늘 만 여러 차례 보는 다크엘프의 성소로 복귀했다.

사냥터에서 벗어나 주위가 조용해진 덕분일까.

‘근접 물리 데미지 반사라면.’

정비하다가 문득, 기르가스의 카운터 배리어에 대한 대응법이 떠올랐다.

‘이보니 완드가 있었군.’

사용하면 대상의 머리 위로 강력한 번개를 내리칠 수 있는 소모성 아이템이다. 이게 마법 데미지인지 물리 데미지인지는 잘 모른다. 그러나 확실한 건 근접 물리 데미지가 아니라는 것이다.

“전원 정비하면서 이보니 완드를 최대한 챙기십시오.”

일일이 다 설명할 시간은 없다. 일단은 챙기도록 지시하고 다시 기르가스가 있는 곳으로 이동했다.

- 마법 끝!

“1그룹이 돌입합니다.”

나를 필두로 진입했다.

‘어디 다시 한번 카운터 배리어를 써 봐라.’

아까는 몰랐으니까 당했지, 알고 나면 그리 무서운 스킬도 아니다. 그렇게 생각하고 있을 때, 기르가스를 중심으로 둥근 마법진이 생겨났고 이내 푸른빛의 장막이 만들어졌다.

‘색이 달라.’

동일한 효과라면 굳이 색을 다르게 할 필요가 없다.

이건 확인이 필요하다.

“전원 동작 그만!”

장막이 생겨남과 동시에 격수들은 일단 공격을 멈추었다. 이미 2그룹이 붉은 장막을 공격했다가 한 차례 전멸하는 것을 보았기 때문에 일단 장막이 올라오자 공격을 멈춘 것이다.

반면에, 조금은 안이하게 반응한 엘프 쪽에서는 달랐다.

윽!

아악-!

사망자가 발생했다.

‘그렇다는 건.’

우두커니 있던 내가 공격을 해보았다. 체력은 줄어들지 않았다.

“엘프들 멈추고 격수들 공격! 푸른색은 원거리를 반사합니다. 푸른색에는 격수가 공격합니다!”

역시나 색이 달라진 게 괜한 것이 아니다. 색이 다른 만큼 효과도 달랐던 것이다.

‘한 번, 이보니 완드를 써볼까?’

아이템 창의 완드를 클릭했다.

기르가스의 머리 위로 번개가 몇 번 떨어졌고, 일단 데미지 반사는 일어나지 않는다.

원거리 마법 데미지로 인정받는다는 뜻이다.

“누운 엘프는 부활해주시고, 계속 딜 합니다!”

이후로 몇 번이나 같은 패턴을 반복했다.

확인 결과, 기르가스는 배리어를 사용한 후 무조건 전 범위 즉사 스킬을 사용하고 배리어는 붉은색, 푸른색 외에 황금색까지 총 세 가지 배리어가 존재했다.

“붉은색 배리어! 격수들 멈추고 이보니 완드로 공격!”

엘프들이 공격을 멈추어야 하는 푸른색 배리어는 방법이 없었지만, 붉은 배리어 일 때에는 이보니 완드를 활용해서 부족하게나마 딜을 넣었다.

그렇게 20분이 지났다.

[기르가스 : 모두 녹아버려라!]

[기르가스 : 크하하하하하!]

“올 카운터.”

20분이 더 흘러갔다.

[기르가스 : 크하하하하!]

[기르가스 : 죽어라! 모조리 죽는 거다!]

“격수 귀환!”

또다시 20분이 지나 한 시간을 훌쩍 넘겼다.

[기르가스 : 영혼만 남겨두고 모두 소멸하리라!]

[기르가스 : 크하하하!]

“전원 카운터 매직!”

코끼리를 이쑤시개로 찔러서 잡는 기분이 이럴까.

이제는 관성으로 움직인다고 여겨질 정도였다. 보스 몬스터의 체력을 알 수가 없으니 헛된 수고를 하는 건 아닐까, 하는 의구심마저 피어올랐다.

‘도대체 뭔 생각으로 체력을 이렇게 크게 만든 거야?’

귀환 횟수는 열 번을 넘긴 지 오래였다. 재정비 후 다시 전투를 이어나가며 쏟아부은 골드만 해도 말해봐야 입만 아플 정도다. 가만히 활만 당기는 엘프들도, 몇 번이나 마을에서 재정비하고 이 먼 거리를 달려와야 했던 격수들도, 지휘하는 나나 진수의 목소리도 무감각해져갔다.

그리고 인고의 끝에 우리는 다른 메시지를 보았다.

[기르가스 : 으헉···! 크헉···!]

[기르가스 : 인간들이여! 나를 이겼다고 생각하는가?]

- 오오오! 설마!

- 드디어! 드디어?

마법과 타격음으로 소란스럽던 전장이 고요해졌다. 기대하는 마음으로 출력되는 다음 메시지를 모두가 지켜보았다.

[기르가스 : 크하하하하! 나는 이계의 지배자 기르가스!]

[기르가스 : 차원의 틈이 완전히 열리는 날! 다시 만나게 될 것이다!]

땅에 박혀있던 기르가스가 연기처럼 흩어졌다.

아이템은 마치 폭발하듯 와장창 터져 나와 사방으로 떨어져 내렸다. 이렇게 아이템이 쏟아지면 먹자 같은 것을 조심해야 하지만 설마 기르가스가 잡힐 거라고는 아무도 생각하지 못해서일까, 다들 얼떨떨해하며 감격할 따름이다.

게다가 이곳의 멤버들은 모두 우리 길드원들이다. 순간의 이익에 휘둘려 평생 후회할 일을 한 이는 존재하지 않으니 조금도 걱정할 필요가 없었다.

- 잡았다! 잡았어!

- 대박! 이게 잡히기는 하는 거였구나!

- 헐. 저거 뭐야. 디스에 미티어까지 있네.

- 헉! 저건 기··· 기···

- 기르가스의 검!

덜컥!

모두가 침만 삼키며 구경만 하는 그 아이템을 내가 집어 들었다.

「기르가스의 검

43/53

양손 무기

근력 +2

체질 +1

매력 +2

추가 대미지 +33

공격 성공 +7

클래스 : [나이트], [드래곤 나이트]

재질 : 블랙 미스릴

무게 : 100」

집행검조차 한 자루도 없는 서버.

최고의 검이 무사의 양손검인 서버.

- 기르검!

- 기르가스의 검이다!

- 와아아!

사냥터 통제가 없는 축복받은 서버이자 저주받은 서버라고도 불리는 켄헬에 최초로 기르가스의 검이 등장하는 순간이었다.

< 목표는 너로 정했다 > 끝

ⓒ (4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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