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999년 게임 스타트-474화 (474/577)

< 목표는 너로 정했다 >

- 아무튼, 엘프족 단검은 더 있지?

- 주문서가 부족해서 저거만 만든 거지?

“왜? 오랜만에 장사꾼의 열정이 타오르냐?”

- 미친놈아. 거저 줘도 안 받을 아이템을 지금 가장 핫하게 만드는 걸 눈으로 봤는데, 그런 생각이 안 들겠냐?

-얼른 대답해! 된다고 말하라고! 돈! 돈을 벌 수 있단 말이야!

격한 호흡이 거북할 지경이었다.

“신음 그만 내! 아무튼, 주문서만 충분하면 아직 저 열 배는 찍어낼 수 있다.”

- 오케이. 금방 대령하겠소이다!

- 오래간만에 제대로 장사 좀 해보자!

오랜만에 타오른 진수성찬은 정말 미친 듯이 엘프족 단검을 팔아댔고 그 수익으로 강화주문서를 구매해 엘프족 단검을 생산해냈다. 결과적으로 거저 줘도 받지 않던 아이템인 축복받은 엘프족 단검은 13억 골드라는 역대급 수익을 우리에게 안겨 주었다.

‘돈이 될 줄은 알았지만, 이 정도로까지 광풍이 불 줄은 몰랐어.’

기대 이상의 수익은 +9 엘프족 단검을 원하는 구매자들이 줄지어 나타나면서 얻게 되었다. 만약 그게 아니었다면 아무리 가치가 올랐다고 해도 13억 골드의 수익을 만들지는 못했을 것이다.

대부분의 사람이라면 여기서 축배를 들고 아주 난리가 아니었을 터다. 하지만 내게는 과정에 불과할 뿐이다.

“가자!”

이제 기르가스를 향해 쏠 총알이 넉넉하게 마련됐다.

구운몽 복귀 이벤트이자 사람들 길드에 새로운 역사를 이끌 때가 되었다.

- 13억을 고스란히 레이드 진행비로 쓰겠다니. 역시 회장님 클래스!

- 진짜 이거 다 써서 길드 전체 스펙을 올릴 거냐?

“물론이지.”

다만, 여기는 비밀 엄수라는 필수 조건이 붙는다.

“최대한 엠씨소프트가 모르게 준비해서 조용히 기르가스를 처리할 거다.”

- MC네 게임인데 MC 모르게 한다고?

- 그게 되겠냐?

“당연하지. 내가 누구냐? 같은 업계 종사자잖아. 뭘 조심하면 쟤들이 눈치 못 챌지 빠삭하게 안다고.”

- 이래서 내부 고발자들이 무서운 거임.

- 오케이. 우리가 조심해야 할 건 뭔데?

“앞으로 인게임 내에서는 기르가스에 대한 이야기 금지. 잡을 때까지는 절대로 그와 비슷한 이야기도 하지 않아야 해.”

- 묵언수행이냐?

- 아무 말도 하지 않으면서 무슨 수로 레이드를 해?

“보이스 채팅을 쓰면 게임 내 채팅 없이 대화는 가능하잖아.”

- 그게 있었구만! 오케이!

- 그거면 끝?

“그럴 리가 있겠냐?”

아이템 강화는 내가 직접 해서 장비를 마련한다손 쳐도 100명 이상의 스펙을 올리는 대작업이었다. 당연히 수많은 아이템을 공수하는 건 옆에서 누군가가 해줘야 만이 가능했다.

“마법 방어 장비들을 모조리 쓸어와. 다른 건 필요 없어.”

- 기르가스 공략의 핵심이 마법 방어인 거구나.

“맞아. 그러니 저렴한 마법 방어 아이템들을 최대한 끌어와 줘.”

- 알따!

- 걱정 마시라!

주요 마방 아이템을 제작하는 데는 강화 성공이 힘들지 기본 재료가 비싼 건 아니다. 그것들을 가지고 마방만 미친 듯이 높인다면, 일단 생존에 대해서만큼은 한시름 놓을 수 있다.

‘생존만 한다면 어떻게든 잡을 수는 있는 거니까.’

이제 다음 스텝을 밟을 차례가 왔다.

바로 공략을 위한 사전 답사 겸 자료 조사였다.

*

기르가스는 명실상부한 플레지 최강의 보스 몬스터다. 그것도 그냥 단순히 현존 최강의 보스라거나 뭐 그런 수준이 아니라 앞으로도 이보다 강력한 보스는 등장하지 않을 만큼 플레지 세계관에서 강력한 보스 몬스터다.

‘이런 녀석을 공략 없이 그냥 장비만 챙겨서 갈 수는 없지.’

파푸니르를 공략했던 때처럼 기르가스 공략을 위한 준비 과정이 있어야 한다. 이를 위한 답사에서 가장 중요한 건 보안이다. 자칫 운영진이 알았다가는 기르가스의 검을 쏙 빼내서 잡아봐야 명예만 남고 주머니는 홀쭉해지는 불상사가 생길 수 있다.

멤버는 기르가스에게 죽지 않고 버틸 수 있는 수준의 장비를 가진 소수이면서 나와 예전부터 인연이 있는 초창기 멤버로 한정했다.

‘죽음 페널티를 감수해 둬야 내부 분열이 안 생기거든.’

경험치 상실이라는 페널티는 플레지처럼 1%를 올리는데 힘겨운 게임일수록 더욱 강력하게 다가온다. 또한, 일이 잘 풀릴 때는 화목하더라도 자신에게 손해가 생기면 남 탓을 하게 되는 것이 사람 아니겠는가.

- 드디어 올 게 왔구나. 안 그래도 사람들 연락해서 대기하고 있었다.

“그래?”

사전답사를 위해 미리 진수에게 연락을 했는데, 이미 눈치껏 멤버들을 모집해 둔 상태였다.

- 보이스 채팅 들어와.

“오케이.”

창에 보이는 이름들은 문자 그대로 초창기의 추억을 함께했던 원년 팀원들이었다.

「플레지 케헬 서버 No.1 사람들 길드

현 채팅 인원 10명

황성찬허좁, 윤진수허좁, 지옥검, 지옥활, 검, 치명타, 분노의 활질, 구두룡검, 비전, 담덕」

10명이나 되는 그들이 더할 나위 없을 만큼 반갑다. 다만, 여기에 좌호법은 없었는데 그 이유는 너무나도 단순하고 명쾌했다. 마음대로 접속하고 게임을 하는 회장님과 달리 그는 출근과 퇴근을 칼 같이 지켜야 하기 때문이었다.

‘회장님도 근무시간이잖아요!’라고 내심 항변하고 싶을 테지만, 그걸 소리 내어 표현할 직원은 존재하지 않으리라!

- 전 군주님 오셨습니까!?

- 형님! 오랜만입니다!

- 베리베리베리 반갑습니다!

채팅방에 들어오기가 무섭게 인사들을 해온다.

- 저번에 그 뱀 대가리들 잡을 때는 함께 못해서 좀 서운했다.

담덕 형님이다. 내가 복귀한다는 소식을 미리 알리지 않은 바람에 지 브라퀴 파티에는 끼지 못하고 우리의 진입을 도와만 주었었다. 그게 못내 아쉬웠던 모양이다.

“그러니까 이번에는 오랜만에 옛날 기분 좀 내봐요. 기르가스를 잡은 서버가 하나도 없으니 우리 드래곤 슬레이어들에게 딱 맞는 보스입니다.”

- 오냐. 잔뜩 기대하고 있다. 보통은 안 될 거라고 하겠지만, 너니까 가능성을 덮어놓고 믿어본다. 무조건 된다고 확신하니까 될 때까지 도전해보자.

- 이거 총 군주님이 계속 실패하면 앞으로 쭉 플레지에서 보게 되는 거 아닙니까?

- 그것도 또 기대되네요.

형님들을 시작으로 길드원들의 너스레가 이어졌다. 한바탕 웃음이 오갈 즈음, 영탁이가 내게 넙죽 인사했다.

- 형님! 오랜만입니다.

“그래, 반갑다. 너 여기에 초대받을 정도면 이제는 제법 세졌나 보다?”

예전에는 메인 멤버 중 늘 최약체의 자리를 고수하고 있었기 때문에 사실 이런 사전 답사에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인물이었다.

- 지금 언제 적 이야기를 하십니까? 거짓말 안 보태고 켄헬 서버에서 치명타 하면 모르는 나이트가 없습니다.

‘진수성찬도 지존 법사 소리 듣고 있더니 얘마저도 이렇게 되는구나.’

역시 현실이건 게임이건 시간을 갈아 넣으면 성장한다는 건 불변의 진리다. 오히려 최선을 다해도 최고의 결과가 보장되지 않는 현실보다 투자한 만큼 결과가 돌아오는 게임이 더욱 친절한 세계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검이는 어때? 이번에는 지 브라퀴랑 달리 시간이 좀 걸릴 거 같은데, 괜찮겠어?”

- 타이밍이 딱 좋아. 서울 패션쇼 때문에 바빴었지만. 이제 다 끝났어.

“나이스한 타이밍이네.”

뒤이어 멤버들 모두에게 재차 확인받을 겸 물었다.

“정보가 전혀 없고 최초의 공략인 만큼 기르가스 레이드를 준비하며 꽤 많이 누울 수도 있습니다. 다들 괜찮으신 거죠?”

- 게임인데 즐겁게 하면 그거로 된 거지.

- 못 깨면 오래도록 쭉~ 할 각오만 해둬라.

담덕 형님을 비롯해서 팀원들이 대수롭잖게 대답했다. 나 역시 최대한 아무도 죽지 않도록 신경 쓰겠다고 다시금 다짐하며 말을 이었다.

“좋습니다. 이제 기르가스와 면담 시간을 가져보지요.”

- 가자.

두런두런 대화하며 이동했다.

과거에 안사락스와 파푸니르를 공략할 때는 가스트라는 몬스터를 테이밍 하여 침묵을 거는 공략법을 사용했었다. 그러나 기르가스에게는 이 방법을 사용할 수 없다.

첫째는 레벨이 워낙에 높은 보스 몬스터라 가스트 따위의 공격이 전혀 들어가지 않기 때문이고 둘째 가스트 같은 허접한 몬스터가 차지할 1칸의 공격 자리가 아까워서다.

‘대충 두 파티 정도가 모이면 사냥할 수 있던 파푸니르와 안사락스랑은 달리 이 녀석은 최소 열 파티에서 스무 파티 정도가 모여야 하는 보스니까.’

이 정도 인원이면 앞에 붙을 격수의 자리도 부족할 지경인데, 어딜 테이밍 몬스터가 자리를 차지하겠는가.

‘그래도 침묵은 좀 아쉽네.’

물론 그 침묵마저도 나중에는 엠씨소프트에서 해결책을 찾았으니, 별 의미는 없을 것이다.

맵 이동을 마친 우리는 저주받은 다크엘프의 성소에 도착했다.

“지난번에 보니까, 저쪽에서 불 나오는 붉은색 원형 보이시죠? 저기를 넘어가면 기르가스가 공격하더군요.”

- 그 정도는 우리도 다 알아.

- 이미 열 댓번 공략 시도했다가 다 실패했습니다.

“실패 요인들이 어떻게 됩니까?”

- 모르지. 그걸 알면 실패한 원인을 수정해서 성공했지 않겠어?

- 그냥 약해서 실패했다고 보고 있습니다.

- 레벨 높이고 장비 보강하고 도전하는 거로 결론 내렸지.

무려 열 댓 번이나 도전한 것 치고는 허탈하리만큼 무식한 결말이었다.

‘하여간 플레지 유저들은 이게 문제라니까.’

이 사람들은 일단 강력한 스펙과 물약빨로 밀고 나가려는 성향이 너무 강하다. 그래서 이 게임에 진득하니 붙어 있는 거겠지만 말이다. 그나마 공성전을 자주 하며 진형을 일사불란하게 짜는 건 잘하는데 정작 몬스터 사냥 쪽에서는 취약한 면모를 더러 보인다.

“격수들. 부탁합니다.”

- 넵!

오늘의 사전답사는 기르가스의 공격 패턴과 범위 따위를 확인하기 위한 작업이다. 그러니 내가 메인 탱킹을 할 수 없는 상황이라 격수들에게 메인 탱킹을 부탁했다.

- 너무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기르가스가 몸통이 박혀서 못 움직이는 바람에 돌아가면서 탱킹하면 탱킹은 어느 정도 버틸 수 있습니다.

어그로의 대상을 따라다니면서 공격하는 다른 몬스터들과 달리 이 녀석은 이동 자체가 불가능한 녀석이기에 가능한 공략법이다.

가장 먼저 나선 이는 지옥검이었다. 격수 중에서 가장 장비가 좋은 나이트가 찰싹 달라붙자 기르가스의 몸체 위로 글씨가 나타났다.

[기르가스 : 크으··· 귀찮은 놈들!]

[기르가스 : 사라져라!]

스피커는 고요했다.

“뭐야? 왜 음성이 없지?”

- 음성? 무슨 음성?

“아니. 나는 얘가 마법 쓸 때 메시지가 아니라 음성지원으로 나올 줄 알았거든.”

진수가 대답했다.

- 이거 플레지야, 플레지. 98년에 출시된 게임인데 무슨 음성지원을 해주겠냐?

‘아니거든.’

기르가스를 실제로 사냥하겠다고 들이대는 건 처음이다. 그러나 예전에 플레지의 사냥 성공 영상을 꿈속 미래에서 본 적은 있다. 그때의 기르가스는 분명히 음성지원이 되었고 많은 사람이 놀랐었던 기억이 있었다.

‘얘도 용처럼 리뉴얼 돼서 새로 나왔나 보네. 아니면 잠수함 패치가 꾸준히 이루어졌던가.’

이런 생각을 하는 사이 보스 몬스터의 팔이 무섭게 휘둘러졌다.

[기르가스 : 크하하하하핫!]

평범한 공격에 불과한데 지옥검의 체력바가 널뛰기를 할 만큼 강한 데미지가 들어왔다. 그의 캐릭터가 얼마 버티지 못하고 바로 귀환 주문서를 눌렀고 다음 멤버가 패턴 유도를 위해 진입하기를 반복했다.

- 으아! 진짜 세다!

- 뮨! 뮨 좀 줘! 뮨 떨어진다!

- 이거 떨어지면 나 바로 즉사야!

뮨을 받고 앞에서 탱킹을 하는 격수만 문제가 아니었다. 강력한 보스 몬스터답게 평타부터 마법까지 기르가스의 공격은 모조리 범위형이었고 그 탓에 싸우고 있는 누구도 긴장을 늦출 수 없었다.

‘괜히 2013년까지 안 잡힌 게 아니구나. 공략이고 말고를 떠나서 스펙이 너무 부족하다.’

내심 혀를 끌끌 찼던 길드원들의 분석은 의외로 정확했다. 답사를 시작하고 고작 2분이 지났을 뿐인데 지옥검 귀환, 고군분투하던 검도 귀환, 세 번째인 담덕 형님이 ‘나 죽어간다!’하며 언성을 높였다. 동안 잽싸게 달려온 지옥검이 다시 바통을 이어받는 식이었다.

“한 명씩 붙으니까 잘 모르겠습니다. 이번엔 두 명씩 붙어보죠.”

이러다가는 평타 공격만 보다가 끝날 지경이었다.

만약 두 명이 붙었는데도 이렇게밖에 버티지 못한다면 기르가스 공략에 격수는 필요 없게 된다. 아무리 내가 앞에서 잘 버텨준다고 해도, 나머지가 버텨주지 못할 테니 말이다.

‘못 버텨주면 차라리 엘프들만 모아서 단체로 활질을 하자.’

극단적으로 가야 하나 싶었는데, 다행스럽게도 지옥검과 담덕 형님이 함께 붙으니 지옥검에 비해 담덕 형님의 체력은 제법 안정적으로 바뀌었다.

‘이 정도면 해볼 만하겠어.’

그리생각할 즈음, 다른 메시지가 나왔다.

[기르가스 : 크하하하하!]

[기르가스 : 죽어라! 모조리 죽는 거다!]

- 아! 왜!? 왜 벌써 이거야!?

- 망했다!

“에? 왜요?”

- 이건 카매(카운터 매직)가 안 돼.

잠시 후, 기르가스 주변이 붉게 물들더니 붉은 용암이 솟구쳐 올랐다. 캐릭터가 외마디 비명을 지르며 허물어지는 것 역시 함께였다.

< 목표는 너로 정했다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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