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999년 게임 스타트-472화 (472/577)

< 목표는 너로 정했다 >

소형 몬스터 28, 대형 몬스터 33. 부가 옵션으로 공격 성공 +5에 근거리 대미지 +23, 심지어 힘 스탯마저 +2를 시켜주는 미친 무기!

그 바로 아래에 있는 무사의 양손검은 고작해야 소형 19, 대형 23에 공격 성공 +1에 근거리 대미지 +5가 끝이었으니 무사의 양손검으로 집행검과 비슷한 스펙을 내려면 최소 22강을 해야 +0 집행검의 성능을 낼 수 있게 된다.

나뿐만 아니라 절대다수의 플레지 게이머는 복권 당첨만큼 이 검 한 자루를 가져보는 게 소원이리라.

‘하지만 이걸 지금의 휴가 기간 동안 먹는 건 불가능하지.’

예전에는 하늘 위의 별을 따는 일과 동격이어서 어려웠지만, 지금은 귀하디 귀한 내 시간을 오로지 플레지 하나에만 쏟을 수 없기에 저어하게 됐다. 만약 집행검의 제작 아이템을 구매할 수만 있으면 무지막지한 돈을 퍼부어서 당장 만들었을 것이다.

그러나 현재까지 켄헬 서버에 아이템이 존재하지 않는 이유가 잘 알려주듯이 집행자의 검을 만드는 재료 아이템들은 거래 불가였다. 갖고 싶은 녀석이 직접 사냥해서 한땀 한땀 바느질하듯 재료를 모아야 하는데 솔직히 거기에 쏟을 시간은 너무나도 아깝다.

‘지금처럼 계속 사냥터 통제가 없는 서버로 남는다면, 정말 오래도록 유일하게 집행검이 없는 서버로 이름을 남길 수도 있겠지.’

그렇다면 이제 뭘 해보는 게 좋을까?

오래간만에 플레이하는 플레지인데 단순히 잡몹을 사냥하고 맵 여기저기를 구경하는 정도로 그치고 싶지는 않았다. 만약, 이 게임에서 밀린 퀘스트 같은 게 있다면 스토리를 즐기면서 충분히 따라갈 마음이 있기는 하다.

그런데 플레지는 퀘스트는커녕 NPC의 대화조차도 읽을 만한 게 없는 게임이다. 이벤트랍시고 있어봐야 변신 이벤트나 토너먼트 따위가 90%이고 말이다.

‘이런 주제에 돈은 어찌나 잘 벌리는지 정말로 한국 역사에 이름이 남을 게임이라니까. 아무튼, 특색있고 굵직한 것을 하고 싶은데. 그냥 미친 척하고 기르가스를 잡아버려?’

한번 나 자신의 스펙 강화를 위해 능력을 아낌없이 쓴 탓일까, 휴가 겸 ‘마음대로 놀 거야!’라는 심보가 폭발한 때문이려나.

전체 밸런스를 신경 쓰면서 조심하던 것과 달리 무모한 발상을 하게 됐다.

‘기르가스는 잡아봐야 개뿔도 없을 게 뻔한데.’

무사의 양손검은 2016년까지 최상위 검의 자리를 지킨다.

왜?

현재 이 검과 집행검을 가진 사람들이 플레지가 서비스될 수 있도록 계속 돈을 지불하는 사람들이고 이들이 가진 무기의 가치가 하락하게 된다면 망설임 없이 플레지를 떠나게 되기 때문이다. 이를 막기 위해서 엠씨 소프트는 어떻게든 그 가치를 유지하게 된다.

이런 상황에서 엠씨 소프트가 기르가스의 검이라는 사기적인 무기를 나오게 둘 리가 없었다. 잡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이유를 배제하고, 이건 꿈속 미래의 내가 입증해줄 수 있다.

기르가스가 등장하고 공략이 되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렸으나, 한 번 공략이 된 후에는 몇 번이나 죽이는 데 성공했다. 그러나 몇 차례나 되는 사냥 성공에도 기르가스의 검은 단 한 자루도 나오지 않았다.

왜 그럴까?

‘나오면 플레지의 미래가 어두워지거든. 예전에 내가 안사락스 잡았을 때를 보라고. 이리저리 패치하고 나중에는 아예 등장하지 않도록 숨겨두기도 했었잖아.’

게이머 관점에서야 나만 재미 보고 히든 피스니 뭐니 하는 거로 이득을 보고 싶어 하지, 운영하는 측에서 그런 부류는 처단해야 할 버그와 마찬가지일 뿐이다.

‘최초라는 명예랑 아이템 획득이라는 실리도 같이 취하는 콘텐츠. 그게 뭐가 있으려나.’

조금 더 고민할 즈음, 어떤 상념 하나가 번개처럼 머리를 스쳤다. 방금 떠올린 지룡 안사락스의 사냥 때의 일이었다.

“진수야.”

- 응? 왜?

“너. 기르가스 어디에 나오는지 알고 있지?”

나는 플레지를 오래했고, 꽤 많은 정보를 보유하고 있지만, 그래봤자 꿈속의 나는 플레지 월드에서 저 밑바닥 천민과 마찬가지였다. 그런 나로서는 기르가스라는 대단한 보스의 위치까지 알고 있을 이유가 없었다.

- 알지. 왜? 잡게?

“구경해 보게.”

- 구경? 네가 그런 것도 하냐?

“어. 하고 싶어졌어.”

갑자기 ‘안 돼.’라고 굳게 먹었던 마음이 돌변한 이유.

그것은 잡히지 않을 것이라고 장담하고 있던 엠씨 소프트가 산타클로스 저리 가라 할 만큼 두둑하게 채워놓았던 안사락스의 경험이 떠올라서였다. 내게는 직업이 게이머였다면 한없는 축복이었을 테지만, 현실에서는 있으나 마나 한 능력이 있다.

바로 어떤 놈이 좋은 아이템을 가졌는지, 강화를 염원하면 성공과 실패가 느껴지듯 내가 바라는 아이템을 저 몬스터가 떨어뜨릴지 말지를 아는 힘이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나는 미래의 기억을 너무 잘 살린 것 같아. 조금만 멍청해서 다크 게이머랍시고 오직 게임만 하고 지냈다면 지금의 능력들이 빛을 보였을 텐데. 그렇다고 현실에서 수백억을 벌 수 있는 지식을 놔두고 게임만 하고 지내는 건 얼간이고.’

가볍게 웃으며 캐릭터를 움직였다.

기르가스는 다크엘프의 성소에 자리를 잡고 있었다. 그곳에 가기 위해서는 데스나이트의 서판이 있어야만 했는데 이건 길드에 이미 많은 수량을 보유하고 있어서 구하기 매우 손쉬웠다.

- 저게 기르가스야. 더 가까이 갔다간 맞아 죽으니까. 여기서 더 들어가면 안 된다.

“오케이.”

현존 플레지 최강의 몬스터, 기르가스!

그는 거대한 뿔이 자란 거인과 같은 모습이었다. 상체만 땅 위에 나와서 거대한 몸과 화면을 가득 채울 정도로 큰 양팔을 휘두를 수 있었을 뿐, 하체는 존재하지 않았다. 이건 플레지의 설정상, 기르가스가 다른 세계의 지배자이며 이쪽 세계로 소환되던 중 의식이 실패했기 때문에 생긴 일이다.

하체가 땅에 뿌리처럼 박힌 것이 아니라, 절반만 소환되어서 상반신만 우뚝 선 기괴한 형태가 된 것이었다. 그 소환 실패의 원인도 기르가스의 마력이 상상 밖으로 너무 강력해서 발생했다고 하니 세계관 끝판왕이라 해도 좋았다.

‘정령의 수정, 기술서, 완력의 목걸이, 오우거의 벨트, 타이탄의 벨트··· 그리고 기르가스의 검! 잡으면 그거 떨굴 거니, 안 떨구는 거지새끼니? 네 정체를 밝혀라!’

설정상 준다고 한 아이템들을 떠올리고 기라그스를 확인. 바꾸고 또 확인하기를 반복했다. 그리고 내 입가에는 미소가 확실하게 그려졌다.

“요 깜찍한 새끼 같으니라고.”

플레지는 일전 안사락스 때와 마찬가지로 황금 고블린 못잖은 빵빵한 아이템들로 기르가스를 꽉 채워놓았다. 저들의 정신 나간 행동이 어찌나 고마운지 모를 것이다. 그런 한편, 의문이 들었다.

분명히 꿈속 내가 본 사냥 영상들에서는 볼 수 없었다. 즉, 본래라면 없어야 하는 무기였다. 그런데 지금은 왜 들어 있는 걸까?

‘대충 예상할 수 있는 이유는 한 가지. 잡힐 리 없다고 생각했으니까 넣어놨었고 제거하지 않은 것. 그러다가 슬슬 유저들 스펙이 올라가고 잡힐 즈음이 되자 삭제해 버렸다는 소리지. 나한테는 잘됐어. 이 정도 콘텐츠는 돼야 구운몽이 나설만하지.’

예전에도 잡았던 용들을 또 잡는 일, 골드로 살 수 있는 아이템을 직접 먹어보는 체험, 사냥터를 다니며 ‘내가 사람들 길드의 구운몽이다!’라고 자랑하는 일도 재미는 있을 것이다. 하지만 플레지를 제대로 즐겼다고 내가 만족하기 위해서는 이 정도 급은 되어야 한다.

- 야. 너 뭐야? 왜 웃어?

“마음대로 웃지도 못하냐?”

- 지금 기르가스 잡을 생각 하고 있지?

“어라? 너 어떻게 알았냐?”

- 숨소리 격해진 거 다 들리거든? 몹 보고 흥분하면 답이야 뻔하지.

“새끼. 흥분이라니. 듣기에 따라 그거 되게 미묘한 단어야.”

- 변태 새끼.

“염병!”

보이스 채팅의 마이크로 내 숨소리가 전부 전달된 모양이다.

- 잡으려는 거 보니까, 나름대로 각도기를 잰 모양인데? 견적이 할 만하다고 나왔어?

“아마도? 그런데 지금 당장으로는 안 되고, 골드가 좀 필요하기는 해. 기르가스 사냥용 무기를 보강해야 하거든.”

- 미친 소리이기는 한데, 네가 해본다니까 왠지 믿음이 되네. 근데, 스펙 올리는 거 있잖냐. 그거 옛날처럼 막 대줄 수 없어. 나 골드 없거든.

“골드가 없다니? 켄헬 최고의 거상 아니었나?”

- 겜생 말고 현생 사는 너님을 보면서 현생 테크를 탔거든. 귀찮은 골드 거래보다는 진수랑 나도 강남 건물주답게 겜생은 반쯤 덜어냈어.

과거의 진수성찬은 켄헬 서버를 좌지우지하는 은행이자 황금의 손이나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마르지 않던 금고와 같은 이들의 위용은 옛말이 된 상태라고 한다. 물론, 어지간한 게이머에 비하면 골드가 많기는 하지만 예전처럼 막무가내 러시를 할 정도는 아니었다.

‘눈 가리고 아웅 거리는 짓이긴 하지만, 그래도 아이템 하나 띄우려면 8개쯤은 고의로 날려줘야 좋은데.’

현금이 아닌 게임 내의 골드가 필요하다.

이를 해결하는 방법은 두 가지다. 누군가의 골드를 현금으로 사는 방법과 직접 재화를 벌어들이는 방법이다. 여기서 내가 선택한 건 두 번째 방법이었다.

“골드 수급이야 묵혀뒀던 걸 풀면 얼마든지 벌 수 있어.”

- 묵혀둔 거? 그게 뭔데?

오래된 게임에는 시대를 풍미했던 아이템의 계보라는 것이 존재한다. 플레지 역시 온라인 RPG의 역사에서 가장 오래 살아남은 게임 중 하나였기에 당연히 그런 역사를 보유하고 있다.

플레지가 세상에 처음으로 등장했던 1998년.

그 시절 플레지 최강의 무기는 카타르였다. 소형 몬스터 10에 대형 몬스터 12라는 균형 잡힌 타격치에 공격 성공 +1은 이 시절 ‘카타르 미만 잡’이라는 표현이 부족할 정도로 우수했다.

그런 카타르의 아성에 처음 도전한 무기가 있었으니 1999년에 등장한 투 핸드 소드다.

소형 몬스터 12에 대형 몬스터 6의 무기.

1의 수치가 상당히 큰 플레지에서 2라는 타격치 차이는 꽤 매력적으로 느껴질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투 핸드 소드는 이름처럼 양손 무기다. 당연히 방패를 착용할 수 없는데 지금과 달리 과거에는 이게 매력 포인트였다.

‘지금은 방패를 착용하지 못한다면 그만큼 방어력이 떨어져서 손해라고 보지만, 그 시절에는 방패에 들어갈 돈을 아낄 수 있다고 봤거든. 그래서 장점으로 분류되었지.’

최고 방패가 난쟁이 방패이고 방어구 강화 주문서의 값이 90만 골드씩 하던 시절의 이야기다. 그리고 이 잠깐이 지난 후 고강화 방패를 착용한 고수들이 속속 등장하면서 다시금 카타르가 왕좌를 차지한다.

시간이 더 흘러서 2001년.

엘프 숲의 등장과 함께 제작 아이템으로 새로운 왕이 탄생했으니 이 무기가 바로 레이피어다.

소형 타격치 11에 대형 타격치 6.

다소 언밸런스한 무기였지만, 이와 함께 등장한 용의 협곡은 부족한 대형 몬스터에 대한 타격치 따위는 무시할 수 있게 만들었다. 용의 협곡 내부 던전에는 언데드이자 작은 몬스터인 정예 해골 병사들이 등장했는데, 이곳에서 사냥하면 +7 레이피어가 +9 카타르의 성능을 내기 때문이다.

또한, 동 레벨에 동 장비일 경우 플레이어의 캐릭터가 가지는 방어 타입은 소형 몬스터로 취급받는 점이 작용하여 카타르로는 레이피어를 가진 상대 나이트를 이길 수 없는 결과를 초래했다.

결국, 이 차이 덕분에 플레지 초기부터 왕좌를 내려놓지 않았던 카타르는 처음으로 그 왕좌를 내려놓게 된다.

‘나야 소형 몹 11에 대형 몹 12짜리 골리앗의 검이 있었으니까 딱히 의미 없는 무기였지만.’

카타르의 굴욕은 그것으로 끝이 아니었다.

운디네 영지의 등장으로 비손상 무기에 대한 인기도가 급상승하게 되면서 싸움은 레이피어, 사냥은 다마스커스라는 인식이 생겨나고 카타르는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게 된다.

하지만 레이피어라고 영원히 왕좌를 지키고 있을 수는 없었다.

2002년!

내가 처음으로 용을 사냥하면서 싸울아비 장검이 등장했기 때문이다.

‘시간순으로 보자면 1998년부터 2001년까지는 카타르의 전성시대, 2001년부터 2002년까지는 레이피어, 2002년부터 2006년까지가 싸울아비 장검의 전성시대지.’

물론, 어디까지나 이런 구분은 최상위 유저들의 이야기였고 중위권으로 보자면 카타르도, 레이피어도, 각 무기별 공격속도라는 개념이 정립되는 2004년까지 잘 살아남았다.

‘굳이 케케묵은 이 정보들을 떠올리는 이유는 지금 내가 골드벌이를 하려는 아이템이랑 관련이 있어서지.’

2009년 현재.

플레지의 나이트들은 상위권과 중위권 사이에는 극복할 수 없는 거대한 벽이 만들어졌다.

카타르의 전성기에는 퀘스트로 획득하는 붉은 기사의 검 덕분에 중위권 유저들도 충분히 만족할만한 무기를 착용할 수 있었고, 싸울아비 장검의 전성기에는 카타르와 다마스커스의 유저들이 싸울아비 장검으로 갈아타며 상당한 물량이 풀려났다.

그 덕분에 수많은 중위권 유저들이 폭락한 이 무기들을 가져감으로 충분히 만족할만한 사냥이 가능했다.

‘그러나 지금은? 없지!’

무사의 양손검이나 오리하루콘 단검 같은 최상위 무기를 제외하면 중위권 플레이어들이 사용할 무기가 없었다. 더 심각한 문제는 이 상황이 2016년까지 그대로 이어진다는 것이다. 이건 작은 문제가 아니라서 결국 수많은 중위권 유저들의 이탈로 이어진다.

‘이탈하는 고객들을 흡수할 만한 게임을 GF에서도 하나 만들어야겠어.’

잠시 새로운 사업 아이템을 떠올렸다가 지억 저편에 박아두는 것으로 끝냈다.

나는 지금 휴가 중이다. 놀 때는 노는 것만 해야 잘 즐길 수 있다.

“성찬아. 예전에 내가 축복받은 엘프족 단검을 창고에 박아두라고 했던 거 기억나냐?”

- 그랬나? 잘 기억이 안 나지만, 창고에 무조건 있기는 할 거야. 네가 찍어둔 아이템이니까.

“그럼 그것들 좀 찾아와.”

- 골드 얘기하다가 엘프족 단검이라면··· 그게 떡상한다는 거냐?

“빙고.”

< 목표는 너로 정했다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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