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999년 게임 스타트-469화 (469/577)

< 내거 아닌 내 캐릭터 >

“5인 1조. 4개의 조로 움직입니다.”

나이트 혹은 다크 엘프가 둘, 엘프 혹은 매지션이 둘을 포함하게 해서 총 4개의 조로 나누었다. 이를 보고 내내 조용히 있던 성찬이 처음으로 감개무량한 듯 말했다.

- 쌍허좁에 지옥검과 구운몽이라니. 이거 오랜만에 켄헬 리벤져스가 모이는 거잖아!

‘놀라운 새끼.’

본인 스스로 리벤져스의 멤버라 부르다니 참, 한 결 같이 부끄러움을 모르는 녀석이다.

- 리벤져스가 뭐야?

- 리벤져스 몰라? 미국 만화에서 잘나가는 슈퍼히어로들이 모인 드림팀!

- 스파이더 가이도 리벤져스야!

- 오! 대박. 나 스파이더가이 완전 좋아하는데. 그런 것도 있었어?

- 너무하네. 우리 전 군주님인 구운몽님이 서비스 중인 베스를 해보면 거기에 나오는 내용이라고.

- 그래도 그런 인기 없는 거 말고 Z맨 멤버로 합시다.

- 옳습니다. 요즘은 Z맨이 대세입니다.

조금만 더 시간이 지나면 대한민국에서 모르는 사람이 없어질 명칭이었지만, 아직까지 리벤져스는 살짝 덕후 기질이 있는 사람들만이 알고 지내는 용어 정도의 위치였다.

그보다는 돌연변이들의 영화인 Z맨이 훨씬 유명하고 큰 영향력을 가지고 있다. 성찬이는 그게 불만이었는지 친구와 길드 총군주을 부르는 말투를 제멋대로 오가며 내게 툴툴거렸다.

- 말이 나와서 그러는데, 전 군주님아. 리벤져스는 영화로 만들 생각 없습니까? 막 바벨의 슈퍼 히어로들 영화가 나오면서 그 영화들을 한 곳으로 묶는 리벤져스가 한 번씩 나오는 거 말이지. 그럼 진짜 대박일 거 아냐.

- 그냥 리벤져스도 아니고, 개별 영화들이 나오면서 그사이에 각 주인공이 다 뭉치는 영화라니. 나오면 좋기는 하겠네요.

- 근데 그게 가능할 리가 없잖아.

- 맞습니다. 배우 출연료가 어마어마할 텐데 감당이 안 될 거예요.

- 인정. 출연료 때문에라도 못 나오겠네.

수많은 바벨 팬들이 기대하면서도 사실 그런 영화가 나올 거라고 믿지 못했던 이유다. 그러는 사이 느긋한 대화 사이로 다급한 목소리가 들렸다.

- 사원 내부! 적!

- 사원 내부 5시에 적! 출현했습니다!

- 5시? 바로 갑니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제단에 들어가고 싶고 최초 공략에 욕심을 내는 길드는 우리만이 아니다. 그리고 보스 룸에 들어갈 수 있는 인원은 선착순 20명에 불과하다. 한 팀이 한 번에 같이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누구든 열쇠를 가지고 먼저 제단에 들어가는 사람이 입장하게 되는 시스템이다.

운이 없으면 A길드 5명, B길드 7명, C길드 8명의 형태로 입장 될 수도 있다는 의미였다. 우스운 건 바로 이 시스템 때문에 한참 먼저 나오는 테바이의 보스 몬스터들조차 공략되지 못했다는 점이다.

하나의 길드가 아닌 본래 파티에서 쪼개진 유저들이 경쟁하다가 진입하는 바람에 보스 몬스터를 앞두고도 서로 견제하느라 사냥에 지금까지 실패했기 때문이다.

‘나 역시 같은 꼴을 당할 수 있지.’

제시간 안에 열쇠를 확보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상대가 열쇠를 확보하지 못하도록 방해하고 만약, 확보했다고 하더라도 제단을 통해 보스 룸에 들어가는 것을 막아내야 했다. 다소 이기적일 수 있는 이 수법들이 지 브라퀴의 공략에서 아주 중요한 전략에 속한다.

그리고 대부분의 전략은 수적인 우세를 토대로 실행된다.

“방법을 바꿔봅시다. 적들과 싸우랴 사냥을 하랴, 이렇게 서로 견제하고 견제 당하다 보면 열쇠 20개를 다 모으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혹, 모은다 해도 테바이 사원처럼 방해받아서 공략에 실패할 겁니다.”

-그럼 어떻게 합니까?

“이 이벤트에 참여하지 않는 길드의 사람들을 전부 부릅시다.”

- 그 말은 사원 내의 사냥터를 통제하겠다는 말씀이십니까?

“통제랑은 다르죠.”

말장난이기는 하지만 아주 틀린 건 아니다. 살짝 비트는 거니까.

“통제는 모두를 막아서는 것이고 지금은 오직 적대 길드만 막아내는 겁니다.”

- 아······.

애당초 플레지는 경쟁을 할 수밖에 없는 구조로 게임을 만들고 그 힘 싸움에서의 우위를 통해 권력을 쟁취하는 맛으로 하는 게임이다. 제아무리 신들린 컨트롤을 보이는 인물이 나와도 수적인 열세를 어찌할 방법은 없고 반대로 말하면 숫자가 주는 막강한 힘을 잘 사용해야 지배할 수 있다는 뜻도 된다.

“일단 길드원들이 와서 적대 길드원들을 보이는 족족 몰아냅니다. 그 사이 각 조원은 열쇠 획득에 최선을 다하도록 합시다. 이후, 열쇠가 전부 확보된 조부터 전투에 합류하는 방식으로 진행하겠습니다.”

사람들 길드 연합에 총동원령이 내려졌다. 곧 얼마 지나지 않아 속속 우리 길드가 사냥터를 잠식해나갔다.

- [연합] 그림자검객 : 11시. 교전 중.

- [연합] 화염의궁수 : 9시 교전 중입니다. 지원 바람.

보이스 채팅은 한 방의 최대 수용인원이 30명이다. 당연히 주요 소통은 보이스 채팅이 아니라 일반 채팅으로 진행된다. 과거 하나의 길드에서만 채팅이 되던 것과 달리 요즘은 각 길드의 연합들이 함께 대화할 수 있는 연합 채팅이 추가로 업데이트되었다.

해당 채팅을 통해 수많은 교전 메시지가 실시간으로 올라온다.

- [연합] 그림자검객 : 11시 교전 끝 9시 지원 갑니다.

- [연합] 메이필드 : 7시 적 발견.

- [연합] 화살폭포 : 지원 갑니다.

좌표가 찍히면 바로 투입되어 사방에서 압박해나갔다.

- [연합] 화살폭포 : 처치 완료.

하지만 상대방은 공격하는 대로 마냥 당하고 정해진 패턴대로 움직이는 인공지능이 아니다. 대대적으로 우리가 움직이는 만큼 지원군을 불러 맞대응하기 시작했다.

삽시간에 몬스터들보다 플레이어들의 칼질 소리와 매지션들의 마법이 울려 퍼졌다. 각 캐릭터들은 색색의 물약들을 마시며 체력을 회복하고 귀환하는 상황이 곳곳에서 나타났다.

- 젠장. 개나 소나 죄다 불렀나? 뭐가 이리 많아졌어?

- 이야. 쟤네도 어지간히 불러 모은 모양인데?

- 최대한 빨리 열쇠 확보하고 빨리 밀어내야겠습니다.

예나 지금이나 사람들 연합은 머릿수보다는 강력한 스펙을 기반으로 한 소수 정예를 추구한다. 한 번에 단체로 싸우는 클랜전이나 수성전 같은 경우에는 유리한 구석이 많았지만, 지금 같은 경우는 머릿수의 부족이 꽤 현실적으로 다가왔다.

열쇠를 모으고 있던 한 개의 조가 적과의 교전에서 패배하면서 마을로 밀려났다. 마을에서 다시 사원까지 오는 시간을 생각하면 굉장한 손해다.

‘빨리 열쇠를 먹어야 내가 합류해서 같이 밀 수 있는데.’

드롭률이 어지간히 낮은 모양이다. 무작정 사냥하는 것도 아니고 최대한 돌아다니며 감이 오는 몬스터를 찾아다니는데 전혀 느껴지는 바가 없었다.

- 이거 좀 곤란한 거 같은데.

- 계속 열쇠만 모으고 있어도 되려나?

불안감 섞인 말이 나올 즈음, 과거의 용사들이 돌아왔다.

- [길드] 좌호법 : 제가 돌아왔습니다! 주군!

오후 8시가 지났을 무렵이다. 퇴근하고 바로 올 것이지, 아까 낮에 있었던 일 때문에 눈치 보느라 조금 늦은 박경호 변호사를 시작으로 각자의 일상을 즐기던 이들이 비로소 복귀했다.

- [길드] 바람신화 : 출장 갔다가 미친 듯이 돌아왔습니다. 반갑습니다!

- [길드] 천공의검마 : 즉시 합류! 전장 투입!

- [길드] 담덕 : 풍운의 총군주 답게 깜짝 복귀 후 바로 자체 이벤트인가? ㅎㅎㅎㅎ

삽시간에 원년 멤버들이 밀리던 전세를 팽팽하게 만들었다.

이들이 행운을 가져다준 걸까.

‘저놈!’

느낌이 딱 오는 놈을 발견했다. 바로 사냥하자 아니나 다를까, 아이템을 획득할 수 있었다.

「쿠쿨탄의 제단 열쇠

[04-30 19:58]

재질 : 금

무게 : 3」

‘좋았어!’

열쇠를 획득했으니 이제 나도 전투에 참여한다.

“이제 제가 좌호법님과 함께 먼저 전투에 합류하겠습니다. 나머지 네 분은 전부 열쇠를 확보하시고 합류해주세요.”

- 두 분이 다니시는 건 조금 위험하지 않겠습니까?

“괜찮습니다. 남은 분들은 그대로 인원 유지해서 나머지 다 확보하고 움직여주세요.”

- 좌호법 : 주군!

- 구운몽 : 아주 반갑습니다. 이제 가 봅시다. 오랜만에 한번 날뛰어 보도록 하죠.

- 좌호법 : 존명!

그때 지옥검이 메시지를 보냈다.

- →[귓속말] 지옥검 : 잊지 마. 전에도 말했지만, 너 지금은 혼자서 무쌍 찍던 그 구운몽 아니야. 특히 다크 엘프를 조심해. 1대 1로 싸우면 무조건 진다.

다크 엘프.

2004년에 등장한 이 클래스 탓에 수많은 나이트 고수들이 플레지를 떠났다. 아마 사람들 연합의 나이트들도 이 연합에서 함께하면서 쌓은 추억과 정이 아니었다면 게임을 접었을 것이다. 그만큼 신규 클래스가 가진 강력함은 기존 유저에게 상실감을 안겨주었다.

여기에는 구운몽도 예외는 아니다. 82라는 엄청난 레벨을 자랑하고 있음에도 70레벨 주변의 다크 엘프를 만나게 되면 언제든 차가운 바닥에 눕게 될 가능성이 높다.

‘괜히 10검만 맞췄나 보네. 지금은 강화운 따져가며 지르기 어려우니 이 싸움만 끝나면 바로 스펙을 올려버려야겠어. 천하의 구운몽이 다크 엘프 무섭다고 쪼그라들 수는 없잖아.’

게임의 전체 밸런스를 해치지 않는다는 목적보다 약해진 내 캐릭터가 주는 속상함이 더욱 크다. 나는 모조리 강화해버리며 다시금 무쌍을 찍어주겠노라 다짐했다.

- [연합] 화염의궁수 : 5시 적!

- [연합] 구운몽 : 5시 지원 갑니다.

- [연합] 구도자의길 : 옛 군주님의 복귀 소식을 듣고 지금 참전함을 아룁니다.

- [연합] 구도자의길 : 5시 확인. 지금 바로 지원하겠습니다.

- [연합] 폭행몬스터 : 와! 구도자님 오셨다!

- [연합] 그림자검객 : 이제 다 밀어버릴 수 있겠네요.

1대 1 PK에 특화된 좌호법과 달리 그는 다대다 전에서 정수를 발휘하는 타고난 지휘관이다. 연합에서 진수성찬보다도 더욱 영향력이 컸는지 은근히 고전하고 있던 연합의 유저들이 그의 등장 하나로 승리를 자신할 정도가 되었다.

참으로 격세지감이다.

‘진짜 나는 옛날 사람이 다 됐구나. 지원하겠다고 했는데 이렇게 무시당할 줄이야. 하긴, 몇 년이나 떠나 있었으니 이렇게 되는 게 당연하기도 하지만.’

실소가 나왔지만, 시간을 되돌려서 ‘세계에서 손꼽히는 GF 그룹 회장이 될래, 플레지 최강 길드의 영주이자 무쌍의 캐릭터로 군림할래?’라고 묻는다면 나는 단연코 전자를 선택할 것이다. 게이머로 제아무리 승승장구해봐야 업데이트나 패치 한 번에 고뇌하는 신세에 불과하지 않던가.

세상사 두 마리 토끼를 다 잡을 수는 없다.

‘그룹 회장님이랑 게임 최강 캐릭터를 두고 두 마리 토끼라고 비유하는 게 우습기도 하고.’

싱겁게 질투하지 말고 이 순간을 즐겨보자!

- [연합] 구운몽 : 5시 도착. 지금부터 제가 이보니 완드로 지휘하겠습니다. 점사하세요.

상황을 보니, 아군은 다섯, 적은 아홉 명이었다. 거의 두 배에 가까운 숫자였지만, 소수 정예를 추구하는 사람들 연합답게 밀리지 않고 잘 싸워나가고 있었다.

보통 이런 교전에서는 매지션을 우선순위로 정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그러나 좌호법과 함께할 때의 장점은 매지션이 아닌 다른 클래스를 우선순위에 두어도 된다는 점이었다.

‘어차피 매지션은 좌호법이 알아서 마킹 다 해주니까.’

매지션대 매지션의 싸움에서는 지금은 물론, 앞으로도 좌호법을 이길 수 있는 사람은 나타나지 않을 것이다.

‘일단 까다로운 다크 엘프부터 날린다.’

적 유저 중 ‘다크로드’라는 닉네임의 다크 엘프에게 이보니 완드를 사용했다. 곧 번개가 떨어지며 그가 타깃임이 정해졌다. 단순히 아군에게 집중적으로 공격할 대상을 정해주기 위한 공격이긴 하지만 82레벨이라는 압도적인 레벨 덕분에 번개 자체의 데미지도 절대 무시할 수 없는 수준이다.

떨어지는 번개의 데미지에 당황한 다크로드는 재빨리 자리를 이탈하려 했다. 그러나 이미 피할 수 있는 방향은 내가 먼저 선점한 후였다. 캐릭터가 끼여서 옴짝달싹 못하는 사이에 확실하게 제압했다.

- [연합] 화염의궁수 : 다크로드 다운!

- [연합] 화염의궁수 : 와! 구운몽님. 애들 다 엉켜 있는데 번개가 한 번도 삑살이 안 나시네요.

다시금 이보니 완드로 번개를 떨어뜨렸다. 내가 움직임의 중심이라는 것을 상대가 알고 공격해왔지만 카운터 배리어로 대응하면 된다. 혼잡한 와중에 정교한 타이밍을 노려 기술을 써야 하지만 쓸데없이 강화된 내 신체 능력과 컨트롤은 이 정도를 여유 있게 할 수 있게 만들었다.

척척 손발이 맞는다. 정확하게는 내 컨트롤에 길드원들이 믿고 따라오며 합격점에 오른 것이다. 공세가 연거푸 이어지니 다음 타깃도 처지 완료!

차츰 숨통이 트이고 여유가 생긴다.

채팅이 활발해졌다.

- [연합] 그림자검객 : 실피드 다운.

- [연합] 화염의궁수 : ㄷㄷㄷ···

- [연합] 화염의궁수 : 레전드로 유명하시긴 했지만, 어차피 나이트이고 하니까 그냥 장비빨이라고만 생각했는데 실제로 보니까 말이 안 나오네요. 이 게임이 이렇게 전략적으로 풀어가는 게 가능한 게임인가?

- [연합] 메이필드 : ??? 왜요??? 무슨 일 있었어요???

- [연합] 화염의궁수 : 일이 있다면 있었죠. 이거 진짜 봐야 알아요. 플레지가 막 하는 게임이라고 이거 보면 아무도 못 할 듯.

- [연합] 화염의궁수 : 이보니 완드로 적의 이동을 꾸준히 방해하면서 도망갈 수 있는 방향을 미리 차단하고 또 그렇게 근접하면 바로 스턴. 진짜 신의 컨트롤이심.

- [연합] 그림자검객 : 나도 나이트이지만, 나이트로 이런 컨트롤이 가능하다는 거 처음 알았음. 구운몽님 지금 몇 년 만에 처음 하시는 거 아니었나요? 스킬 날아오는 타이밍에 맞춰서 쓰는 카운터 배리어. 캬! 환상이네.

- [연합] 지옥검 : 다들 전 군주님이 본업에 충실하신 후에 가입해서 잘 모르시나본데. 그냥 단순히 게임을 많이 하고 장비가 좋아서 레전드였던 게 아닙니다. 솔직히 안사락스 레이드만 해도, 지금 높아진 스펙으로 사냥하려 해도 쉽지 않은데, 그걸 7년 전에 해낸 사람이에요.

- [연합] 윤진수호좁 : 당시 50레벨 이상도 몇 안 되고 거의 48렙, 49렙이던 시절이었지.

- [연합] 메이필드 : 11시 적!

- [연합] 구운몽 : 갑니다.

처음에는 그저 그냥 왕년의 레전드 정도였지만 몇 번의 교전 이후 평가가 빠르게 수정되고 있었다.

- [연합] 화염의궁수 : 군주님! 7시요!

- [연합] 구운몽 : 갑니다.

- [연합] 그림자검객 : 군주님 3시 교전입니다!

나와 함께 게임을 하지 않았던 사람들에게 나는 전 군주 혹은 군주가 아닌 그저 구운몽일 뿐이었는데, 이제는 모두가 아주 자연스럽게 군주님이라 부르고 있었다.

< 내거 아닌 내 캐릭터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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