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내거 아닌 내 캐릭터 >
이들은 처음부터 통제를 당해보지 않았기에 우리의 노력이 당연하게 이뤄진 일로만 여겨질 뿐이고 오히려 이를 거론하면 생색낸다는 식으로 비칠 따름이었다. 이런 지옥검의 고충에 나는 간단한 해결법을 알려주었다.
- 구운몽 : 복잡한 매듭은 단순하게 끊어 해결할 수도 있는 일이지요. 그 방법에 대해 지옥검에게 긴히 할 말이 있습니다.
- 지옥검 : 어떻게 말입니까?
- [귓속말] 구운몽 : 아오, 손발이 오그라들어서 잠깐 휴식탐 좀 갖자. 뭔 사극도 아니고 이게 뭐래? ㄷㄷㄷㄷ
→ [귓속말] 지옥검 : 원래 이 정도는 아니었는데, 오래간만이라 다들 너무 심취한 것 같다. ㅋㅋㅋㅋ
그 사이 멤버들은 ‘소곤소곤’ ‘속닥속닥’ ‘웅성웅성’ 같은 글자를 머리 위에 띄우며 분위기를 만들고 있었다. 그래서인지 소극장 무대 공연을 보는 기분도 들었다.
- [귓속말] 구운몽 : 아무튼, 고마움을 모를 땐 느끼게 해주면 돼. 한동안 레벨 업과 장비업에 집중한다고 하고 통제니, 뭐니 신경 쓰지 마. 그냥 너희 사냥만 하고 다녀. 그러면 그동안 우리가 통제를 막아왔던 것에 불만을 느꼈던 애들이 지금이 기회라고 통제를 시작할 거야.
→ [귓속말] 지옥검 : 설마, 깡패 동원한 다음에 구해주면서 고백하는 삼류 드라마 같은 시나리오?
- [귓속말] 구운몽 : ㅇㅇ 그러다가 걔들에 대한 불만이 나오면서 ‘사람들 길드가 있던 시절이 좋았다’라는 말이 들리겠지. 바로 그때 짠~!하고 등장해서 걔네를 밀어내면 돼.
- →[귓속말] 지옥검 : 그건 너무 속 보이는 양아치 짓이잖아. 누가 봐도 의도적이고.
- [귓속말] 구운몽 : 삼류는 그만큼 잘 먹히고 흔해서 삼류야. 게다가 속 보이면 또 어때?
- →[귓속말] 지옥검 : 여태 잘 유지해오던 이미지는?
- [귓속말] 구운몽 : 겸손하게 남들이 칭찬해주기를 기다리고 자연스럽게 이뤄지는 거, 이루어지면 물론 좋지. 그런데 그럴 가능성이 얼마나 되냐? 그냥 보호해 주고 보호비 받는 심플한 방법이 최고야. 계산이 명확하잖아.
- →[귓속말] 지옥검 : 헐?
- [귓속말] 구운몽 : 더군다나 양아치는 통제하는 것들이지 우리가 아니야. 우리 길드는 통제를 막아주는 경찰인데 현실의 경찰은 세금으로 월급이라도 받지, 우리는 그조차도 없었어. 무료 봉사 자경대였던 셈이지. 그러니 고마움 정도는 당당하게 요구해도 돼.
- →[귓속말] 지옥검 : 너무 노골적인데···
- [귓속말] 구운몽 : 그게 나아. 호의가 계속되면 권리인 줄 알거든.
- →[귓속말] 지옥검 : ···와. 그 말 멋있다. 나도 써먹어야지. 알았어. 그렇게 하자.
대화를 마친 뒤 본격적인 플레이를 위한 전 단계에 들어갔다. 그것은 바로 보이스 채팅이었다.
“아! 아! 잘 들리십니까?”
- 옙!
- 아이고. 우리 전 군주님 오셨습니까?
- 허허허. 반갑습니다들.
- 말로 할 때는 사극 톤으로 하지 않는 겁니다.
- 하하하하하!
세상이 변했다는 것을 또다시 느낄 수 있는 부분이다. 예전에는 오더를 제대로 맞추기 위해서 진수성찬과 함께하면서 그들에게는 말로 하고 빠른 전달을 위해 미리 사인을 숫자로 맞춰놓고 행동하곤 했는데 이제는 그럴 필요가 없다.
게이머스 포럼에서 제작한 후에 배포한 보이스 채팅을 통해 이제는 대화하면서 게임을 플레이하는 것이 가능해졌기 때문이다. 예전처럼 힘들게 키보드로 채팅을 할 필요도 없고, 어려운 암호를 달달 외울 필요도 없으며, 굳이 꼭 한자리에 모일 이유도 없어진 것이다.
“지옥검?”
-네. 지옥검 맞고, 잘 들립니다.
채팅방에는 이미 20명이라는 대 인원이 모두 들어와 있었다. 고작 20명이었지만, 그래도 공식적인 채팅이었으므로, 존댓말을 사용하는데, 오랜만이라서 그런지 지옥검도 나도 영 대화가 매끄럽지 못했다.
- 이야기는 많이 들었습니다. 함께해서 영광입니다.
처음 듣는 목소리. 아마도 내가 플레지를 그만두고 연합에 들어온 유저인가 보다.
“반갑습니다. 그럼. 간단하게 브리핑하고, 입구를 찾으러 흩어지도록 할 텐데요. 우선, 그 전에 이 자리에 계신 분들의 클래스를 먼저 확인하도록 하겠습니다.”
클래스별로 인원이 어떻게 되느냐에 따라서 공략법은 달라지는 법이다.
나를 포함해서 나이트가 넷, 엘프가 셋, 다크 엘프가 여섯, 매지션이 일곱이었다. 썩 좋은 인원 구성은 아니었다. 하지만 사람 가려가면서 팀을 만들기에는 어려움이 있으니 감수하고 넘어가기로 했다.
“일단 강력한 딜이 꽤 중요한 문제이긴 하지만, 사실 딜 자체만으로 보자면 나이트보다는 다크 엘프라고 할 수 있습니다.”
문제는 다크 엘프의 탱킹 능력이다. 이 클래스는 애초에 암살자를 콘셉트로 가지고 있는 만큼 탱킹 능력이 떨어진다. 즉, 이럴 때는 기존 공략법을 조금 변형하는 편이 낫다.
“다들 잘 알다시피 지 브라퀴는 한 몸에 두 개의 머리를 가진 쌍두사입니다. 우리는 이 중에서 암컷을 먼저 노립니다.”
- 네? 암컷이요?
지 브라퀴의 머리는 둘 다 광역 스킬을 보유하고는 있으며 암컷은 매지션, 수컷은 전사의 스킬을 쓴다.
- 테섭에서 공략에 성공한 글들을 보면 전부 수컷을 먼저 공략해서 성공했습니다.
- 수컷은 체력이 많아서, 암컷이 다시 살아날 확률이 높습니다.
일반적인 공략이라면 매지션을 먼저 사냥하는 것이 당연하지만, 이들이 우려하는 이유는 이 보스가 가지고 있는 또 하나의 특징 때문이다.
지 브라퀴는 한쪽 머리를 제거한 후, 다른 머리를 1분 이내에 죽이지 못하면 죽였던 머리가 부활한다. 이것 때문에 차라리 둘을 동시에 공략하거나 체력이 높은 수컷을 먼저 제거하고, 이후에 암컷을 제거하는 방식으로 공략했다.
즉, 수컷을 먼저 제거하는 방식이 세간이 알려진 공략법이었다.
“괜찮습니다. 충분히 가능합니다.”
- 그래도···
처음 듣는 다크 엘프 유저의 말을 지옥검이 잘랐다.
- 람다. 그만 조용히 하고 들어.
- 맞아. 총군주님이시다.
- ···네.
예전 같으면 상상도 못한 일이다. 내가 작전을 내놓는데, 그것에 대해 반론하다니 말이다.
‘20명에서부터 이런 데 200명이 모이면 오죽하겠냐고.’
기르가스를 포기한 건 매우 합리적인 선택이었다. 어쨌거나 미진함을 권위로 찍어누르고 게임을 하면 팀워크에 부정적인 영향을 끼칠 수 있다. 그러니 이들의 궁금증을 풀어주기로 했다.
“사람들이 착각하는 게 있습니다. 지 브라퀴 공략에 성공해낸 곳이 테스트 서버라는 겁니다.”
-네?
사람들의 착각은 여기에서부터 시작된 것이다. 플레지의 테스트 서버는 6개월마다 초기화를 하는 서버다. 열정을 가지고 키운 캐릭터도 6개월이면 사라진다.
아무리 테스트 서버의 배율이 본 서버와 비교할 수 없는 수준이라고 할지라도 테스트 서버의 초고수와 본 서버의 초고수는 레벨부터 장비까지 그 스펙부터가 엄청난 차이를 보인다.
테스트 서버에서 지 브라퀴의 공략에 실패한 것은 암컷을 죽이고 수컷을 죽이려니 1분 안에 수컷을 죽일 화력이 나오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는 다르다.
“충분히 화력이 나올 겁니다. 테섭의 초고수들 스펙이면 그들 1.5명은 있어야 우리 한 명분이 될까 말까일 테니까요.”
- 아! 맞아!
- 그렇네. 그걸 생각 못 했어.
- 난 그냥 70레벨 보스라는 거에만 집중해서···
“수컷의 체력은 25,000. 암컷은 20,000입니다. 적지 않죠. 강력합니다. 당연히 체력이 높은 수컷을 먼저 노리는 것이 합리적으로 보일 겁니다. 그러나 암컷의 광역마법을 최대한 빠르게 봉쇄하는 게 더 중요합니다.”
- 그럼 어떤 식으로 하실 건가요?
“일단 저와 매지션 한 명이 수컷을 마킹하겠습니다. 그 사이에 나머지 분들이 빠르게 암컷을 제거합니다. 이때 매지션들은 거리를 벌리고 다크 엘프의 생존에만 집중하세요. 이후, 암컷을 제거한 후 수컷에게 아껴뒀던 마나를 모두 쏟아내는 겁니다. 이해되셨습니까?”
- 네! 이해됐습니다!
제법 오래 손을 떼고 있었지만, 익숙한 일은 자고로 몸이 기억하는 법이다. 한때의 플저씨로서 내 솜씨는 전혀 죽지 않았고 능숙하게 일행을 진두지휘했다.
나와 함께 할 매지션은 성찬···이 아니고 진수로 결정 났다.
‘얘들 아이디도 오랜만에 이렇게 보니까 순간 헷갈렸네. 상대방을 허좁이라고 했었지.’
오래간만의 플레지 나들이를 시작한다.
*
이벤트 지역인 케찰의 신전.
이곳으로 가는 길은 게임 내에 정해진 아홉 곳의 필드 중 무작위로 생성되는 시공의 틈새라는 것을 먼저 발견하는 일이 선행되어야 한다. 랜덤하게 나타난 틈새를 찾지 못하면 진입할 수 없다.
이럴 때 개인이 아닌 길드라는 집단의 힘이 유감없이 발휘된다.
- 글라딘.
- 글라딘 골 밭에 열렸답니다.
“바로 갑시다.”
혼자서는 죽자 살자 돌아다녀야 발견할지 말지도 모르는 곳을 바로 순간이동으로 날아갔다.
케찰의 신전은 남미의 아즈텍을 기반으로 만들어 낸 세계다. 맵 디자인 역시 늪과 정글, 폐허가 된 유적지의 배경이었으며 몬스터들은 수풀, 파충류, 조각상과 같은 종류였다. 다만, 이 신규 몬스터들은 강력하다기보다는 짜증 나는 스타일로 유명해진다.
- 이 미더덕같이 생긴 놈들!
- 진짜 클릭 잘 안 되네요. 아! 신경질 나!
2D 게임이라서 겪는 소소한 일이었다. 길드원들이 미더덕이라고 툴툴거리는 몬스터는 아즈티였다. 클릭하기 어려운 자그마한 알 모양인데 다가오는 즉시 토네이도 마법을 연거푸 날리는 몬스터였다.
“쓸데없는 놈들에게 괜한 시간 쏟지 말고. 그냥 쭉 밀고 들어오세요. 제단 입구까지 달려갑니다.”
- 여기 몬스터들이 지 브라퀴 약점을 알려주는 석판을 떨군다고 공략에 나와 있던데요? 그거 안 먹고 가나요?
4개의 비밀 석판을 주기는 한다. 그러나 이 사람들의 기대와 달리 그런 아주 쓸모없는 물건이고 그 답을 나는 이미 알고 있다.
“이 뱀의 약점은 암컷이다.”
- 네?
- 갑자기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그 석판에 적힌 약점 내용입니다. 이 뱀의 약점은 암컷이다. 그러니 고작 그거 얻으려고 여기서 시간 쓸 필요 없어요. 다 여러분에게 혼란을 주려고 테섭 애들이 꾸민 이야기입니다.”
- 헐······.
- 정말요?
“네.”
- 우와··· 진짜 몰랐다.
- 아마도 그것 때문에 여기서 시간 보내는 애들 많을 텐데.
“우리는 얕은 속임수에 빠지지 말고 사원 내부로 바로 가서 몹을 잡아야 합니다. 그 녀석들이 제단으로 들어가는 열쇠를 줍니다.”
- 큰일 날 뻔했네.
- 넵. 알겠습니다.
케찰 사원은 총 6가지의 구역으로 나누어져 있다.
첫째는 균열을 타고 들어오며 마주하는 폐허 지역, 둘째는 아마존과 같은 정글, 셋째는 늪, 넷째는 케찰 사원의 입구, 다섯째는 내부, 마지막으로 보스 방이라 할 수 있는 제단이다.
늪 지역에 들어오자 다른 불만의 목소리들이 들렸다.
- 정글에서 있던 놈들은 작아서 클릭이 어렵더니 이제는 덩치가 너무 커서 뭐가 뭔지 하나도 모르겠네요.
- 아까는 작아서 그랬는데 이번에는 너무 커서 클릭하기 어려워!
- 녹색 안개 때문에 시야도 엄청나게 가리고.
- 여기는 짜증 유발이 콘셉트인가 봅니다.
정글의 미더덕들과 달리 늪의 몬스터들은 세 마리만 들어서도 화면이 가득 찰 정도로 큰 사이즈를 자랑한다. 레벨도 20~30대였던 정글 몬스터들과 달리 이곳은 40후반에서 50에 이르는 만큼 혼자서 다수의 몬스터가 몰리면 고레벨들도 죽기 십상인 제법 아찔한 곳이다.
‘혼자 다닐 때의 이야기지만.’
지금 우리는 20명이 거의 다 같이 몰려다니는 것과 마찬가지다. 그러니 몬스터들에게 둘러싸일 위험은 없었고 오히려 몬스터가 우리를 피해 다녀야 할 판이다. 지금 나오는 불만들도 몹의 데미지가 아프다거나 하는 게 아니라 빨리 지나가고 싶은데 어그로가 끌리니 짜증난다는 게 전부이지 않던가.
“사원에 도착했네요. 여기부터는 좀 나눠서 다닙시다. 타깃은 이름에 ‘자드’라는 말이 붙은 녀석들입니다. 이놈들이 열쇠를 주니 보이는 대로 다 때려잡으십시오.”
- 넵!
*
케찰 사원이 본 서버에 등장한 것은 오늘이 처음이다. 그런데도 기본적인 정보 정도는 이미 다들 잘 알고 있는 편이다. 일단 케찰 사원 이전에 먼저 나온 테바이 사원이 있기 때문인데, 이 두 장소는 몇 가지 공통적인 특징을 갖고 있었다.
하나, 보스 룸에는 시공의 균열이 열린 후 2시간 30분이 흐른 이후에만 입장할 수 있다.
둘, 보스 룸에 들어가기 위해 필요한 열쇠는 테바이 피라미드 내부 몬스터들로부터 획득할 수 있다.
셋, 테바이 오시리스 제단 열쇠를 가진 플레이어 중 선착순 20명까지만 들어갈 수 있다.
넷, 보스 공략에 성공하면 아이템은 20명의 인벤토리에 랜덤하게 들어간다.
다섯, 보스 공략에 성공하면 24시간(1일) 동안 테바이 사원이 유지된다.
여섯, 보스 공략에 실패하면 3시간이 되는 시점에서 테바이 사원은 소멸한다.
여기서 테바이를 케찰로, 오시리스를 지 브라퀴로 단어만 바꾸면 완벽하게 대입되는 공식이 된다. 그러니 지 브라퀴 공략의 핵심은 보스 룸에 들어가기 위한 열쇠를 최대한 빠르게 확보하는 일이며, 열쇠를 획득한 이후에는 우리 팀이 아닌 외부의 인원이 제단에 침입하는 것을 막아내고자 견제하는 것이었다.
< 내거 아닌 내 캐릭터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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