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999년 게임 스타트-467화 (467/577)

< 내거 아닌 내 캐릭터 >

“이래서 허접이라고 한 거였구나.”

바로 이해했다. 일명 ‘9오단’이라 불리는 이 검은 지금 시기에 꿈의 무기들 중 하나로 분류된 좋은 장비가 틀림없다. 그러나 이건 사냥용 무기일 뿐이다.

‘한 손 무기의 한계는 명확하지.’

90년대에 출시한 플레지는 요즘의 게임들과 비교하면 너무나도 단조로운 게임이다. 그런데 플레이가 단순할 뿐, 막상 알아보면 다양한 격변을 거친 게임이기도 했다.

이 중에서 2000년대에 들어서 온 최고의 변화는 나이트 클래스가 가진 무기의 격변이다. 내가 한창 플레이하던 시절에는 한 손 검이 무조건 최고였고 이후 공격속도 업데이트가 이루어지면서 속도가 가장 빠른 단검이 장검의 자리를 차지하게 된다.

그리고 지금은 양손 검의 성능이 상승하고 또, 쇼크 스턴이라는 양손 무기로만 사용할 수 있는 나이트 전용 스킬과의 시너지로 양손 검의 전성시대가 찾아온 상태다.

- [귓속말] 구운몽 : 9오단이라니? 왜????

- →[귓속말] 지옥검 : ㅎㅎㅎ 무양이나 집행검이 아니라서 당황하셨어요? ^ㅡ^

- [귓속말] 구운몽 : 조금? 살짝? 많이? ㅡ.ㅡ;;

- →[귓속말] 지옥검 : ㅋㅋ 당연하지. 솔직히 너 그만두면서 구운몽은 상징에 불과해졌잖아. ‘사람들 연합에서 최고 레벨을 보유하고 있다’는 걸 보여주는 홍보? 광고? 딱 그 정도 말이야.

- →[귓속말] 지옥검 : 그래서 템은 최대한 사냥만 빨리할 수 있는 거로 맞춰놨고 사냥터에만 짱 박아뒀지.

플레지는 서비스 20년째가 되어서야 95레벨이 나오고 그조차도 신문 기사에 실릴 정도로 레벨별 경험치 요구량이 엄청나게 커지는 게임이다. 아차 해서 죽어버리면 몇 달이라는 시간이 송두리째 날아가니 구운몽 캐릭터는 싸울 상황에 절대로 부르지 않는 중이었다.

- →[귓속말] 지옥검 : 그리고 집행검은 아무도 없어.

- [귓속말] 구운몽 : 아무도 없다니? 다른 서버에는 한 개 정도 나온 거로 아는데?

- →[귓속말] 지옥검 : 그게 다 사냥터 통제하고 제일 센 길드가 독식해서 잡으니까 벌써 등장한 거야. 그런데 우리는 평화로운 관리를 하잖아. 통제 같은 거 안 하고.

켄헬의 자부심!

플레지의 전 서버 중 유일하게 통제가 없는 서버라는 것이다.

- [귓속말] 구운몽 : 오케이. 그건 잘했네.

- →[귓속말] 지옥검 : 길드의 최초 총군주였던 너의 의지인 만큼 우리도 그건 끝까지 지키고 있는 중이야. 대신 문제가 있지. 너 그만두고 나서 길드에 가입한 사람 중 대부분이 그거 때문에 탈퇴했거든.

속된 말로 꿀을 빨고 싶어서 최강 길드에 가입했는데 그런 혜택이 예상만 못 해서 실망했다는 소리였다.

- [귓속말] 구운몽 : 누군가의 말대로 인간의 욕심은 끝이 없는 법이니까.

내가 하면 로맨스, 남이 하면 불륜이라는 말은 사람 사는 곳이라면 어디에서나 통용되는 진리다. 신규 유저들이 켄헬을 선택하는 이유에는 통제가 없는 서버라는 게 큰 이유가 되어 준다. 그래서 새내기 시절에는 여타 서버와 비교해서 더 빠르게 성장할 수 있다.

하지만 고레벨이라 분류되는 구간에 오르고 자신이 기득권층에 들어왔다 싶으면 스스로가 밟고 올라온 사다리를 치워버리고 싶어 한다.

- [귓속말] 구운몽 : 오케이. 상황 파악 대충했음. 땡큐!

- →[귓속말] 지옥검 : 그럼. 사냥 고?

- [귓속말] 구운몽 : 아니. 잠깐 있다가 할 거야. 할 일이 생겨서.

- →[귓속말] 지옥검 : 오랜만에 게임하는 사람이 할 게 뭐가 있대?

- [귓속말]구운몽 : 흐흐흐. 오랜만에 하니까 할 일이 생겨 있는 거임.

미래의 정보라는 것만으로도 너무 승승장구하기 때문에 묵혀뒀던 능력을 시원하게 사용할 요량이다.

‘이 장비로는 쪽팔려서 못 다니지.’

무기 강화!

서버에 존재하지도 않는다는 집행검은 어쩔 수 없으니 무사의 양손 검이나마 챙겨서 쓸만하게 강화해야 게임할 맛이 날 것 같다.

‘무기 강화 주문서는 창고에 넉넉히 있고 칼은 없으니까 노 강 상태인 걸 사서 띄우면 그만이지.’

시장에서 무사의 양손 검을 네 자루 구매했다. 하나만 있어도 9검까지 강화할 자신은 있지만, 언제나 그렇듯 세 자루는 보여주기 용도다. 적당히 날려 먹고 포기해주고 머뭇머뭇하는 연기를 해줘야 인간미 있다.

「무사의 양손 검에 은은한 빛이 감돌았습니다.」

「+1 무사의 양손 검에 은은한 빛이 감돌았습니다.」

「+2 무사의 양손 검에 은은한 빛이 감돌았습니다.」

오래간만이니 내 감이 죽지 않았는지 살짝 집중하며 마우스를 클릭했다.

「+4 무사의 양손 검에 은은한 빛이 감돌았습니다.」

「+5 무사의 양손 검에 은은한 빛이 감돌았습니다.」

「+6 무사의 양손 검에 은은한 빛이 감돌았습니다.」

「+7 무사의 양손 검에 은은한 빛이 감돌았습니다.」

‘한박자 쉬고.’

+8에서 서늘한 기분이 들었다. 잠깐 기다리며 남은 무기를 강화하고는 타이밍을 노린 뒤 느낌이 좋을 때 더블 클릭했다.

「+8 무사의 양손 검에 은은한 빛이 감돌았습니다.」

“아! 맞다. 이쯤에서 보통은 축복받은 주문서를 썼었지.”

아이템을 바꿔서 다시 클릭!

「+8 무사의 양손 검에 화려한 빛이 감돌았습니다.」

“짜잔. 아이템 강화하는 방법이 이렇게 쉽다니까. 느낌대로 밀었다 당겼다가 해주면 빡! 뜨잖아.”

웃은 뒤 무사의 양손 검 한 자루를 아낌없이 질러서 강렬한 빛과 함께 날려 먹었다. 이 정도면 인간미 있을 것이다.

- [귓속말] 구운몽 : 뭐하냐?

- →[귓속말] 지옥검 : 나? 그냥 애들이 사냥하다가 뒤치기 당한다 그러면 거기 도와주러 다니고 있어. 왜?

- [귓속말] 구운몽 : 너 칼 뭐 써?

- →[귓속말] 지옥검 : 나야 9무양 쓰고 있지.

- [귓속말] 구운몽 : 마을.

- →[귓속말] 지옥검 : 응? 마을로 오라고?

- [귓속말] 구운몽 : 어. 산타할아버지가 칼 떨구고 갔어.

- →[귓속말] 지옥검 : 칼? ···아 놔. 벌써 질렀냐?

- →[귓속말] 지옥검 : 바로 감. 기다려!

귀환한 지옥검에게 나는 교환창을 띄웠다.

「+10 무사의 양손 검

19+10/23+10

근거리 명중 +1

추가 대미지 +5

클래스 : [나이트], [드래곤 나이트]

재질 : 철

무게 : 150」

- →[귓속말] 지옥검 : 이런 미친!

- →[귓속말] 지옥검 : 와··· 이건 진짜··· 으아!! 10양검을 찍어내냐?

- →[귓속말] 지옥검 : 될 놈 만 되는 세상! 으아아아아앙앙아아아아!

교환창에 올려진 무사의 양손 검을 보고, 지옥검이 비명을 질렀다. 무사의 양손 검 뒤에 적힌 +10이라는 숫자는 플레지를 하는 사람이라면 모두가 설레임을 느낄 숫자다.

사실, 플레지를 하는 많은 사람에게는 한 가지 정신병이 있다. 바로 +9라는 정신병이다. 무기의 앞에 +9라는 숫자가 적히지 않으면 잠이 제대로 오지 않는 병인데, 나는 남들보다 이 병이 더 심해서 이제는 +10이 아니면 집중이 잘 안 된다.

- →[귓속말] 지옥검 : 뭐야? 뭐야? 접속한 지 얼마나 됐다고. 또 뭐야? 설마 오랜만에 돌아와도 그 러쉬의 신은 여전한 거야?

게임하는 사람 치고 질투가 나지 않으면 그게 이상할 일이다. 그러나 우리 길드원들은 시샘하지 않는 편이다. 내가 아이템을 보여주었다는 것의 의미를 누구보다 잘 알기 때문이다.

자고로 떡을 만지면 떡고물이 손에 묻는 법 아니던가.

- [귓속말] 구운몽 : 자꾸 그렇게 시끄럽게 굴면 검이에게 넘긴다?

- →[귓속말] 지옥검 : 넵. 죄송. 입 닥치고 총군주님께서 하사해주시는 대로 받아 모시겠습니다.

그렇게 아이템 분배의 시간을 가졌다. +10강화 장비는 총 네 자루를 만들었고 지옥검과 검, 구운몽 캐릭터가 하나씩 무장했다. 남은 한 자루는 오리하루콘 단검인데 이건 그냥 +9인 게 마음에 들지 않아서 가볍게 강화한 것에 불과했다.

무기를 양손 검으로 바꿨다. 그 탓에 방어력이 91에서 79로 줄어들었지만, 이건 상관없었다. 어차피 나이트는 데미지로 말하는 캐릭터다.

‘그러고 보니 이놈의 게임은 대체 왜 데미지가 아니라 대미지라고 적는 거래?’

이게 사실 외국어이고, 데미지의 시작이 de가 아니라 da였기 때문에 표기법으로는 대미지가 맞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대다수 플레이어가 데미지라고 표기를 하기 때문인지 ‘대미지’라는 글은 영 불편하다.

‘튜토리얼이냐 듀토리얼이냐, 레오나도 디카프리오냐 리어나도 디캐프리오냐··· 에이. 의미 없다. 우리 게임도 아닌데 신경 써서 무엇 하리. 그냥 아이템 칸에서 저 부분만 안 보면 되는 거지.’

남의 회사 게임이다.

- →[귓속말] 지옥검 : 그럼. 이제 할 일 끝난 거야?

- [귓속말] 구운몽 : 대충은?

스펙업도 지나치게 하면 재미를 상실하게 만든다. 이쯤에서 멈춘 뒤 부딪치며 적정 수준을 조율해나가기로 했다.

- →[귓속말] 지옥검 : 이제부터는 뭐 할 건데?

- [귓속말] 구운몽 : 지 브라퀴 공략 같이할 사람들 혹시 있냐?

- →[귓속말] 지옥검 : 당연히 있지. 너 그거 하게?

내가 게임을 하지 않고 있는 지금 켄헬 서버 최강의 나이트는 단연 지옥검이다. 그런 그가 함께 지 브라퀴를 잡을 공략대를 구성하지 않았을 리가 없었다. 그리고 플레지는 단순히 즐기는 수준을 넘어서서 실제로 돈이 되는 게임이다.

기존의 멤버들 중 아직도 플레이하는 이들이 대다수였고 구운몽이 돌아왔다는 말을 전하자 금방 왕년의 유저들이 다시금 모여들었다.

지옥검, 검, 치명타, 악마혈 등 추억의 아이디들이 속속 등장했다.

- 구운몽 : 이거 진짜 오랜만에 모여보네요. 반갑습니다. 구운몽입니다.

- 지옥활 : 군주님이 복귀하시다니!

- 악마혈 : 소문 들었습니다. 가짜는 단검을 들었지만, 진짜는 크고 아름다운 +10검을 들고 있으시다면서요?! 오오오!

- 분노의활질 : 부디 검이 아닌 활에도 그 은혜를 베풀어주소서!

떠들썩한 메시지들 사이로 맨날 얼굴을 보는 한 인물도 글을 올렸다.

- 좌호법 : 이렇게 다시 주군을 모실 수 있게 되다니! 영광입니다! 주군!

‘이 형도 여전하구나.’

현실에서는 냉철한 변호사지만 게임 속에서만큼은 누구보다도 열정적인 좌호법.

참 오래간만에 본다.

‘그런데 잠깐.’

나야 회장이니까 논다손 쳐도 그는 업무 시간이 아니던가.

- 구운몽 : 우리 법무팀 박 변호사님께서 이 시간에 어떻게 여기에 계신 건지요?

- 좌호법 : 주··· 주군? 저는 변호사가 아니라 좌호···

- 구운몽 : ???

- 좌호법 : 죄송합니다! 퇴근 후에 돌아오겠습니다!

무려 2,000타는 넘을 것 같은 엄청난 속도로 채팅을 올린 좌호법은 순식간에 박 변호사님이 되어 사라졌다.

*

잠시 ‘회장님 갑질 개무섭.’이랑 ‘ㄷㄷㄷ’과 같은 채팅이 줄지어 올라온 뒤, 본격적인 공략 이야기에 들어갔다.

- 지옥검 : 복귀하신 총군주님을 박수로 맞이하며, 목표에 대해 정확히 알고 싶습니다. 그냥 지 브라퀴를 잡는 건지, 아니면 최초 공략을 도전하는 건지요.

- 구운몽 : 그냥 잡아봐야 재미없죠. 최초 공략이 목표입니다.

- 지옥검 : 그럼 지금의 인원으로는 어려울 것 같습니다.

내가 먼저 정보를 풀어내지 않아도 다들 아는 이유는 지 브라퀴가 본 서버에만 막 등장했을 뿐, 이미 테스트 서버에서 공략이 이뤄졌고 게이머스 포럼에도 크게 이슈가 된 적이 있는 보스 몬스터이기 때문이었다.

이미 고레벨 유저들은 거의 모두 지 브라퀴 공략에 대한 노하우를 쏟아냈고 이번 공략에 도전하는 원정대 수준이라면 시간이 얼마나 걸리든 성공을 해내기는 할 것이다.

‘성공을 할 수 있느냐, 없느냐에 포인트를 두고 있었는데 그렇게 하면 안 되겠구나. 조금 더 제대로 집중해야겠어.’

나야 상금인 1억 골드를 받느냐 마느냐에 별 관심이 없지만, 함께 플레이하는 길드원들의 사정을 고려해줄 필요가 있었다.

- 악마혈 : 이렇게 하는 건 어떨까요? 어차피 보스 방에는 20명밖에 못 들어가니 총군주님을 비롯한 정예만 딱 뽑아서 밀고 들어가는 거요.

- 황성찬호좁 : 동의합니다.

- 윤진수호좁 : 저도 동의합니다.

- 지옥검 : 제 생각도 같고, 이기고 제대로 이슈 몰이도 했으면 싶습니다.

- 구운몽 : 이슈 몰이?

- 지옥검 : 요즘은 플레지 길드들도 언론 플레이가 엄청납니다. 성주가 되는 게 민주적으로 투표해서 이뤄지는 것도 아니고 싸워서 차지하는 건데, 이조차도 민심을 잡으려고 하고 별의별 짓을 다 합니다.

일명 플저씨라고 불리는 아재들에게 플레지는 단순한 게임이 아니다. 게임 자체가 그들이 소속된 하나의 사회이자 세계인 셈이다. 그 탓에 이 안에서는 전혀 게임 내의 일이라고 생각할 수 없는 온갖 사건 사고들이 발생하고 있었다.

처음에는 나와 내 지인을 제외하고는 다 적이었던 플레지에도 어느 정도 현실과 비슷한 개념의 매너라는 것이 도입되었고, 이제는 나름대로 명분도 굉장히 따지고 있는 모양이다.

‘그나저나 좌호법만이 아니라 여기 있는 사람들도 다 콘셉트 충이기는 해. 이게 뭐라고 진짜 회의하듯 죄다 존칭하고 그런대?’

막상 거부감 없이 나도 그리 참여하고 있긴 하지만 말이다.

- 구운몽 : 그래도 사람들 연합 정도면 이슈가 없어도 충분하지 않습니까?

- 지옥검 : 그것도 다 옛날이야기입니다. 총군주님의 오랜 잠수 이후 큰 이슈나 별다른 임팩트 없이 저희 길드는 그저 강하다는 이미지만 유지만 된 지 오래였습니다.

- 구두룡검 : 약발 다 끝난 지 오래지.

- 검 : !!!!!

- 구두룡검 : 아! 죄송합니다. 유명무실해진 지 오래였습니다, 총군주님!

아마 얼굴을 보고 있었으면 서로 입술이랑 볼이 씰룩거렸을 것이다.

- 지옥검 : 현재 저희 길드는 초창기에 용을 사냥하며 선점했던 힘으로 지금까지 잘 나가는 길드 정도로만 인식되고 있습니다. 그나마 유일하게 통제 없는 서버라고 해서 다른 서버 유저들이 인정해주고 말이죠.

사실 게임에서 유저들끼리 사냥터를 독점하네, 통제하네 마네 하는 것도 터무니없는 일이기는 하다. 그러나 생태계라고 해도 좋을 만큼 자리 잡았으니 이 부분을 지적하는 건 의미가 없다. 중요한 건, 다른 서버에서는 강자들이 좋은 사냥터를 독점하기 위해서 통제를 하는 일이 당연하고 우리 서버는 예외라는 점이다.

‘그런데 고마워하지 않는다니. 너무 당연하게 여겨지는 상태고.’

혜택을 받지 못하는 다른 서버의 유저들은 우리 연합에 대한 칭찬 글과 부럽다는 글들을 계속 올리지만, 켄헬 서버의 유저들은 별다른 관심이 없었다.

< 내거 아닌 내 캐릭터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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