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999년 게임 스타트-464화 (464/577)

< 바꿔 간다 >

“여기서 그치면 단발성에 끝날 뿐입니다. 굳혀서 저들이 원하는 관행을 바꿉시다.”

특별한 지금 한 번이 아니라, 앞으로 세대가 바뀌었음을 공고히 다져야 한다. 이번에는 승리의 편이 확실시되었으니 돈을 주고 언론 미디어 전체에게 우리 기사 전문을 싣도록 했다.

【재계 1위 GF 그룹 약자의 편에 서다.】

TV에 얼굴을 내비치는 현대의 가장 화려한 직업인 방송관계자들.

그러나 내부의 실상은 어둡기 그지없다. 특히 보조 출연자 외주 작가 등의 사람들은 여전히 자신이 하는 일의 가치만큼의 보상 혹은 보호를 전혀 받지 못하고 있는 방송계 최하의 약자들이다. 최근 이런 약자들의 편에서 강자가 큰 화제가 되고 있다. 바로 대한민국 재계 1위의 기업 GF 그룹이다.

파편적으로 여러 목소리가 뒤섞여 자칫 희석될 뻔한 CAS와 KBC의 사태를 깔끔하게 정리하고 인권에 주목하는 기사였다.

“나팔수가 제대로 나팔을 부니 효과가 좋군요. 이 맛에 언론에 돈 주는 건가 봅니다.”

“그런데 회장님. 너무 공격적으로 나가는 건 아니신지 조금 우려됩니다.”

“왜요? 나중에 방송사에서 출연자들에게 뒤 수작이라도 부릴까 봐?”

“아뇨. 그게 아니라. 저들이 단합해서 저희를 매도하면 우리가 아무리 GF라고 꽤 곤란하지 않을까 해서 말입니다.”

“곤란할 게 뭐 있습니까? 방송사들이 아무리 단합해봤자 그이 할 수 있는 건 한계가 명확합니다.”

‘이 바닥 좁다’라는 협박은 상황이 바뀌면 반대로 작용하기 마련이다. 그 좁은 바닥에서 벗어나면 정말 무능해진다. 그리고 거듭 강조하는 바지만, 우리 그룹은 일본을 구멍가게로 볼 정도로 세계가 무대다.

‘한국은 일본보다도 시장 규모가 작고.’

그러니 착하면서도 품값을 지나치게 많이 들고 정의로운 지금 같은 의적 행동을 할 수 있던 것 아니겠는가. 이를 김유천 비서실장이라고 모를 리 없다. 하지만 그는 내가 자칫 간과할 수 있는 문제점을 환기해주는 일을 하는 이다.

반대를 위한 조언이 아니라 잊지 말라는 뜻의 말이 이어졌다. 마냥 이상만 추구하고 낭만만 이루려고 하면 안 된다고.

“문제가 생겼을 때 우리에게 손을 내밀어주는 누군가가 있다면 만 명의 보조 출연자보다 하나의 KBC가 훨씬 나을 수 있습니다.”

“만약 우리가 자금난을 겪고 있다고 칩시다. 그럴 경우에 뭐 KBC가 우리에게 도움을 줄 가능성이 매우 낮겠지만, 도와주는 것도 해준다고 칩시다. 그들이 어떤 도움을 줄 수 있죠?”

1만 명의 출연자들이 개인당 1,000원씩 걷어서 준다고 치자. 이러면 1,000만 원이 된다. 개인에게는 큰돈이겠지만, GF의 입장에서는 간에 기별도 안 가는 돈이다.

그렇다면 KBC는? 그들의 유동자산의 경우 많을 때는 300억 정도까지 될 거다. 그리고 그들도 살아남기 위해 돈이 움직여야 할 테니까. 아마 실제 운용 가능 자금은 20억 남짓.

큰 차이가 나기는 한다.

‘문제는 1,000만 원이나 20억이나 별반 도움이 안 된다는 거지.’

GF 정도 그룹에 문제가 생겼다는 건 20억으로 해결할 수 없다는 뜻이다.

기업 대 개인.

둘의 경쟁에서 경제적인 이득을 제외한다면 애매한 기업 하나보다 1만 명의 손이 훨씬 큰 도움이 될 거다.

“그러니 대기업보다 1만 명의 아군이 실익이 됩니다. 마냥 정의롭기만 하려는 건 아니에요.”

“그렇군요. 확실히 기업 이미지만큼은 여느 대기업과 감히 비교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나중에 출마하신다면 정치인도 너끈히 되실 것 같습니다.”

크게 웃어넘겼다.

“우리 변호사들이 움직일만한 일들은 더 없습니까?”

“혹시나 해서 그들이 지금까지 받지 못한 급여를 받아볼 방법들을 찾아보았습니다. 하지만 이미 정상 근무만 하고 퇴근했다는 서류에 전원이 사인을 마쳤다 보니 그 부분은 포기해야 할 것 같습니다.”

참 안타까운 일이다. 일을 시켜놓고 그 일에 해당하는 돈을 제대로 주지 않았다면 남의 돈을 도적질해서 빼앗은 도둑들과 다를 게 무엇인가.

“변호사들은 할 일이 없지만, 스케줄 관리부터 이들의 급여 관리. 그리고 세금과 보험에 대해 관리를 할 직원들을 더 뽑아야 할 것 같습니다.”

“직원들이 더 필요하다고요?”

“회장님께서 워낙 사건을 크게 터트리시는 바람에 대한민국의 보조출연자라는 출연자들은 죄다 몰려오고 있는 형편이거든요. 알아보니 한국에서 활동하는 보조 출연자들의 숫자는 1만 명에 달하더군요. 이 중에서 5천 명까지는 모일 것 같습니다.”

대단한 인원이지만 일반 회사처럼 사무실에 개인 책상과 의자가 존재하는 곳이 아니다 보니 인원이 많다고 사무실이 미어터지는 일은 벌어지지 않는다.

대신 5천 명에 달하는 인원이 움직일 버스와 그들이 출연할 프로그램 물색, 그들에게 적용될 4대 보험과 세금을 다룰 직원이 최소 10명은 있어야 숨은 쉬면서 일을 할 것이다.

“그럼 인원을 확충합시다.”

CAS는 회사의 입장에선 수익은 없고 지출만 존재하는 법인이다. 심지어 해당 법인을 통해 GGT의 수익이 더 늘어나긴커녕 그 특성 때문에 오히려 GGT의 수익도 줄어드는 곳이 CAS다.

‘상장회사에서는 절대로 할 수 없는 사업이지.’

‘답답하면 니들이 뛰든지’라는 말의 대답처럼 이런 정신 나간 부자 한 명쯤은 나와주면 좋지 않을까, 싶어서 내가 해본다. 돈키호테처럼 휘청거리면 안 되니까 나름 실익도 챙기면서 말이다.

“이제 슬슬 준비해야 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준비요?”

“저들이라고 이렇게 무작정 당하고 있지만은 않을 겁니다. 무언가 반격의 준비를 하고 있겠죠.”

“반격이라. 뭐 하고 싶은 대로 하라 하죠.”

우리 그룹은 맷집이 좋다.

*

김유천 실장이 언급한 기존 미디어의 반격은 노골적으로 문화예술계가 양분되는 형태로 이루어졌다. GF의 투자금을 받아서 운영되는 집단과 GF의 투자금을 전혀 받지 않고 운영되는 집단으로 말이다.

“전면 보이콧?”

“네, 회장님. 지금 방송국도 GF와 연관된 곳의 직원들은 전혀 고용하지 않고 멀티 플랙스도 우리의 투자금을 받은 영화는 전부 스크린을 내어주지 않기로 했습니다.”

“발등에 불이 떨어졌다 이거군요. KBC 하나가 아니라니. 그런데 이 중·소규모 제작사들은 다 뭡니까? 이들도 힘을 합쳐요?”

“규모의 차이가 있어도 이들 역시 스태프들에게는 갑이었던 이들입니다. 공적인 이익 이전에 쥐고 있던 권력이 토막 나는 걸 용인하지 못하는 모양이죠.”

밥그릇 싸움은 저렴하면서도 가장 치열하다. 하지만 이를 마냥 매도할 수는 없다. 누구에게나 남보다는 내가 중요하고 이런 개개인이 모여 사회를 이룬 거니까.

“그 바람에 수많은 실업자가 만들어지고 있습니다. 초기에 저희가 하는 운동을 칭찬하기만 하던 여론도 슬슬 잘 운영되던 대한민국의 시스템을 망친 주범이 우리라는 식으로 매도하는 여론과 섞이기 시작했습니다.”

“돈을 써봐야 달랑 기사 한 번이 고작이니, 참 더럽게 비싼 약발이군요.”

어쨌건, 전혀 없는 사실을 오보하는 건 아니다. 우리가 어떤 취지를 가지고 있건 간에, 우리 때문에 직장을 잃은 사람이라면 일단 분노가 생기기 마련이다.

“이런 식이면 장기적인 여론전에 생활고로 이탈하는 이들이 생기겠군요. 그런 싸움은 저들이 익숙할 테니··· 처음과 달리 저들이 점점 저를 과감하게 만듭니다. 하긴, 저들에게는 잘 지내던 이들의 밥그릇을 걷어찬 나쁜 놈이 바로 저일 테지만요.”

독백하듯 되뇌고는 결단했다.

“전부 고용하세요.”

“그리 말씀하시리라 짐작해서 알아보았습니다만, 회장님. 1만 명입니다. 이들 모두를 감당하는 건 숫자가 너무 많습니다.”

“저 역시 전에 대답했을 겁니다. '만약'이 아니라 정말로 1만 명의 편에 설 거라고. 그편이 이미지로 보나 장기적으로도 우리에게는 이익이라고. 이건 단순히 해야 하는 정의로운 일이기 때문에 이어나가는 게 아닙니다. 기호지세에요. 지금 놓치면 이도 저도 아니게 됩니다.”

“알겠습니다, 회장님.”

그 대답을 기다렸고 듣고 싶었다는 듯, 김유천 비서실장이 회장실을 나섰다. 이제 내 메시지가 모두에게 전해질 것이다.

‘고작 이런 거로 안 돼. 우리 그룹은 맷집이 좋다니까.’

대한민국의 방송계나 영화계에서는 대단한 착각을 하고 있다. 하나의 기업이 대한민국 전체 문화예술과 상대해서 싸우는 게 불가능할 거라는 착각 말이다.

미안한 말이지만 대한민국의 문화예술계 전체 시장규모를 다 합친 것보다 더 큰 규모를 가진 기업이 한국에는 몇 개씩이나 된다. 그리고 그들 전체와 싸울 수 있을 만한 규모를 가진 기업이 세 개이고 여기에는 GF가 들어간다.

‘물론 싸울 일도 없겠지만, 만약에 싸울 일이 생긴다 치더라도 상장된 주식회사라는 그 특성 때문에 나머지 두 기업은 이윤에 반하는 그런 행위를 하지 못하겠지.’

하지만 그걸 할 수 있다면?

종양 같은 폐단 하나를 도려낼 수 있다. 한편으로 이는 적어도 나 정도의 존재가 나타나지 않는다면 지금과 같은 기적은 일어나지 않는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멍청이처럼 맞고 나서 거기에 대응하는 짓거리를 반복할 이유가 없지.’

저들이 연대해서 공격해왔으니 이번에는 이쪽에서 응수해보겠다. 나는 생각을 정리하고 이튿날, 김유천 비서실장에게 말했다.

“우리가 올해 영화에 투자하기로 했던 투자금이 총 얼마입니까?”

“800억입니다.”

“생각보다 작네요?”

“아닙니다. 대한민국은 매년 150편 미만의 영화를 제작합니다. 그리고 제작되는 모든 영화의 평균 제작비는 대략 23억 정도입니다. 이를 대충 계산하면 1년에 영화 제작비로 3,500억 원 규모의 투자가 이루어지고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여기서 GF가 홀로 투자하는 800억은 대한민국에서 만들어지는 전체 영화의 22%에 해당한다. 절대 작지 않은 금액이다.

대한민국에는 대표적인 투자배급사가 3개나 존재한다. 이들은 전문적으로 상업 영화에 투자하고, 또 이 영화를 극장에 내 거는 것으로 수익을 내는 집단이다. 이들을 제외하고도 수많은 투자배급사와 제작사 투자사들이 존재하고 말이다.

그런데 영화 배급사도 투자 전문 회사도 아닌 GF가 그 전체 제작비의 22%를 투자하고 있다니. 김유천 실장의 말대로 절대 적은 돈이 아니었다.

“투자금이 작은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대한민국 영화계가 작은 거군요.”

“지금 제작 준비 중인 라이언 맨 2의 제작 예산이 2,000억이니, 확실히 그렇습니다.”

“좋습니다. 잽이 아니라 풀 파워로 제대로 반격해보죠.  투자 비중을 높입시다.”

“네?”

“어차피 수많은 보조 출연자들과 작가, 그리고 스태프들이 일자리를 잃었다면서요?”

“그렇습니다.”

“이 많은 인원을 모두 활용해서 영화도 만들고 예능도 만들고 다 하면 되겠네요.”

“그건···”

김유천 비서실장이 무엇을 걱정하는지는 잘 알고 있다. 영화든 드라마든 예능이든 결국 그것을 만들어내는 데에 가장 중요한 사람들은 지금 일자리를 잃은 사람들이 아니라 이러한 상황에도 전혀 걱정할 게 없는 사람들이다.

당연히 지금 이 사람들만 데리고 방송이나 영화를 제작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이야기이며 이런 건 나도 잘 알고 있다. 하지만 모 일본 만화의 한 장면으로 유명한 짤이 있지 않던가.

거부하기에는 지나치게 많은 돈.

빅 머니!

그거면 된다.

“명분은 우리에게 있습니다. 여기에 돈은 훌륭한 설득력을 갖출 터. 되는대로 투자해서 다 데려오세요. 좋은 예능을 만들던 PD, 좋은 영화를 만들던 감독. 손닿는 만큼 모조리 데려와서 찍는 겁니다.”

“불가능합니다. 자금이 부족합니다.”

“하는 수 없지요. 제가 사비를 좀 쓰겠습니다.”

“네?”

“한 10조 정도 쓰면 충분히 하고 싶은 거 다 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사비로 10조요?”

“그동안 사재기한 주식들 좀 처분하죠.”

쓸 때는 쓴다.

“맙소사. 진심입니까?”

“거짓말 같아요?”

“아뇨. 진심 같아서 걱정인 겁니다.”

김유천 실장의 표정을 해석하자면 ‘원래도 또라이라는 건 알고 있었지만, 생각보다 훨씬 더 미친 또라이였어.’ 정도로 해석이 될 것 같다.

“제가 그렇게까지 대책 없이 저지르려는 건 아닙니다.”

“무언가 대책이 있으신 겁니까?”

“텐션이랑 합작으로 만든 중국 방송사 있지 않습니까?”

“네.”

“거기서 전부 소화해낼 겁니다.”

어차피 한류다 뭐다 해서, 중국에서 소비되는 한국의 콘텐츠는 넘쳐난다. 그뿐만 아니라. 넷플렉스를 통하면 중국을 제외한 전 세계로 송출할 수 있다. 뭐가 됐든 나는 손해를 볼 일은 없을 거라는 이야기다.

“기왕 사재를 쓰는 마당이니 이참에 글로벌 프로젝트나 해봅시다.”

“제 담력이 회장님 덕분에 자꾸만 강해지는 것 같습니다. 어떤 글로벌 프로젝트인지 짐작도 되지 않네요. 무엇입니까?”

“흔한 거 있잖아요. 한중 합작 드라마라던가 한미 합작 드라마 같은 거.”

미디어의 세계에도 국가라는 장벽이 꽤 두꺼운 편이기는 하지만 그 벽이 점점 얇아지는 것이 추세다. 그리고 앞으로는 그 속도가 더욱더 빨라질 것이다.

“중국용 드라마는 중국과의 합작, 넷플렉스용 드라마는 미국과의 합작. 이렇게 진행해봅시다. 기대되지요?”

“정말로 진심입니까?”

“당연히 진심이지요.”

“······.”

외계 생명체를 보는 시선으로 나를 보던 김유천 비서실장이 탄식하듯 말했다.

“회장님께서는 뭐든 시작하시면 작게 시작했다가 핵폭탄처럼 팽창하는 거 같습니다.”

“딱 감수할 수 있는 폭탄이지 않고요?”

“바로 그게 환장할 일이라는 거고요. 정말로 글로벌하게 들썩이겠군요.”

김유천 비서실장은 치사하다.

제정신이 아니라고 나를 말로 욕하면서 표정은 너무나도 즐겁게 웃고 있었으니까.

< 바꿔 간다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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