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바꿔 간다 >
“그래서 김 실장님 연봉이 10억보다 낮아요?”
“···그건 아닙니다.”
김유천 비서실장은 직책이 실장일 뿐, GF 그룹 전체로 따져도 그보다 윗사람이라 할 수 있는 사장급은 몇 되지 않는다. 그런 사람 연봉이 고작 10억일까.
“그러니까 그런 거에 너무 아까워하지 마시고 변호사를 고용합시다.”
“알겠습니다. 변호사 추천은 온전히 박 변에게 맡겨두겠습니다.”
“신뢰가 팍팍 오네요.”
회사에 변호사가 아예 없어서 새로 고용하려는 것이 아니다. 아마 사내 변호사가 아예 없었다면 김유천 실장이 먼저 변호사를 고용하자고 이야기했을 것이다. 더 많이 그리고 더 잘난 변호사를 고용하려고 하기 때문이다.
김유천 실장의 입에서 나온 박 변은 박경호 변호사다. 한창 플레지에 빠져 있던 시절 GF에 입사한 좌호법으로서 그는 TS 투자에서 투자와 관련된 법을 관리하다가 현재. GF 그룹 법무팀에서 대표 변호사를 담당하는 중이었다.
‘혼자니까 자연스럽게 대표자고 그러니까 대표 변호사지.’
안타깝지만, 좌호법은 이제 그 대표 변호사 자리에서 내려오게 생겼다. 전관예우급 변호사라는 존재는 원한다고 아무 곳에서나 훅훅 데려올 수 있는 그런 존재가 아니다.
대한민국에는 엄청난 건의 변호만 담당하는 대형 로펌이 다섯 개고 그들과 협력하는 대형 기업집단이 수십 개나 된다. 이 중에서 상위 다섯 개의 그룹만 따져도 총 10여 개의 회사에서 전관예우급 변호사를 데려가길 원하는 실정이다.
그런데 정작 이런 급 있는 변호사는 몇 년에 한 번 정도나 나온다.
결국, 당장 GF라는 간판과 높은 연봉을 이용해서 꼬실 수 있는 변호사는 나름대로 검사와 판사 경력을 가지긴 했지만, 내부에서는 딱히 자랑할만한 역량이 없는 그런 변호사들을 고용했다.
“박 변의 말에 의하면 이 정도를 구하는 것도 GF니까 가능했던 거라고 합니다.”
‘하긴 뭐 드라마나 영화에서도 어떻게든 섭외하려고 로펌끼리 전쟁처럼 뒷공작하고 그러던데. 드라마가 그 정도인데, 현실은 더 하겠지.’
아무튼 이 정도면 준비는 충분하다.
“비싸신 분들까지 다 섭외했으니 이제 움직여 봅시다. 우리 변호사님들에게 일하라고 전하세요.”
“일이라고 하시면?”
“일단 법인을 만들어야 직원들을 받고, 직원들을 받아야 영업을 시작할 거 아닙니까?”
그렇게 문화 종합예술 보조자들이라는 의미의 CAS가 만들어졌다.
가장 먼저 법인의 직원으로 고용한 이들은 GGT와 도사 전우치, 전당포, 반가워 귀신아와 관련된 보조자들이었다. 그저 어제와 같은 일상을 지냈을 뿐인데 상황이 환경이 확확 바뀌어서 얼떨떨해하는 그들을 모아두고 내가 말했다.
“우리는 여러분을 통해 이익을 얻을 생각이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법인을 오래 유지할 생각도 없습니다.”
이제 갓 직원들을 고용한 주제에 고용된 직원들에게 회사를 오래 운영할 마음이 없다고 말하는 중이다. 당연히 GF라는 이름을 믿고 모여든 사람들이 웅성거리는 소리로 강당이 가득 찼다.
“그럼. 회사가 없어질 때 저희는 어떻게 되는 겁니까?”
“알아서 하셔야 합니다.”
“네?”
“CAS는 여러분들이 스스로를 지킬 수 있는 조합을 만드는 힘. 그것을 직접 키울 수 있는 여건을 드리고자 만든 법인입니다. 즉, 우리의 목표는 여러분을 보호하되 스스로 보호할 수 있도록 도움을 드리는 것이지요.”
“지금까지 그런 단체를 만들려고 엄청난 노력을 해왔으나, 전부 헛짓이었습니다. 저희더러 그걸 또 하라는 말씀입니까?”
“이전까지는 그런 움직임을 보이면 여러 곳에서 압력과 보복을 당해왔던 것으로 압니다. 그래서 여러분이 지쳤을 테지요. 하지만 이제부터는 제가, GF가, 여기 CAS가 부당한 불이익으로부터 막아드리겠습니다.”
우리는 도와줄 뿐이다. 이를 거듭 강조했다.
“여러분을 비호해드리는 것은 어렵지 않습니다. 그렇지만 제가 모든 보조출연자와 모든 제작진, 모든 작가를 보호할 수는 없습니다. 제가 보호할 수 있는 건 어디까지나 CAS가 품을 수 있는 분들뿐입니다. 그러나 여러분이 단체를 만든다면 모두가 보호를 받을 수 있습니다.”
시민은 연대해야 한다.
“그러니 여러분이 직접 움직이셔야 합니다.”
지금 이 자리에 있는 사람들은 지금까지 이렇게 큰 품에 들어와 본 적이 없을 것이다. 그만큼 많은 사람을 품었다. 하지만 수많은 보조출연자나 작가들에 비하면 이 자리에 있는 사람들은 극히 일부일 뿐이다.
“우리 GF는 여러분을 응원하겠습니다.”
여기서야 말로 미국식의 파이팅 응원이 딱 맞다.
힘내라가 아니라 싸워라!
*
GF 그룹에서 만든 법인이니만큼 기존의 엑스트라 회사들이나 기존의 어설픈 회사들과는 질적으로 다른 특징들을 보유하고 있었다.
우선 첫째, 우리 보조출연자들은 따로 전용 전세버스가 제공된다.
둘째, 방송 작가들과 스태프들에게는 공동으로 운용할 수 있는 법인 자동차가 배치됐다.
셋째, 언제 어디서 촬영이 있든 이들을 위한 식사가 제때 제공된다. 이로써 더는 쫄쫄 굶으면서 일하는 일이 사라졌다.
이 별것 아닌 대처들이 의미하는 바는 명백하다. 각 매체의 갑들에게 날리는 경고다.
그러나 이러한 경고를 받으면 받을수록 더 이상한 짓을 하는 종자들은 어디를 가나 존재하기 마련이다.
“세상 좋아졌네. 무슨 엑스트라들이 전세버스를 가지고 다녀?”
“뭐야 이동식 탈의실도 있어?”
“와아~ 진짜 웃기네.”
전혀 웃길 일이 아니다. 엑스트라는 남자도 있고, 여자도 있다. 한 가지 성별만 존재하는 것도 아닌데, 옷을 갈아입을 공간조차 없다. 이들이 주·조연 배우들처럼 벤이 있는 것도 아닌데 무작정 빨리 옷을 갈아입으라 마라 요구하는 현실이야말로 웃긴 일이다.
그러나 이런 불합리한 말을 들으면서도 그저 웃으며 고개를 숙이는 것 말고는 할 수 없는 것이 보조출연자들의 어쩔 수 없는 숙명이었다.
보조 출연자들은 일용직이다.
하루 출연료 3만 원. 새벽 6시까지 방송국에 찾아와서 촬영장으로 이동하고, 또 거기서 오후 6시까지 가득 채워서 시간을 쓰게 만들어 놓고 주는 돈이다.
그나마도 6시에 딱 끝내주기라도 하면 다행이다. 본래의 규정대로라면 그 6시를 초과하면 바로 추가 수당이 붙게 되는데, 7시 이전에만 끝나면 절대 추가 수당을 주지 않는다. 그래서 늘 6시 40분쯤에 끝나는 것이 보편적이고 관행으로 굳어왔다.
지금처럼 시비를 걸 때 반응 한번 잘못 했다가는 그대로 모가지.
다시는 이 사람이 있는 촬영장에는 들어올 수도 없게 되어버린다.
그야말로 파리보다 못한 목숨이 이 보조 출연자들의 운명이다.
“6시 초과했습니다. 추가 수당을 붙여주셔야 합니다.”
“뭐? 추가 수당? 아니. 당신들이 촬영장에 6시에 도착했어? 촬영장에 도착한 시간은 7시잖아. 그럼 7시부터로 잡아야지!”
“그럼 7시까지 이곳으로 오라고 연락을 주시던가요. 저희와의 계약은 오전 6시까지 방송국에 모일 것. 그리고 오후 6시까지 촬영에 임할 것. 6시를 초과하게 될 시 2일 치를 지급할 것. 이것이 계약입니다.”
보조출연자는 시급의 개념이 없다. 일 단위 계산이다. 그래서 6시를 초과해서 수당을 줄 거면 차라리 한 번에 2일 치 급여의 끝 시간이 10시까지 촬영을 해버리는 게 낫다.
그러나 방송을 하려면 배우가 필요하고, 배우의 스케줄에 맞춰야 하기 때문에 방송사에서 보조출연자에게 지급할 돈이 아깝다고 촬영을 더 할 수는 없는 노릇이니 어떻게든 오후 6시까지에 맞추는 것에 이골이 난 집단이 드라마 촬영팀이다.
“어허. 이 사람이 그래도! 당신들 회사 어디야? 어딘데 이렇게 안하무인이야! 다들 일 그만하고 싶어!?”
이렇게 갑질을 하고 있는 이 사람도 결국 보조출연자다. 그저 이 드라마 촬영팀과 친한 보조출연자 용역 회사에서 오래 일했고, 그 경력으로 보조출연자들의 중간관리자 역할을 겸하고 있을 뿐이다.
보조출연자들의 처우가 개선되면 본인의 처우도 개선이 될 테지만, 당장 그런 것들까지 생각할 여유가 없는 사람들이기도 했다. 자신 역시도 고용된 노동자라는 자각이 부족하기 때문이었다.
“출연자 임금 지급에 관한 문제입니다. 이건 조장분이 나서서 될 일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조연출님과 이야기하게 해주시죠.”
“아니. 뭐 대체 어떤 회사길래 이렇게 꼴통 짓을 하는 거야? 여기 KBC야 KBC! KBC랑 척지고 계속 방송할 수 있을 거 같아?”
“그건 조장이 걱정할 문제는 아니고요. 저는 우리 회사 출연자들이 제대로 된 급여를 받을 수 있도록 해야겠습니다.”
“저도 같이 이야기하겠습니다.”
“저도요.”
CAS가 아니었다면 이렇게 KBC에 대놓고 들이박으려는 생각 따위는 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나 CAS는 이런 일로 문제가 생기면 소송으로 어떻게든 돈을 받아줄 것이며, 불공정한 행동을 고발했다고 불이익을 주는 행위가 밝혀질 시 추가 고발이 이어질 수 있다며 힘을 실어주었다.
마지막으로 정 일할 곳이 없어지면 GGT에서 출연할 자리를 만들어주겠다며 최후의 보장마저도 맞춰주었다. 이런 데 더 망설이는 것은 멍청이나 하는 짓이다. 그들은 본래부터 해야 했고 탁상행정으로나마 명백하게 존재하던 법대로의 요구를 비로소 하게 되었다.
“조연출 나오라고 하세요. 우리는 우리의 권리를 주장해야겠습니다!”
이것은 비단 보조출연자들만의 이야기가 아니었다. 일용직으로 촬영 보조를 하는 이들부터 작가들까지 자신의 권리를 제대로 찾지 못하고 있던 이들이 단체로 들고 일어났다.
이른바 사회적으로 파문을 일으킬 수 있는 첫 변화의 신호탄이었다.
이를 ‘그러시군요.’라고 받아들일 확률보다는 경기를 일으키고 맞대응할 확률이 높기는 누구라도 알 수 있다. 당연하게도 KBC는 이들의 목소리를 무시하고 그간 해오던 대로 강압적인 행동을 해버렸다.
*
“그래서 지금 전원 해고 통보가 떨어졌다고요?”
“그렇습니다.”
정확히 말하자면 그나마 해고라도 당한 건 작가들뿐이다. 나머지야 전부 일용직이니 해고고 뭐고 당할 것도 없었다.
“그럼, 이제 프롤로그 끝났네요.”
예상했던 바고 울고 싶은 아이의 뺨을 아주 제때 때려준 셈이다.
“본 게임 들어갑시다.”
“네, 회장님. 변호단에게 준비하라 알리겠습니다.”
“자료들은 미리 다 보냈죠?”
“그렇습니다.”
“좋네요. 그래 어디 한 번 누가 이기나 해 봅시다.”
변화를 일으키기 위한 첫 번째는 우선 세상에 ‘우리들이 있습니다!’라며 널리 알리고 흐름의 방향을 만드는 것이다. 이를 위해 미디어를 활용한다.
【GF. 미디어의 그늘에 랜턴을 달다.】
【보조출연자도 사람입니다. 그들도 배우입니다. 보호받을 권리가 있습니다.】
【보조출연자의 처우 개선! 방송사가 먼저 나서야 한다!】
CAS 소속 직원들과 계약을 하면 다른 보조출연자나 작가들과 비교해서 신경 써야 할 것들도 많고 골치 아픈 일이 벌어질 가능성도 높다는 것을 저들도 알았다. 그러니 방송사들은 이제 CAS 소속의 직원들을 사용하지 않으려 할 것이다.
그래서 먼저 선수를 쳤다. 이 자들에게 손을 내밀지 않으면 그 자체만으로 악당인 것처럼 방송사들을 매도하는 광고를 열심히 찍어냈다.
【CAS는 많은 것을 바라지 않는다. 그저 노동 환경 개선과 인권 보장. 고작 이 두 가지가 전부다.】
【CAS의 요구, 노동 환경 개선과 인권 보장. 방송사를 무너뜨릴 만큼 큰 것일까?】
【인권을 무시하는 기업은 유지할 가치가 있는가?】
언론기구들은 대부분 서로가 동지이며 친구이자 형제다. 그 때문에 우리의 기사를 싣지 않는 언론사들도 많았지만, 요즘은 세상에 넘쳐나는 게 인터넷 기사다.
트래픽만 많으면 주요 언론사가 아니라고 해도 충분히 상위권에 올리는 것이 가능하고 이런 비주류 언론사들은 어떻게든 주류의 반열에 들기 위해 안간힘을 쓰는 이들이다. 주요 언론사들을 이길 기회만을 엿보는 그들을 적극적으로 활용했다.
【GF 홀딩스의 자회사 CAS. KBC 상대로 소송.】
【CAS. ‘방송 보조 인력들의 불합리한 해고에 대해 KBC와 끝까지 싸울 것!’】
【은밀한 폭력과 고성이 오가는 촬영 현장을 분석해본다.】
【규모는 거대. 착취는 그대로? 시장 규모가 커지고 제작비가 상승했지만 보조 출연자들의 처우는 오히려 더 악화하여가고 있다.】
【드라마 촬영 스태프들, 일주일에 80시간씩 일하고 한 달에 고작 150만 원 받아.】
【촬영 후 집에 들어갈 시간도 없는 예능 작가들. 섭외부터 예능의 모든 것을 담당하지만 언제 잘릴지 모르는 인생.】
언론을 통한 압박 그리고 법인의 소송. 대중들의 시청률을 활용한 광고비로 수익을 내는 방송사로서 오랜 시간 끌고 있는 것에는 꽤 부담일 수밖에 없다.
방송사들은 가만히 당할 자들이 아니었고 당연히 수많은 발악을 해보았지만, 나는 지금까지의 상대와 다르다. 고작해야 인터뷰 하나가 전부였던 개인의 외침이 아니라 얼마든지 버틸 맷집과 다양한 창구를 통해 확성기에 대고 목소리를 높일 수 있다.
비슷한 크기의 목소리로 서로 싸우게 된다면?
명분을 가진 쪽. 구경꾼들에게 응원을 받는 쪽이 이기게 된다. 결국, 시청자들의 분노를 막아내지 못했고 2주일 만에 KBC는 항복의 백기를 들었다.
【KBC 그간 고생한 보조 용역 고용자들에게 사과.】
【‘미안한 마음뿐이고 앞으로는 철저히 개선하여 실망하게 해드리는 일 없도록 하겠다.’】
이것은 CAS의 첫 움직임이었고, 방송사와 보조 용역의 싸움에서의 첫 승리였다.
< 바꿔 간다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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