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999년 게임 스타트-461화 (461/577)

< 바꿔 간다 >

*

암행어사처럼 촬영지에 다녀오려는데 김유천 비서실장이 점잖게 만류했다.

“회장님. 예전에 도시로 촬영 때도 구경 갔다가 진행만 방해하고 오셨다는 소문이 파다합니다. 그런데 또 그러시려고요?”

“방해는요. 제 덕분에 고기도 잘 먹고 그랬는데.”

“······.”

“···혹시, 보셨어요?”

“아뇨. 못 봤죠. 그냥 이야기만 들었습니다.”

흥! 못 봤으면 됐다.

뻔뻔해져 보자.

“사람이 어떻게 남의 말만 듣고 그렇게 모함합니까? 내가 그때 차에 막 고기랑 간식 바리바리 싸서 산골짜기까지 쫓아가고 분위기도 얼마나 좋았는데요. 그때 성호가 저를 얼마나 따랐는지 소문이 자자하게 났을 겁니다. 컴퓨터도 주고 아주 훈훈했거든요.”

“그러고 보니 당시에 유성호 배우가 회장님께 ‘삼촌. 삼촌.’ 하면서 엄청나게 따랐다고 하긴 했었네요. 요즘도 연락은 하십니까?”

“바빠서······.”

동생 태희랑도 연락을 잘못하고 있는 마당에 걔랑 연락하고 지내게 생겼나?

그러고 보니 참 격세지감이다. 당시에는 ‘미래의 스타랑 나도 친하게 지내봐야지! 연예인이다! 연예인!’이라고 어떻게든 친해지려고 애를 썼었다. 그런데 이제는 할리우드 배우랑 알고 지내고 워낙 사업으로 바쁘다 보니 별반 신경을 쓰지 않게 됐다.

‘근데 이 인간이 뭐? 삼촌이라고?’

진실을 바로 잡자.

“지금은 그런 말을 들을지 몰라도 당시에는 형이었습니다. 김 실장님도 잘 알다시피 레이첼 작가님이 제게 젊은 회장님이라고 꼭꼭 말하잖습니까.”

“글쎄요. 처음에는 삼촌으로 불렀다가 간식의 힘으로 간신히 형이라 부르게 됐다고 형빈이한테 들었는데, 녀석이 잘못 기억했나 보네요.”

‘젠장. 내부 고발자가 있었을 줄이야.”

오래간만에 배신자를 만나서 소주를 컵으로 먹여야겠다. 불쌍하니 안주는 소갈비로 넣어주고.

“아무튼. 그래서 안 가신다고요?”

“회장님. 원래 그런 곳은 저희가 나타나면 다들 얼어서 제대로 촬영도 못 합니다. 그러니까 이번에는 좀 참으시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저희 GF에서 게임 개발하는 거랑은 사정이 다르지 않습니까?”

맞다. 엄청 다르다. 게임이야 결국 내 사람들이 만드는 거라지만, 영화는 그냥 계약서에 계약만 한 남이 만드는 거다. 을이 정말 갑과의 계약대로 이행하느냐 마느냐를 감시하는 것은 갑의 의무 중 하나다.

‘이번 목표 중에는 결과물이 아니라 과정이 중요하니까.’

스태프들이 근로 계약대로 잘 일 하는지 그냥 나 혼자 가서 보기로 했다.

도사 전우치의 초반 촬영지는 단양이었다.

출퇴근용으로 타던 팬텀 대신 디스커버리를 타기로 했다. 차량 특유의 힘찬 엔진음과 함께 나는 촬영지에 대해 기대를 했다.

과연 최종훈 감독은 나와의 약속을 잘 지키고 있을까?

‘스태프들 즐겁게 일하고 있으면 좋을 텐데.’

대한민국의 영화계에 표준근로계약서라는 것이 처음 만들어진 시기는 2013년이다. 그 이전에는 애초에 표준근로계약서라는 개념 자체가 존재하지 않았다. 영화와 같은 예술 계통은 그런 규정이 적용되지 않는 분야니까.

묘한 이야기다. 사실 규칙적으로 일을 하기 어려운 예술가들의 경우는 이것이 적용되지 않는 게 맞다. 그리고 굳이 따지고 보면 밤샘 촬영이 필요할 때도 있고 한낮 촬영이 필요할 때도 있는 영화는 불규칙적인 예술 분야인 것도 맞다.

하지만 다른 예술들과는 달리 명확하게 스케줄을 구성할 수 있고, 그것을 활용해서 미리미리 촬영 시간 등을 기획할 수 있는 것이 영화 촬영이기도 하다.

그런데도 이 바닥은 늘 근로자에게 근로자의 당연한 보장을 해주질 않는다. 2013년에 처음으로 표준근로계약서가 도입되었는데, 이 계약서를 작성한 영화는 전체 영화 중에 5% 수준밖에 되지 않았을 정도다.

2014년에는 꽤 늘어서 23%.

2015년에는 36%.

그렇게 점차 확대되어 2017년에는 74%까지 되었다. 이것만 보면 엄청난 발전으로 보일 테지만, 여전히 함정이 존재했다. 계약서만 그렇게 작성했을 뿐, 실제 촬영 현장은 변하지 않은 곳이 넘쳐났다.

‘왜 계약서와 달리하느냐!’라고 상식적으로 반발하기 어려운 건, 흔히 들으면서도 짜증 나게 인정할 수밖에 없는 이유 때문이다.

“이 바닥 좁다, 이거지.”

꿈속 미래에는 그렇게 허울뿐인 계약서들이 판을 치는 세상이 왔었다.

‘내가 그나마 관심 가진 것도 2019년에 나온 패러사이트 덕분이었지.’

국제 영화제에서 상을 받고 세계적으로 인정받은 초대박 영화.

이 영화의 또 다른 유명세가 바로 표준근로계약서를 작성하고 그 기준에 맞춰서 영화 촬영을 했다는 것인데, 이게 참 헛웃음 나오는 지점이다. 상식적이며 정상적인 계약서를 지키려고 했다는 것. 당연해야 마땅한 그것이 오히려 대단하다고 광고 마케팅으로 사용됐을 만큼 영화계가 엉망진창이었다는 의미라서다.

더욱더 놀라운 점은 패러아시트가 실제로는 계약서를 철저하게 지켜서 화제가 된 것조차 아니라는 점이다. 최대한 계약서를 지키려 노력했다는 점. 정말로 그 지점만으로 찬양을 받았다는 사실에 연거푸 충격을 받은 일이 있었다.

그러니 내가 지금 최종훈 감독을 어떻게 100% 신뢰할 수 있겠는가?

“빌어먹을 관행. 너무나도 익숙한 관행!”

운전대를 내려치며 혼자 소리쳐보았다.

안다. 계약서를 충실하게 지키지 못하더라도 당장은 그의 잘못이기보다 그가 그것을 당연하게 느끼도록 만든 현재의 시스템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하지만, 내가 가서 지적하고 수정하라는 말을 했음에도 그대로 유지한다면 그때는 감독의 잘못이 될 것이다.

촬영장에 도착하니, 이곳저곳에서 스태프들이 꽤 바쁘게 촬영을 위한 세팅을 하고 있었다.

‘최대한 티 나지 않게 자연스럽게 섞여 들어가야지.’

오늘은 그러려고 일부러 이런 환경에 어울리는 청바지와 면티 그리고 모자까지 챙겨왔다. 그렇게 목표했던 대로 자연스럽게 그들의 사이에 합류했을 때, 누군가가 나를 불렀다.

“어이! 거기!”

‘응?’

“못 들은 척하냐? 야! 너!”

멈칫했다가 모자를 눌러쓰며 고개를 돌렸다. 암행을 왔으니 목소리도 어눌하게 바꿨다.

“그 거기가 혹시 저 인가요?”

“그래. 너. 거기에 너 말고 누가 있어?”

“아··· 그러네요······.”

“얼빠졌기는. 너, 어디 소속이냐?”

“그게··· 음··· 어······”

‘뭐라고 해야 하지?’

따지고 보면 GF 홀딩스 소속이라 할 수도 있긴 하지만, 솔직히 내가 GF의 속해 있다기보다는 GF가 내게 속해 있는 비율이 훨씬 높은 편이다.

머리를 긁적이는 내게 그가 말했다.

“답답한 새끼 같으니. 안 그래도 야근 금지니 뭐니 해서 시간도 없어 죽겠는데 엉뚱한 데서 뺑끼냐?”

“네?”

“됐고, 이거 좀 빨리 날러.”

“아! 네.”

기껏 정체를 숨기고 염탐하겠다고 왔는데, 이제 초장인 지금 내 정체를 다 드러내는 건 좀 무리수다. 스태프들의 상황도 알아볼 겸 왔으니 순순히 따라보기로 했다.

“이놈은 덩치만 컸지 뭐 제대로 옮기지도 못하네. 근육 같아 보이는 살덩이는 왜 달고 있어? 이런 놈은 대체 누가 데려온 거야?”

번쩍번쩍 들고 힘자랑을 해서 좋을 게 없다. 그래서 눈치껏 속도를 맞췄는데 여지없이 핀잔이 돌아왔다.

‘회장님 노릇을 오래 해서 그런가. 진짜 추억 돋네, 추억 돋아. 완전 군대 같아.’

나를 이렇게 막 대하는 사람을 만난 건 정말 오래간만이다. 그 시절에 탄 박스를 한 번에 세 개씩 옮기고 그랬던 기억이 새록새록 떠오른다. 지금은 그보다 부피는 배로 크면서 무게는 절반밖에 안 나갈 것 같은 상자를 나르고 있지만 말이다.

“이거도. 저거도 저쪽으로. 아! 새꺄! 빨리빨리!”

‘아니. 이 자식은 왜 서두르라면서 같이 안 해? 그렇게 빨리빨리 옮겨야 하면, 자기가 나서서 하나라도 더 옮겨야 능률이 오르는 거 아니냐?’

나이가 이미 지긋하게 들은 감독급들이 이러면 내가 말도 안 한다. 근데 딱 봐도 나보다도 어려 보이는 녀석이 무작정 반말을 찍찍해대면서 사람들을 부려먹을 생각만 하니 영 마음에 안 들었다.

하지만 어리고 건방진 이 녀석을 통해 확실히 알았다.

‘영화 제작 환경을 고치기 위해서 투자한 건데, 씨알도 안 먹혔구나. 영화의 막바지나 중반도 아니고 첫날부터 이따위라니!’

기성 감독에게 지나친 기대를 한 모양이다.

지켜보니 영화의 스태프라고 해서 다 같은 스태프들이 아니었다. 누군가는 감독의 직속 라인이고, 또 누군가는 그냥 일용계약직처럼 들어와서 일하는 스태프들이다. 당연히 지금 저렇게 소리 지르고 있는 놈은 감독의 직속 라인이고 나 같은 외부 인력들은 노예처럼 일하고 있었다.

‘나이가 벼슬은 아니다만, 그래도 무작정 저렇게 반말 찍찍하면서 소리를 지르면 기분 나쁘지. 어라? 그러고 보니 삼촌 취급은 기분 나쁘고 형은 좋아했었는데, 막상 어리게 취급하니 기분이 구린 거잖아. 이것도 내로남불 이려나?’

넘치는 힘으로 적당히 일하면서 주변 스태프들의 표정을 살폈다.

“빨리빨리!”

“아! 거기! 그거 라인 똑바로 안 할 거야!?”

“그거 선 관리 제대로 안 하면 큰일 난다고 했어!? 안 했어!?”

솔직히 저런 선 관리 이런 거로 소리를 지르는 건 인정한다. 사고가 날 수 있는 문제니까 그럴 수 있다. 그런데 그게 아니더라도 천천히 움직이는 꼬락서니를 못 보겠다는 듯 계속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던 이들도 여럿 있었다.

그렇게 일하다가 나는 전직 군인의 특기를 살려 슬며시 자리를 옮겼다.

이른바 짱 박히기다.

낙엽조차 조심하는 말년의 경험치를 살려서 스태프들의 눈을 피해 영화 촬영 현장을 관조하듯 넓게 지켜보았다.

“노동 환경은 작살나는데 여기 배경은 기깔나네. 갈대는 가을에나 보는 건 줄 알았는데, 이렇게 봄에도 있었구나.”

경치가 정말 좋다. 영화 관계자들은 이런 촬영장을 참 잘도 찾아낸다. 그러던 내 눈이 감독과 배우들에게 닿았다.

“말이 배가 고픈 건지 갈대숲에 들어오고부터는 갈대만 먹지 앞으로 가질 않아요.”

“하! 돼지 같은 녀석이 쳐 잡술 줄만 알지. 그게 다 오냐오냐했더니 그럽니다.”

“컷!”

날카롭게 끊고 최종훈 감독이 지적했다.

“그렇게 그냥 말만 하지 말고 말을 때리면서 하세요. 얘가 말이지만, 사실 초랭이라는 걸 알고 있잖아요? 그러니까 초랭이를 때린다고 생각하고 팍! 팍!”

“때려요? 얘를요?”

말을 때리라는 말에 정지원이 기겁했다.

“네. 때리세요.”

“그럼 어느 정도로 때려야 얘가 놀라지 않고···”

“퍽! 퍽! 소리가 나게 때려도 됩니다. 말은 그 정도에 신경도 안 써요.”

그의 말에 따라서 옆에 있던 말 사육사가 아무렇지도 않게 말을 때렸다. 멀찍이 있는 내게까지 들릴 정도였는데, 저건 누가 봐도 아플 정도의 세기였다.

‘이 시기니까 이렇게 촬영이 되지 10년만 지나 봐라. 그거 동물 학대로 바로 잡혀간다.’

한편, 가차 없는 사육사와는 달리 배우 정지원이나 임수경은 말을 때린다는 것에서 상당한 미안함을 보였다. 그러나 이들은 연기자이고 감독의 사인이 들어오면 연기를 충실히 해야 한다.

“말이 배가 고픈 건지. 갈대숲에 들어오고부터는 갈대만 먹지 앞으로 가질 않아요.”

“하. 돼지 같은 녀석이.”

퍽! 퍽!

“쳐 잡술 줄만 알지!”

퍽! 퍽!

“그게 다 오냐오냐했더니 그럽니다.”

“오케이! 컷!”

조금 전의 사육사와 비교하면 한참이나 작은 소리.

그런데도 정지원은 컷 사인이 떨어짐과 동시에 말에게 미안한 마음을 표현하며 말의 목을 끌어안았다.

“아이고~ 아프지? 안 아프나? 아니지 아프지? 미안.”

물론 말은 그가 그러거나 말거나 말을 하지 못했고 어쩌면 정말 사육사의 말처럼 하나도 안 아플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그저 주변에 널리고 널린 갈대에 관심을 더 보일 뿐이다.

“정지원을 실제로 보는 건 처음인데, 생각했던 것보다는 성격이 훨씬 착한가 보네.”

그냥 거짓으로 말을 위하는 느낌이 아니었다. 정말 미안해서 어쩔 줄을 모르는 것이 느껴진다.

바로 그때였다.

“착해? 그러는 너는 뭐냐?”

말과 동시에 예리한 감각으로 뭔가가 느껴졌다. 반사적으로 고개를 숙이자 내 뒤통수가 있던 자리로 무언가가 지나갔다.

“어쭈? 피해? 이 새끼가 짱 박혀서 혼자 영화 감상하고 앉았네! 야, 재밌냐? 재밌어? 어라? 계속 이제는 막아?”

자꾸 피하면 더 화만 돋울 것 같아서 손으로 가드 했는데, 그러자 이제는 대놓고 더 힘을 줘서 때린다. 조금 전까지 나를 부려먹던 젊은 그 녀석이었다.

‘이 새끼. 폭력이 익숙하네?’

이쯤 되니 내 표정도 굳어진다.

< 바꿔 간다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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