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999년 게임 스타트-459화 (459/577)

< 꼭 필요한 변화들 >

*

일반적으로 영화가 만들어질 때는 좋은 시나리오를 보고 그다음에 배우를 섭외한다. 그러면 배우의 힘으로 투자가 붙곤 한다.

반면에 내가 투자하는 영화는 그 순서를 바꿔도 된다.

“정말입니까? 이 영화에 무조건 투자를 하신다고요? 저희는 아직 아무도 캐스팅도 그 무엇도 하지 못했는데?”

쉽사리 믿지 못하는 도사 전우치의 최종훈 감독이 내게 되물었다.

“캐스팅이야 투자금만 확실하면 알아서 잘하시지 않겠습니까?”

“그거야 뭐, 그렇습니다만··· 세상에. 윤태식 회장님이 직접 선택하시다니··· 아! 정말 믿기 어렵습니다. 아니죠. 믿고 말겠습니다. 네! 캐스팅! 확실하게 해내겠습니다.”

그가 자문자답하며 의지를 보였다. 나는 최종훈 감독에게 손가락을 들었다.

“대신 딱 한 가지만큼은 확실하게 해주셨으면 합니다.”

“어떤 것 말씀입니까?”

“스태프들과의 근로계약입니다.”

“네? 근로요?”

“계약서에 근로 시간과 임금을 명확하게 고지하고 하루 여덟 시간만 촬영할 것. 꼭 촬영해야 할 때만 추가 촬영을 하고 이 역시 하루 최대 네 시간을 넘기지 말 것.”

“저기··· 회장님. 그렇게 촬영하면 제작비가 엄청나게 올라갑니다.”

제작비의 상승은 투자자들이 가장 싫어하는 말이다. 최종훈 감독은 ‘지금이야 이렇게 정의로운 척 말을 하지만 막상 제작비가 불어나면 싫어할 것 아니냐?’와 같은 뉘앙스를 조심스럽게 드러냈다.

“다 알고 하는 말입니다. 감독님은 이 영화 제작비에 얼마를 생각하고 계십니까?”

“100억··· 아니. 80억 정도를 예상합니다.”

“그 돈으로 판타지 영화를 어떻게 만듭니까? 제가 총 200억을 투자하고 예비비로 50억을 추가하겠습니다. 물론 마케팅 비용이 별개입니다.”

한국 영화의 수익은 100만 명당 30억 정도의 수익을 만들어낸다. 250억이면 800만 명의 관객을 동원하더라도 손해를 보는 엄청난 비용이다. 거기에 마케팅 비용이 따로 라면 최소 1,000만 명의 관객을 동원해야 본전치기가 가능하게 된다.

짧은 시간, 손익계산을 따져본 최종훈 감독은 한참 동안 입만 벌린 채 말을 하지 못했다. 뒤늦게 가까스로 정신을 수습하고는 조심스럽게 물었다.

“회장님께서는 자선사업을 하실 생각입니까?”

“일탈이라 해둡시다. 한국에서도 노동 착취 같은 것 없이 모두가 만족할만한 퀄리티의 영화를 제작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습니다. 물론, 수익을 전혀 포기하는 게 아니니 허투루 제작하시면 곤란합니다. 이익을 냈다는 선례가 있어야 이후에도 이와 같은 긍정적인 투자를 이어나갈 수 있을 테니까.”

“아무리 그래도 천만 영화의 책임감은······.”

버거움에 한숨을 내쉬지만, 지금 최종훈 감독이 생각하는 이익과 내가 생각하는 이익은 달랐다. 그는 관객의 숫자를 보고 나는 넷플렉스까지 따져보니 결코 자선사업이 아니었다.

“지금 감독님 앞에 있는 저는 대한민국 재계 1위 기업의 총수입니다. 제가 망할 투자를 생각 없이 하는 것으로 보이십니까?”

“죄송합니다.”

“돈에 대한 걱정은 제가 합니다. 감독님은 작품에 대해 걱정만 하시면 됩니다.”

초점이 흔들리는 눈을 쏘아보며 말했다.

“돈이 필요하면 필요한 만큼 다 지원이 될 겁니다. 250억보다 더 많은 돈이 필요하다? 투자할 겁니다. 다만 돈이 들어간 만큼의 변화와 퀄리티는 뽑아내셔야 합니다. 저의 사전에는 눈먼 돈은 존재하지 않아요.”

내 돈을 꿀꺽하려 들었다가는 절대로 가만두지 않을 것이야!

“그리고 최종훈 감독님이 그만한 작품을 만들어 낼 능력이 있는 분이라 생각해서 이렇게 찾아왔지 않습니까?”

“으··· 아··· 그게···”

“부디 제 기대를 저버리지 말아 주십시오.”

“물론입니다! 예! 제가 목숨 걸고 꼭 만들어내겠습니다!”

“가능하시겠습니까?”

“네! 꼭 만족하실만한 작품을 만들어오겠습니다.”

‘좋아. 동기부여가 확실하게 된 것 같군.’

도사 전우치를 선택한 이유는 그냥 재미있게 봤었기 때문만은 아니다. 이 영화야 어차피 단순한 오락 영화지만 이것이 마음에 드는 이유는 전형적인 한국식 판타지를 아주 잘 표현했기 때문이다.

‘우리나라는 왜 이리 전통을 못 써먹는지.’

일본과 서양에서는 어떻게든 한 줌의 인지도만 있어도 그것을 잘 포장하여 세계에 널리 알린다. 그런데 한국은 이상한 캐릭터나 도청에서 만들고 조형물을 세울 생각만 하지 제대로 된 캐릭터를 만들 줄을 몰랐다.

그 탓에 한국 국민들마저도 이제는 자국의 캐릭터보다 외국의 캐릭터가 익숙해진 상태다. 그래서 전우치를 골라 더욱 명성을 얻게 하는 것이 긍정적인 방향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전당포는 그냥 내가 재밌게 봐서 골랐고.’

물론, 두 작품 다 본래 역사에서 흑자를 낸 영화들이다. 하지만 근로조건을 달리 한 만큼 이번에는 적자를 낼 수도 있다. 많은 제작비는 필연적으로 관객수의 부담감으로 되돌아올 테니 말이다.

그래서 감독에게 거듭 강조했다.

“잊지 말아 주십시오. 투자금에 합당한 퀄리티. 오직 그것만 확실하게 해주신다면 다음 영화가 뭐가 됐든 제가 또 이렇게 지원해드릴 수 있습니다.”

“네! 회장님. 믿고 맡겨만 주십시오!”

어깨를 두드리자 최종훈 감독이 넙죽 인사했다. 지나친 태도가 아니다. 무려 200억짜리 영화가 아니던가. 감독들은 자신의 영화가 객석을 얼마나 채웠느냐도 중요하지만, 얼마짜리 영화까지 찍어보았는가도 굉장히 중요한 경력이 된다.

그에게 나는 하늘에서 난데없이 내려온 황금 동아줄일 것이다.

‘이 사람이 능력만 더 됐으면 500억을 투자했을 텐데, 그랬다가는 진짜 돈 낭비가 되겠지.’

예를 들기 민망할 정도지만, 국내 영화사에 굵직한 획을 그은 성냥팔이 소녀의 강림이 돈값 못한 영화이지 않던가. 내가 볼 때 최종훈 감독은 200억까지는 어떻게든 소화하지만, 그 너머부터는 자신이 뭘 찍어야 하는지도 모르게 될 것이다.

“아차. 그러고 보니까 조건이 하나 더 있었습니다.”

“네? 어떤 거죠?”

“주요 출연자들의 출연료는 맥시멈이 15억입니다. 그 이상은 용납 못 합니다.”

“주요 출연자라고 하시면 주연 배우들 말이신지요?”

“맞습니다. 포스터에 이름 굵게 표현할 사람들.”

“아! 네! 당연합니다! 그 이상은 나가지 않을 겁니다.”

“그럼 나가서 일 보세요.”

“네! 회장님!”

전우치를 마무리한 뒤 전당포의 이경범 감독과 계약을 이어서 실행했다. 과정은 전우치 때와 별반 차이가 없었다. 사실 제아무리 담력이 있는 인물이라고 해도 그룹 회장이 경호원들과 함께 나타나서 투자한다고 하면 누구라도 공손해질 것이다.

‘거부할 수 없는 제안을 하는데 괜한 쇠고집을 내세워서 거절할 리도 없고.’

그렇게 계획대로 투자를 마무리 지었다.

*

세상사 도깨비방망이 휘두르듯 ‘뚝딱’ 이뤄지는 게 어디 있으랴.

게임 제작과 마찬가지로 영화 역시 시간이 필요하기 마련! 사회에 긍정적인 변화를 일으키려는 의도가 제대로 이뤄지는지, 주목은 받는지를 느끼기 위해서는 기다림의 시간이 필요했다.

‘그사이 내 기억에는 있지만, 시나리오는 돌지 않는 작품을 찾아야 하는데··· 그 감독을 어디서 만날 수 있을까? 생김새는 아는데 이름이 떠오르지 않으니 이거 참 답답하네. 차라리 귀찮으니까 밀린 게임을 해버려?’

과거의 나였다면 무조건 게임을 선택했을 것이다. 좋아하기도 했고 가장 저렴하면서도 즐겁게 즐길 수 있는 오락거리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하던 일은 마저 끝내고 싶다.

‘영화인들이 모일만한 곳에 가면 찾아낼 수 있겠지.’

생각을 마치고 김유천 비서실장에게 물었다.

“김 실장님. 혹시 영화와 관련된 행사 같은 거 없겠습니까?”

“3월이라 딱히 큰 행사는 없습니다. 고작해야 단편 영화제 하나 정도만이고요.”

“오! 좋네요. 갑시다.”

“네?”

“그 영화제에 가자고요.”

빨리 앞장서라는 제스쳐를 취했지만, 김유천 실장은 요지부동이다. 왜 그러냐며 쳐다보자 그가 말했다.

“회장님. 이틀 후입니다.”

“······.”

쳇.

*

이틀 뒤, 찾아간 단편 영화제는 틈새시장을 노리고 진행하는 만큼 레드카펫조차 없이 조촐했다. 그런데 재미있게도 대기업의 지원을 나름 받고 있었고 특히 포토월에 가장 많은 공간을 차지하고 있는 것은 GF의 로고였다.

“우리가 이런 행사도 지원했습니까?”

“회장님이 생각하시는 것보다 한국 영화계는 회장님께 많은 손을 벌리고 있습니다.”

GF는 예전이나 지금이나 영화에 많은 투자를 하고 또 영화로 꽤 많은 돈을 벌어들이고 있다. 그러나 그 영화 수익의 대부분은 미국에서 벌어들이는 것이고 한국에서는 사실 수익이 났는지 손해가 났는지 워낙 소소한 금액이라 이제는 보고도 따로 받지 않았다.

‘이것도 그런 과정 중에 모르고 있던 것 중 하나려나.’

이런저런 생각을 하면서 주변을 둘러보는데, 한 곳에 유난히 많은 사람이 몰려 있었다.

“연예인이네요? 신기하게?”

“회장님도 옆집에 알버트 다우니 주니어가 살고 있으신 분이시고 당장 선글라스만 벗어도 상당한 소란을 일으키실 수 있으십니다. 혹시 개인적인 팬이시라면 제가 불러서 사인을 내놓으라고 할까요?”

“워~워. 붙잡아 와서 강제로 그런 거 받지 마세요. 딱히 팬이라서가 아니라 이런 조촐한 행사에 연예인이 있는 게 신기한 거니까요.”

미니 시리즈의 주 조연으로 자주 얼굴을 본 연예인이 있어서 사람들의 이목이 쏠린 것이었다. 그의 등장으로 대중의 시선이 몰렸을 때, 행사 관계자 한 명이 나를 발견하고는 부리나케 달려왔다.

“아이고! 회장님! 어떻게 이런 누추한 곳에 귀하신 분께서 직접 참여해주셨습니까. 실로 가문의 영광입니다.”

‘이 대사를 어디서 되게 많이 본 것 같은데.’

중년의 진행자는 선글라스를 왜 썼냐 싶게 단박에 나를 알아차렸다.

“자자. 이쪽으로 오시죠. 자리가 미리 마련되어 있으니 안내해드리겠습니다.”

“제가 오는 줄도 몰랐는데 자리가 미리 마련이 되어 있다고요?”

“저희 행사 자체가 회장님의 지원이 아니면 진행이 안 되는 행사 아닙니까? 오시든 안 오시든 회장님의 자리는 매년 따로 챙겨두고 있었습니다. 저희 영화제가 아니라고 하더라도 대부분 국내의 단편 영화제에는 회장님의 자리가 필수로 다 존재할 겁니다. 회장님이시야말로 한국 단편 영화계의 주춧돌이자 기둥이시니까요.”

충격적이다.

‘세상에. 대한민국 단편 영화제란 영화제는 다 지원하는 거였어? 그런데 왜 한국 영화계에는 변화가 없던 거지? 내 귀에 들릴 만한 영화가 아직까지 한 편도 나왔고?’

원래의 역사보다 영화계에 도는 투자금이 훨씬 커졌는데 물에 소금 가마니를 쏟은 것처럼 흔적도 없이 사라진 것 같다.

안내를 따라가니 영화제 가장 앞자리가 정말 비어 있었다. 내 자리를 중심으로 옆과 뒷자리까지 텅텅 비어서 정말 나를 위한 자리가 마련된 셈이다.

“영화제는 30분 정도 후에 시작될 예정입니다.”

‘이러다가 영화제가 시작하면 그만한 곤혹이 없겠어.’

꼼짝없이 끝날 때까지 자리를 지켜야 할 텐데 그 지겨운 걸 언제 다 보고 있냔 말이다. 내 참여로 영화제는 빛이 날지 모르나 내 시간은 그만큼 날아가고 만다. 그렇게 초조한 마음으로 불편을 무릅쓰고 주변을 둘러볼 무렵, 반가운 얼굴을 발견했다.

“저 사람이다.”

“네? 어떤 사람이요?”

“김 실장님. 저기 안경 쓴 사람 보이죠?”

“안경 쓴 사람이 너무 많습니다.”

“파란 셔츠에 안경 쓴 저 사람 말입니다.”

“아! 발견했습니다. 그런데 저 사람이 누구죠? 저는 잘 모르겠습니다만.”

“우리가 오늘 여기에 온 이유입니다.”

“그냥 연락해서 사무실로 오라고 말씀하시면 되지 않습니까?”

‘이름이 생각 안 나서 그래.’

이미 데뷔한 감독이면 그 작품으로 찾을 텐데 그는 아직 데뷔도 안 한 감독이고 예전에 그냥 사진으로 봤던 얼굴만 기억하고 있었다. 그래서 못 찾거나 영화제에 몇 번 더 다녀야 할 줄 알았는데 단박에 만난 걸 보면 확실히 내가 운이 좋긴 좋은가 보다.

찾던 사람을 찾은 이상 계속 이 자리에서 불편하게 두리번거리고 있을 이유가 없어졌다.

“갑시다.”

이름도 기억나지 않는 신인 감독.

그는 여기저기 인사하러 다니느라 바쁜 모양이다. 어떻게든 가까이 가면 또 어딘가로 자꾸만 이동해서 10여 분이나 쫓아가서야 드디어 붙잡을 수 있었다.

“잠시만 이야기 좀 했으면 싶습니다.”

“죄송하지만 제가 지금 좀 바빠서요.”

“대충 보아하니 뭐로 바쁜지는 알겠는데, 지금 인사 다니는 그 어떤 사람보다 저랑 이야기하시는 게 좋을 겁니다.”

영화 말고는 관심도 없는지, 근래에 들어서 사진이 방방곡곡에 뿌려진 내 얼굴을 보고도 누군지 못 알아본다.

“누구신데 자꾸 바쁜 사람을 붙잡는 건데요?”

“이런 사람입니다.”

보다보다 답답했는지, 김유천 실장이 그 사람의 손 위에 명함을 올려준다.

「GF 그룹 회장 윤태식」

명함을 받아서 확인한 그는 멍청한 표정으로 명함과 나를 번갈아서 확인하고는 화들짝 놀라며 한 발짝 뒷걸음마저 친다.

“저를요? 찾으시는 사람이 저 맞으십니까?”

“네. 맞습니다.”

“아니. 저를 대체 왜요?”

“영화 하나를 맡기고 싶어서요. 뭐 처음 보는 사람이 이런 말을 하면 사기꾼 같겠지만, 아시다시피 제가 이런 거로 사기 칠 그런 사람은 아니지 않습니까?”

“그야 그런데요······.”

조용한 곳으로 자리를 옮겼지만, 영화제의 시작까지 많은 시간이 있지 않았기에 본론만 빠르게 이야기하기로 했다.

“혹시 지금 쓰고 계신 시나리오 있으십니까?”

“시나리오요?”

“영화를 만들려면 시나리오가 있어야 하니까.”

“제가 원래 각본가라서 사실 시나리오가 완성된 게 있기는 한데···”

“제목이 뭐죠?”

“그게요. ‘반가워 귀신아’라고······.”

< 꼭 필요한 변화들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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