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999년 게임 스타트-454화 (454/577)

< 균형감각 >

*

데스 아너드의 새로운 시나리오를 완성한 후, 아나킨 스튜디오는 게임을 완성하기 위해 개발에 박차를 가했다.

캐릭터들의 대사 조금만 고쳤다고 했지만, 사실 캐릭터들을 살아있게 만들기 위해서는 그에 필요한 장면들이 더 추가되어야만 했고 이는 곧 볼륨의 증가로 이어졌다. 결국 그냥 대사 몇 줄이 바뀐 것과는 완전히 다르게 각색된 셈이다.

[저는 그동안 대형 배급사들이 저희 게임을 외면한 이유를 단순히 매니악하기 때문이라고만 생각했었습니다. 그런데 이제 보니 저희의 시나리오 기획이 영 부족했던 거였습니다.]

[그렇게 말씀하시기에는 시나리오를 수정하신 분들이 워낙 어마어마하신 분들이라서 말이죠.]

2009년 GF에서 출시하는 게임 중 가장 기대작이라 볼 수 있는 게임인 만큼 나 역시, 개발 기간 내내 그들의 스튜디오에서 테스트를 함께 진행했다.

[레이첼 맥클레인 작가님 덕분에 제가 모르던 저의 단점들을 고스란히 알게 되었습니다. 정말 소중한 기회가 되었어요.]

데스 아너드의 전반적인 스토리를 작성한 사람이 바로 내 앞에 있는 미카엘이다. 그런 사람이 자신의 자존심을 보이기보다 레이첼 작가에게 존경심을 보이고 있었다. 이를 보고 나는 그를 높게 평가하게 되었다.

대다수 사람이 잘못을 지적받으면 그것이 제아무리 합리적이고 이유가 충분해도 선뜻 받아들이지 않는다. 하물며 자존심과 에고가 높기로 유명한 창작자는 오죽하랴. 레이첼이라는 명성에 오히려 반감을 품고 쓸데없는 오기를 부릴 가능성도 충분히 있었다.

‘나이를 먹으면 먹을수록 쇠심줄처럼 질겨지는 게 고집이거든.’

미카엘이라는 인물은 생각보다 컸다.

[회장님. 그런데 질문 하나만 드려도 되겠습니까?]

[네. 하세요.]

[잠입과 암살에 관한 게임도 사실 레드 오션이라면 레드 오션이라 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이런 장르에 선뜻 투자해주신 이유가 뭡니까? 게다가 저희 회사는 회장님이 눈여겨보실 만큼의 성과도 이룬 적이 없었는데 말입니다.]

[성공할 것 같아서 그랬습니다. 레드 오션이건, 과거가 어찌 됐건 간에 말이지요.]

이런 질문을 자주 받아서 곧잘 대응하게 된 지 오래다.

그리고 2009년 3월.

한국으로는 봄이 찾아오는 계절.

하지만 이름만 봄일 뿐, 여전히 싸늘한 바람이 부는 날에 데스 아너드를 출시했다.

【데들리 스페이스로 바이로 해저드를 무너뜨린 GF. 이번에는 데스 아너드로 어쎄신 크리스에 도전장을 내밀다.】

【지금까지 이런 게임은 없었다. 마법과 검술 그리고 총까지 남자들의 모든 로망을 한곳에 모은 암살 게임 데스 아너드.】

【무작정 죽이는 게임의 시대는 갔다. 이제는 게임이 당신에게 직접 물어올 것이다.】

【당신은 죽음의 사신이 될 것인가? 명예로운 기사가 될 것인가?】

사실 플레이어의 선택이 분기점을 만드는 형태의 게임은 매우 흔하다. 적 또는 인질을 살해할 것인가 풀어줄 것인가, 도덕적인 선택을 할 것인지 실리적인 선택을 할 것인지 등등 선택의 갈림길마다 새로운 분기가 탄생하고 진행 방향이 변화하는 형태는 오래전부터 있어 왔다.

그런데 지금과 같은 기사들이 나오고 유난스럽게 반응하는 이유는 간단하다. 누가 봐도 데스 아너드는 암살게임이고 미션 역시 암살하기 좋게 잘 만들어 놨는데 ‘암살을 하지 마!’라고 강권하기 때문이다.

‘진짜 웃기는 게임이지.’

플레이어들이 인터넷에 보이는 반응도 기자들과 마찬가지였다.

- 해보지도 않고 이런 말을 하는 게 좀 그렇긴 한데, 이거 암살 게임이잖아. 근데 암살을 할 거냐 말 거냐를 선택하라니? :-c 이건 좀 이상한 거 아니냐?

- GF가 지금까지 실패한 적이 없다 보니까 이제는 무조건 남들과 다른 특이한 게임을 만들어보겠다고 난리 치는 거라고 봄. :(

- 그보다 이거 배경 봤냐? :Q

- 8-O 암살하는 게임 배경이 저게 뭐야? 파스텔 톤이라니! 그래픽도 진흙 뭉쳐놓은 느낌이고. 이게 말이나 되는 감성인가?

- 왜? 나는 파스텔 톤 배경이 예뻐서 마음에 드는데. |-D

- 암살 게임이라고 드래곤 소울마냥 우중충하게 만들 필요는 없음. 그거 다 고정관념임. :*)

- 떠들 시간에 데모 버전이나 해보고 와봐. 일단 해보면 그런 말들 안 나올 거야.

- 진짜 재미있음. :^D

많은 글이 ‘도대체 이런 게임을 무슨 생각으로 만들었냐’부터 ‘과거 데들리 스페이스가 바이로 해저드의 표절작이었던 것처럼 데스 아너드는 어쎄신 크리스의 표절작!’이라고 공격하고 ‘이런 게임은 망할 게 분명해.’라는 냉소적인 의견까지 여러 가지가 있었다.

이런 글들을 보면 재밌다는 감정만 든다.

‘사람들은 영웅의 탄생만큼이나 영웅의 몰락을 기대한다더니. 이제까지 실패한 게 없다는 소리를 하면서 정작 내가 게임을 출시하면 늘 망할 거라고 고사 지내는 사람들이 넘친단 말이야.’

촌극이다. 이 역시 망하지 않는다는 확신이 있기에 누릴 수 있는 여유이기도 할 것이다.

*

GF의 G 크로스가 출시되고 판매량 곡선이 무섭게 치솟은 계기는 세 번이다.

첫 번째는 워쳐1의 출시.

두 번째는 데들리 스페이스.

세 번째가 데스 아너드가 나온 바로 지금이다.

“이럴 줄 알고 우리는 발 빠르게 움직였지.”

‘없어서 못 판다’라는 표현이 거짓이 아닌 상황에서는 신속하게 움직이는 게 상책 아니던가. 잽싸게 구매한 이들 중에는 미국 콘솔 게임 커뮤니티들 중 최고라고 자부하는 LCC(LA 콘솔 클럽)도 있었다.

[전에는 이렇게 모이려면 TV도 설치해야 하고 정신없었는데. G 크로스는 그냥 콘솔만 가져오면 되니까 너무 편해.]

이들 회원은 게임이 발매되기 무섭게 데스 아너드를 구입해서 한자리에 모여 있었다.

[이러다가 우리 또 이름 바꾸는 거 아냐?]

본래 이 클럽의 이름은 LGC(LA 게임 스테이션 클럽)였다. ‘우리가 인정하는 게임은 오직 게임 스테이션에만 있다!’라는 기치 아래 외골수적인 면모마저 보인 과거가 있으나 이는 혜성처럼 등장한 GF의 신과 같이를 통해 꺾였다.

그때 눈물을 머금고 ZBox를 추가하면서 게임 스테이션 클럽은 콘솔 클럽으로 이름을 변경한 것이다. 그리고 이제는 회원들 전원이 G 크로스만 들고 모이니 더 이상 콘솔 클럽이라는 명칭을 사용하는 것이 의미가 없어진 셈이 되었다.

[우리가 어쩌다 이렇게 됐지? 우린 정통파였다고. 원조 말이야.]

[이게 다 GF 때문이야. 그놈들이 매번 우리 이름을 바꾸도록 만들고 있어.]

[그렇다고 게임을 재미없게 만들라 할 수는 없잖아. 망할 놈이 귀염둥이 새끼들 같으니. 하나라도 재미가 없어야 욕을 시원하게 해줄 텐데!]

[미친 일이야. 전자오락은 우리 미국이 세계 종주국이잖아. 근데 왜 동양 놈들이 이렇게 끝내주는 걸 자꾸 만들지? 위대한 미국은 어디 가고? 일본에 이어서 한국한테까지 또 밀려나는 건가?]

[밀려나긴 뭐가 밀려나? ZBox는 지금까지 3,000만대를 팔았어! 그에 반해 G 크로스는 아직 1,000만대도 못 팔았다고!]

[맞아. 아직은 한참 멀어지.]

[암! 그렇고말고!]

고개를 끄덕이고 있으면서도 그들은 잘 알고 있는 사실을 결코 입 밖으로 내뱉지 않았다. 출시일이 다를 뿐이고 지금 같은 속도면 추월당하기에 십상이라는 사실이었다.

[그나저나 오랜만이라서 그런가? 예전 생각이 문득문득 나네.]

[하긴 지금은 매번 게임이 나올 때마다 찾아가는데, 그때는 게임 스테이션에 못 나가니까 ZBox에나 출시하는 게임이라고 했었지.]

[좋아지기는 했어. 접근성이 높아진 덕분에 우리들도 숫자가 늘었잖아. 초창기에는 게임 스테이션 클럽으로 뭉치면 고작 예닐곱이 전부였는데 지금은··· 가만, 다들 몇 명이지? 하나··· 둘··· 셋··· 여섯··· 열둘···열여섯···]

[오우! 20명도 넘어!]

대인원이 모여서 우글거리며 게임을 즐기니 수군수군 거리며 나누는 대화들도 제각각이었다.

[자! 자! 사적인 대화는 게임을 다 확인한 이후에 하고 일단 오늘은 게임을 제대로 해보도록 합시다. 오늘 모여서 이 게임을 하는 목적은 ‘과연 데스 아너드라는 게임이 제대로 된 평가를 받고 있는 것인가.’를 냉철하게 비평하는 것입니다.]

누군가를 칭찬한다는 건 상대적으로 뒤처지는 다른 회사들을 냉소적으로 보게 만든다. 자국에 대한 자부심이 넘칠 수록 그 쓴맛은 더해갈 뿐이니 이쯤에서 GF를 칭찬하는 일은 멈추기로 했다. 자신들은 플레이어이니 회사는 집어치우고 게임에만 주목하면 된다.

[돈의 노예에 불과한 언론보다는 미국에서 가장 인지도가 높은 우리 커뮤니티가 몸소 평가하고 이 사실을 증명할 테니 다들 확실하게 플레이해 주시기 바랍니다.]

[걱정할 필요 없습니다!]

[게임성! 오직 작품성!]

[민망하리만큼 떠들어대는 내용이 정확한지 확실하게 봅시다!]

클럽원들이 저마다의 각오와 함께 게임을 플레이했다.

언제부터인지 GF의 상징은 역동적이면서도 유려한 그래픽과 연출력이 되었다. 데스 아너드 역시 몰입감 넘치는 영상과 귀를 사로잡는 깊은 목소리로가 인상적이었다.

「새로운 이야기가 시작될 때가 된 것 같군.」

「삶과 죽음, 진실과 거짓, 선과 악, 신과 악마.」

「전혀 다른 곳에 있을 것 같은 그것들은 사실 한자리에 있지. 사실 이제는 그 두 가지다 정말 다른 것인지도 잘 모르겠어. 때때로 진실은 네가 원하는 그것이 진실이 되는 법이거든.」

「챕터 1. 꽁지깃새의 둥지 강.」

영상미를 통해 느껴지는 감정은 묵직함이다.

[이거 기사랑 다른데?]

[파스텔톤이니 뭐니 하길래 상큼 발랄할 줄 알았는데, 뭐가 이렇게 무거워?]

다운월에 창궐한 전염병을 해결하기 위해 제국 전역을 돌아다니며 치료제를 찾던 주인공. 게임은 주인공이 수집한 자료들을 모아서 여왕과 공주가 있는 다운월의 탑으로 돌아오는 장면에서부터 시작했다.

[숨바꼭질?]

[이거 그거네. 은신 튜토리얼.]

[꼭 해야 하나? 어차피 안 해도 이 정도는 눈치로 다 알잖아.]

[그렇긴 한데 어차피 초반에 확실하게 손에 익혀두는 것도 나쁘지는 않지.]

게임을 즐기는 사람들이 많은 만큼이나 게임을 즐기는 방식도 다양하다. 어떤 사람은 지문 하나 장면 하나 놓치지 않고 모든 것을 확인하는 반면에 다른 이들은 오직 메인 퀘스트와 메인 스토리의 클리어에만 몰두한다.

「세상이 어딘지 이상하게 돌아가고 있어요.」

「에밀리를 찾아서 지켜줘요. 이제는 당신밖에는 남은 게 없는 것 같아요.」

「아아··· 당신께는 미안할 뿐이에요.」

이 자리에서 20명이 넘는 게이머가 있는 만큼 그들은 각자의 방식대로 플레이했고 저마다의 화면은 다른 속도감으로 진행되는 중이었다.

[뭐야? 게임 시작한 지 얼마나 됐다고, 여왕이 죽어?]

[근데 이런 진흙 같은 그래픽으로 이 장면이 이렇게 짠하게 보일 수 있는 거야?]

[여왕이 뭐 하는 사람인지도 모르는데, 이상하게 안타깝네.]

[멍청하기는. 바보냐? 여왕인데 뭐 하는 사람인지 왜 몰라? 여왕이 여왕 하는 사람이지.]

[빌어먹을. 그래. 너는 참 똑똑해서 좋으시겠다?]

[오우. 너도 괜찮은 놈이야. 내가 똑똑한 걸 바로 알아보다니. 사립고 졸업한 남자가 바로 나거든.]

[병신도 성적이 좋을 수 있는 거구나.]

[뭐, 이 새끼야?]

시차를 두고 화면이 뒤바뀌었다.

「이놈! 보는 눈이 없는 틈을 타서 이런 짓을 하다니!」

「저자가 여왕 폐하의 시해범이다. 바로 체포해!」

뒤이어 회색의 안개 사이로 검푸른 색의 「Death Honored」 라는 글귀가 떠올랐다.

[이 게임 이름이 ‘죽음 혹은 명예’가 아니라 ‘죽어버린 명예’라는 건가?]

[아하!]

[그렇군. 살상과 비살상이라길래 죽음과 명예라는 형태로 생각했거든.]

[듣고보니 그럴싸해. 방금 그 사건으로 제국 호국경의 명예가 죽어버린 거구나!]

원래 드라마를 많이 보는 사람들은 이후의 내용을 보지 않아도 일반적인 드라마의 진행 방향을 예측하는 법이고, 영화를 자주 보는 사람들은 영화의 다음 장면을 예측할 수 있다.

게임 역시 마찬가지다. 게임을 많이 플레이한 이라면 당연히 지금의 장면을 보면서 다음 장면을 예측할 수 있었다.

[역시 감옥 탈출 씬으로 시작이군.]

[근데 이거 연출이 흥미로워.]

[당연히 조력자가 처음에 나와서 주저리주저리 떠들 줄 알았는데, 고작 몰래 들여온 편지라니······.]

[깔끔해. 군더더기가 없어.]

그때 편지를 이리저리 살피고 감옥 내부를 면밀하게 조사하던 이는 옆에서 들리는 비명을 들었다.

[으아악! 저거··· 저거 뭐야?]

[왜 뭐가?]

건물 위에 있는 파이프들을 타고 탈출하는 씬이었다. 그 장면에서 경비병과 쥐 떼가 마주하게 되는데 이 쥐들이 무려 두 명의 경비병들을 순식간에 덮쳐서 갉아먹어버렸다.

[쥐가 많지도 않은데 사람을 잡아먹고 있어.]

[초반에 역병이니 어쩌니 했었지? 그렇다면 이 세계관에서는 쥐가 유저를 공격하는 존재라는 의미군.]

입으로는 불평거리를 쏟아내고 있지만 그들은 수백 개의 게임을 플레이한 골수 게이머들이다. 단순히 옆의 장면을 보고 ‘와우!’ ‘대단해!’와 같은 리액션을 보이는 것이 아니라 스토리를 짐작하듯 게임의 특성 요소와 암시를 읽어냈다.

[게임 분위기를 보면 현대는 확실하게 아니지?]

[근데 쥐가 동물이 아니라 잡거나 피해야 하는 몬스터인데··· 이거, 암살 게임이 아니라 오히려 좀비물 아닌가?]

[이런 배경에서 좀비라면 확실히 으스스하긴 해. 게다가 긴장감의 균형을 묘하게 잡았잖아?]

[오히려 경비병은 그런가 보다 하면서 처리하는데, 쥐들을 어떻게 할 수가 없어. 역병 쪽에 무게감을 준다 이거군.]

[탈출 루트 찾는 것들은 익숙하면서도 새롭고.]

방향을 잡고 장르를 재정립했다. 그래야 기대감을 갖고 놀랄 준비를 제대로 할 수 있다.

[아! 나 지금 등에 소름 돋았잖아.]

[너 거기지? 문의 그 밸브.]

[맞아. 손잡이인지 그거를 돌리는데 쥐들이··· 어휴. 땀나는 거 봐.]

< 균형감각 > 끝

ⓒ (4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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