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균형감각 >
대번에 핵심을 짚어 주었다.
[지금의 데스 아너드에서는 캐릭터들이 전혀 살아있지 않아요. 저의 눈에는 개발하시는 분들이라 그런지 주어진 명령어에 따라서 원하는 반응만 하는 로봇, 또는 구조물로 여기는 것처럼 보일 정도죠.]
[세계관은 유기적이지만 사건들이 유동적이지는 않은 것 역시 같은 원인 탓에 귀결된 현상이랍니다.]
[젊은 회장님이 더 쉽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이런 예를 드는 편이 나을 듯싶군요. 데스 아너드에는 신이 있죠? 이방인이라는 존재가?]
[네.]
이방인.
일반적으로 우리가 이길 수 없는 대상에게도 이기고, 죽어야 할 상황에서도 살아남는 주인공을 보면서 그것을 주인공 버프라고 부르는데, 이 존재는 그런 주인공 버프를 현실화시키는 존재다.
이방인은 게임에서 주인공이 처음 반역자로 몰린 후 감옥을 탈출했을 때 처음 등장한다. 그는 아무런 이유도 목적도 말하지 않은 채 대가 없이 초능력을 선사한다.
[목적이 없는 신은 매력적이죠. 아주 좋아요. 그런데 정말 아무런 목적이 없을까요?]
사실 게임을 해보면 이 신에게 아무런 목적이 없다는 생각을 절대로 할 수 없다. 이방인은 주인공이 어떤 선택을 하더라도 딱히 유감을 표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더 좋아하는 것과 싫어하는 선택지는 분명히 존재했다.
감정적인 태도.
호불호는 성향과 목적에 밀접한 관련이 있다.
[이 게임에서 이방인이라는 신이 존재하는 이유가 뭘까요?]
‘주인공만 초능력을 사용하는 것에 대한 정당성 아닌가?’
바로 떠오른 대답이지만, 패티샤에게 이런 대답을 하면 마이너스 점수를 받을 것만 같았다. 그렇기에 대답하지 않고 우선 생각하는데 먼저 그녀가 알려주었다.
[이방인은 데스 아너드의 스토리에서 한발 물러선 거리에 있어요. 주인공이 무엇을 하든 간에 그저 지켜보는 역할을 하죠. 주인공보다 먼저 선택했던 자들을 죽이는 그때에도 말이에요.]
[그게 중요한 겁니까?]
[중요하죠. 이 게임이 가지고 있는 주제와 가장 밀접한 존재니까.]
[이야기에 별다른 중심도 되지 않는 캐릭터가 이 게임의 주제와 가장 밀접하다니요?]
[소설이나 영화는 작가가 만들어요. 관객은 완성품이라는 형태의 만들어진 이야기를 그저 읽고 시청할 수밖에 없죠. 독자, 청자, 관객의 위치에서 그들은 어떠한 상상을 하고 감상을 느끼건 소설의 스토리에 조금도 변화를 줄 수 없어요.]
[그러나 데스 아너드는 달라요. 주인공을 활용하는 사람인 플레이어의 의지가 어느 쪽에 닿아 있느냐에 따라서 전혀 다른 두 사람이 완성되는 겁니다.]
[지금까지는 게임에 관심이 없어서 몰랐는데, 이렇게 확인해보니 알겠더군요. 게임이라는 것은 지금까지 존재하는 그 어떤 매체보다 스토리텔링에 있어서 소비자와 눈을 맞춰야 하는 분야라는 걸요.]
[참여하며 만들어가는 이야기이기 때문이죠.]
굉장히 철학적인 사고가 동반된 대화 같지만, 저 소감에 대한 답변은 확실하게 해줄 수 있었다. 바로 인류 기술의 발전을 통해서 가장 최근에 만들어진 매체이기 때문에 복합적이라는 것이었다.
[다시 돌아와서. 이 신은 어떠한 목적을 가지고 주인공에게 초능력을 주었을까요?]
[어떻게 사용하는지 궁금해서가 아닐까요?]
[그렇다면 왜 궁금할까요? 왜 하필 주인공이죠?]
[글쎄요······.]
세 여성의 물음에 나는 뺨을 긁적였다.
[맞아요. 젊은 회장님의 대답이 정답이죠. 그래서 이 이야기가 재미없는 거랍니다.]
이번의 원포인트 레슨 강사는 릴리였다.
[주인공이 배신을 당해요. 왜? 그냥 권력 때문에?]
다시 물었다.
[주인공이 초능력을 얻어요. 왜? 그냥 이유가 없어서?]
‘아!’
[모든 과정에서 왜라는 물음의 울림이 없다시피 해요.]
정답을 듣고서 이해했다.
[스토리를 구상하신 분은 왜라는 물음의 대답을 알고 있을 거예요. 그런데 이야기라는 건 화자가 아니라 청자의 입장에서 왜라는 의문부호를 해갈시켜줘야 해요. 즉, 물음표의 이유를 알아채지 못하면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겁니다.]
[그래서 캐릭터가 부재한 거군요.]
[맞아요. 그러니 일단은 이야기에 맞춰서 캐릭터를 만들고 그 캐릭터들이 왜 이런 행동을 했느냐를 맞춰주면 같은 물줄기라도 생명력을 얻어서 흘러갈 겁니다. 더 이상 왜 이런 이야기가 되었는지 궁금해할 필요가 없게 되는 까닭이죠.]
이들의 스토리 강연은 정답을 바로 알려주는 방식이 아니었다. 이들은 나에게 자신이 생각하고 있는 답이 무엇인지, 이 캐릭터들을 어떻게 바꿀 것인지에 대해서는 단 한마디도 해주지 않았다.
그러나 지금의 이야기만으로도 데스 아너드가 한 단계 발전할 수 있을 거라는 확신이 생기게 해주었다. 그리고 이 기대는 충분히 보상받았다.
*
[대장! 대장~!]
[왜? 또?]
[이거! 이거! 시나리오 봤어요?]
본래 계획은 넷플렉스에 소속된 하나의 팀으로 기획했던 것이었는데, 어떻게 하다보니 GF 그룹의 새로운 자회사가 만들어졌다. 레이첼 맥클레인을 대표로 하는 작가들만의 전문 회사다.
레이첼의 R.
릴리의 l.
패티샤의 P.
그래서 RlP다. 원래는 알엘피여야 하는데 일부러 엘을 소문자로 사용함으로써 무언가를 찢거나 뜯어낼 때 사용하는 rip의 느낌을 줬다나 뭐라나 하는데, 거장들의 의도라니 나는 ‘넵’하고 따르기로 했다.
‘전문가한테 맡기는 게 최고야.’
그녀들이 툭하면 시나리오를 찢고 대본을 찢어댈 계획인지 뭔지 신경 쓸 게 아니다. 중요한 건, 이렇게 똘똘 뭉친 노년의 친구 모임은 달랑 며칠 지나지 않아서 새로운 시나리오와 대본을 뚝딱 완성하여 내게 주었다는 것이 관건일 뿐이다.
그리고 이를 읽은 에일리가 놀라움에 폴짝폴짝 뛴다는 사실이 경악할 일이었다.
‘게임이 소설이랑은 다르게 쉬웠나? 소설 한 권을 쓰는 데에는 몇 년씩 걸리는 양반들이 이건 뭐 라면 끓이듯이 해치워버리니.’
한국에서야 판타지 소설이 1년에 한 권 나오는 수준이면 엄청 느린 연재지만, 미국은 1년에 한 권 연재면 무난하게 연재되는 수준이다. 오죽하면 그 유명한 소설인 황좌의 게임도 연재를 시작하고 10년이 더 되었는데 지금까지 5권밖에 출간되지 않았던가.
물론, 그 소설 한 권 분량이 국내 판타지 소설 세 권 분량이기는 하지만 말이다.
아무튼, 이 양반들이 한국과 비교해서 훨씬 탄탄한 구성이나 세계관을 짜는 능력이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이렇게 글을 빨리빨리 써서 주는 스타일이 아닌데 어쩐 일인지 기대 이상으로 빠르게 스토리 수정을 완료해 주었고 그것이 지금 에밀리의 손에 들려 있었다.
[어때? 북쪽에서 특별히 모셔온 작가님들이 새로 쓴 거야. 예전이랑 달라졌지?]
[그냥 달리진 정도가 아니에요! 이건··· 우아! 진짜! 진짜 대박이에요!]
신기한 일이다. 데스 아너드의 스토리는 정말 쌀 한 톨만큼도 바뀐 것이 없다. 그런데 원본 스토리 그대로 만들어진 이야기가 캐릭터들과 연출 방법을 통해서 완벽하게 다른 분위기를 풍기게 되었다.
이래서 거장은 붓을 가리지 않는다고 하는 말이 있나 보다. 펜이나 키보드 같은 기구가 아니라 글의 요소 중에서 소재가 여기에 해당한다. 그녀들이면 케케묵어서 먼지가 풀풀 흩날리는 삼류 소재를 가지고도 걸작을 만들어낼 것이 분명했다.
[특히 이거 봐요. 처음 시작! 나는 이 이방인의 독백으로 시작하는 이 부분이 정말 너무 마음에 들어요.]
[그래?]
[게다가 진짜 대박은 이거죠.]
새로운 대본이 상당히 마음에 들었는지, 에밀리는 신이 나서 대본의 바뀐 부분 이곳저곳을 내게 보여준다.
[여기 봐요. 신이 사실은 인간이었대요! 그전에는 그냥 이유도 없이 주인공을 도와주는 존재였다면, 이제는 왜 신이 그런 존재가 되었는지를 알려주고 있어요. 원래는 인간이었고, 처음에는 그런 인간적인 면 때문에 정의를 추구하는 사람들을 도왔었다니··· 와아!]
바뀐 대본에서는 각 캐릭터가 특정 행동과 결정을 하게 된 이유가 명확하게 드러난다. 지금 이 이방인의 경우도 본래는 인간을 위해서 힘을 사용했지만, 난항을 겪고 실패하여 결국에는 강압적인 힘으로의 정의구현을 포기하게 되었다.
그래서 바꾼 형태가 이렇다. ‘자신의 힘을 얻은 자가 정의를 추구하길 원하는 것’에서 ‘일말의 유희라도 내게 제공하는 것’으로의 전환이다. 그 덕분에 주인공은 악마의 계약 같은 것을 하지 않고 초능력을 얻게 되었으며 이 점을 대본에서 명확하게 느낄 수 있었다.
여기서 핵심은 명확하지만 그걸 대놓고 말로 설명하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은유와 연출이라는 표현 형태로 플레이어라면 충분히 느끼게 된다.
‘고급스러운 스토리 텔링이라는 게 어떤 건지 새삼 느끼게 됐지. 캐릭터 간의 관계를 통해 복선을 깔아두고 사용하는 방법도 볼 수 있었고. 그런데 완성품을 볼 때야 쉽게 이해되지 백지상태에서 나보고 하라고 한다면······.’
고개가 절레절레 흔들어진다. 못할 것 같아서다.
스피드 런을 하듯 꼭 필요한 요소만 접하고 게임을 진행한다면 모호하게 이해하면서도 조금은 의문이 드는 스토리 구성이다. 그러나 게임 여기저기에 숨겨둔 단서들을 찾아내어 간다면 이야기를 더욱 잘 이해할 수 있는데, 이 단서들의 구성이 기막혔다.
드래곤 소울에서는 공백으로 두었기에 플레이어가 가설로 스토리를 해석하고 재구성하는 무한대의 줄기가 존재했다면, 데스 아너드에서는 가설 하나하나가 하나의 오브젝트를 접했을 때는 딱 그것을 추론할 수밖에 없도록 완벽하게 설계했다.
우연함을 계획적으로 구성하는 것. 그러면서도 품격이 있다는 점.
역시 클래스가 다르다.
[이제는 안 망할 거 같지?]
[그걸 말이라고 해요? 물론 성공이죠! 안 되겠어요. 나 판타지 소설이라고는 마법사 포터 이야기만 읽어봤는데 이분들 거도 다 읽어볼래요.]
[좋은 선택이야. 인기 있답시고 아무 장르 소설이나 읽다가는 실망할 거거든. 그러니···]
[대장. 대장! 나 이 작가님들 소개해주면 안 돼요?]
‘···내 말은 하나도 안 듣고 있구나?’
[그냥 뭐 별 건 아니고 인사만. 딱 인사만 하려고 해요. 작가님들 좀 소개해줘요! 그러면 안 돼요? 인사 다음에는 사인까지만 받을 생각도 조~금은 있지만요.]
팬심 가득한 그녀의 반응에 나는 고개를 흔들며 대답했다.
[안 될 거야 전혀 없지.]
[역시 우리 대장이 최고···]
[근데 싫어. 절대로 안 돼.]
[네? 안 될 게 전혀 없는데 안 돼요? 싫어도 안 된다? 안 돼요. 돼요. 돼요. 뭐 그런 건가? 그게 무슨 말이에요?]
[안 된다고.]
[왜요? 으아아! 우리 작가님들! 왜요? 알려줘요!]
‘네 미친 텐션 때문에 그런다!’
[너무 시끄러워서 안 돼. 그분들이 얼마나 예민하신 분들인데. 너 때문에 글 못 쓰실라. 절대 안 돼.]
[대장. 농담이죠? 진짜?]
[아니. 진짜.]
[에이. 진짜? 진짜?]
[아이고, 이 진짜가 열 번을 넘길 것 같아서 벌써부터 지친다.]
나 같은 사람도 에밀리나 알버트가 옆에 있으면 정신이 사나워서 뭐 하나 집중이 제대로 되는 게 없을 정도다. 하물며 늙은 작가들은 오죽할까?
배우와 시나리오 작가들이 친해져서 나쁠 건 전혀 없었지만, 내 본능은 알버트와 에밀리만큼은 절대 노부인들과 함께 두면 안 된다고 경고를 보내오고 있었다.
[진짜 “완전 치사!” 막 저번에 데들리 스페이스도 죽어가는 거 내가 방송으로 살려줬는데. 이거도 스토리 별로라고 막 그래서 대단하신 작가님들이 막막 오게 된 건데. 그리고···]
[어허! 막은 뭐가 자꾸 막이야? 게다가 앞에 그거 뭐야? “완전 치사”라니? 한국말은 또 어디서 배웠어?]
“흥! 하쿵말 레슨 바다커등요? 체~!”
바로 이렇게 사용하는 거 보면 그냥 되는대로 내뱉는 건 아니고. 정말 말을 제대로 배워서 하는 거 같기는 한데.
‘발음이 영······.’
한국어를 중국인이나 일본인한테 배웠나 보다.
[어쨌거나 작가님들은 안 돼. 그렇게 알아.]
[그럼. 대신 소원 하나!]
[뭐?]
[그렇잖아요~! 방송도 잘해주고 이번 스토리도 내가 잘 얘기해서 됐고! 소원 하나 정도는 들어줍시다, 진짜. 내가 진짜 서러워서 여기서 막 울어버릴지도 몰라요!]
[다 컸다며?]
[울 거예요!]
[세상에 그렇게 용감하고 큰 목소리로 운다고 하면 누가 믿기야 할··· 이런 젠장. 누가 연기자 아니랄까 봐 거기서 눈물이 왜 나와? 야! 안 속아. 억울한 척해도 연기인 거 다 아는··· 진짜냐? 어이. 뭘 그리 서럽게 울고 그래? 아이고······.]
얘는 열여섯 살 때나 지금이나 발랄하다가 가끔 불도저 같고 이리저리 공처럼 튀는 성격이 여전했다. 이걸 알면서도 어찌나 실감나게 우는지 보다가 한숨이 푹푹 나올 정도다. 결국 나는 소원 하나는 꼭 들어주겠다고 약속을 했고 그제야 지독한 집착에서 풀려날 수 있었다.
< 균형감각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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