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999년 게임 스타트-452화 (452/577)

< 균형감각 >

미국 판타지계에서도 마법에 관련된 것으로 가장 유명하다더니, 정작 작품은 SF라는 점에서 괴리감이 생기는 사람이다. 그러나 이런 괴리감은 이미 어찌 됐든 상관이 없었다.

‘의사 주변엔 죄다 의사고 판사 친구는 죄다 판사라더니, 역시 레이첼! 친구들이 다 엄청난 작가들이야.’

무조건 잡아야 한다.

[아무래도 세 분 모두 소설 작가시니까. 게임이나 드라마에 관한 부분에서는 도와줄 팀원들이 필요할 거라고 생각합니다.]

[원래는 저희끼리 될 거라고 생각했는데, 확실히 해보니까 그렇겠더라고요.]

[저희 넷플렉스에서 전문 작가팀을 만들고 있던 참입니다. 괜찮으시다면 LA에 세 분이 편안히 지내실만한 집과 차. 그리고 가까운 곳에 사무실까지 전부 마련해두도록 하겠습니다. 원하신다면 이사에 관련 된 것들도 다 저희가 처리해드릴 수 있습니다.]

[또 이러신다. 제가 이야기했죠? 저 돈 많아요. 제 친구들도 어디 가서 돈으로 부끄러울 일이 생길 수준은 아니고요.]

[저로서는 당연히 해드리는 예우 같은 거라서······.]

수천억대의 자산을 가진 사람.

그러다 보니까 확실히 돈으로 엮는다거나 하는 것이 불가능했다. 이럴 때는 부디 저들의 흥미가 우리 쪽에 계속 붙어 있기를 바라는 수밖에 다른 도리가 없었다.

[일단 저희를 도와줄 전담팀을 지원해주신다는 부분은 상당히 마음에 드네요. 그런데 혹시, 우리가 따로 집필하는 소설 같은 것도 영화나 드라마로 제작될 수 있을까요?]

‘아! 친구들이라더니 비슷한 요구를 해오는구나.’

잠시 생각하고는 솔직하게 대답했다.

[처음 시놉시스에서 미디어화가 가능할 만한 것인지는 붙여드리는 팀원들이 확인해줄 수 있을 겁니다. 가능성을 본다면 제작하겠으나 그렇지 않은 것까지 100%로 장담을 할 수는 없습니다.]

[그 정도에도 미치지 못하는 글을 쓸 리는 없죠. 좋아요, 충분한 답변이었어요. 그럼, 이사 후에 봐요.]

대모의 자부심은 반해버릴 것만큼 카리스마가 넘쳤다.

*

미니애폴리스에서 LA까지의 거리는 2,000마일로 3,200㎞미터가 넘는 거리다. 당연히 그녀들의 이사는 시간이 필요했고 준비가 되기까지는 다른 작업을 먼저 시작해보기로 했다.

[아앗!]

내 사무실에서 2층 아래에 있는 아나킨 스튜디오에 들어가자 미카엘이 황급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회장님! 어쩐 일로 오셨···]

[인사는 됐습니다. 다들 열심히 일하고 계신대 제가 들어오건 말건 하던 것을 멈추지 말고 계속 집중하세요. 한국의 GF 본사에서는 다들 그렇게 일합니다.]

한국의 게임사를 인수한 후에 개발 중에 찾아와서 이런 말을 한다면 다들 엉거주춤한 자세로 일을 하는 것도 아니고, 안 하는 것도 아닌 풍경을 만들 텐데. 미국이라서 그런 걸까? 내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다들 다시 개발에 집중한다.

[어때요? 개발은 순조롭습니까?]

[회장님께서 많은 지원을 해주신 덕분에 아주 순조롭게 진행이 되고 있습니다.]

‘그래야지. 여기에 들어가는 돈이 얼만데.’

처음 GF에 올 때까지만 해도 고작해야 4명밖에 없었던 아나킨 스튜디오는 이제 80명이라는 대 인원으로 북적북적한 느낌을 준다.

사실상 아나킨 스튜디오는 인수했다기보다 그냥 이 사람들을 고용해서 새로 게임을 개발하는 개념에 더 가까운 셈이다. 하지만 오늘부터 이들은 강제로 휴식기를 가져야 한다.

[게임 진행 상황을 확인하시러 오셨습니까? 그렇다면 이쪽으로···]

[아니요. 오늘부로 데스 아너드 개발은 잠정 중단합니다.]

[네!?]

청천벽력과도 같은 말이 내 입에서 나오자 미카엘을 비롯한 일에 집중하려던 개발자들 모두가 내게 시선을 고정했다. 충격받은 표정들이 실로 각양각색이었다.

[회··· 회장님! 갑자기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저는 데스 아너드가 참 마음에 듭니다. 예상컨대 1,000만 장이 넘게 팔리는 게임이 될 수 있다고 확언할 수 있을 정도지요.]

[천만! 감사합니다··· 가 아니라, 그런데 왜 중단하신다는 겁니까?]

[그 너머를 바라볼 수 있는 게임인데 지금의 스토리가 발목을 붙잡고 있기 때문이지요.]

내 입에서 나온 말이 데스 아너드의 해체가 아니라 개발을 잠정 중단한다는 것이었고, 지금은 스토리가 문제라는 것으로 이어졌기 때문에 당장이라도 기절할 것 같았던 핵심 개발진들이 이제야 비로소 숨이 쉬어진다는 표정을 지었다.

[게임 개발의 잠정 중단이 게임 스토리를 갈아엎기 위한 중단이라는 말씀이십니까?]

[그렇습니다. 게임 스토리를 처음부터 다시 만들 겁니다. 하지만, 이는 저나 여러분이 아닌 최고의 시나리오 작가분들이 해주실 일이니 우리는 시나리오가 수정되기까지 게임의 전반적인 시스템을 수정할 겁니다.]

[네?]

[최고의 작가분들?]

[전반적인 시스템?]

이야기가 껑충껑충 징검다리 건너듯 뛰었지만 앞의 사정을 구구절절 말할 필요는 없었다. 마지막 메시지면 충분하다.

[맞습니다. 전반적인 시스템이지요. 우선, 게임의 조작감이라거나 하는 부분은 전부 마음에 듭니다.]

데스 아너드는 개발에 들어간 지 반년 정도밖에 되지 않았지만, 이미 데모 버전이 완성 수준으로 만들어져 있는 상태다. 개발 기간이 5년이네, 8년이네 하지만, 사실 게임 개발이라는 건. 본격 궤도에 들어가기만 한다면 6개월 만에도 완성이 되는 것이 게임이다.

‘당연히 엄청난 숫자의 개발자들이 갈려 나가야 하지만.’

아나킨 스튜디오는 이미 GF에 합류하기 전에 데스 아너드에 대한 모든 콘셉트와 기획을 완성한 상태였다. 그 때문에 GF의 자금력으로 인력을 충원한 후부터는 데모 버전을 완성하기까지 그저 순풍 맞은 배와 같았다.

그리고 나는 이 완성 된 데모 버전은 당연히 이미 플레이를 다 해본 상태다.

[게임의 조작 스타일이 사이버 쇼크와 유사한 부분이 꽤 많더군요?]

[네. 사이버 쇼크에서 큰 영감을 얻었고 이번 개발에 사이버 쇼크의 자료를 많이 받았습니다.]

이들의 게임 개발이 빠르게 진행된 이유가 여기에 추가로 더 있었다. 자신들이 영감을 받은 게임이 같은 울타리 안에 있는 스튜디오에서 개발한 게임이고, 그 자료를 받아서 개발한다면 꽤 많은 실패를 피해갈 수 있었을 테니까.

[데모 버전에 사용된 챕터는 아마도 2일 차의 파트1. 챕터의 이름은 쾌락의 집이라고 생각되는데 맞나요?]

[아니. 어떻게 그걸 그렇게 딱 바로! 역시 회장님은 대단하십니다. 정확합니다.]

[주인공을 막아서는 모든 자를 상대로 들키지 않고 잠입을 통해 에밀리를 구하거나, 적들을 모두 죽이고 에밀리를 구하라는 미션. 이건 참 마음에 들어요. 그런데 게임의 배경이 생각했던 것과는 조금 다르더군요.]

원래 내가 알고 있는 데스 아너드는 유려한 그래픽과 함께 그 사이에서 파스텔 풍의 느낌을 조금씩 주는 게임이었다면, 지금의 데스 아너드는 수채화의 느낌을 아주 강하게 풍기고 있었다.

[게임의 배경 분위기가 생각했던 것과는 조금 다르더군요.]

[아! 그게 느껴지셨군요! 아무래도 G 크로스의 그래픽 성능을 생각하니까 이런 그래픽이 가장 게임 분위기와 어울릴 것 같아서 바꿔보았습니다. 마음에 안 드십니까?]

[아니요. 마음에 듭니다. 너무 아름다워서 암살하는 게임과의 괴리감이 있지 않을까 싶어서 걱정한 것뿐입니다.]

텍스쳐의 품질이 원래의 그것보다는 꽤 떨어졌지만, 그 대신 한 폭의 수채화 같은 풍경은 아름다움 그 자체라 할 수 있었다.

‘여기까지는 칭찬이고.’

이제 본론이다.

[제가 본 게임의 치명적인 단점이자 반드시 개선해야 할 부분은 블링크입니다.]

[블링크요?]

[이 기술을 사용하면 게임이 너무 쉬워집니다. 그렇다고 블링크를 안 배울 수도 없고, 또 이동에 대한 문제 때문에 블링크를 완전히 봉인할 수도 없더군요. 이갓 뿐만 아니라 다른 초능력들도 같은 문제를 발생시킵니다. 문자 그대로 초능력이라서 사용만 하면 전반적으로 너무 쉬워집니다.]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이 게임은 화끈한 전투와 잠입이라는 두 마리 토끼를 한 번에 잡기 위한 게임인데, 결국 게임 플레이는 둘 중 하나를 선택하게 된다.

‘이런 류에서 진짜 제대로 두 마리 토끼를 다 잡은 게임이라고는 아캄 워리어뿐이긴 하지.’

아캄 워리어는 스토리, 연출, 게임성 그 어느 것 하나 빠지는 게 없는 최고의 게임 중 하나로 평가받은 게임이다. 데스 아너드가 그렇게 만들어진다면 좋겠지만, 이건 사실 내 어쭙잖은 지식으로 조언한다고 해서 만들어질 수 있는 게임이 아니다.

[회장님. 학살하는 플레이어들일 경우 스킬을 다양하게 활용하면서 더 손쉽게 클리어가 가능하지만, 아무도 죽이지 않고, 적들에게 발각되지 않는 조건을 맞추려고 한다면 난이도가 상당히 올라가게 됩니다.]

맞는 말이다. 미카엘의 말처럼 아무도 죽이지 않고, 미션을 클리어하는 방식을 사용한다면 훨씬 어려운 게임이 되기야 할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또 그것대로 문제라고 생각한다. 결과적으로 엔딩이나 그런 것들 때문만이 아니라 게임의 난도를 위해서 비살상 모드를 강제 받는 것과 다름이 없으니 말이다.

[그렇다면 저희가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설정을 추가하면 어떨까 싶습니다. 원래 세계관의 설정을 보니 살상을 많이 해서 주인공의 혼돈 수치가 올라가면 쥐 떼가 생겨나고 우는 자들이 늘어나지 않습니까?]

기본 설정에 의하면 주인공이 살인을 많이 할수록, 치안이 나빠지며 그 여파로 쥐 떼가 늘어남은 물론이고 전염병마저 창궐하게 된다. 결국, 병에 걸린 자들이 중증에 이르면서 좀비와 비슷한 존재로 변해가는 것이다.

[그것들로 분위기를 확실하게 잡아버립시다. 즉, 쥐 떼 정도가 아니라 학살을 많이 하면 할수록 죽이기 힘든 존재들이 등장하는 겁니다. 스킬을 쓰지 않고는 잡을 수 없는 괴물. 뒤에서 몰래 공격하는 게 아니라면 죽이기 힘든 그런 적을 만들어내세요.]

[회장님과는 달리 대다수의 플레이어는 스킬을 잘 활용해서 게임을 쉽게 플레이할 수준이 되지 못한다고 생각합니다. 컨트롤이 부족한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그런 적이 출현하게 되면 너무 큰 어려움을 겪지 않겠습니까?]

[상위의 높은 난도에서만 그런 적을 출현시키면 됩니다.]

[그럼 그 부분만 수정하면 되겠습니까?]

[아뇨. 블링크에도 제한을 둬야지요. 너무 자주 쓸 수 있어서 밸런스를 해칩니다.]

[하지만 블링크가 존재함으로 인해서 스피디한 잠입 액션이 가능한 거라서 딱히 손대기 어렵습니다.]

[압니다. 사실 그것 때문에 더 재미있기도 하니까요.]

[네? 그런데 왜···]

[게임이 시시하니까요.]

‘도대체 우리보고 어쩌라는 거야?’라는 의문 가득한 시선을 받으며 내가 말했다.

[즉, 블링크를 연속으로 사용할 때는 소리가 난다거나 빛 같은 게 강하게 터진다거나 하는 효과를 줌으로써 연속 블링크가 어렵도록 변경하자는 겁니다. 단, 이것도 역시나 노멀 난이도까지는 적용하지 않고 말이지요.]

[아! 그런 식이 있었군요!]

[이 두 가지를 우선 수정하되, 힘든 작업이 아닌 만큼 여러분도 틈틈이 추가로 어떤 것이 들어가면 더욱더 재미있는 게임이 될 수 있는지 연구해주시기 바랍니다.]

[알겠습니다.]

[그럼. 늘 응원하겠습니다.]

정말로 내가 말한 수정안들이 미카엘의 마음에 드는 내용이었는지는 모른다. 어쩌면 열심히 구상하고 개발한 것들에 쓸모없는 지적을 했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그러나 디테일한 지적을 할 만큼 내가 이 게임에 애정을 품고 있다는 점은 충분히 느낄 수 있을 것이다.

*

한편, 데스 아너드의 클래스를 한 단계 높여줄 노부인들이 드디어 LA에 도착했다.

‘결혼을 안했는데 부인이라고 부르면 안 되겠지? 입 밖으로 내지 않도록 조심하자.’

우리로서는 난항에 빠뜨리는 스토리 개선 문제를 재미있는 이야기로 치부할 정도의 작가들은 과연 어떤 방식으로 해결할까?

기대감을 안고 사무실에서 레이첼과 릴리, 패티샤를 맞이했다. 늙음이 결코 추한 게 아니라는 말을 증명하듯 고우면서도 강단 있어 보이는 이들이 들어오니 사무실이 꽉 찬 느낌마저 들었다.

[데스 아너드 스토리의 기획을 받아서 확인했는데, 곤란을 겪는 이유가 ‘게임이 완성 단계이기 때문’이라고 되어 있더군요. 이게 맞나요?]

[네.]

그녀들은 가볍게 웃었다.

[잘 이해가 안 되네요.]

[네? 이해가 안 된다니요?]

[원래 스토리라는 건 다 거기서 거기예요.]

이토록 간단한 문제를 가지고 왜 고민하는지 모르겠다며 말했다.

[셰익스피어. 더 나아가면 서구권에서는 사실 그리스 신화 이후로 완전히 새로운 이야기 같은 것은 없다고들 하죠. 왜? 이미 나올만한 구성은 거기서 다 보여줬으니까.]

[로맨스부터 판타지 그리고 막장에 끝에 이른 이야기까지 아주 오래전에 다 나왔어요. 그래서 중요한 것은 스토리가 아니라 표현이거든요.]

아니 뭐 이런 거장이 하는 이야기니까 꽤 중요하다고 생각은 하지만, 난데없이 왜 내게 스토리에 대한 가르침을 내리고 있는 걸까?

의아해하는 나를 두고 그녀들이 주거니 받거니 하며 말을 이었다.

[스토리가 별로다, 스토리가 재미없다, 이런 말들을 많이 하는데 핵심은 이거예요. 표현이 재미없다는 것.]

[게임의 스토리도 마찬가지랍니다.  진부하고 지겨운 이야기라는 평가나 감상은 스토리 때문에 듣는 게 아니라 표현 때문에 듣는 거예요. 그러니 스토리를 두고 고민하는 건 무의미한 일이죠.]

[즉, 바꿔야 하는 건, 캐릭터예요.]

< 균형감각 > 끝

ⓒ (453)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