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균형감각 >
이후 눈과 귀를 닫고 돌아가는 사태의 추이만 넌지시 지켜볼 때였다.
‘거봐. 우는소리 해도 막상 일은 잘하잖아.’
직접 마주하면 마음 아픈 사연을 한 바구니나 들을 것 같아서 업무 보고서로 보고사항을 대신 받았다. 이를 김유천 비서실장이 정리해서 알려주었다.
“회장님의 선견지명 대로 엔진 개발은 이번에 새로이 합류한 하이드 소프트의 경험이 많은 역할을 하고 있다고 합니다.”
그저 구시대의 인물로만 여겼던 조지 카맥이었는데 이제는 내부에서도 평가가 완전히 달라졌다. 시대의 흐름을 놓치기는 했으나 명장의 클래스는 영원불멸하다는 식으로 말이다.
“하이드 소프트가 예전만 못하긴 하지만, 그래도 게임 엔진을 세계 최초로 상용화시킨 인물입니다. 지난 7년간 쌓은 우리의 기술이 그들을 추월했다고는 해도 기술만 추월했을 뿐, 경험은 절대 추월하지 못하죠.”
“옳으신 말씀입니다. 다만 사람이 너무 꼬장꼬장해서 김재용 실장이 위경련이 올 만큼 스트레스로 고생하고 있는 모양입니다.”
“탈모는 아니죠?”
“네? 아··· 네. 그 정도는 아닙니다.”
“다행이네요. 그럼 원펀치로 다 때려부술 리가 없으니 아무 문제 없습니다.”
“대관절 무슨 말씀이신지······.”
“아무튼, 잊지 말라고 전해주세요. 메가 텍스쳐는 절대로 안 됩니다.”
“네, 회장님. 그렇게 전달하겠습니다.”
“그리고 조지 카맥의 이름에 너무 흔들리지 않아도 됩니다. 중심은 GF이지 하이드 소프트가 아닙니다. 그러니 저들이 축적한 경험 중에 딱 필요한 것들만 빼내고 엔진 개발은 김재용 실장 자신이 추구하는 걸 확실하게 밀고 진행하라고도 일러주세요.”
“알겠습니다.”
“좋습니다. 이 이야기는 여기까지 하도록 하죠. 나중에 추가 보고할 일이 생기면 그때 다시 이야기하도록 합시다.”
“예.”
보고를 마친 김유천 실장이 사무실을 나갔다. 그런데 문이 닫히지 않고 새로운 얼굴이 쾌활하게 등장했다.
[짜잔~! 에밀리가 왔습니다~!]
알버트가 그랬듯이 이제는 에밀리가 할 일이 없다면서 자꾸 사무실에 들어오는 형국이다.
[뭐야 손에 들고 있는 그건? 새로 작품 들어가기로 했어?]
그녀는 신경 써주지 않는다고 툴툴 대지만, 사실 에밀리는 신경 써줄 필요가 전혀 없는 스타였다. GF에서의 도움 같은 건 필요 없이 가만히 있으면 알아서 출연 제의가 들어오고 그녀는 그냥 여러 선택지 중에서 마음에 드는 작품을 선택하기만 하면 된다.
이번에도 손에 왠 대본 비슷한 것을 들고 있어서 그리 말했는데 또 뭐가 불만인지 볼을 한껏 부풀린다.
[아니. 사람이 대체 어떻게 그래요?]
[내가? 또 뭐 잘못한 거야? 이번에는 뭔데?]
[흥! 맞아요. 작품 들어왔어요. 그게 뭔 작품이게요?]
[나야 모르지.]
[헹~ 모르면 이상한 건데~ 나는 알지롱~ 데스 아너드라는 이름. 진짜 몰라요?]
[응? 데스 아너드? 그걸 네가?]
처음에는 토라진 척, 그다음에는 빙그레 웃던 에밀리가 눈을 크게 뜨고 되물었다.
[아니. 정말 몰라요?]
[데스 아너드야 잘 알지. 다만, 네가 그걸 들고 있는 거는 신기하고.]
[우와··· 진짜 너무하신다. 나는 또 우리 대장이 데들리 스페이스로 미안해서 먼저 연락 준 줄 알았더니만, 그럼 대장이 선물해 준 게 아니었어요?]
[응. 아냐.]
[와! 배신감!]
일부러 따돌린 것도 아니고 맡는 역할이 없어서 그랬을 뿐인데 미안할 게 뭐가 있나.
‘그러고 보니 데스 아너드에는 적당한 캐릭터가 있기는 하지.’
에밀리에게 적당한 역할은 공주이고 게임 속 이름 역시 에밀리 콜디안이었다. 고전 게임을 떠올리면 마왕의 성에 갇혀있는 공주님을 연상하면 된다.
[봐요. 이름도 딱 내 이름인 에밀리! 근데 선물이 아니었다니··· 쳇.]
‘그러고 보니까 이름이 같았네.’
우연이다.
[근데 사실은 대장이 준 게 아니라고 하니까 하는 말이거든요. 솔직히 이거 별로 하고 싶지 않았어요.]
[하기 싫다고? 왜?]
평소에는 그렇게 요즘 뭐 시켜주는 것도 없다 뭐다 하더니, 이제는 또 갑자기 왜 이런 소리인가?
[솔직하게 말해도 돼요?]
[당연하지.]
[이 게임 망할 거 같아.]
[뭐?]
데스 아너드는 전세계 판매량이 무려 1,000만 장이나 되는 엄청난 프랜차이즈 타이틀이다. 그런데 이 게임이 망할 것 같다니. 대체 뭐 이런 어처구니없는 평가가 있나? ‘얘가 겜알못인가?’하는 생각이 드는데 굉장히 설득력 있는 이야기가 이어졌다.
[이거 솔직히 스토리가 너무 허접해. 오죽하면 스토리가 없다시피 한 와일드 헌터보다 스토리가 봐줄 게 없는 거 같다니까요?]
‘스토리가 허접하다고?’
잠시 데들리 스페이스에 올인했던 기억 창고를 새로이 떠올리며 검색했다. 데스 아너드는 다운월이라는 19세기 산업혁명을 배경으로 한 가상의 공간이 배경인 게임이다.
이 세계관에서는 동력원으로 석탄 대신 고래기름을 쓰는데 그 탓에 포경선이 고래를 매달고 가는 것을 볼 수 있었다.
그뿐이랴, 산업의 발전과 도시 전체를 뒤덮고 있는 기묘한 분위기, 곳곳에서 발견할 수 있는 일지와 대역병이 파괴한 다운월의 편린에 이르기까지 제작진은 던월이라는 공간을 살아있는 공간으로 만들기 위해서 엄청난 노력을 기울였다.
‘하지만 에밀리의 말 대로야. 잘 짠 세계관과 달리 스토리는 허접했어.’
훌륭한 그래픽과 좋은 오브젝트들로 배경을 가득 채우더라도 어딘지 모르게 비어버린 공간이라는 느낌이 드는 게임들이 종종 있다. 그것은 시각적인 효과는 충분하게 주었지만, 내면에 자리하고 있는 세계관의 부재 때문에 벌어지는 일이었다.
그런 점에서 데스 아너드는 착실하게 설정을 쌓은 게임이지만 정작 그 설정을 활용하는 스토리의 부재가 참으로 아쉬운 게임이었다. 착실하게 쌓은 설정을 스토리가 마구 헝클어버릴 정도로 스토리는 평범 이하의 부실한 수준이다.
하지만 잊지 말아야 할 것.
이 게임은 지금 상태만으로도 1,000만 장을 팔았다는 사실이다.
[대장은 이거 스토리 뭔지 알아요? 하긴 게임이 만들어지고 있다는 건 우리 대장이 승인했다는 거니까 당연히 알고 계시겠네? 어? 이상하다··· 그럼 이런 스토리로 게임이 성공한다는 거예요?]
에밀리가 의아해하는 건, 기존의 GF게임들이 스토리, 세계관, 게임성이라는 모든 요소에서 부족한 점이 거의 없었기 때문이다. 흥미롭지만 기대치를 충족시키기에는 못 미친다는 것이니 고평가된 나 자신을 욕해야 하는 사례라 하겠다.
[진짜 이해가 안 돼요. 아니면 사실은 스토리가 좋은 건데, 내가 그걸 파악하지 못하는 건가?]
[아니야. 네가 말한 대로 스토리는 허술한 게 맞거든.]
충성과 배신을 핵심으로 두고 있는 데스 아너드의 이야기는 처음에 누명을 쓴 주인공이 왕실에 충성하는 충성파에게 구출을 당하면서 시작된다. 그리고 이후에 모든 스토리를 클리어하게 되면 그 충성파들에게 배신을 당하는 식의 전개가 되는데···
‘거참. 대놓고 지적받으니까 나도 좀 민망하네. 이게 대관절 뭐 하자는 스토리야?’
뭐 그것까지는 좋다. 그렇게 이야기가 이어나가면 되는 거다.
그런데 게임의 엔딩이 시궁창이라는 게 참으로 가관이다. 지금까지 엄청난 활약으로 왕실을 구해낸 주인공을 배신한 이 멍청이들을 땅에 묻어버리는 것으로 게임은 끝난다. 반전은커녕 단선적이며 유치할 정도의 흐름이라 하겠다.
아나킨 스튜디오가 이런 수준으로 만든 건, 본래 그들이 돈 없는 회사였고 이런 회사에서 제대로 된 스토리 작가를 구할 수 있었을 리가 없었기 때문이다.
[에? 그런데도 게임으로 개발하는 걸 승인했어요?]
[스토리는 게임에 있어서 아주 중요한 요소이긴 하지만 게임의 재미라는 건 스토리가 전부는 아니거든.]
내가 말해놓고도 그냥 핑계 같지만 사실이긴 했다. 이 게임은 스토리 때문에 하는 게임이 아니라. 그 과정을 즐기기 위해서 하는 거니까. 오히려 스토리 부분이 나오면 그냥 귀찮아서 내던지는 게임이 바로 이 데스 아너드다.
[그럼 이 엉망진창 스토리로 게임이 나오는 거예요?]
[원래는 그럴 생각이었는데, 네 말을 듣고 보니 생각이 좀 바뀐다. 네 생각은 어때? 에밀리. 스토리 갈아엎을까?]
[보니까 꽤 많이 진행됐던데요? 그래도 되는 거예요?]
원래 게임이라는 건 스토리를 만들고, 그 스토리를 중심으로 게임을 그 위에 세우는 것이다. 지금 데스 아너드 역시 본래 가지고 있던 스토리를 놓고 그 위에 세워둔 게임이다.
게임에 존재하는 첨탑, 하수구, 여타의 모든 것이 스토리에 맞춰서 구상되었고 만들어진 것들이다. 이미 완성품이 존재하는 게임을 가지고 사소한 몇 가지만 건드려서 게임을 재미있게 만들 시나리오를 구성하라는 것은 완전히 새로운 것을 창조하는 것보다 몇 배는 힘든 일이다.
[어려울 뿐이지 불가능한 건 아니거든.]
[그럼 해야죠! 훨씬 재밌어지는 건데.]
[시나리오 수정을 진짜 기가 막히게 하면 엄청 뿌듯하겠지?]
[당연하죠! 대장!]
[좋았어. 그럼 나는 북쪽에 좀 가봐야겠다.]
[네? 북쪽이라뇨?]
[맛있는 피자도 포장해올게.]
[어어? 대··· 대장?]
각 분야의 문제는 전문가에게 조언을 구하는 편이 가장 낫다. 그리고 과거와 달리 지금의 GF에는 스토리 부분에 있어서 마스터키와도 현자와도 같은 길을 안내해주는 능력자가 있었다.
*
[이런. 젊은 회장님께서는 정말 성격도 급하시네요. 연락과 동시에 이곳까지 찾아올 줄이야. 늙은이 심장 떨리겠어요.]
[앞으로 피자를 떠올리면 언제라도 날아오고 싶을 정도였습니다.]
[그리고?]
[삼가 조언을 구할 일도 있습니다.]
[젊음이란 좋네요. 정말 열정적이라 보기 좋아요.]
주름진 웃음을 짓고 있는 레이첼 맥클레인.
미국에서 가장 능력이 뛰어난 작가로 손꼽히는 그녀에게 찾아왔다. 물론, 그녀가 데들리 스페이스의 멀티미디어 유니버스를 창작하는 중이고 게임 시나리오 집필한 경험이 전무하다는 것은 나도 잘 안다.
하지만 소설계의 대가라면 눈높이가 다른 식견을 가지고 있을 터다. 나와 같은 보통 사람이 백날 고민할 문제를 손쉽게 통찰해 낼 것이라 믿기에 이렇게 날아왔다. 지난번과 같은 피자가게에서 나는 준비한 자료와 함께 데스 아너드와 관련된 이야기를 그녀에게 해주었다.
'과연'이라고 해야 할까?
긴 고민도 필요 없다는 듯 그녀가 고개를 끄덕였다.
[간단하네요. 이것도 제가 맡을게요.]
[네? 둘 다요? 그게 가능하십니까?]
말이 좋아서 멀티미디어 유니버스지, 따지고 보면 모두가 같은 세계관을 공유하지만, 그 스토리는 각각이 분리된 장편 소설을 만들어내야 하는 방대한 작업이다. 그것을 맡아서 작업하면서 데스 아너드까지 맡아서 하는 것이 가능할까?
하지만 지난번과 마찬가지로 레이첼의 대화법은 무언가가 뚝 잘린 상태였다. 차분하게 들어야 이해할 수 있었고 그녀는 이를 알려주었다.
[오해가 있네요. 제가 맡긴 하겠지만, 제가 집필할 건 아니에요.]
[조금 더 자세히 알려주셨으면 합니다.]
[지금 데들리 스페이스의 작업을 하다 보니 예전처럼 혼자서 책만 쓰면 되는 그런 일이 아니더라고요. 그래서 새로운 작업 방식을 구상하게 됐어요.]
[새로운 작업 방식이요?]
[영화나 드라마 업계를 보면 작가들이 팀을 만들어서 작업하잖아요? 저도 이제 그렇게 해볼까 해서 친구들이랑 상의를 좀 했는데, 친구들이 전부 재미있을 것 같다고 찬성을 하더군요. 안 그래도 나이 들고 요즘은 혼자 사는 것도 적적했었는데, 일이라는 핑계로 친구들이랑 같이 지내볼까 해요.]
[친구들이라고 하시면···?]
[릴리라는 친구랑 패티샤라는 친구인데, 젊은 회장님께서는 혹시 들어 보셨으려나?]
그녀가 장난기를 담은 미소를 지었다. 거기서 직감했다. 전혀 못 들어본 이름이지만, 내가 모르는 업계에서 나름 유명한 이들일 것 같다는 사실을 말이다.
후딱 날아오는 바람에 김유천 비서실장을 두고 온 마당이다. 나는 레이첼에게 짧게 양해를 구한 뒤 잽싸게 문자를 보냈다.
<김 실장님. 혹시 레이첼씨의 친구분들 중 릴리라는 사람이랑 패티샤라는 사람에 대해서 아는 거 있으십니까?>
대답은 빛처럼 빠르게 돌아왔다.
<유명합니다. 세 분은 이미 분야에서 굉장히 유명한 친구들입니다.>
<유명하다고요?>
<작가 릴리는 몇 번이나 휴고상의 후보에 올랐지만, 안타깝게도 입상은 하지 못했던 작가입니다.>
‘노벨상 후보자!’
<패티샤는 그런 경력보다는 미국 판타지 마법에 관련된 분야에서 최고로 치는 작가입니다. 유명한 것들로는 스페이스 워즈가 있습니다.>
<스페이스 워즈? 제가 아는 그 영화 스페이스 워즈요?>
<예. 해당 시리즈의 1편부터 3편까지의 편집을 맡았던 작가입니다.>
< 균형감각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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