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더욱 탄탄하게 >
‘언제 본론이 나오냐’하며 대충 듣다가 찬물을 뒤집어쓴 듯 정신이 번쩍 들었다.
[제가 잘못 들은 게 아니라면, 작품 자체를 원한다는 말씀 같은데··· 바로 이해한 게 맞습니까?]
[네.]
‘이건 또 무슨 귀신 씻나락 까먹는 소리란 말인가? 내가 EA로부터 이 게임을 확보하기 위해서 얼마나 공을 들였는데, 이걸 달라니? 애당초 이걸 줄 거면 작가를 뭐 하러 구하고?’
노망난 할멈이 틀림없다. 생김새만 멀쩡할 뿐, 말이 통할 리가 없으니 다른 대화가 무슨 쓸모겠는가.
[표정을 보니 오해가 있으신 거 같네요. 작품을 달라는 말은 제가 작품의 저작권을 가지겠다는 의미가 아니에요.]
[그럼 무슨 의미로 말씀하신 거죠?]
[들어보니 게임은 이미 1편이 완성된 거나 마찬가지라고 하더군요.]
[그렇습니다.]
[제 말은 이미 완성된 게임 1편을 제외한 나머지 전부를 의미하는 겁니다. 1편을 제외한 소설, 드라마, 영화, 게임에 관한 모든 스토리의 권한을 주세요.]
나는 반성하는 데 주저함이 없는 남자다.
‘노망이라니. 이렇게 불경한 생각을 하다니. 이 멍청한 녀석.’
경직된 표정을 풀고 한없이 열린 마음으로 그녀에게 물었다.
[더 자세히 알려주실 수 있으시겠습니까?]
자칫 조금 전처럼 오해할까 우려된다고 하자 레이첼이 말했다.
[저는 꽤 유명한 작가에요. 남들은 고작해야 한 번, 혹은 두 번 정도 등록될 밀리언셀러에 수도 없이 올랐고 한 번 받기도 힘든 휴고상을 네 번이나 받았어요. 그런데 제 소설은 단 한 번도 미디어로 제작된 적이 없습니다.]
‘하긴 SF 소설 쪽에서 그렇게 대단한 사람인데, 내가 이름조차 모르고 있었다는 건, 정말 그 소설 쪽에서만 유명하다는 이야기겠지.’
[그래서 제 조건은 이겁니다. 데들리 스페이스는 분명히 드라마와 코믹스, 그리고 게임으로 만들어지는 소설이라고 하셨죠?]
[정확하게 표현하자면 소설과 드라마 그리고 코믹스로 만들어지는 게임입니다.]
[저의 요구가 바로 그거에요. 그걸 바꾸는 것.]
‘원작을 말하는 의미였었구나.’
이제 이해했다.
[물론 가장 첫 작품이 게임이니까 게임 원작이라는 부분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건 저도 잘 압니다. 하지만 그래도 앞으로 나오는 모든 이야기는 제가 만들고 싶습니다. 그것이 바로 제 조건입니다.]
노 작가의 한이 무엇인지 비로소 이해했다.
레이첼은 지금까지 자신보다 인기가 없었던 소설들도 게임화되고 영화화되었는데 정작 자신의 작품은 그러지 못한 점이 가슴에 맺힌 멍에였던 것이다. 그렇기에 다양한 플랫폼으로 제작하겠노라 발표한 데들리 스페이스를 통해 자신의 한을 풀겠다는 뜻이었다.
즉, 그녀의 관심을 끈 건 게임이 아니라 알버트를 통해서 널리 알려진 기사인 셈이다.
‘나로서는 거부할 이유가 없지. 일단 이 사람의 스토리 구상력은 내가 감히 평가하고 말 수준이 아니야. 오히려 이런 사람이 데들리 스페이스의 스토리를 설계하고 글로 완성한다면··· 맙소사. 나는 꿈속 미래에서는 존재할 수조차 없었던 진정한 걸작을 만들게 되는군!’
애매하게 끝나버린 아서의 이야기가 이어지는 수준이 아니다.
거장의 손길이 깃든 스토리보드를 타고 나는 온갖 기술력을 다해 재현해내기만 하면 되는 거다. 이런 제안을 거절하면 그건 머저리다. 당연히 승낙하려는데 문득 호기심이 생겼다.
2,400억이나 있는 부자. 대단한 인맥과 자기 분야의 영향력마저 갖춘 레이첼이 왜 굳이 이런 빙빙 돌아가는 방법을 쓰는 걸까?
[영화나 드라마화가 되지 못하는 것이 아쉬우셨다면, 그냥 직접 영화로 제작하셨어도 되지 않습니까?]
[제 소설을 제가 직접 영화화하는 게 무슨 소용이 있죠?]
[네? 소용이 없습니까?]
영화로 성공하고 그것으로 큰돈을 벌어들이면, 지금까지 자신의 소설을 외면했던 제작자들에게 빅 엿을 선사할 수 있는 아주 훌륭한 수단이 아닌가, 싶었는데 작가의 자존심은 이런 내 사고방식과 달랐다.
[평가는 타인이 해주는 것이지 자신이 직접 할 수 없어요. 그리고 저는 다른 이들이 제 것을 가지고 다양한 작품으로 재탄생시켜주기를 원했을 뿐입니다.]
‘···차이가 있나? 원래 다양한 미디어로 제작될 게 예정된 작품의 스토리를 집필하는 거랑 이거랑? 도대체 뭐가 다른 거지?’
잠시 고민해봤지만 당최 이해되지 않는다.
‘아무렴 어때. 나한테 좋으면 그걸로 된 거지.’
레이첼이라는 능력자가 스토리를 써주면 그것으로 된 거다. 개인적인 부분이야 작가의 문제이니 그냥 넘어가기로 했다.
[좋습니다. 스토리에 관한 모든 권한을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다만. 한 가지 걸리는 부분이 있군요.]
[어떤 부분 말인가요?]
[아실지 잘 모르겠지만, 데들리 스페이스는 유혈과 폭력, 시체가 즐비한 작품입니다. 작가님의 스타일과 살육은 상당히 다른 작품이라 생각되는데···]
[그 부분은 걱정하실 필요가 없어요.]
[어째서죠?]
[누가 쓰더라도 그런 식으로는 쓸 수 없을 테니까.]
[네?]
의아해하는 내게 그녀가 가르쳐주었다.
[회장님께서 원하신 작가의 조건 중에는 대중성이 있다고 들었어요. 그런데 아실지 잘 모르겠지만, 영화나 게임이면 모를까. 소설과 드라마의 스토리에서는 배설물 같은 잔인한 작품이 대중성을 가질 수 없습니다.]
‘아!’
내가 쓴 말을 그대로 돌려주며 레이첼이 말을 이었다.
[그리고 게임 같은 부분에서의 잔인함은 제가 자세히 하지 않아도 어차피 연출에서 표현할 테니 상관없죠.]
듣고 보니, 일리가 있었다.
내가 원한 작품이 대중성 높은 작품인데, 여기에 게임 1편과 같은 고어함을 넣는다?
처음부터 이상한 구상을 했던 거였다. 기존의 데들리 스페이스가 가진 이미지만을 고정관념으로 둬서 생긴 문제였다. 그리고 나는 안심했다.
‘역시 전문가에게 맡기는 게 최고야.’
소설과 스토리.
나 같은 놈 백 명이 달라붙어도 레이첼만 못하다. 이 진실을 십분 인정하며 그녀의 조건을 승낙했고 이제는 덤에 불과해진 충분한 페이를 제시했다. 아무리 돈이 많고 이제는 불필요할 정도로 가졌다고 해도 많으면 많을수록 흡족한 게 돈 아니겠는가.
더군다나 상대방이 자신을 얼마만큼 중요하게 여기는지 좋은 척도도 되어주고, 말이다. 원하는 바를 이룬 레이첼은 만족스러운 얼굴로 돌아갔다. 그리고 우리는 그녀의 이름 역시도 마케팅에 적극적으로 활용했다.
【데들리 스페이스의 스토리. SF 소설계의 대모 레이첼 맥클레인이 맡는다!】
【레이첼 맥클레인이 데들리 스페이스의 모든 스토리를 담당하기로 하다!】
【SF계 거장의 첫 번째 드라마이자 넷플렉스의 첫 드라마! 데들리 스페이스!】
└ 이 레이첼이 내가 아는 그··· 그 레이첼은 아니···지 않잖아! 이런 미친!! 오오!!
└ 뭐야··· 이거 왜 이래··· 이쯤 되면 무섭게··· 끝내주잖아!!!!
└ 미쳤다. GF 섭외력 뭐냐? 뭘 만들려고 그래?
└ 젠장! 모든 스토리? 모든 스토리라고? 하나가 아니라는 거지?!
└ 나 눈에서 물 난다. 대모님-! 으허허헝-!
└ 으아아아! 보고 싶어! 보고 싶다고!!
└ 하기로 한 거 다 보여줘! 난 늙어 죽기 전에 보고 싶다고!!
└ 대모님 걱정하는 거임?
└ 나 말이야. 나. 80살 넘은 나.
└ 아이고··· 어르신께서 이런 곳에서 글을 쓰실 줄이야···;;;
레이첼 맥클레인이라는 이름은 내 기대 이상의 무게감을 가졌던 것 같다. 그녀가 데들리 스페이스의 스토리를 담당하게 되었다는 소식이 전해짐과 동시에 인터넷은 그야말로 폭주할 지경이 됐다.
“제가 생각했던 것보다 미국에서 인기가 훨씬 대단한 모양입니다.”
“회장님. 휴고상을 몇 번이나 받은 작가입니다. 대단할 수밖에 없죠.”
가장 놀라웠던 건 드라마 소식에도 미동조차 보이지 않던 할리우드의 무비스타들이었다. 누구나 이름만 들어도 알 법한 세계적인 이들이 레이첼 맥클레인이라는 이름이 인터넷에 퍼지고 나서부터는 드라마 출연에 대해 문의를 보내온 것이다.
출연료나 배역을 떠나서 단지 그녀가 스토리를 쓴다는 것. 오직 그 이유였다. 만약, 이미 배역에 대한 모든 계약을 끝마친 상태가 아니었다면 적잖게 마음이 흔들렸을 것이다. 이들의 등장으로 위로라나 캘리가 오히려 존재감이 묻혔을 테고 말이다.
“이제 회장님께서 지시하셨던 모든 준비가 갖춰진 것 같습니다.”
김유천 비서실장의 말대로다. 게임 출시만 남았을 뿐, 게임 캐릭터를 연기한 배우들로 이슈 몰이를 충분히 했고 레이첼 맥클레인이라는 거장의 영입을 통해 폭발적으로 화력을 끌어올렸다. 이 이상의 이슈 몰이는 지구 멸망이나 재앙 급이 아니면 존재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런데 지나칠 정도로 기대감이 응축된 탓일까. 외부의 요건들이 200%로 만족하여서 드는 생각이려나.
알버트와 레이첼이라는 저들의 이름에 과연 지금의 데들리 스페이스가 어울리는 클래스인지 되짚게 된다.
‘게임적으로 더 나아질 수 있는데 내가 적당히 타협한 거라면, 친구나 다른 모든 이들에게 내가 미안해진다.’
냉철하게 되짚어 보자.
일전에도 언급했지만, 데들리 스페이스는 굉장한 완성도를 가진 잘 만든 호러 서바이벌 게임이다. 그러나 이 게임은 완성도와는 별개로 상업적으로는 실패한 게임이기도 했다.
‘게임스테이션3, ZBox 360, PC. 이 세 가지 플랫폼으로 발매하고도 실패했어.’
멀티 플랫폼은 라이선스 부분에서 손해를 감수해야 하지만 다양한 시장에 상품을 내놓음으로 더욱 높은 판매량을 기대할 수 있다. 그런데도 판매량 견인에 실패한 게임이라는 건 소비자들이 외면할만한 이유가 분명히 존재한다는 것이다.
‘화제성을 타고 유입한 고객이 정착할 수 있을 만큼의 게임을 만들어야 해. 그러자면 어디를 손봐야 할까? 마이너스 요인이 뭐였지?’
고어함?
‘아니야.’
소설이나 영화라면 모를까, 호러 게임을 즐기는 게이머는 애당초 자극이 강할수록 환호를 했으면 했지 그것 때문에 구매를 꺼리지는 않는다.
공포심?
‘글쎄.’
바이로 해저드가 처음 등장할 때나 마이너한 장르였을 뿐, 지금은 공포를 베이스로 하는 액션류의 게임이 당당히 메이저 장르에 들어섰다. 그러니 데들리 스페이스의 실패에는 이 요소가 포함되지 않는다고 보면 된다.
재미가 없어서? 아니면, 반복되는 구간에서의 지루함?
‘이것들도 틀렸어.’
원래 이런 폐쇄된 공간에서 생존하는 게임은 배경이 다 거기서 거기다. 바이로 해저드도 사실상 그것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그런데도 바이로 해저드는 상업적으로 성공했고 데들리 스페이스는 실패했다.
“지금 당장 데들리 스페이스의 자료를 가져오십시오.”
기억만으로는 한계가 있다. 나는 기존 일렉트릭 아트에서 진행한 데들리 스페이스의 모든 자료를 찾아오라고 지시했고 이를 모조리 검토했다. 그리고 일전에 개발진들을 통해서 전달받았던 발매 직전의 마지막 테스트 버전이 아닌, 데모 버전을 발견하고 이를 진지하게 플레이해 보았다.
그리고 확실하게 알았다.
“김 실장님. 비카미 신지 감독과 김대익 실장에게 레드우드로 와주었으면 한다고 전해주세요.”
“회장님. 게임을 새로 만들기에는 이미 일정을 더 미루기 늦은 시점입니다.”
“일정은 그대로 갑니다. 단지 조금만 수정할 겁니다.”
“···회장님의 조금이라는 말을 듣고 개발진이 어떤 반응을 보일지 저는 알 것 같네요.”
“괜찮아요. 이번에는 정말 조금입니다.”
데들리 스페이스를 직접 플레이해 보면서 느끼고 보완책으로 확실하게 찾아낸 요소.
게임 자체가 가지고 있는 문제점!
‘너무 쉬워.’
이것은 꿈속 미래의 관점에서는 많은 사람이 공감하지 않을 말이었다. 생각보다 데들리 스페이스의 난도가 높아서 고생하는 사람들이 적잖았기 때문이다. 실제로도 데들리 스페이스는 서바이벌 호러에 처음 접하게 된 게이머에게 환풍기 트라우마가 생기게 만든 게임이다.
그런데 이건 딱 초심자에게만 해당한다.
‘충격적인 외관과 배경에 익숙해지면? 그냥 거기서 끝이지.’
안 그래도 반복되는 배경이 많은데 게임 스토리는 방대해서 플레이하다가 지칠 정도로 볼륨이 크다. 그러다 보니 다회차 플레이가 당연하게 여겨진다. 그런데 게임 업계에서 데들리 스페이스는 다회차 경험이 굉장히 적은 게임으로 손꼽힌다.
그 이유는 간단하다.
1회차에서 지친 게이머들은 2회차의 욕구가 들지 않는 게임이라는 판단으로 게임을 깎아 내린다.
한편, 2회차 이상을 즐기고자 했던 게이머들은 같은 위치, 같은 타이밍, 새로운 지역이지만 전혀 새롭지 않은 배경에서 등장하는 몬스터들과 이들의 패턴으로 게임의 난도가 하락했음을 느끼게 된다.
그리고 보스전 역시 맥 빠질 정도로 시시하다.
일전의 나는 약간의 손만 거들었다. 비카미 신지라는 정통성을 확보했고 이미 거의 완성된 게임이기에 정말 개선해야 할 요소들만 신경 쓰고 외적인 부분으로 넘어간 것이다. 그러나 지금은 다르다.
‘알버트와 레이첼이라는 이름값에 어울리려면 조금 더 나아져야 해!’
촉박한 일정 속에서 변주를 가미하는 방법. 그것은 네임드 급의 괴물과 보스전을 조금 더 쫄깃하게 만드는 것이다. 그리고 가장 최종 보스는 환골탈태 급으로 개선한다.
단순히 체력이 높고 공격력이 높은 문제가 아니라 진짜로 압도적인 위압감을 보여주는 디자인으로 만든다. 적어도 지금의 데들리 스페이스는 시각적으로는 압박감이 느껴지는데, 막상 싸워보면 호구에 불과한 놈이 최종 보스니까.
이러한 목적으로 과거 워쳐 때와 유사하게 레드우드 시티에 다시금 특별팀을 급히 신설했다. 이름하여 데들리 스페이스 디벨롭 특별팀이었다.
< 더욱 탄탄하게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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