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999년 게임 스타트-444화 (444/577)

< 더욱 탄탄하게 >

“드라마가 아니라니요?”

“그건 일단 주요 배역들이 이미 다 정해지지 않았습니까?”

맞다. 할리우드는 영화나 드라마를 제작하기에 너무나도 좋은 곳이라서 돈과 신뢰만 있다면 유명한 제작자들은 물론이고 배우들까지도 손쉽게 캐스팅이 가능하다. 이곳에는 스타가 되기 위해 오늘도 몸부림치는 엄청난 인력풀이 넘쳐흐르는 곳이기 때문이다.

‘물론 전 세계에서 알아주는 대스타들은 한국의 스타들 섭외하기보다 어렵지만.’

어차피 이런 드라마에 그런 스타들을 섭외할 것도 아니었고 주요 배역 중 두 개는 이미 위로라와 캘리라는 두 사람이 있었던 덕분에 딱히 캐스팅이 어렵지는 않았다.

“설명이 필요하겠군요. 드라마보다 중요하다는 게 뭡니까?”

“소설을 먼저 신경 써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소설? 작가를 섭외하는 것을 비롯해서 이미 실장님께 다 맡겼을 텐데요?”

“그게···”

“왜요? 무슨 일 있습니까?”

“사실은 어차피 안 될 거로 생각하고 그냥 찔러보기만 했는데 생각지도 못한 거물이 응답을 보내왔습니다.”

“거물? 소설가 중에서 말입니까?”

“네. 회장님께서는 혹시 레이첼 맥클레인이라는 작가를 아시는지요?”

잠시 기억창고를 열심히 찾으려다가 그 시도조차 하지 않았다.

‘북미에서 제아무리 유명하면 뭐 해. 내가 게임으로 접한 사람이 아니면 알 리 없잖아.’

그렇다. 내 기억은 게임 관련 분야이거나 세상을 떠들썩하게 만들 만큼의 대서특필된 소식이 아니면 한계가 있었다. 애당초 모든 종류의 지식을 갖는 게 인간이 가능할 리도 없고 말이다.

“누굽니까?”

“SF 계에서는 노벨상이라 불리는 휴고상을 네 번. 네뷸러상을 한 번 받은 작가입니다.”

‘뭐?!’

깜짝 놀랐다.

네뷸러상은 미국 SF 판타지 작가 협회에서 주최하는 시상식이다. 이곳은 미국 장르 문학계에서 권위 있는 전문가들이 엄중하게 심사하고 상을 주는 곳으로 그만큼 장르 문학이지만 뛰어난 작품성이 있는 작품들이 엄선 된다.

반면에 휴고상은 그와 정반대되는 곳이다. 소수의 전문가들이 입상작을 투표하는 네뷸러와는 달리 월드콘 투표를 통해 수백에서 수천의 사람이 투표하고 거기서 가장 많은 표를 받은 작품이 당선되는 형태다.

네뷸러상을 탈 수 있다는 것은 그만큼 뛰어난 필력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증명한다.

휴고상을 탈 수 있다는 것은 일반 대중들에게 어필이 가능한 글을 쓸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이 두 종류의 상을 모두 받았다?’

두말할 필요가 없다. 불가능에 가까운 재능을 가진 어마어마한 존재라는 소리다!

“누군지 모르지만, 일단은 아는 거로 하죠.”

“네?”

“아는 거로 치고 이후 설명을 해주시란 말입니다.”

“아! 네, 알겠습니다. 제가 될 리 없다고 생각하면서도 우선 리스트를 만들어뒀으니까 레이첼 맥클레인 작가에게 연락을 취했었습니다. 아시겠지만, 원래 그녀 정도의 클래스는 이미 돈은 가질 만큼 가진 작가들이고, 또 자기 작품과 아이디어에 자부심을 가진···”

“거두절미하고 결과부터 갑시다. 어떻게 됐다는 겁니까?”

승낙이면 ‘제가 해냈습니다!’라고 할 테지 지금처럼 ‘소설을 신경 써주십사···’라고 할 리는 없다.

김유천 비서실장은 자신의 노고를 싹둑 자른 게 속상했는지 입맛을 다시고는 대답했다.

“회장님과 이야기를 해보고 싶다고 했습니다. 일단 흥미는 생기지만, 자신이 쓸 만한 작품인지 아닌지는 회장님과 대화해보고 판단을 내리겠다고 합니다.”

“그 작가를 만나야 한다는 의미였군요.”

“죄송합니다.”

그 말에 크게 웃고 말았다.

“죄송하기는요. 대단한 일을 해내시지 않았습니까? 무려 휴고상을 네 번이나 받은 작가인데 말입니다. 잘하셨습니다. 정말 잘했어요.”

‘맞아. 이쯤 들으니 생각나네.’

영국의 마법 학교 이야기를 다룬 소설이 책으로 나와서 대박을 치고 영화로도 다시 한 번 초대박을 이루어냈다. 바로 이 소설이 2001년에 이 상을 받았으며 현대 RTS 게임을 정립했다고 말하는 게임인 둔의 원작 소설 역시도 그러했다.

‘노벨상 4회를 석권하신 대문호께서 한번 보자고 메시지를 보냈다는데 삼고초려 그 이상을 해도 아깝지 않지.’

귀하신 분께 누추한 이 몸이 얼른 날아가야겠다.

“시간 약속 잡으세요. 그리고 그분을 만나려면 저도 말할 것들을 준비해야겠으니 당분간 전자결재는 우리 고진환 부사장님께서 수고를 해주셔야 한다고 전달해주시고요.”

“네?”

“어쩔 수 없는 일입니다. 사람에게 시간은 유한한 거고. 제게는 더욱 중요한 일이 생겼으니 간단한 결재들은 우리 부사장님이 해주셔야지 않겠습니까?”

“회장님. 부사장님이 일찍부터 회장님의 전권대리처럼 몇 배나 더 많은 일을 하고 있다는 걸 모르는 사람이 없을···”

“어허! 게다가 한국에서의 결재를 제가 지금 여기 미국에서 하는 게 말이나 됩니까? 애초부터 이 시스템은 이상했다니까요.”

“제발 직접 그 지시를 내려주시면···”

“그럼 저는 대문호님을 만날 준비를 하러 가보겠습니다.”

“회장님. 회장님? 회장님!”

원래 선장은 중요한 일을 처리하고 배의 방향을 결정하는 굵직한 일을 처리하면 된다. 나머지는 전문가에게 맡기자. 내가 만나는 사람들에게 여러 번 언급한 건 절대로 거짓말이 아니다. 특수한 몇몇 일정을 제외하면 나는 실무적으로 한가하고 시간도 여유로운 회장에 속한다.

‘그러니까 우리 고진환 부사장님 파이팅.’

아차. 이렇게 말하면 싸우자는 거냐고 하려나?

한국인이니까 힘내라고 잘 알아듣겠지, 뭐.

153. 더욱 탄탄하게

작가 레이첼 맥클레인.

1949년생으로서 최고 고참 작가이자 현재 활동 중인 SF 작가 중에서 가장 잘나가는 작가로 손꼽히는 대모랄 수 있는 인물이다. 그녀는 미네소타주에 속한 도시, 미니애폴리스 거주하고 있었다.

‘나 역시 그룹의 회장이니 그쪽에서 찾아오시죠.’라는 자존심 따위는 내세워서 무엇하랴. 나는 LA에서 단박에 직접 미니애폴리스까지 찾아갔다. 덕분에 미국에서 두 번째로 긴 강이자 세계에서도 길기로 유명한 미시시피 강과 아름다운 주변 경관도 보게 되었다.

[저와 직접 이야기하고 결정하시겠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첫인상은 길에서 봤으면 곱게 늙었으나 강단 있어 보이는 고집스러운 할머니로 보였을 여자다. 하지만 그녀가 어떤 인물인지 잘 알기 때문일까, 똑같은 주름과 눈빛에서도 ‘대작가라서 뭔가 달라.’라는 비범한 느낌을 제멋대로 느끼게 된다.

이래서 선입견이라는 건 참 영향을 크기 미치는 것 같다.

한편, 빤히 나를 보던 레이첼이 안경의 위치를 달리하며 내 얼굴을 다시금 쳐다보았다.

[GF 그룹의 회장님?]

[네. 맞습니다. 반갑습니다. 윤태식이라고 합니다.]

수행 인원을 보고는 그녀가 살짝 당황하며 말했다.

[오. 이런! 이토록 젊으신 분이 회장님이실 줄이야. 미안해요. 나이 지긋하신 분일 거라고 지레짐작한 나머지 실례를 범하고 말았네요. 정말 죄송합니다. 레이첼 맥클레인이라고 합니다.]

전혀 불쾌하지 않았다. 역지사지라는 말이 있지 않던가. 나 역시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그녀의 이름을 듣고 뭐 하는 인물인지 몰랐듯 그녀 역시도 나를 모를 수 있었다. 사람들에게는 저마다의 영역과 삶의 공간이 있기 때문이다.

다만, 정말 의외인 점은 이 자리가 레이첼의 요청으로 만들어졌다는 점이었다. 단순히 작가의식이 투철해서 타인을 무시한다고 보이지는 않는다. 그보다는 윤태식이라는 그룹의 회장이 아니라 데들리 스페이스의 전권을 가진 이라면 아무라도 상관없다는 의도로 보였다.

‘덕분에 하나는 확실하군. 돈은 아니야.’

나는 레이첼이 요구할 선택지들을 되짚으며 물었다.

[굳이 저를 보자고 하신 이유가 무엇입니까?]

잠깐 눈을 크게 뜬 그녀가 웃었다.

[얼굴 보고 인사하자마자 바로 본론이신가요? 이렇게 멀리까지 오셨는데?]

레이첼의 손이 동네의 한 가게를 가리켰다.

[이 집 피자가 맛있으니 일단 식사부터 하면서 이야기하죠. 일단 사람이 배가 불러야 뭐든 후하게 생각해주는 법이거든요. 제 배가 부르면 회장님에게도 유리하지 않겠어요?]

[제 배가 부르면 작가님에게도 유리한 부분이 있겠고요.]

[이런. 너무 티를 많이 냈죠?]

당초부터 이 가게를 염두에 두었는지 예약 주문이 되어 있었고 우리는 긴 기다림 없이 음식을 먹을 수 있었다.

‘역시 식당은 현지인 소개로 가는 게 최고긴 해.’

그녀의 말대로 피자는 상당히 맛이 좋았다. LA에 분점을 냈으면 대박이겠다, 싶을 만큼의 맛집이다. 그런데 콜라와 함께 먹는 내 모습을 보며 그녀가 연신 신기하다는 투로 말하는 게 아닌가.

[옆에 비서님이 꽤나 힘드시겠어.]

[힘들다니요?]

[식사하시는 걸 보니까 회장님 성격이 보통 급하신 게 아닌 거 같거든요. 행동 하나하나에 확인이 가득하니 결단력과 추진력도 대단해 보이고.]

느닷없이 치고 들어오는 그녀의 말에 김유천 비서실장은 말없이 크게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바로 옆에서 저리 인정해버리니 내가 뭐라 되묻는 게 머쓱해진다. 게다가 사람이 상대방이 어떤 스타일인지 분석하는 건 누구나 하는 일 아니겠는가.

적중률이 형편없느냐, 아주 뛰어나느냐의 차이는 있지만 말이다.

[티가 많이 납니까?]

[딱히 많이 나는 건 아닌데. 작가라는 직업 때문이라고 할까요? 일단 사람이든 사물이든 관찰부터 하는 버릇이 좀 있어요. 목소리의 크기, 손의 행동반경, 앉아있는 자세와 같은 부분을 묘사하는 것으로서 인물의 개성과 복선을 축조해나가듯이 말이지요. 특히···]

그녀는 말끔해진 접시를 눈짓으로 가리켰다.

[정말 맛있었습니다.]

[회장님 성격을 보아하니 더 시간 끌었다가는 답답해서 일어나실까 봐 내가 조마조마하네. 원래 정치인이랑 기업가들은 기다리는 것들을 잘 하지 않나요?]

[일반적으로는 그런 것 같더군요.]

연초에 있었던 대통령 만찬회. 그때의 기억을 되짚어보면 세상에서 가장 바쁜 사람들일 것으로 예상되는 사람들끼리 모여서 30분이면 끝날 대화를 가지고 몇 시간 동안 지루하게 대화를 했었다. 그런데도 지루하다는 분위기를 풍기는 사람은 단 한 사람도 볼 수 없었다.

[그냥 제가 좀 특이한 거라고 해두죠. 워낙 경영이니 정치니 하는 골치 아픈 것들을 좋아하지 않는 성격이거든요.]

[그런데도 회사를 이렇게 크게 키우셨어요?]

[어쩌다 보니 그리되더군요. 운도 따라 주었습니다.]

[작은 회사는 능력으로 세울 수 있지만 큰 회사는 정치가 필연이지요. 얽히지 않고는 불가능한데··· 다른 기업인들이랑 성격이 다르다 보니까 상대한 기업인들이 내성이 없어서 말려들었나? 아무튼, 성격 급한 회장님을 배려하는 의미에서 슬슬 본론을 꺼내 보죠.]

레이첼은 미소 지은 뒤 아무것도 묻지 않은 입가를 닦았다.

[저는 일단. 데들리 스페이스라는 작품의 세계관이나 설정이 상당히 마음에 들었어요. 하긴, 그랬으니까 이 자리가 만들어졌을 테니 이건 너무 당연한 이야긴가?]

[당연한 이야기라도 일단 직접 듣는 것과 예상하는 건 꽤 큰 차이죠.]

[그렇죠? 그래서 이 소설을 집필하는 것에는 꽤 흥미가 동하는 중이고 조건만 맞으면 저는 이 글을 쓰고 싶어요.]

‘본론으로 들어간다더니만, 아직도 안 끝났나.’

내가 있던 곳은 캘리포니아로서 서부 해안가의 남부다. 반면에 미네소타는 미국에서도 최북부에 있었다. 이렇게 먼 곳까지 나를 부르면서 마냥 긍정적일 리가 있겠는가.

요구하는 바가 있을 텐데 도대체 그 본론이 언제 나올지 의문일 정도다.

[그래서 드리는 말씀인데, 회장님은 제가 이 글을 쓰면 저에게 무엇을 해주실 수 있습니까?]

나는 객관식이 좋다. 주관식은 골치 아파서 싫다.

[작품을 집필하실 경우 받게 될 보상이라면, 작가님의 이름에 걸맞은 금액을 우선 생각해두고 있습니다만··· 단지 그것만은 아니실 테지요.]

[맞아요. 세계 최고의 부자 중 한 분이라고 하던데. 당연히 제 재산을 회장님과 비교하면 한참이나 부족할 겁니다. 비교하는 것 자체가 창피한 수준이겠죠. 그래도 저도 세계 어딜 나가도 꽤 부자에 속하는 사람입니다.]

안다. 휴고상을 몇 번이나 받은 소설가라서 몸값이 얼마이고 지금 상황이 어떠한지 대충 알아봤는데 당장의 재산만 해도 한화로 2,400억 원 정도 된다고 하더라.

한국 최상위의 재벌을 제외하면 어중간한 재벌들과도 비슷하게 견줄 수 있을 만한 재산.

게다가 그들처럼 자신의 자리를 위한 주식이 아닌 자산이기 때문에 따지고 보면 훨씬 유동성이 좋은 이쪽이 더 자유로운 진짜 부자일지도 모른다.

‘그러니 어르신. 본론을 시작해주세요.’

바라는 게 있으면 바로 말해 줬으면 좋겠다. 하지만 작가라서 그럴까, 나이 지긋한 분들의 공통적인 특징이려나. 대화하는 스타일이 확실히 달랐다.

[제가 돈이 필요해서. 혹은 돈을 더 벌고 싶어서 회장님과 만남을 원했을까요? 아니요. 저는 이제 돈 욕심이 없어요. 그리고 어차피 제가 쓰면 잘 팔릴 것이고 돈은 그것으로도 차고도 넘치게 들어올 겁니다.]

[그럼 무엇을 원하십니까?]

[데들리 스페이스를 원합니다.]

< 더욱 탄탄하게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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