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배우 >
[회사의 아티스트들이 해주겠다고 했으면 문제없을 테니 이제 연기에 들어갑시다.]
작업을 시작하자며 손짓하자 알버트가 말했다.
[잠깐만. 아직 올 사람들이 남았어.]
[또? 도대체 몇 명이나 부른 거야?]
지금까지 알버트가 데려온 배우들은 미국에서 이름만 대면 바로 누군지 얼굴을 떠올릴 수 있는 유명인사들이었다. 비록 전성기만 못하고 근래에는 하는 일이 없는 배우이기는 했으나 영화나 드라마도 아닌 게임 업계에서는 쉽사리 섭외할 수 있는 이들이 아니다.
‘인맥의 파급효과가 무시무시하네. 이러다 할리우드 배우들 총집합이라도 되는 거 아닌가?’
다행히도 이런 내 우려는 금방 종식됐다.
[핫 스타에서 우리를 인터뷰 하러 올 거야.]
[투데이 핫 스타?]
[맞아. 그거.]
투데이 핫 스타는 미국에서 가장 잘나가는 연예인의 활동 등을 촬영하고 인터뷰하는 코너다. 한국으로 치면 한밤이나 ‘사랑해요 연예가중계’로 유명한 방송인 셈이다.
[그거 영화 개봉 같은 걸 할 때나 광고용으로 하는 거잖아.]
[그렇지.]
[그런데 여기를 왜 촬영해?]
[하하하! 이런 게 바로 나의 대단함 아니겠어? 게임 더빙을 한다고 슬쩍 말했거든. 그러니 ‘이때다!’하고는 연락주고 아주 난리가 아니었다고. 알다시피 전 세계의 모든 방송국이 나를 인터뷰하고 싶어서 안달이 났잖아.]
알버트의 자화자찬이 꼴사납게 보일 수 있으나, 딱히 과장되거나 틀린 말은 아니었다.
라이언 맨의 폭발적인 인기 덕분일까? 고난을 극복한 드라마틱한 성공 스토리 탓이려나.
일반적으로 배우들의 인터뷰는 영화 개봉 전에 많지만, 알버트는 개봉한 후에 더 큰 관심과 인터뷰 요청이 들어오는 중이었다. 그래서 의리를 지킨답시고 영화 개봉 전에 인터뷰 요청을 했던 방송사들에만 인터뷰에 응해줬다는 말도 들은 기억이 있다.
[여기도 영화 개봉 전에 인터뷰했던 곳이야?]
[맞아. 뭐, 핫 스타에서 인터뷰했던 건 아니지만. 결국 이 방송사에서 인터뷰한 거니까 거기서 거기라고 봐도 되겠지.]
아무래도 상관없다. 배우가 더 늘어나는 거라면 걱정이었을 테지만, 그게 아니라 배우들이 우리 게임에 참여하는 현장을 촬영하고 추가 인터뷰를 하는 쪽이라면 무조건 오케이다.
‘공짜로 우리 게임을 홍보해주겠다는데 이걸 왜 막겠어.’
무려 방송사에서 해준다. 이 정도면 온 우주가 데들리 스페이스의 성공을 팍팍 후원해준다고 믿어질 정도다. 외려 게임 외적인 요소들이 충족된 만큼 ‘각별히 신경 써서 게임성을 더 높여야겠어.’라는 책임감마저 들었다.
잠시 후, 알버트가 이야기 한 대로 방송사 직원들이 스튜디오에 찾아왔다. 저들이 촬영 준비에 들어가자 모션 캡처의 전문가들이 배우들의 얼굴 표정을 잡아내기 위한 트래커들을 알버트와 나머지 두 배우의 얼굴에 붙였다.
[뭐야? 옷은 안 갈아입어?]
[뭔 옷?]
알버트는 ‘그거 있잖아, 그거.’라면서 말했다.
[다른 게임 제작할 때 보니까 반지 시리즈 영화처럼 쫄쫄이 입고 거기에도 이것저것 붙이고 그러던데?]
아마도 모든 동작을 잡아내는 모션 캡처를 기대한 모양이다. 그러나 이미 그런 동작들은 모두 개발이 완료된 상태다. 오히려 굳이 이걸 알버트나 다른 배우들에 맞춰서 새로이 제작하면 돈과 시간을 낭비하는 셈이 된다.
[그럴 필요가 없으니까.]
[필요가 없다니?]
[그건 끝났어.]
[그럼 지금 우리는 뭐 하는 건데?]
[표정이랑 목소리 연기. 몸 전체의 모션 캡처는 말고.]
[엥?]
[사실, 표정도 굳이 캡처할 필요가 없는 상황이거든. 그래도 배우가 바뀌었으니 그 얼굴에 맞는 표정을 넣으면 더 좋을 거 같아서 이 부분만 추가하는 거야. 하지만 몸까지 전부 새로 제작하면 게임 출시를 연기해야 해.]
이미 우리가 바이셜 게임즈를 인수하면서 데들리 스페이스의 출시가 몇 개월이나 연기된 상태다. 여기에서 또다시 출시 연기를 하면 게이머들의 기대감은 하락할 것이다. 자연스레 이는 판매량의 저조로 이어질 가능성이 매우 크다.
[이러면 그냥 성우랑 똑같네?]
[그리 볼 수도 있지만, 표정 연기는 해야 하거든. 게다가 애당초 네가 저번에 말했었잖아. 연기할 게 별로 없어도 충분히 임팩트를 줄 수 있다고. 설마 아니었던 건 아니지?]
[물론! 우린 배우라고. 당연히 표정만으로도 충분하지!]
약간 실망했던 표정의 알버트는 내 말에 자극받았는지 금방 의욕적인 표정을 지었다.
[똑똑히 지켜봐. 할리우드의 스타가 어떤 사람들인지 보여주겠어. 우리는 이미 목소리만으로도 올킬이 가능한 사람들이라고. 다만··· 젠장!]
[왜?]
[인터뷰 다시 해야 할 거 같아서.]
[인터뷰를 이미 했어?]
[다 했지. 원래 인터뷰 먼저하고 촬영하는 거야.]
나 같은 평범한 사람한테는 이상한 이야기였다. ‘순서가 바뀌어야 정상 아닌가.’라는 생각이 불현 듯 들었다. 그러나 회차별 순서대로 촬영하는 드라마가 없다는 건 알고 있으니 이와 비슷한가 보다 하고 대충 이해했다.
[이전의 인터뷰가 어땠길래?]
[반지 시리즈의 골룸처럼 막 그런 연기를 하는 거라고 엄청 화려하게 인터뷰했단 말이야. 근데 이렇게 될 줄은 몰랐지!]
[···오! 그럼 안 되겠네. 좋았어. 인터뷰 시간을 확보해줄 겸 최대한 빨리 촬영 끝내도록 할게. 자, 파이팅하자고!]
[뭐? 파이팅은 무슨 파이팅이냐? 싸울 놈이 어디 있다고. 나보고 내면의 나와 싸우라는 거야?]
한국식 응원인 ‘파이팅’을 이해 못 하는 알버트를 뒤로 한 채. 김유천 실장과 나는 구석의 공간으로 자리를 옮겼다. 이제부터는 배우들의 시간이니 나 같은 이들은 빠져줘야 한다.
넌지시 김유천 비서실장에게 물었다.
“방송국 직원들에게 주의 사항들은 확실하게 고지했습니까?”
영화처럼 예민하게 ‘배우들의 연기 장면은 촬영하면 안 됩니다.’ 와 같은 주의를 줄 필요는 없다. 하지만 게임 내용의 스포일러가 될 만한 것들은 방송에서 나가지 않도록 단단히 조심할 필요가 있었다.
“물론입니다. 딱히 제가 하지 않아도 되었는데 이미 마이코닉스에서 고지한 상태였거든요. 방송으로 나갈 수 있는 것과 없는 것 등등을 설명하느라 저들이 스튜디오에 늦게 도착한 거였습니다.”
보이지 않는 곳에서 우리 직원들이 열심히 뛰어다니고 있었던 모양이다.
‘촬영팀이 추가 돼서인지 분위기가 제법 다르긴 하네.’
평소 이런 촬영을 할 때에도 카메라가 있기는 했지만, 그거야 작업의 효율을 위한 카메라였을 뿐이다. 그런데 오늘은 방송국에서 나와서 함께 하다 보니 영화나 드라마 현장에 온 기분이 들었다.
그래서일까?
“회장님. 초보인 할리우드 배우보다 숙련자인 성우분들이 오히려 평소랑 다르게 많이 긴장한 것 같습니다.”
알버트 때문에 묻혀 있었지만, 오늘 촬영에는 알버트와 두 배우만이 참여하는 것이 아니다. 그 외의 배역에 들어갈 성우들도 함께하는 자리다. 그런데 저들의 얼굴에는 수많은 카메라로 인한 긴장감이 역력하게 드러나고 있었다.
“그래도 다들 베테랑들이잖습니까. 자기 차례가 되면 멀쩡히 잘할 겁니다.”
“그건 그럴테지만, 뭐랄까··· 확실히 할리우드 배우들은 다르구나, 하는 생각이 들어서요.”
‘확실히 그건 그래. 카메라를 전혀 부담스러워하지 않고 있어.’
그러나 자세히 보니 다른 느낌이 들었다. 이제야 숨통이 트이는 것 같다는 표정을 짓는 배우들에게는 단순히 ‘편하다’는 감정 너머로 ‘반갑다’라는 표정이 보였기 때문이다. 아마도 각자의 우여곡절로 자중 아닌 자중 생활을 해야 했던 지난 시간이 있었기에 저럴지도 모른다.
[오프닝 촬영합니다. 이곳에서는 전반적인 표정 연기가 메인이고 목소리는 따로 다시 녹음할 겁니다. 그러니 표정 연기에 집중해주시면 됩니다.]
감독의 사인이 떨어졌다.
처음 시작은 아서의 애인 역할을 맡은 캘리 브룩하트. 과거 엘리스 앤 빌의 여주인공이었던 그녀였다.
[아서··· 나야. 자기에게 말하고 싶었는데··· 미안해······.]
[대체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건지 모르겠어.]
[여긴 완전히 엉망이야··· 너무 이상해. 그 사소한 일이 이런······.]
순식간에 몰입한 배우들의 영향일까, 많은 이목이 쏠린 탓일지도 모르겠다.
팽팽해진 긴장감이 이전과는 다른 분위기를 자아냈다.
특히 캘리 브룩하트는 조금 전까지 알버트와 웃으며 대화하고 있던 사람이라는 것을 믿을 수 없을 정도로 혼란과 안타까움, 애틋함이라는 복합적인 감정이 단어와 표정에 절절히 담겨 있었다.
실로 완벽하게 배역에 몰입했다. 김유천 비서실장이 내게 소곤소곤 말했다.
“확실히 연기자가 다르긴 다른 것 같습니다. 솔직히 목소리만 두고 이야기하면 성우들이 더 낫긴 한데··· 우와··· 역시 연기자들이네요.”
맞다. 나도 김유천 비서실장과 같은 감상이었다. 연기하고 있는 것을 이미 다 알고 있는 상황에서도 ‘혹시 무슨 일이 생긴 건 아닐까?’라는 생각이 들 정도의 힘. 이건 표정 연기의 위력이었다.
사실 알버트야 사람이 가벼워서 그렇지 배우로서의 연기력은 그 누구도 가볍게 이야기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런 만큼 그는 조금도 걱정하지 않았지만, 나머지 두 사람은 약간의 우려가 있기는 했다.
어쨌거나 왕년의 스타였을 뿐이고 화제성은 보장됐지만 실력은 미지수이지 않았던가. 그러나 클래스는 영원하다는 말은 정말 옳은 소리였다.
‘전혀 걱정할 필요가 없어.’
특히나 세 사람 중에서 가장 연기의 비중이 높은 위로라 호로위즈는 신뢰감이 넘치는 톤으로 완벽하게 보는 이들을 감탄시켰다.
[몇 번이나 봐야겠어요? 참, 사무치시네.]
[이제 다 왔으니 걱정하지 말아요. 도착하면 만날 수 있을 겁니다.]
[훗. 둘이서 할 말이 산더미겠네요.]
코웃음에 단단하고 안심이 되는 느낌이 들 정도다.
더할 나위 없이 든든한 동료의 모습.
‘놀라워.’
이는 대단히 큰 역할이다. 진행을 이어나가며 신뢰감 있는 동료라는 느낌을 주는 게 아니라 초장부터 의심의 여지가 없도록 꽉 잡았다. 그만큼 후반의 배신이라는 반전은 더욱 큰 충격을 안겨줄 것이다.
그리고 내 고정 관념 하나가 흔들렸다.
‘애니메이션이야 아직은 성우의 영역이 맞긴 한데, 게임은 이제 성우보다 연기자들을 우선 섭외대상으로 넣어야 하는 거 아닐까?’
편견이라면 편견일 나만의 고리타분한 생각. 그것은 성우의 영역에 어설픈 연기자나 아이돌 같은 부류가 끼어들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 관념은 한국에서 본 다큐멘터리나 애니메이션 중 전혀 어울리지 않는 목소리와 어눌한 발음의 작품을 다수 보며 든 생각이기도 하다.
‘수준 이하의 더빙이 오죽 충격적이었어야지.’
잘하는 부류가 없는 편은 아니지만, 그런 사례는 드물다. 누구나 말은 할 수 있지만 듣기 좋은 노래를 부르기는 어려운 것처럼 성우의 연기 역시 마찬가지다. 그런데 게임 부분은 이제 바뀌어야 한다는 깨달음이 내게 다가온 것이다.
‘목소리 녹음이 절대적인 애니메이션과는 달라. 이? 게임은 영화와 크게 다를 게 없어졌거든.’
모션 캡처의 범위가 좁았던 시절까지는 여전히 성우의 영역이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제는 자연스러운 동작 때문만이 아니라 각 프레임 하나하나를 제작하는 것보다 모션 캡처로 연기하는 편이 시간과 돈을 절약하는 시대가 왔다.
완성도를 위한 선택이 아닌 필수가 되어버린 것이다.
‘표정만으로도 감정 전달력이 이렇게나 높아졌는데, 만약 정말로 전신 모션 캡처를 했다면 어땠을까? 발매일을 연장한 상태만 아니었으면 진짜 싹 재촬영하고 싶어질 정도야.’
풍부하게 바뀔 데들리 스페이스의 후속작이 더 기대될 정도다.
이런데도 게임 제작에 성우를 고집할 필요가 있을까?
‘없지!’
나는 김유천 비서실장에게 손짓하고는 작게 말했다.
“서브웨이 2033이랑 데스 아너드 개발진에게 전달하세요. 게임에 어울리는 배우들의 목록을 뽑으라고. 그리고 목록이 만들어지면 바로 섭외할 수 있도록 준비해주시고요.”
“회장님. 개발진이 직접 목록을 꾸리면 마냥 자기들이 좋아하는 배우들로 목록을 만들 수도 있습니다. 그럼 비용이 상당하지 않겠습니까?”
왕년의 유명인사를 데리고 데들리 스페이스를 촬영하고 있으나, 이건 예외다. 알버트라는 거물은 친구 페이만 요구한 채 거의 봉사활동이나 마찬가지로 참여 중이다. 게다가 위로라 호로위즈와 캘리 브룩하트 역시도 성우들보다 더 낮은 개런티를 받았는데 이건 전부 알버트 코인의 덕분이었다.
‘남들도 이렇게 쓸 수는 없으니 상한선을 잡아줘야겠지.’
호기롭게 ‘작품성을 위해서라면 얼마든지!’라고 하면 대장부답겠지만, 그런 호구 멍청이 짓을 자존심과 맞바꿀 이유는 없다.
“주인공은 3억, 주요 배역은 1억, 나머지는 성우진으로 채워도 되니 그렇게 맞출 수 있는 배우로 섭외합시다.”
“알겠습니다.”
이후 우리는 한 편의 영화를 감상하듯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연기에 빠져들었다. 잘 아는 스토리였는데도 하이라이트가 나올 즈음이 되어야 ‘이제 막바지구나.’ 싶을 만큼 몰입도가 좋았다.
[아서. 정말로 내가 그냥 떠나갈 거로 생각했던 건 아니지?]
[그럴 수 없어. 난 마커를 챙겨서 떠나야 하거든.]
[이를 어쩌나. 네가 마음에 들기 시작했었는데. 뭐~ 제정신이 아니기는 하지만.]
[뭐야? 지금 네 상태가 어떤지도 모르는 거야? 이런··· 너 자신을 다시 되돌아보는 게 어때?]
[아~ 그렇지. 그녀의 영상을 보는 게 이해가 빠르겠어.]
[이번에는 꼭 끝까지 보라고.]
위로라 호로위츠는 지금까지의 신뢰감 넘치는 목소리와는 완벽하게 달라진 냉소적인 어조로 바뀌었다. 이 크기는 정확히 그녀가 주입한 신뢰의 크기만큼 컸고 묘한 위기감마저 들게 했다.
이윽고 가장 처음 애절하게 말하던 캘리 브룩하트의 목소리가 북받치는 서글픔을 담고 들렸다.
[여긴 완전히 엉망이야··· 너무 이상해. 그 사소한 일이 이런······.]
[이렇게 끝내고 싶지는 않았어. 한 번만이라도··· 꼭 한 번만이라도 다시 만나길 원했는데···]
[아서. 사랑했어··· 언제나···]
사랑한다는 말이라기에는 너무나도 슬픈 캘리 브룩하트의 연기.
모두가 침을 삼키게 되는 것도 잠시, 처음부터 죽어있었던 연인의 메시지에 알버트가 조용히 흐느꼈다. 나를 비롯한 모두가 숨 쉬는 것조차 잊고 몰입하고 있을 때, 훈계하듯 짚어주고 씹어 뱉듯이 말하는 위로라 호로위즈가 말했다.
[하지만 걱정하지 마. 네가 제정신이든 아니든 마커는 이제 내 손에 들어왔으니까.]
[이제 이 빌어먹을 곳과도 안녕이야. 잘 있어, 아서.]
나는 크게 반성했다.
“실장님. 주연에 5억까지 쓰겠습니다.”
“탁월하신 선택이십니다.”
저런 명품 연기가 더해지는데 이만한 개런티?
전혀 아깝지 않다.
< 배우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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