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999년 게임 스타트-441화 (441/577)

< 배우 >

‘상징적인 게임은 밖으로 나오는 일이 없어.’

상징이 됐다는 것은 그만큼 경제적으로도 성공을 거두었다는 의미이고 자신들만으로도 충분한 명성과 자본을 가지고 있다는 뜻이다. 일렉트릭 아트에서 그렇게 인수하고 싶어 하는 T3처럼 말이다.

일본의 게임인 판타지 7의 리메이크 발표가 됐을 때, 미국 전체가 들썩였다. 발표 자체가 나오기 전이고 고작 게임 주인공의 칼이 영상에 등장했을 뿐인데도 수많은 게이머가 울먹이며 자신의 눈을 믿지 못했다.

북미 아이스 스톰의 메피스토 시리즈는 3편의 개발 발표를 했을 때, 행사장이 무너지진 않을까 걱정될 정도로 엄청난 비명이 쏟아져 나왔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떨까?

GF는?

‘아직 그 정도의 IP는 단 하나도 없어.’

안다. 지금 당장만 그러할 뿐, 조금만 더 기다리면 우리도 그런 게임을 가지게 된다.

드래곤 소울, 몬스터 프레데터스, 워쳐, 서브웨이 2033, 데들리 스페이스 등등 수많은 게임이 우리를 그런 위치로 가져다줄 것이다. 그러나 최소 10년은 지나야 가능한 일이고 그때쯤이면 G 크로스도 후속 기종의 판매가 꽤 되어 있을 것이다.

그래서 하이드 소프트를 인수해야 한다.

‘당장 이슈가 될 IP를 가지고 싶어.’

내가 욕심을 내는 이유가 바로 이것이었다.

“돈이 얼마가 들던 상관이 없습니다. 두 회사 모두 우리 GF의 자회사로 볼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알겠습니다, 회장님. 진행하도록 하겠습니다.”

어설프게 내가 나서서 얼굴 보고 인수하려고 노력할 필요가 없는 회사다. 내가 직접 나타났다고 해서 감동할 사람들도 아니고. 이런 회사들은 그냥 김유천 실장이 나서서 돈과 서류로 정리하는 것이 나았다.

‘좋았어. 내 일을 마쳤으니 이제 놀러 가야지~’

진지한 업무는 딱 여기까지!

“그럼. 전 이만.”

가볍게 의자에서 일어났다.

“어디 가십니까?”

“이런. 실장님이 제 스케줄을 모르면 어떡합니까?”

“회장님··· 공식적인 스케줄이야 제가 먼저 알겠지만 개인적인 스케줄은 말씀을 해주셔야 알죠.”

‘너님 때문에 탈모가 온다고!’라는 눈빛에 나는 냉큼 대답해줬다.

“모션 캡처 스튜디오에 갑니다.”

“모션 캡처라면··· 아! 그날이 오늘이었군요.”

데들리 스페이스.

알버트와 위로라 호로위즈고 모션 캡처 연기를 하는 날이 바로 오늘이다. 그런데 김유천 실장의 반응이 조금 이상했다.

“회장님이 가신다면 저도 어쩔 수 없군요. 회장님이 가시는 곳이라면 저도! 당연히! 따라 나서야 하지 않겠습니까?”

비장함과 뿌듯함. 기대가 어린 표정이다. ‘기필코 저도 갈 겁니다.’라는 강력한 의지마저 보인다.

“왜 이래요?”

“그게··· 위로라 호로위즈 씨가 오신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그랬습니다만?”

“가위 손의 그녀가 온다는데! 실물을 영접할 수 있다는데! 어떻게 안 갈 수 있겠습니까?”

“가위 손?”

“모르셨습니까?”

몰랐다. 이건 진짜로 몰랐다.

‘가위 손을 두고 비틀주스가 대표작이라고 생각했다니.’

물론 비틀주스가 부족한 영화라는 건 아니지만, 그래도 상대가 가위 손이라면 참 미안한 이야기가 아닌가?

“이런 갑시다.”

이야기를 듣고 나니 더욱 궁금해진다.

나는 몰랐던 열성 팬을 대동하고 얼른 이동했다.

*

위로라는 휘둥그레진 눈으로 알버트를 보았다.

[여기 뭐야? 이거?]

[뭐가?]

[게임 연기하는 거라면서?]

[그랬지?]

[그런데 이 스튜디오는 뭐야? 그냥 더빙하고 그러는 거 아니었어?]

갓 도시에 온 사람처럼 연신 주위를 둘러보는 그녀를 보고 알버트가 웃었다.

[너는 나보다도 한참이나 젊으면서 어떻게 아직도 이런 걸 모르고 사냐?]

[내가 뭘?]

[요즘 게임이라는 건 영화와 같은 종합 예술이야. 예전처럼 그냥 ‘띠디리~’ 뭐 이런 음악이 나오고 만화 같은 그림의 그런 게 아니라고.]

[진짜야?]

알버트의 설명을 들으면서 GF의 모션 캡처 스튜디오를 둘러보는 위로라는 연신 놀라워했다. 그런 그녀를 보며 알버트는 신바람이 나서 윤태식에게 듣고 자신이 알게 된 이야기들을 자랑스럽게 알려주었다.

[그러니까 내가 이번에 촬영한 영화 알지?]

[라이언 맨? 그걸 어떻게 모르겠어. 난 고작 절도지만, 넌 마약쟁이로 완벽하게 망한 인생이었는데 그 영화 하나로 제대로 인생 역전이 됐잖아. 내가 그 이야기 듣고 얼마나 배가 아팠는지 알아?]

작품을 보면 별다른 접점이 없는 두 사람임에도 대화를 보면 꽤 친분이 있는 사이에서나 할법한 대화가 자연스럽게 이어졌다. 아마도 둘 다 한 시대를 대표하던 하이틴 스타였고 또 범죄 경력을 통해서 커리어가 완벽하게 무너진 케이스들이라 그만큼 친밀감이 있는 모양이었다.

[그 영화도 여기서 촬영했어.]

[이런 데서 영화도 촬영해? 이렇게 이상한 곳에서?]

[신기하지? 요즘은 게임이랑 영화랑 다를 게 없어. 게다가 너, 가장 성공한 영화가 가위 손이지?]

[···그 영화는 얘기도 꺼내지 마.]

[에이. 내가 하려는 이야기는 그게 아니야. 가위 손이 얼마 벌었어?]

[9천만 달러 정도?]

정확히 말하자면 8,600만 달러지만, 원래 낚시꾼들은 자신들이 잡은 물고기가 평생 자라고 있다고 말하지 않던가? 잡을 때는 30㎝이었으나 놓아주고 1년이 지났으니 자신이 잡은 건 지금쯤 더 성장한 50㎝짜리 잉어였다는 것처럼 말이다.

그러니 이런 말을 할 때 반올림 정도는 애교다.

[여기서 개발하는 게임의 매출액이 얼마나 될 거 같아?]

[그걸 내가 어떻게 알아?]

퉁명스러운 대답에 알버트가 미소를 지었다.

[1억 달러가 넘어.]

[뭐? 1억!?]

알버트 역시 윤태식과 함께하기 전에는 전혀 몰랐던 내용이고 당시의 그도 저런 반응을 보였었다. 그래서인지 자신과 똑같이 반응하는 위로라의 모습에 더욱더 즐거워하고 있었다.

[그러니까 잘 해봐. 이 게임이 성공하면 새로운 발판이 될 수도 있어. 그리고 혹시 또 알아? 여기서 한 연기가 마음에 들면 회사에서 다음 애니메이션에 캐스팅할지도 모르지.]

[게임 회사에서 애니메이션도 만들어?]

[뭐야? 게임은 몰라도 마이코닉스는 알아야 하는 거 아냐?]

연기자들 게다가 나이가 조금 있는 여성 연기자라면 게임에 대한 정보력이 부족할 수 있다. 그러나 애니메이션 회사에 대한 정보력이 부족한 것은 조금 다른 문제다.

[마이코닉스는 알아.]

[그런데도 지금 그런 말이 나와? 여기가 마이코닉스야.]

[무슨 소리야?]

놀리지 말라는 대꾸를 했던 위로라가 알버트의 표정을 보고는 되물었다.

[진짜야?]

[진짜야.]

[마이코닉스라고!? 여기가!?]

[응.]

[그러니까 지금 할리우드 3D 애니메이션계의 투톱으로 있는 그 마이코닉스 말하는 거 맞지?]

[맞다니까 그러네.]

[게임회사라며?]

[게임 회사지. 그런데 그 게임 회사가 바벨도 가지고 있고 마이코닉스도 가지고 있고 넷플렉스도 가지고 있어.]

[···우와. 전부 다?]

[전부 여기 꺼야. 그중에 마이코닉스는 이 모든 곳에서 만드는 컴퓨터 그래픽에 관련된 예술에 관한 모든 것을 주관하는 곳이고.]

[나 지금 엄청난 곳에 와 있었구나······.]

[당연하지!]

바벨 소속이었지만, 알버트는 늘 자신이 GF 소속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런 만큼 그는 위로라의 이런 반응이 매우 즐거웠다.

[나 사실 게임 연기하라고 했을 때, 엄청 속상했었거든. 내가 이제는 이런 연기를 해야 하는 배우가 됐구나, 같은 거.]

한국에서는 드라마 배우가 영화도 하고 영화배우가 드라마도 하고, 별다른 벽 없이 업계를 오간다. 그러나 미국에서는 그렇지 않았다. 모두가 그런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영화배우들은 드라마 배우들보다 높은 급의 배우라는 인식들이 있다.

그런데 드라마도 아닌 게임에 출연하라니!

이건 영화배우에게 굉장한 몰락과 같은 기분이 들었을지도 모른다.

[그런 말이 어디 있어? 연기자가 연기하는 곳을 가려? 그러는 거 아니야. 다신 그런 소리 하지 마. 알았어?]

[으응······.]

이런 그녀의 마음을 모르는 것은 아니었지만, 그럴수록 더욱 힘들어진다는 것을 이미 경험으로 알고 있던 알버트는 모르는 척 괜히 위로라를 질책했다. 이것은 어쩌면 몰락 이후로도 영화판에만 얼굴을 내밀었던 자신을 향한 책망이기도 했다.

그즈음, 보디가드와 동양인 회장으로 보이는 이들이 들어왔다. 특이한 점은 경호원으로 보이는 인물이 뒤에서 따라오지 않고 앞에서 일행을 이끌고 있다는 점이었다.

[뭐야. 오늘 연기하는 날이라고 왔는데 오자마자 분위기가 왜 이래?]

[우리 윤 회장 왔어?]

위로라는 알버트가 크게 반기는 인물을 보고 알 수 있었다. 저 젊은 경호원처럼 보이는 남자가 윤태식 회장이라는 것을 말이다.

*

[왔지. 왔는데. 왜 오자마자 사람을 잡고 있냐고.]

[별거 아냐. 신경 쓰지 마. 우리끼리 그냥 이야기 좀 하고 있던 거야.]

[너무 부정하니까 오히려 의심스러운데?]

[하하! 인사해. 여기는 위로라 호로위즈. 그리고 이쪽은 아까 말한 게임사인 넷플렉스, 바벨, 마이코닉스 그 전부를 가지고 있는 회장님.]

‘왜 이렇게 거창해?’

짓궂은 알버트의 표정을 보니 위로라를 두고 또 뭔가 장난을 치던 중인 게 틀림없다. 아니나 다를까, 각종 회사를 가진 물주라는 소개 방식 때문인지 위로라는 굳은 모습으로 제대로 인사를 이어가지 못했다.

‘할리우드 스타의 삶을 잃고 너무 오랜 시간을 보냈나 보네.’

제 잘난 맛에 사는 할리우드 스타라면 대기업의 회장을 만나는 정도로 이렇게 얼어붙을 이유가 없었다. 하지만 차차 익숙해지면 바뀔 모습이 될 것이다.

‘그나저나 이 사람도 나이가 들기는 드는구나.’

젊을 때는 전 세계의 수많은 남성의 마음을 설레게 했던 미모의 여성.

그러나 지금은 세월의 흐름이 느껴진. 비교적 연예인들이 자신의 나이보다 어려 보이는 외모를 자랑한다는 점에 비추어보면, 위로라는 꾸준히 관리를 받지도 않고 딱히 관리하고자 노력하지도 않은 것 같았다.

하지만 얼굴에 세월의 흔적이 진하게 묻어 있음에도 그녀가 가진 특유의 분위기는 여전했다. 이런 걸 보고 폼은 순간이지만 클래스는 영원하다는 식의 표현을 하나 보다. 이 분위기만 잘 살릴 수 있다면 충분히 훌륭한 작품이 나올 수 있을 것 같다.

[그럼 슬슬 시작해 봅시다. 대본은 다 읽어 보셨죠?]

[네.]

[아! 그리고 한 사람 더 있는데······.]

의뭉스럽게 말을 흐린 알버트가 새로운 인물을 소개했다.

[내가 이 친구에게는 미안한 마음이 좀 많거든. 그런데 이 친구도 요즘 많이 힘든 거 같더라.]

살그머니 등장한 여성.

그녀를 보고 ‘또 왕년의 하이틴 스타인가? 근데 누구지?’ 싶은 나와는 달리 김유천 실장은 단박에 소리쳤다.

“맙소사! 앨리스! 앨리스가 내 눈앞에!”

조금 전까지만 해도 가위 손의 그녀를 본다면서 행복에 겨워하던 그는 더 이상 위로라를 눈에 담지 않았다. 이 남자, 알고 보니 여배우들한테 엄청 팬심이 넘치는 인물이었다.

“누구죠?”

“아이고! 회장님. 그녀를 모르시다니요!”

덕후의 심기를 잘못 건드렸나 보다. 김유천 실장이 ‘전하! 그럼 아니 되옵니다!’라고 고하는 신하처럼 알려주었다.

“제가 미국 생활을 하면서 유일한 낙 중 하나였습니다. 바로 그녀가 주인공이었던 앨리스 앤 빌이었죠! 참고로 앨리스 앤 빌이면 알버트가 다우니 주니어가 촬영 도중에 마약 혐의로 잡혀갔던 그 드라마입니다.”

이제 대충 알 것 같다.

미국에서 선풍적인 인기를 누렸던 드라마인 앨리스 앤 빌.

원래의 각본대로라면 남주였던 알버트와 여주 앨리스가 결혼하면서 해피엔딩으로 끝났을 드라마다. 그러나 지금은 모두가 잘 아는 대로 알버트가 촬영 도중에 경찰에게 잡혀다는 바람에 앨리스는 얼결에 싱글로 드라마가 끝나고 말았다.

미안함이 많은 배우.

지금은 요즘 많이 힘든 인물.

알버트가 그녀를 소개하며 했던 말에는 이런 이유가 있었다. 그런데 나는 헛웃고 말았다.

‘게임 시나리오를 전혀 모르니 이런 문제가 생기네.’

높은 포텐을 가진 왕년의 배우들이 인맥의 힘으로 대거 나와 주었다. 여기에 불만은 전혀 없다. 그런데 데들리 스페이스는 구조요청을 한 연인이 알고 보면 이미 죽어 있었다는 스토리적인 반전을 가진 게임이다.

반면에 앨리스 앤 빌은 드라마의 팬이라면 알버트와 앨리스가 다시 만났을 때 연결되기를 원할 것이다. 묻힌 배우 되살리기 또는 도움을 주려는 의도에서 전혀 반대될 수도 있었다.

슬쩍 다시 생각해보라는 뜻을 우회적으로 표현해 보았다.

[갑자기 이러면 곤란해. 디자인도 다시 다 따야 하는 거거든.]

[그건 걱정 안 해도 돼. 이미 다 해뒀어.]

[뭐? 이미?]

[응. 바쁜 회장님 대신 내가 우리 회사에 가서 미리 이야기해 봤거든. 그러니까 다들 좋다고 해주던데?]

‘우리 회사 어디? 버닝 아웃? 마이코닉스? 그러니까 배우들을 데리고 GF 순방이라도 했다는 거야? 도대체 어디를 간 거래?’

누가 보면 알버트와 내가 공동 창업자인 줄 알 만큼 라이언 맨 이나 게임, 회사 자랑을 하는데 전혀 거리낌이 없는 모습이다.

[그··· 그럼 됐네.]

[하하!]

좋다고 해준 사람 중에는 분명 앨리스&빌을 본 사람이 있을 텐데, 그 사람들이 좋다고 했으면 괜찮을 것도 같다. 십중팔구는 사무실에서만 일하는 개발자들이 배우들의 부탁을 받고는 ‘무조건 가능합니다!’라며 기뻐했으리라 보지만, 자기들이 원한다니 어쩌랴.

‘아, 몰라.’

대신 하나는 확실하다.

화제성과 홍보 포인트는 본래 역사보다 끝내줄 것이다.

< 배우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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