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배우 >
데들리 스페이스의 제작진들은 전지전능한 존재가 세상을 구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 주변 어딘가에 있을 것 같은 평범한 존재가 세상을 구하는 캐릭터를 만들고 싶어 했다. 또한, 이를 통해 플레이어들이 더욱 큰 긴장감과 몰입감으로 호러의 참맛을 느낄 수 있기를 원했다.
그래서 콘셉트가 최대한 평범하게 아서 클라크를 만들었다는 건데··· 이 게임을 해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이 대목에서 코웃음을 칠 것이다. 기술자라는 직업의 평범함은 누구나 공감할 수 있다.
하지만 아서 클라크는 절대로 평범하지 않다. 시리즈 1, 2, 3 그 어떤 것을 플레이해 보아도 마찬가지다. 평범함과는 아주아주 거리감이 있는 주인공이라는 사실을 말이다.
‘괜히 공돌이계의 투신이라고 부르는 게 아니라니까. 애초에 혼자서 세상을 구해야 하는 게임의 주인공이 평범하다는 건 전제 자체가 불가능해.’
알버트라는 한창 주가를 올리는 배우.
라이언 맨 이라는 대형 프랜차이즈의 캐릭터.
시도는 평범함이었지만 결과물은 안드로메다급으로 멀어진 데들리 스페이스의 제작진과 기획 의도.
‘그래, 어차피 게이머들이 평범한 주인공으로 인식할 수 없다면 차라리 이 캐릭터와 가장 어울리는 캐릭터 디자인과 목소리. 여기에 알버트의 연기력까지 더해보는 거야. 이러면 훨씬 몰입감이 올라갈 게 틀림없어.’
현실의 알버트는 ‘심심해!’를 외치며 매일 찾아오는 한량이다. 땅콩과 블루베리 따위를 끝도 없이 먹으면서 기웃기웃하는 게 일상인 잘생긴 백수였다. 그러나 세간에 익숙한 그의 이미지는 라이언 맨 이라는 공돌이계의 끝판왕이었으니 딱 맞는다.
심지어 데들리 스페이스 1편에서 아서 클라크의 나이는 2508년을 기준으로 43세!
현재인 2008년의 알버트는 미국식으로 43세다.
‘진짜 이렇게 딱 맞아떨어지기도 힘든데.’
소름 돋는다. 이거야말로 신께서 점지하신 최고의 조합이다.
[아주 좋은 생각이야. 팝이 해준다면 나야 좋지.]
[하하! 그래 보자고. 게다가 나 말고도 여기 어울리는 배우들이 떠오르는데 더 데려와도 돼?]
[배우들?]
[영화 에이리언에 출연한 배우들이랑 꽤 잘 어울릴 거 같거든.]
‘촉이라는 게 발달한 걸까? 그게 아니면 애초에 이런 부분에 있어서 감각이 좋은 걸지도 모르고.’
장난이 아니라 정말로 깜짝 놀랐다. 알버트가 평소에 허당과 같은 모습을 자주 보여줘서 그렇지 확실히 대형 스타가 되는 데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는 것 같다.
[놀라워. 사실 이 게임은 에이리언에 대한 오마주가 꽤 많은 작품이거든.]
[응? 이제 막 게임한 거 아니야? 근데 그런 오마주가 있다는 걸 이미 알고 있··· 아차. 회장님이니까 제작진이 이미 알려줬겠구나.]
‘이건 말실수였네.’
다행히 알버트가 알아서 혼자 납득해줬으니 망정이지 그게 아니었으면 땀 좀 흘렸을 만한 실수였다.
[맞아. 이 괴물들의 방식이 강간이랑도 잘 맞고 생긴 것도 느낌이 딱 그러네.]
[그게 무슨 뜻이야?]
[에일리언의 대가리를 봐. 딱 봐도 좆이고 번식 방법 역시 강제로 새끼를 몸속에 넣잖아. 그 녀석이 안을 파먹고 뛰쳐나오면서 성장하는데 이건 낳기 싫어도 낳을 수밖에 없는 공포랑 연결되고.]
‘듣고 보니 정말 그러네?’
강간이 주는 두려움을 여자가 아닌 남자도 실감할 수 있게 만든 작품이다. 더군다나 에이리언1을 떠올리자 아비규환이던 우주선에서 가장 현명하게 움직인 캐릭터가 바로 여주인공이었던 것이 생각났다.
‘미래의 PC 영화보다 훨씬 잘 만든 고전의 여성 영화였구나.’
나처럼 재미있고 엄청나게 흥행한 것 위주로 보는 일반인과 영화를 진지하게 보는 관점은 확실히 여러모로 달랐다. 물론, 이런 몰입이나 해석을 나는 게임에 국한해서 집요하게 하는 편이니, 각자의 가치관 차이라고 봐도 좋을 것이다.
[그런데 그런 명작에 나온 배우들이라면 제작비가 상당히 커져서 곤란할 수도 있겠는데?]
[그건 전혀 걱정하지 않아도 돼. 그건··· 하하! 이거 진짜 잘 맞아. 와! 어쩜 이렇지?]
알버트가 무언가가 떠오르는지 감탄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뭔데 그래?]
[혹시 위로라 호로위즈라고 알아?]
[알지!]
그녀는 에이리언 시리즈 4편에 안드로이드 역으로 출연한 여배우로서 20세기 말 청춘스타를 대변하는 인물이다. 대표적인 작품으로는 팀 버튼 감독의 비틀 쥬스로 팀 버튼 특유의 괴상한 분위기 속에서도 참 예쁘다는 생각을 계속하면서 보게 됐던 기억이 생생하다.
[그러고 보니 못 본 지 꽤 됐네.]
꿈속 기억에서도 한동안 얼굴을 못 보다가 그녀의 얼굴을 다시 보이기 시작한 것은 넷플렉스 덕분이었다. 공포 드라마인 이상한 이야기에서 위로라 호로위즈는 마이어스가의 어머니 역할이었는데 이를 보면 근 20년에 가깝게 공백기를 거치는 것이다.
[좀 안 좋은 일이 있었어.]
[어떤 건데?]
[절도 사건이 있었거든.]
그 정도 사건이면 대중적인 이미지가 조각날 만한 흑역사이긴 하다.
‘아무래도 알버트 본인이 그런 식으로 커리어가 무너져 본 경험이 있다 보니 다른 배우들에게도 도움을 주고 싶은 모양이네.’
영 이상한 배우를 추천하는 거라면 아무리 그의 말이라 해도 무시할 테지만 위로라 호로위즈 정도면 오히려 이쪽에서 환영이다. 나중에 그녀가 재기에 성공했을 때 그녀를 살려준 작품이 데들리 스페이스가 된다면 이는 평생 꼬리표처럼 붙게 될 것이다.
그제야 알버트가 왜 웃었는지 이해했다. 에이리언이 오마주였는지 몰랐던 게임이었는데 자연스럽게 출연 욕심을 내면서 떠올린 배우가 에이리언 4의 여배우이지 않던가.
[좋아. 마음에 들어. 그럼 섭외 부탁할게. 나는 모델링 수정할 준비 하라고 이야기 해둬야겠다.]
[모델링?]
[최대한 배우의 얼굴이랑 비슷하게 디자인을 새로 해야지.]
[이미 다 만든 거 같은데, 그래도 돼?]
[대부분의 장면에서 마스크를 쓰고 있으니까 수정작업이 어려울 건 없어. 게다가 팝의 외형에 관한 모델링은 이미 라이언 맨 제작에서 지겹도록 해왔잖아. 새로이 만들 필요도 없을 거야.]
[오호!]
[근데 딱히 연기할 게 별로 없을 텐데, 괜찮아?]
[응? 연기가 별로 없어?]
사실 데들리 스페이스의 1편에서 아서는 대사가 거의 없다.
2편과 3편에서 수다쟁이처럼 말을 많이 하는 것과는 상당히 대조되는데 아무래도 아서의 모델과 성우의 역할을 담당한 모델과 계약을 2편부터 맺었고 1편부터 그와의 계약을 염두에 두었기 때문에 후에 괴리감을 피하고자 최대한 대사를 줄인 것이 아닌가 생각하고 있다.
게다가 데들리 스페이스는 이미 거의 완성이 된 것이나 마찬가지다. 여기에 굳이 알버트의 연기를 위해 대사를 욱여넣는 것은 멍청한 짓이 아닐 수 없었다.
[하긴. 게임하는 걸 봤는데 대사가 없기는 하더라. 그래도 괜찮아. 중간마다 잠깐 나오는 것만으로도 느낌은 충분히 살릴 수 있어.]
대배우의 장담이 내게는 더할 나위 없는 믿음을 주었다. 이런 걸 보면 그는 그냥저냥인 백수 캐릭터가 아니다. 알고 보면 특수요원인 능력 있는 백수가 틀림없다.
“오케이. 콜!”
*
회사를 차려놓고 요즘처럼 이렇게 서류만 보고 있는 시간이 길었던 적이 없었다 싶을 정도로 최근에는 정말 서류만 보고 사는 느낌이 든다.
“김 실장님. 지금 제가 정리해둔 파일. 이 파일에 있는 회사들을 수소문해주세요.”
“둘 중 하나가 아니라 두 회사를 다 인수하시려는 겁니까?”
고개를 끄덕이자 그가 조금 놀라는 반응을 보였다.
이유는 이들 회사가 가진 이름값 때문이다. 지금까지 내가 인수한 게임사들은 보통 남들이 관심을 가지지 않지만 포텐을 가지고 있다고 판단하는 회사들이 대부분이었다.
그러나 이번에는 다르다.
우선 첫 회사.
카이저 박스 소프트.
브로스 암즈로 이미 큰 주목을 받는 게임사로 이미 상당한 실력과 인정을 받는 회사였다. 하지만 이 회사를 인수하는 건 기존의 내 방식에서 조금도 변한 것이 없다고 당당히 말할 수 있다.
‘아무리 지금 잘나가도 훗날에 비하면 훨씬 싸.’
브로스 암즈 시리즈는 충분히 매력적인 게임이지만, 이들의 진짜 성공작은 배다스 랜드다. 그리고 이 게임은 한창 개발과정에 있었다.
배다스 랜드 1편은 약 300만 장 수준의 판매에 그쳤지만 2부터는 그들의 색깔이 게이머들의 눈을 사로잡으면서 1,300만 장이라는 엄청난 판매고를 올린다.
‘참 웃겨. 고작해야 400만 장 팔린 데들리 스페이스는 아는데 정작 1,300만 장이나 팔린 배다스 랜드는 모르는 사람이 태반이었거든.’
꿈속 미래를 회상해보니 웃음이 나온다. 일반적으로 화제성과 매출은 정비례하게 되지만, 무조건 그렇게 되는 건 아닌 모양이다.
‘다음은 하이드 소프트.’
인수하기로 작정한 두 번째 회사.
이곳이야말로 김유천 실장이 의문을 가지기에 적합한 회사다. 여긴 그야말로 지금까지의 행보와 역행하는 회사나 마찬가지다.
‘FPS의 아버지인 조지 카맥의 회사. FPS 계의 조상님이라 할 수 있는 볼프 슈타인, 툼, 페이크 삼대장이 있는 회사지.’
바이로 해저드를 만든 비카미 신지는 바이로 해저드의 아버지다.
데몬 메이 크라이를 만든 코미야 히데키는 데메크의 아버지다.
그러나 조지 카맥은 툼의 아버지라고 불리지 않는다. 그는 FPS의 아버지라고 불린다.
단순하게 하나의 게임을 놓고 그것의 아버지라고 불리는 것과 그 게임들이 포함된 장르를 두고 그것의 아버지라고 불리는 것! 이 중에서 무엇이 더 높게 보이느냐는 따로 질문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그래서 더럽게 비쌀 게 분명한 회사지. 역사만 찬란할 뿐, 지금은 완벽하게 지는 해에 불과한데도.’
조지 카맥이라는 역사성과 정통성은 그만큼 묵직하다. 하지만 그가 업적을 남겼다고 해서 마냥 위대하다고 보기는 어렵다. 조지 카맥의 명언이 있지 않던가.
- 게임에 스토리는 포르노의 스토리와 같다.
- 있으면 좋지만, 중요하진 않다.
- 그런데 윗분들은 그걸 모르더라.
흥미롭게도 그가 이 말을 내뱉은 뒤 FPS 장르에 새로운 지각 변동이 일어난다.
그 게임의 이름은 바로 하드 라이프!
이 게임은 조지 카맥의 저 주장을 정면에서 반박한다고 말할 수 있을 정도로 훌륭한 스토리를 담고 있다. 정말 재미있는 건 하드 라이프가 조지 카맥이 개발한 게임 페이크의 엔진으로 개발되었다는 점이었다.
즉, 그의 엔진으로 그의 주장이 반박당한 것이다.
‘조지 카맥이 뒤쳐진 이유이기도 하고.’
하드 라이프의 등장 이후로 FPS 업계는 빠르게 변화했다. 여기서 조지 카맥의하이드 소프트는 더 업계의 선두주자 자리를 유지하지 못하게 되었다.
과거 그는 3D의 선구자였다.
하이드 소프트는 게임 업계 최고의 개발 기술을 가진 회사였었다. 이를 부정할 사람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나 2000년대에 들어서면서 그들보다 뛰어난 개발력을 가진 게임사들이 쏟아져 나왔다.
‘게다가 이런 자충수를 둔 데는 또 다른 이유도 있지. 남들은 100명이 넘는 인원으로 개발하는데, 소수 정예를 끝까지 추구했거든. 오죽하면 국내 커뮤니티 사이트에서는 n 류 개발자라고 부를까.’
이건 그의 실력을 폄훼하기보다는 게임 스테이션의 팬들이 많아서 게임 스테이션을 싫어하는 조지 카맥을 공격하는 의도가 더 크긴 하지만 말이다.
즉, 그는 뛰어난 만큼 자기주장이 강해서 오히려 흐름의 변화를 따라가지 못한 인물로 정리할 수 있고 하이드 소프트는 ‘과거의 영광을 잃어버린 채 더럽게 가격만 비싼 회사’였다.
그런데도 이 낭비를 하는 이유는 철저하게 내 욕심 때문이다.
‘비카미 신지는 바이로 해저드의 아버지로 엄청나게 명망이 높은 개발자지만, 그에게는 바이로 해저드가 없지.’
게임의 아버지는 비카미 신지다. 하지만 게임의 주인은 일본회사인 케코다.
‘폴란드의 워쳐는 꽤 훌륭한 성적으로 내고 있어. 본래의 미래보다도 훨씬 큰 명성을 쌓고 더욱 위대해질 테지.’
그러나 드래곤 소울이나 몬스터 프레데터스처럼 이제 시작하는 단계에서 1편이 성공을 이뤘을 뿐이다. 거대 프랜차이즈의 영역에 들어가기에는 한참이나 모자라다.
다른 게임들 역시 비슷비슷했다.
우크라이나의 서브웨이 2033이나 아나킨 스튜디오에서 개발하게 될 데스 아너드 두 가지 모두 마찬가지다. 훗날 GF를 상징할 프랜차이즈 게임들이 될 것은 확신하지만 당장 그 이름값을 톡톡하게 해줄 상징적인 게임은 없다.
그래서 미국의 위기인 지금이 내게는 기회다.
< 배우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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