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999년 게임 스타트-439화 (439/577)

< 배우 >

152. 배우

바이셜 게임즈의 이전 이름은 일렉트릭 아트 레드우드 스튜디오였다. 그 이름에 걸맞게 사무실은 레드우드 시티에 있었다.

캘리포니아주에 소속된 레드우드 시티는 사우스 샌프란시스코와 산호세의 중간 즈음에 있다. LA에 기반을 두고 있는 GF와는 긴밀한 거리라는 점이 내게는 긍정적인 시그널을 주었다.

하지만 장점만 존재하는 건 아니다.

레드우드 시티는 샌프란시스코에서는 물론이고 미국 전체로 따져도 가장 인건비가 비싼 곳 중 하나다. 훗날 데들리 스페이스로 큰 명성을 얻게 되는 바이셜 게임즈는 고작 5년 만에 총 3편. 외전까지 더 해서 6개의 게임만을 출시하고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는데 이 배경의 가장 큰 이유가 바로 인건비였다.

‘최소 500만 장 이상을 팔지 못하면 손해라고 했었지.’

데들리 스페이스는 훌륭한 게임이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500만 장의 판매량은 넘기지 못했고 높은 인건비와 판매량을 두고 계산기를 두드려보았을 때, 적자를 벗어날 수 없었다. 그렇기에 꿈속 미래에서 일렉트릭 아트는바이셜 게임즈를 폐쇄해 버린다.

데들리 스페이스라는 게임이 아무리 걸출하건, 시리즈물이 꾸준히 발전하건 말건 그런 건 중요한 게 아니다. 회사는 이익을 보기 위해 영업하고 돈이 되지 않는 사업 아이템은 버려지는 쪽이 합리적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나는 게이머이고 너드거든.”

돈은 이미 충분할 만큼 벌었다. 손해 보지 않고자 계산기를 잔인하리만큼 두드리면서 발을 빼는 것보다는 훗날 사라지게 될 훌륭한 프랜차이즈를 살려낸다는 게이머의 마음이 훨씬 더 만족스러웠다.

그뿐이랴.

멀리 내다보자면 약간의 적자를 보게 되더라도 이런 수준의 게임이 퍼스트 파티로 존재하는 것 자체가 이득이다. 또한, 우리는 퍼블리셔이자 개발사이며 플랫폼이자 유통사다. 그러니 수익 분기점을 500만 장이 아니라 300만 장으로 확 낮춰도 된다.

다만, 본래의 역사라면 다음 달에 출시 예정이었던 게임인 데들리 스페이스의 일정을 지금은 바꿨다.

자주 떠올렸던 바지만, 우리가 만든 G 크로스의 유일한 단점은 다른 콘솔기기보다 성능이 떨어지는 점이다. 반면에 데들리 스페이스는 기존 콘솔보다도 훨씬 성능 좋은 PC에 맞추어진 게임이다.

이런 차이가 있는데 곧바로 G 크로스에 바로 이식했다가는 잦은 프레임 드랍 엉망진창이 될 것이 분명했다. 그러니 G 크로스에 맞는 다운 그레이드 작업이 필수였고 다음 달이었던 출시는 2개월 더 미룬 상태였다.

“그래도 먼저 즐기기에는 큰 문제가 없다는 얘기지~ 이런 게 바로 게임사 회장님이 갖는 큰 혜택 아니겠어?”

상품에 약간 하자가 있을 뿐, 몇몇 버그를 제외하고는 당장 PC로 즐길 수 있을 정도로 완성되어 있다는 점에는 변함이 없다. 나는 GF의 회장으로서 ‘출시도 안 된 게임을 먼저 즐길 수 있는 특권.’을 누려보기로 했다.

느긋하게 게임을 한판 때려본닷!

[오늘은 무슨 일이야? 라이언 맨 회장님이 서류가 아니라 게임도 하네? 일없어?]

불쑥 들어온 알버트가 자연스럽게 앉으며 물었다. 이른 오전부터 매번 얼굴을 보다 보니 이제는 안 오면 오히려 이상하게 느껴질 정도였다.

[뭐긴. 일하는 거지?]

[노는 게 아니라?]

[얼마 전에 회사 하나를 인수한다고 했었잖아. 이게 거기 게임이거든. 나는 게임의 완성도나 그런 것들을 직접 플레이해 보면서 확인하는 거고.]

[오! 그럼 이게 바로 우리 회장님이 친히 나서서 인수한 그 게임이야?]

[누가 들으면 다른 게임들은 내가 직접 움직이지 않은 것들인 줄 알겠다?]

아닌 게 아니라. 지금까지 GF에서 인수한 AAA 타이틀은 전부 내가 직접 만나서 인수를 결정했다. 그러니 이 말은 굉장한 오해의 여지가 있는 말이니 정정이 필요하다.

[하하! 알면서 한 말이야. 너무 그렇게 노려보지 말라고 회장님. 그나저나 뭐 하는 게임 이길래 표지부터가 이렇게 무시무시해?]

[표지가 무시무시하다니?]

[이것 봐. 여기.]

알버트가 내게 내미는 것은 데들리 스페이스의 제작진들이 꼭 타이틀은 이것으로 해달라며, 원래 패키지의 메인 일러스트였다.

[이게 무시무시해?]

[잘린 팔이 허공에 떠 있는 그림인데, 이게 안 무시무시해?]

[팔? 어라?]

지금까지 이 그림이 잘린 팔이라고는 전혀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그냥 팔 그림이라고만 생각했지. 그런데 사람이라는 게 참 묘한 동물이다. 핑크색 코끼리를 생각하지 마, 라고 하면 자연스레 연상하는 것처럼 알버트의 말을 듣고 보니까 이 팔은 영락없이 잘린 팔로 보였다.

[그러네?]

[그치? 내 말이 맞지?]

[응. 맞아.]

알버트가 크게 웃었다. 워낙 나랑 이런 대화를 해서, 내가 틀리고 그가 맞은 일이 적었기 때문일까? 그는 자신의 말이 맞았다는 것에 굉장한 통쾌함을 느끼는 것 같았다.

[이거 무서운 게임 맞지? 표지가 이런 걸 보면?]

[굳이 장르를 정하자면 SF 서바이벌 호러 TPS거든.]

[무슨 장르 명칭이 그렇게 길어?]

확실히 그의 말처럼 게임은 영화나 드라마와 장르명을 말하는 방식이 좀 다르다. 영화의 경우는 ‘SF, 호러’와 같은 형식을 취하는 것이 일반적이지만, 게임은 SF 호러와 같이 어떻게든 하나로 연결해서 설명하려는 경향이 강했다.

[이게 더 있어 보이니까?]

[에이. 유치하잖아.]

[그런가?]

[그런 거야. 하하하! 오늘은 내가 다 맞네. 나한테 한 수 배워야겠어.]

왜 그렇게 말을 하는 것인지. 정확한 이유 따위는 모른다. 그냥 개발자들이 원하는 대로 장르를 정하고 소개할 뿐이다. 개인적으로는 계피보다는 시나몬, 설탕보다는 휴가라고 하면서 더 있어 보이는 기분을 느끼는 거랑 비슷하지는 않나, 생각해본다.

[아무튼, SF면 미래가 배경이겠고 서바이벌 호러면 무언가 무시무시한 것에서 생존을 해야 한다는 식이겠지. TPS는 모르겠는데, 이건 뭐야?]

[삼인칭 슈팅 게임.]

[어휴. 게임이라는 거 엄청 복잡하네. 나 때는 그냥 탁구나 치고 유령 피해서 동전을 줍거나 하늘에서 떨어지는 외계인한테 총 쏘는 그런 수준이 전부였는데.]

[팝. 그건 좀. 갑자기 확 나이 들어 보이잖아.]

[난 내 나이가 안 부끄럽다! 너도 늙을 거야!]

[저주하냐?]

[자연의 이치라는 거지.]

[뭔 소리래?]

[하하하!]

20년도 더 된 게임들 이야기를 들으니 21세기에 갤러그를 예로 들며 토론하던 어느 학부모 전문가가 떠오른다. 논문을 읽지 않고 논문을 언급할 수 있는 통찰력의 대가였는데, 부디 내가 게임문화 개선에 힘쓰는 만큼 현실에서는 방송에서 보는 일이 없기를 소망해 본다.

‘4대 악이랑 게임 중독 이슈 자체가 나오지 않도록 잘 관리해야지. 어? 이러면 대통령 선거에도 뭔가 끼어들어야 하는 건가? 킹 메이커처럼?’

정치라는 단어에서 왠지 모를 오싹함을 느꼈다. 나는 재빨리 이성을 되찾고 사랑스러운 게임 화면에 집중했다.

[그나저나 굳이 상대 회사의 CEO까지 만나서 빼앗은 게임이 어떤 건지 궁금하다. 지금 해볼 수 있어?]

[안 그래도 하려고 하는 시점이었어.]

[좋았어. 우리 회장님 게임 실력이 세계 제일이라는데 드디어 제대로 구경해보는 거군. 바로 시작해봐.]

[세계 제일이··· 아닌가? 맞나?]

[때늦은 겸손함은 보이지 않아도 돼. 넌 엄청 잘났잖아.]

이제는 나도 잘 모르겠다. 그냥 게임이나 하기로 했다.

데들리 스페이스!

이 게임의 인트로 영상은 평화로운 분위기의 우주선에서 시작한다. 그러나 평화로움은 우주선의 외관만일 뿐, 카메라가 마치 우주선 내부로 들어가는 것처럼 영상의 배경이 우주에서 우주선 내부로 이어지면서 분위기는 반전된다.

우주선의 내부는 이미 알 수 없는 존재로부터 습격을 받았고 인간들은 모두 죽어 있던 것이다.

[아! 깜짝이야!]

정지된 화면을 보여주는 것처럼 내부를 보여주고 있던 도중, 느닷없이 괴물이 움직이며 사람을 공격했다. 사실 놀랄 만큼 무섭거나 한 장면은 아닌데 멈추어 있다고 믿고 방심하고 있던 차에 갑자기 괴물이 움직이니 알버트가 놀란 것이다.

뒤이어 이 우주선으로부터 메시지가 송신된다.

앞의 영상이 인트로라면 메시지부터는 프롤로그의 시작으로 볼 수 있다. 아서의 연인인 닐스가 보낸 구조 메시지로서 이때부터 본격적인 데들리 스페이스의 스토리가 시작된다.

등장한 아서를 보고 알버트가 물었다.

[구조 메시지를 받아서 온 건데 왜 주인공은 군인이 아닌 엔지니어야?]

‘공돌이 우습게 보냐? 얘 전투력이 지구를 구할 정도로 막강하거든.’

세계를 지키는 3대 공돌이···라는 드립을 해봐야 누가 알겠나.

내심 웃고는 대답했다.

[플레이어는 이 게임의 장르가 서바이벌 호러에 TPS 장르라는 걸 알고 있으니 ‘전투가 벌어지겠구나.’라는 생각을 하는 거야. 하지만 조금 멀리서 보자고. 우주에서 문제가 생겼다는 구조 신호를 받았어.]

[아하. 우주선에 결함이 생겼을 거라고 판단하는 게 맞겠구나. 지금까지 없었던 외계인이나 괴물의 습격으로 위기에 빠졌다고 보는 게 오히려 비상식적이고.]

[정답이야. 당연히 군인보다는 엔지니어가 찾아오는 게 훨씬 어울리지.]

[좋았어. 그럼 우주선을 수리하러 온 엔지니어가 아까 그 괴물들을 물리치는 거야?]

[그렇지?]

[오! 놀랍도록 상식적이던 개연성이 여기서 갑자기 확 무너지는걸. 연구만 해온 기술자가 무슨 수로 괴물을 잡아?]

어른의 고정관념으로 보면 확실히 그렇기는 하다. 하지만 그래서 더욱 빠져들게 되는 부분이 있었다. 데들리 스페이스는 오직 빠루 하나만으로 무쌍을 찍는 어느 게임과는 다르다. 아서 클라크가 자신이 기술자라는 것을 잘 살려서 다양한 공구를 즉석에서 제작하고 무시무시한 적들을 잔인하게 썰어 버리기 때문이다.

‘사실 전기톱은 무기로 나온 게 아니잖아. 공구지.’

산업용 도구가 용도에 맞게 쓰이는지, 살육을 대상으로 쓰이는지의 차이일 뿐이다. 그래서 데들리 스페이스의 아서는 공돌이계의 웨펀 마스터이자 투신이라고 칭송받게 된다.

녹화 기록물을 확인해나가며 이어지는 스토리.

괴이한 형태의 외계생명체를 상대해나가는 내 플레이를 지켜보며 알버트가 혀를 내둘렀다.

[엔지니어가 이렇게 싸움을 잘하다니 굉장히 새로운데?]

[새로워? 왜?]

[보통 이런 직접적인 전투는 엔지니어가 아니라 군인이 해야 정상이잖아.]

[아이고, 다른 사람이라면 몰라도 팝이 그런 말을 하면 곤란하지 않나?]

[내가? 왜?]

[라이언 맨 이잖아!]

[···아!]

게임 세계의 최강 공돌이를 말하자면 아서 클라크일지 모르지만, 영화에서는 바로 이 인간이 연기한 라이언 맨 이었다. 그런데 그걸 연기한 인간이 라이언 맨을 떠올리지 못할 줄이야.

[맞아. 왜 그걸 못 떠올렸지?]

[시대가 달라서이지 않을까?]

아무래도 라이언 맨의 배경은 현대와도 같은 느낌의 세상이다.

‘현대의 과학 수준을 아득하게 뛰어넘은 그 세계를 온전히 현대라고 부르기에는 조금 무리가 있으니까, 그런 느낌의 세상으로 보는 게 맞지.’

한편, 아서 클라크의 데들리 스페이스는 우주를 배경으로 하는 만큼 먼 미래 세계를 다루고 있다. 적들도 호러 서바이벌이라는 콘셉트에 맞게 좀비와 비슷한 존재다. 이러니 라이언 맨과는 전혀 다른 분위기였고 알버트는 아서 클라크와 자신을 연결해서 생각하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이점이 그에게는 뭔가 영감을 주었나 보다.

진중하게 생각한 그가 내게 말했다.

[주인공이 엔지니어고 또 수트를 입은 상태에서 전투를 이어가고 있어. 그럼 여기서 딱 어울리는 사람이 바로 떠오르지 않아?]

[무슨 소리야?]

[조금 전에 태식도 말했잖아. 라이언 맨 이라고.]

[그런데?]

[이 게임. 데들리 스페이라는 것을 내가 직접 연기하면 어때? 사람들이 더 몰입하지 않을까?]

조금 전에 설명했듯이, 아서 클라크는 공돌이계의 끝판왕이다. 공돌이답게 다양한 공구들을 활용해서 적들을 물리치고, 세상을 구하는 존재. 확실히 그의 말처럼 라이언 맨과는 아주 궁합이 잘 맞는 존재가 아닐 수 없었다.

‘매칭이 잘 되는데?’

< 배우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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