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999년 게임 스타트-438화 (438/577)

< 하나 더 >

‘예상대로군.’

버닝 아웃은 레이싱 게임이다.

일반적으로 차량끼리의 경주가 메인이 되는 다른 게임들과 달리 상대방의 차량과 충돌을 하거나 접근전을 통해서 데미지를 주어 테이크 다운을 시키는 것이 주요 목적인데 다른

레이싱 게임과는 또 다른 재미를 선사하는 매력적인 작품이었다.

특히나 이 시리즈의 3편은 사상 최고의 시리즈로 수많은 팬을 열광시킨다. 이후 레이싱 게임에서 쓸데없이 접근전을 벌이는 사람들에게 ‘레이싱은 안 하고 버닝 아웃을 하고 앉

았네’라는 말이 자연스럽게 자리 잡게 해줄 만큼의 명작이었다.

‘문제는 그게 2004년도 게임이라는 거야.’

2005년도에 리벤지와 레전드, 2007년에는 도미네이터와 올해 파라다이스가 나왔다. 하지만 이들은 ‘나름 괜찮은 게임’의 수준일 뿐, 딱히 우리가 투자해줘야 할 정도로 매력적

이지는 않았다.

한편, 미러 에지는 버닝 아웃보다도 심각하다.

FPS 최초로 파쿠르를 도입한 게임으로서 빌딩 숲을 자유롭게 활보하는 여성이 매력적인 게임이다. 특유의 상징성과 재미를 느낄 수는 있다. 그러나 딱 소재에서 오는 참신함이

전부일 뿐, 굳이 투자해야 할 정도로 매력이 있는 게임은 아니었다.

‘판매량은 250만 장이니 제법 대단해 보일 수 있지. 그런데 이건 내가 아니라 남이 만든 거잖아.’

인수한 회사에서 이런 판매량이 나오면 훌륭한 거지 남의 회사에서 개발하는 게임이 이 정도 매출을 올리면 투자자인 내게는 썩 마음에 들지 않는 수준이 된다.

[버닝 아웃을 제외하고는 신작 게임인 모양이더군요.]

[그렇습니다. 하지만 두 게임 모두 우리 회사에서 굉장한 기대를 걸고 있는 게임이라는 것은 알아주셨으면 합니다.]

‘이 자식이 나한테 약을 파네?

요한 니콜라스가 숨기는 지점이 있다.

버닝 아웃은 이미 개발된 게임을 가지고 조금만 수정하면 G 크로스로 이식이 가능하다는 것. 그리고 미러 에지나 데들리 스페이스는 사실상 개발 완료 단계에 있는 게임이라는

것이다. 즉, 그는 이미 지들 돈으로 다 해결해놓고 우리 돈은 받아서 원하는 대로 쓰겠다는 의도였다.

‘워 필드 Ⅲ가 있었다면 또 몰라. 나를 뭐로 보고 어디서 이런 깜찍한 제안을 하고 있어?’

워 필드 Ⅲ는 전 세계 1,500만 장 이상 팔린 최고의 게임이고 시리즈의 매 작품이 1,000만 장을 넘기는 게임이다. 일렉트릭 아트를 대표하는 프랜차이즈로서 게임 자체가 가져

오는 파급력을 무시할 수 없다.

‘하긴. 얘네가 멍청이들도 아니고. 그런 프랜차이즈를 독점으로 내주겠다는 소리를 하지는 않겠지.’

그냥 발매하면 1,000만 장이 보장되는 게임을 뭐가 아쉬워서 기기 판매량을 다 합쳐도 300만대 남짓한 G 크로스에 독점을 내어주겠는가.

그를 이해한다. 누구나 자기 몫을 단단히 챙기려고 굴고 이건 합리적인 선택이다. 그러니 나 역시 마찬가지다. 네 몫을 줄이고 내 몫을 챙길 수 있다면 언제든지 그 길을 선택할

것이다.

[무슨 말씀인지는 알겠지만, 딱히 매력적인 조건은 아니군요.]

[뭐요?]

요한 니콜라스는 내 말에 어처구니없다는 반응을 보였다. 협상의 자리에서 그다지 좋은 태도는 아니었지만, 오랜 시간 업계 최고의 갑의 자리에 있었던 일렉트릭 아트이니만큼

그 자부심이 넘쳐흐르는 것이다.

[세 개의 게임을 독점으로 내어드린다는 말인데도 매력적인 조건이 아니라고요?]

[알고 있는지 모르겠으나 우리 G 크로스는 레이싱 게임에 그다지 좋은 성능을 보이기 힘듭니다.]

레이싱 게임은 이미 5세대 콘솔 시절부터 그 그래픽이 하이엔드 급으로 상향 평준화가 된 지 오래다. 레이싱 게임을 즐기는 수많은 게이머는 그런 게임의 그래픽에 적응하고 그

것이 이제는 당연하다는 인식으로 자리를 잡았다.

그런데 G 크로스는 어떤가?

기적의 최적화가 돋보일 만큼 G 크로스는 그래픽 연산능력에 최대 약점을 가졌다.

‘굳이 우리가 나서서 직접 단점을 어필할 필요는 없지.’

내가 레이싱 게임을 즐기는 취향은 아니지만, 그래도 유명한 레이싱 게임들을 모르는 것은 절대 아니다. 그런데 왜 내가 지금까지 인수한 회사 중에 레이싱 게임에 특화된 회사

가 없을까?

시간이 지난 후에야 결국 구색을 갖추기 위해서라도 채워 넣어야겠지만, 지금 당장 이런 게임들을 출시하는 건 긁어 부스럼이다.

‘지금은 차라리 레이싱 마니아들이 외면하는 게임기가 되는 게 나아.’

심지어 이들이 우리에게 제공할 버닝 아웃이 G 크로스만의 매력을 갖춘 버닝 아웃일 리도 없다. 같은 이유로 얘네들이 발매하는 레이싱 게임 중 최고의 프랜차이즈라 할 수 있는

니어 포 스피드를 내어준다고 해도 사절한다.

그건 버닝 아웃보다 더 큰 문제를 가져오는 게임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버닝 아웃을 제외한 두 개의 게임들은 투자해 주실 수 있겠습니까?]

어떻게든 투자금을 끌어가고 싶은 요한 니콜라스는 남은 두 개의 게임이라도 투자 협상을 이어나가길 원했다.

나 역시 데들리 스페이스를 간절히 바란다.

이런 속내를 드러내지 않으며 나는 투자자로서의 여유를 한껏 보였다.

[그것도 곤란할 것 같습니다.]

[네? 버닝 아웃은 레이싱이라서 문제가 될 수 있다지만, 미러 에지와 데들리 스페이스는 그런 문제도 없지 않습니까?]

[두 개의 게임은 하이엔드급 PC에서 그 맛을 제대로 느낄 수 있도록 개발된 게임으로 보이더군요. 이미 시연 영상까지 공개가 되어 있던데, 이런 게임을 G 크로스로 내보낸다?

다운 그레이드 때문에 꽤나 곤욕을 치러야 할 거라는 생각은 들지 않습니까?]

[최신의 게임을 G 크로스로 이식하려면 그 어떤 게임이라도 감수해야 하는 부분입니다.]

[그렇죠. 그런데 그걸 감수할 만큼의 가치가 있느냐는 다른 문제입니다.]

요한 니콜라스의 낯이 붉어졌다.

[저희 게임이 그럴 가치가 없다는 말씀입니까? 더 대화를 이어갈 이유가 없군요! 처음부터 이렇게 거절할 거라면 차라리 만나자는 약속을 잡지 않는 것이 예의가 아닐까 싶습니

다!]

그가 당장이라도 사무실을 뛰쳐나갈 것 같은 표정으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앉으시죠.]

[뭐라고요?]

[앉으시라고요. 이 자리는 협상의 자리가 아닙니까? 상대방이 자신과 다른 생각을 하고 있다면 설득할 생각부터 하셔야지 이렇게 쉽게 포기하고 일어나실 줄이야······. 이 모습

이 협상하러 나오신 분의 태도라고는 보이지 않는군요.]

[설득할 이유가 안 느껴지니까 이러는 겁니다.]

코웃음 치던 그가 돌연 미간을 찌푸렸다.

[···뭡니까? 지금 뭔가 원하시는 게 따로 있으신 겁니까?]

[그러니까 만나자고 약속을 잡지 않았겠습니까?]

[뭐죠?]

내심 웃으며 나는 짐짓 무표정하게 말했다.

[저는 데들리 스페이스 하나만을 원합니다.]

[미안하지만, 그렇게는 진행하기 어렵습니다.]

‘그렇겠지. 고작해야 게임 하나 투자받는 돈으로는 T3를 인수하려는 자금에 별 도움이 되지 못할 테니까.’

하지만 드디어 본론을 꺼낼 분위기가 됐다. 나는 비어있는 자리를 말없이 보고 그가 앉도록 시간을 주었다. 이윽고 협상 자리에 앉은 그에게 말했다.

[솔직하게 이야기를 나눕시다. 원하시는 바가 게임 제작을 위한 자금이 아니라는 것 정도야 서로가 이미 알고 있는 내용이 아니겠습니까?]

[!]

자신들의 의도를 이미 파악하고 있었을 거라는 걸 전혀 예상 못 했는지, 요한 니콜라스의 눈이 찢어질 듯이 커졌다.

[일렉트릭 아트에서 T3를 원하고 있다는 건 어차피 업계에서 공공연하게 소문이 다 난 이야기입니다. 제가 그걸 모른다면 오히려 그게 이상하지요.]

[···그걸 아는 것과 지금 이 시국에 저희가 그걸 노리고 있다는 걸 예상하는 건 다른 문제입니다.]

[세계에서 가장 성공한 게임 중 하나를 가지고 있는 회사를 인수하려면 당장의 지갑 사정으로는 쉽지 않겠지요. 그래서 우리와 손을 잡으려는 것 아닙니까?]

[······.]

[그럴 거면 최소한 필요한 돈만큼 매력적인 제안을 해주셨어야지요.]

고작 이런 게임들로 우리에게 1억 달러 이상의 투자금을 요구하려고 한다면 너무 날강도와 같은 제안이 아니겠나?

[설마, 워 필드의 독점 발매를 원하시는 겁니까?]

‘대체 왜 높은 곳에 있는 사람들을 상대가 말을 하면 그 말을 그대로 받아들이질 않는 걸까?’

분명히 데들리 스페이스를 원한다고 했는데 말을 비비 꼬려고 든다.

나도 양심이라는 게 있지. 워 필드를 독점으로 내놓으라는 이야기는 이들에게 할 생각 따위는 없다. 바보도 아니고. 상대방이 받아들일 수 없는 제안은 할 필요가 없으니까.

[다시 말씀드리지요. 저는 데들리 스페이스 하나만을 원합니다.]

[저희 목적을 알고 계신다면 저희가 그 게임 하나 투자를 받는다고 해서, 상황에 별다른 변화가 생기는 게 아니라는 것 정도는 예상하고 계실 거로 생각합니다만.]

[그거야 데들리 스페이스를 어떻게 받느냐의 문제가 아니겠습니까?]

[어떻게요? 설마 스튜디오를···]

[맞습니다.]

바이셜 게임즈.

여기가 바로 데들리 스페이스를 개발한 스튜디오다.

1998년도에 설립된 이 스튜디오는 지금까지 이미 영화로 만들어진 유명 IP를 가져다가 게임을 제작하는 역할을 담당했는데 그 때문에 자신들만의 IP를 만들 수 있길 원했다. 그

러던 이들이 비카미 신지의 바이로 해저드4를 보고 영감을 받아서 제작한 게임이 바로 데들리 스페이스다.

‘우리에겐 비카미신지가 있으니 이보다 더 좋은 조합이 있겠어?’

바이셜 게임즈가 내 손에 들어오면 장담하건대 꿈속 미래를 뛰어넘는 명작이 탄생할 것이다. 이들의 조합이면 큰 시너지를 발휘할 수 있으리라.

[바이셜 게임즈는 어차피 당신들에게 별다른 기대감이 없는 스튜디오로 알고 있습니다. 이를 넘기면 당신들은 T3의 인수에 도전할 다시없는 기회를 잡게 될 겁니다.]

화가 가라앉은 걸까.

요한 니콜라스의 피부에 보이던 붉은 부분들이 사라졌다. 잠시 후 그가 말했다.

[세간에서 저희를 향해 부르는 별명이 뭔지 아십니까?]

[설마, 잇 올을 직접 말씀하시려는 건 아니시겠죠?]

[아뇨. 맞습니다. 그걸 말하려 한 겁니다. 저희는 욕심이 많습니다. 무엇이든 다 먹어 치우려는 욕심만큼이나 한번 먹어 치운 것을 다시 뱉어내느니 차라리 소화해 버리는 곳이

바로 우리 일렉트릭 아트입니다.]

‘그래서 잇 올 외에 엘리미네이트 올이라는 별명도 추가로 획득하게 되지.’

잇 올이 전부 먹어치운다는 의미라면 엘리미네이트 올은 전부 제거한다는 의미가 있다. 지금 요한 니콜라스가 말한 소화라는 건 딱 저 별명과 어울린다.

[뜻밖이군요. 그래서 제 추가 제안은 들어보지도 않고 그냥 이 자리에서 일어나실 생각입니까? 정말 놓치기 아까운 기회가 될지도 모르는데?]

요한 니콜라스의 입가가 파르르 떨린다. 사람이 이렇게까지 자신 있게 말하면, 그 앞의 과정이 전부 어처구니가 없는 말들이었다고 하더라도 혹시나 싶은 의심이 들게 되는 것이

다.

[좋은 기회니까 기왕이면 놓치지 않으셨으면 좋겠네요.]

그러면서 요한 니콜라스의 앞에 의문의 서류 하나를 올려놓았다.

‘곽지원 부사장님 완전 리스펙 합니다.’

내가 이번 협상에서 완전히 우위를 차지하고 있다고 확신할 수 있는 이유.

그것이 바로 이 서류에 있었다.

[이게 뭡니까?]

[확인하는데 시간이 많이 드는 것도 아니니 그냥 직접 확인해 보시지요.]

의심 어린 눈으로 요한 니콜라스가 서류를 들었다. 그리고 숨조차 멈출 만큼 크게 놀랐다.

[이··· 이건···!]

[보시는 대로 T3 인터렉티브의 지분 5%입니다.]

그가 침을 꿀꺽 삼켰다.

[어떻습니까. 이거면 바이셜 게임즈를 저희에게 넘기는 것에 아쉬울 게 없으리라 보는데?]

곽지원 부사장은 전무 시절부터 회사의 자금을 다양한 곳에 투자하는 역할을 담당하고 있었는데, 그는 장기적인 안목으로 이 T3 인터렉티브에 투자하고 5%라는 지분을 확보해

둔 상태였다.

사실 가만히 두면 점점 더 성장할 회사고 더 많은 수익을 가져다줄 지분이니 처분할 필요가 없기는 했다. 그러나 교환 대상이 바이셜이라면 완전히 달라진다.

T3 인터렉티브의 지분은 기껏해야 두 배 정도의 수익을 바라보지만, 바이셜은 열 배의 수익을 바라볼 수 있는 곳이니까!

[제 제안은 이겁니다. 지금 보여드린 T3 인터렉티브의 지분 5%와 1억 달러. 그것으로 바이셜 게임즈와 현재 개발 중인 데들리 스페이스를 넘길 것.]

맞은편에 앉은 요한 니콜라스가 세상 다시없는 유혹에 빠진 모습이 됐다. 고민, 갈등, 번민의 감정이 물씬물씬 넘쳤다. 제아무리 잇 올이니 어쩌니 해도 이건 포기할 수 없는 미

끼다.

‘뭘 그렇게 고민하고 앉았어. 먹음직스러운 미끼가 던져졌으면 물어야지.’

일렉트릭은 지금까지 7% 정도의 지분을 확보한 상태다.

이 5%를 합치면 13%이니 조금만 더 모으면 T3를 합병할 수 있을 거라는 희망을 품을 수 있다. 그러나 요한 니콜라스는 모를 것이다. T3는 그 정도로는 절대 인수할 수 없는 회

사라는 것을 말이다.

T3는 자부심이 매우 강하고 실제로도 이들이 가진 가치보다 훨씬 높은 자신의 가치를 책정해둔 상태다. 하지만 이를 모르는 입장에서는 5%에 승패가 갈린다고 보일 것이다.

이윽고, 한참의 기다림 이후 그가 결단을 내렸다.

[하겠습니다.]

미끼를 통해 나는 대어를 낚았다.

< 하나 더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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