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999년 게임 스타트-437화 (437/577)

< 하나 더 >

[응? 일렉트릭 아트? 음악 회사야?]

[그런 곳에서 기획안을 보냈을 리가 없잖아]

[네가 놀라기에 엉뚱한 회사일 수도 있겠다 싶었지. 혹시 모르잖아. 찔러봤는데 마음에 들어서 투자하겠다고 연락할지도 모르는 일이니까.]

[하긴,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겠네. 그런데 여기는 아니야. 그냥 게임 회사거든. 미국뿐이 아니라 전 세계에서도 제일 큰 게임 기업을 선정할 때 항상 손에 꼽히는 규모를 가진 회

사지.]

일렉트릭 아트가 전 세계에서도 손에 꼽힐 정도로 큰 회사라 하자 눈을 확 키우고는 나를 쳐다보았다.

[우리 회사보다 커?]

이제는 알버트가 ‘우리 회사.’라는 표현을 해도 그러려니 하게 됐다. 마치 ‘네가 우리의 자부심이란다!’라며 장남한테 올인한 옛 부모님 세대의 누군가를 보는 기분도 든다.

[게임계열사만 보자면 비슷할걸?]

일렉트릭 아트의 작년 매출은 31억 달러로 한화로 환산하면 대략 3조 6천억이다. 사실상 GF보다 크면 컸지 작은 규모는 절대 아니다. 단지, 순이익 부분에선 7천 600만 달러로

GF와 비교하여 1/10 수준으로 떨어지는 순이익을 보여주는 차이가 있을 뿐이었다.

‘개발비가 엄청나게 들어가는 게임을 개발하고 콘솔 분야에 공격적인 투자도 했는데 딱히 콘솔 시장이 커지지도 않았으니 투자금 회수에 난항이 있을 수밖에.’

매출 자체로는 절대로 무시할 수 없으나 2005년 이후부터 심각한 부진을 겪고 있는 일렉트릭 아트.

이 기업은 레이먼 브라더스 사태에서도 절대 움츠리지 않을 모양이다.

[역시. 잇올은 잇올인가?]

[잇올이라니? 여긴 일렉트릭 아트라며?]

[그건 얘네 원래 이름이고, 잇올은 별명이야.]

미래 기억에 따르면 이런 위협 속에서도 T3 인터렉티브와 같은 거대 게임사를 인수하려고 시도할 만큼 굉장한 욕심쟁이였다. 이쯤 되자 알버트가 투자제안서에 관심을 보였고

나는 그가 읽도록 건네주었다.

내용 자체는 별것 없었다. ‘현재 자신들은 많은 게임들을 개발하려고 준비하고 있으며 그중에는 우리 콘솔로 출시할 게임들도 존재한다. 그러니 우리에게 투자하면 서로에게 이

익이 될 것이다.’라는 것.

[그냥 평범한 투자요청 같은데? 내가 모르는 뭐가 있는 거야?]

알버트는 자신과 나의 견해가 어떻게 다른지 궁금해했다.

[얘들은 지금 한 창 T3 인터렉티브를 인수하기 위한 협상을 진행 중이야. 그리고 T3 인터렉티브도 규모만큼은 절대 만만치 않지. 그 큰 덩치를 삼키려면 당연히 돈이 많이 필요

하겠지?]

[그렇겠지?]

[일단, T3는 탐이 날 수밖에 없는 회사야. GTA라는 엄청난 게임 브랜드를 가지고 있거든.]

[GTA? 그게 뭔데?]

그에게 GTA의 자유도와 게임성이 어떤지를 설명하는 건 크게 의미 있는 일이 아니었다. 나는 간단히 알려주기로 했다.

[수십억 달러의 매출을 올릴 수 있는 게임이라고 보면 돼.]

다섯 번째 시리즈가 30억 달러를 넘기면서 게임 시장이 영화시장보다 더 거대하다는 것을 명확하게 알려준 게임이다.

[수십억? 엄청나잖아. 그런 회사면 우리가 인수하는 게 좋지 않아?]

[나한테는 별로야. 내키지 않아.]

[응? 왜? 엄청 많이 팔리는 게임이라며?]

맞다. 돈은 된다.

그리고 돈만 되는 게 문제다.

[T3에서 개발하는 게임은 다른 게임들과 좀 달라. 폭력적인 성향이 훨씬 두드러지는 게임이거든. 잘 알다시피 한국에서는 게임의 이미지가 좋지 못해. 폄하하는 사회 인식이 팽

배하지. 이런 판국에 폭력적인 게임을 만드는 게임사를 인수하는 건 이미지에 큰 타격을 주거든. 그러잖아도 언론이 물고 뜯으려고 이를 갈고 있는데 빌미를 줄 수는 없지.]

문제는 이것만이 아니다.

T3에서 만드는 게임은 세계가 깜짝 놀랄 만큼 엄청나게 팔리고 어마어마한 매출을 기록한다. 그런데 이건 속 빈 강정이다.

‘매출액이 높으니까 다행인 수준이거든. 가성비가 진짜 형편없어.’

30억 달러를 벌면 뭐 하겠는가? 게임에 들어간 돈이 3억 달러인데 말이다.

그만큼 GTA는 다른 게임과는 그 비교가 불가능할 정도로 엄청난 비용이 들어간다. 실제로도 T3는 GTA를 출시하기 직전까지는 만성적인 적자에 시달리다가 게임을 출시하고

매출액이 수직 상승을 해야 간신히 벗어나기 일쑤인 회사였다.

적자를 만성적으로 겪으니 안정성과는 완전히 거리가 멀다. 이런 기업에 쓸 돈 3억 달러는 그야말로 낭비였다. 매출이 적더라도 더 다양한 프랜차이즈를 확보하는 편이 훨씬 좋

다.

[돈 많이 벌면 그냥 좋은 거 아닌가?]

[보통은 그래.]

[하긴, 우리 회장님은 특별하니까.]

[내가 아니라 상황이 그래.]

[아무튼, 이 제안서에는 안 나온 T3가 일렉트링 아트랑 무슨 상관인 건데?]

[EA는 거대한 게임 개발사야. 지금도 수많은 자체 게임을 개발하고 있고 이를 진행하는 데는 전혀 지장이 없는 상황이지. 그런데 3억 달러를 투자해 달라며 개발을 핑계 댄다?]

[이해했어. 그러니까 ‘우리는 T3를 인수하는 데에 돈을 다 쓰고 싶으니, 우리가 개발할 게임은 GF에서 대줘.’라는 거지?]

[맞아.]

[···우와. 진짜로 기획안을 잠깐 봐도 되는 게 맞구나. 지금 이 짧은 시간 동안 기획안을 봐 놓고는 여기까지 계산을 다 하다니.]

‘미래에서는 유명하게 퍼진 이야기에 불과하거든.’

[그럼. 어떻게 할 거야? 얘들 너무 얌체 같은데, 투자 안 할 거지?]

[아니. 할 건데?]

[뭐? 얘네 하는 짓 너무 밉상인데? 이걸 다 알면서도 투자를 하겠다고?]

[응.]

[대체 왜?]

[‘일렉트릭 아트가 원할 때 손을 내밀어준 사람’이라는 좋은 포지션을 잡으려고. 그래야 GTA 말고 내 관심을 끄는 게임을 가져올 수 있거든.]

데들리 스페이스.

그 게임이라면 1억 달러 절대 아깝지 않다.

[내 생각인데, 너는 정치를 해도 잘할 거야.]

내 웃음을 본 알버트가 고개를 흔들었다.

*

일렉트릭 아트.

원래 이 회사의 초기 이름은 일렉트릭 아티스트로서 그 의미는 ‘전자기기를 다루는 것에 있어서 예술가와 같다’는 의미라고 한다.

회사를 창립할 때 이름을 정하는 데는 매우 많은 고민이 들어간다. 일렉트릭 아트 역시 그런 과정을 겪었다.

처음에는 ‘소프트 아트’라는 이름으로 하고 싶었는데 이미 동일한 이름의 회사가 있었고, 창립자였던 트래블 호킨은 ‘어메이징 소프트웨어’를 밀어붙였으나 창업 멤버들 전체가

‘그건 너무 끔찍한 이름!’이라며 강력하게 거부했다.

타협점을 찾아서 지은 이름이 바로 일렉트릭 아티스트다.

문제는 정작 아티스트라는 이름을 달았는데 회사에는 영업, 마케팅, 엔지니어만 존재할 뿐이라는 거였다. 그래서 없는 아티스트 대신 아트로 변경하면서 지금까지 이 이름으로

남아있게 되었다.

‘얘들도 콘솔에 도전하기는 했었지.’

정확히는 일렉트릭 아트가 아니라 이 회사의 창업자가 콘솔이라는 영역에도 도전하길 원했다. 그래서 나온 콘솔이 ‘3Do 얼라이브’인데 이건 게임기가 나오던 시절을 살았던 사

람들이라면 LZ에서 광고하던 엄청난 광고를 기억할 수 있을 것이다.

그 이후의 태생이라면?

그런 콘솔이 존재했었는지 아예 모른다.

‘폭삭 망했죠.’

얼라이브는 그만큼 끔찍한 실패와 함께 세간에서 사라진 콘솔이다. CD 영상 재생 매체와 게임기의 콜라보레이션 제품으로서 ‘하나의 제품으로 두 가지 장점을 모두 누릴 수 있

다’는 장점을 어필했다.

하지만 실상은 그냥 비디오는 비디오대로, 게임기로는 게임기대로 성능이 떨어져서 이도 저도 아닌 제품이었다. 이러니 망할 수밖에 다른 도리가 있으랴.

이토록 까고 또 까도 양파처럼 계속 새로운 깔 것들이 등장하는 일렉트릭 아트였지만, 이들도 나름의 업적이라는 것을 가지고 있다.

‘얘들도 한때는 아름다운 회사였는데.’

돌아올 수 없는 순수했던 시절이 누구에게나 있듯, 본래 일렉트릭 아트 역시 그런 시절이 있었다.

이 회사가 설립된 시기는 게임 개발자들이 자신의 이름을 걸고 게임을 출시한다거나 게임에 대해 인터뷰를 하는 것이 금지되어 있었다.

심지어 지금은 엔딩 크레딧에 개발자의 이름이 들어가는 것이 당연했지만, 당시에는 이조차도 금기시되어 있을 정도다. 그런데 이 족보 없는 전통을 깬 회사가 바로 일렉트릭 아

트였다.

지금의 욕심쟁이 일렉트릭 아트를 생각하면 절대 상상도 할 수 없지만, 이곳은 원래 굉장히 개발자 친화적인 회사였으며 개발자를 가장 먼저 우대하는 그런 회사였다.

‘자본주의가 변질시킨 괴물이라고 할까? 아니면 그냥 돈 욕심 많은 인간의 본성이 이런 걸까.’

아무튼, 일렉트릭 아트의 개발자 친화적인 정책은 초창기에 게임의 질을 높이는 긍정적인 결과를 가져왔다. 자신의 이름을 걸고 개발하는 만큼 개발자들은 더욱더 높은 퀄리티

의 게임을 개발하고자 노력했고 이것은 결과적으로 게임 전체의 질을 높인 것이다.

“도착했습니다. 회장님.”

일렉트릭 아트의 CEO인 요한 니콜라스와의 협상을 위한 자리.

LA를 거점으로 활동하고 있는 GF와 실리콘 밸리를 거점으로 하는 일렉트릭 아트는 미국치고는 꽤 가까운 곳에 자리하고 있는 편이었다.

물론 그 가깝다는 거리는 미국 기준이다.

353마일.

한국식으로 568Km나 되었으니까.

거리가 이쯤 되면 중간에서 만나는 것도 무의미해진다 그 탓에 우리보다 더 아쉬운 입장인 일렉트릭 아트의 CEO가 직접 LA로 찾아왔다.

그와는 GF가 아닌 넷플렉스의 본사에서 만나기로 했다. 딱히 GF에서 만나지 못할 이유는 없었지만, 그래도 GF보다는 넷플렉스의 사무실이 조금 더 크고 고급스럽기 때문에 이

장소로 정했다.

‘협상은 기세부터 시작인데 좁은 곳에서 만나줄 이유가 없잖아.’

요한 니콜라스는 사정이 급했던 만큼 벌써 도착해서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들어오시라 하세요.”

“네.”

당연한 말이지만, 그가 일찍 왔다고 해서 내 사무실에서 기다릴 수 있던 건 아니다. 내가 오기까지 그는 VIP 응접실에서 대기했고 내가 도착한 후 허락해주자 비로소 들어올 수

있었다.

[윤태식입니다.]

일렉트릭 아트와 우리 사이에는 아직은 별다른 응어리가 없는 관계다. 일단 먼 곳까지 찾아온 그를 반갑게 맞아주기 위해 자리에서 일어나 악수를 청했다.

[반갑습니다. 요한 니콜라스입니다.]

[먼 곳까지 오시느라 피곤하실 텐데, 이쪽으로 앉으시지요.]

[G 크로스의 판매량이 요즘 천장을 뚫고 끝없이 올라간다고 하던데, 뿌듯하시겠습니다.]

미국발 금융위기가 가져온 누가 봐도 기적적인 반대급부.

세계의 전반적인 산업들이 후퇴하고 있는 가운데 G 크로스는 특유의 가성비에 힘입어 폭발적인 성장을 하고 있었다. 시장의 수요를 생산속도가 따라잡지 못하고 있을 정도도 말

이다.

[운이 정말 좋았지요. 이런 사태가 일어날 줄 그 누가 짐작조차 했겠습니까?]

[그것이 운만 가지고 가능할까요? 회장님께서 시기를 보는 눈을 타고나신 것이죠.]

그와 내가 웃으며 인사치레를 나누었다.

자리에 앉은 뒤 넷플렉스의 총무팀 직원들이 커피와 다과를 가져다주었다.

[이번에 G 크로스로 출시할 게임들에 투자를 받으시고 싶으시다고요?]

[그렇습니다. 아시겠지만, 레이먼 브라더스가 무너지면서 미국에 돈이란 돈은 전부 씨가 말랐지 않습니까? 지금 이 미국 땅에서 달러를 움직일 수 있는 건 오직 GF뿐이라고 소

문이 무성합니다.]

‘지들도 주머니 속에 20억 달러 이상을 쥐고 있다는 걸 뻔히 알고 있는데, 뻔뻔하게 표정 하나 안 변하네.’

이러니 일렉트릭 아트와 같은 대형 기업을 운영할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뻔뻔하게 협상하는 건 나도 제법 할 줄 안다.

[그럼 몇 개의 게임을 우리 쪽으로 출시해줄 생각입니까?]

사실 몇 개의 게임을 출시해줄 것이냐는 이미 이들이 보낸 제안서에 힌트가 다 있었다. 그곳에 3개의 게임을 소개하고 있었으니 아마도 요한 니콜라스는 세 개의 게임만 이야기

할 것이다.

[지금 내부적으로 이야기가 되는 게임은 ‘버닝 아웃’과 ‘미러 에지’ 그리고 ‘데들리 스페이스’라는 게임입니다.]

< 하나 더 > 끝

(438)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