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999년 게임 스타트-435화 (435/577)

< 하나 더 >

[진짜 우리 회사는 대단하구나. 나는 세계에서 가장 대단한 나라의 국민이면서 세계에서 가장 대단한 회사에 소속된 세계에서 가장 대단한 행운아네?]

‘저게 뭔 소리야?’

[그나저나 너 진짜 대단하다. 이런 심오한 이야기를 하면서 눈은 계속 기획안들을 읽고 있는 거잖아. 진짜 이 정도 능력은 돼야 회장님 노릇을 할 수 있는 거구나.]

‘오해걸랑?’

지난 21일.

나는 공식적으로 미국의 게임개발사들에 투자를 약속했다. 내가 만족할만한 게임 기획을 가져오는 회사에 직접 투자하겠다는 약속을 말이다. 그 결과, 지금 내 앞에는 엄청난 양

의 기획안들이 쌓여가는 중이다.

그리고 언제나 그렇듯, 나는 내가 아는 미래의 기억을 토대로 열심히 성공할 게임들의 목록과 대조하고 있을 뿐이었다. 분석이 아니라 단어 검색이라고 보면 되는데 이 모습이

완벽하게 멀티태스킹 하는 걸로 비친 모양이다.

그러던 중 인터폰이 울렸다.

- 회장님. 김유천입니다. 손님이 찾아왔습니다.

“손님? 누구지요?”

이상한 나라의 동물을 쳐다보듯 있던 알버트가 내 쪽으로 다가왔다.

[왜? 뭐야? 누가 왔대?]

[잠깐만.]

- 게임 개발사라는데, 죄송하지만 저는 처음 듣는 개발사라서요.

“어딘데요?”

- 아나킨 스튜디오라고 합니다.

내 입가에 미소가 걸렸다.

아는 이름.

쇼핑 목록에 있는 상품이었다.

*

최후의 도전. 놓쳐서는 안 되는 마지막 기회!

아나킨 스튜디오의 미카엘과 로널드는 이러한 마음가짐으로 즉시 LA로 날아왔다. 그러나 정작 GF 미국 법인의 입구에 도착해서는 내부로 들어가지도 못하고 어정쩡하게 방황

하고 말았다.

[어쩌지? 그냥 쳐들어가면 총 맞는 거 아닐까?]

[으으··· 너무 무턱대고 찾아온 것 같아.]

둘은 GF의 빌딩을 보고서야 자신들이 지금 어떤 회사에 무턱대고 달려왔는지 현실을 깨달았다. 그들로서는 영화에서나 봤지 현실적으로는 상상도 할 수 없었던 거대한 건물이

눈앞에 있었던 것이다.

1층 로비에 들어섰을 뿐인데도 주눅이 들었다. 자신들이 얼마나 대단한 IP들을 보유하고 있는가를 과시하듯 전시되어 있는 유명 캐릭터들. 여기에 ‘허튼짓 하면 이 총으로 심장

을 마사지해 주지.’라고 할 것만 같은 건장한 경비원들이 무서움을 배가시켰다.

[그러게. 이렇게 큰 회사에 아무런 약속도 잡지 않고 찾아왔으니··· 만나줄 리가 없겠지?]

[그러겠지? 로널드, 그럼 어떡해야 할까?]

[몰라. 자꾸 나한테 묻지만 말고 너도 좀 생각을 해보라고.]

[어떤 생각을 하면 좋을까?]

[이 미친 놈.]

사람과 사람의 만남에서 첫인상은 굉장히 중요한 요소였다. 그런데 약속도 없이 불쑥 찾아온 불청객에 대해서 GF의 회장은 어떠한 생각을 가질까? 그의 성격은 모르지만 한 가

지는 알 수 있었다.

[우리 같은 불청객을 좋아하지는 않을 거야.]

투자하겠다고 찾아온 것도 아니고 투자를 받겠다고 찾아온 불청객. 심지어 딱히 유명세가 있는 것도 아닌 자신들이 이곳에서 환영받을 가능성은 없다고 봐야 했다.

그러나 현실을 파악했을지라도 발길을 돌릴 수는 없는 노릇이다. 무모한 용기라도 부리지 않았다가는 회사가 분해되어 날아갈 게 뻔했기 때문이다.

선택할 수 있는 지문은 두 가지다. 이대로 정면 돌파를 하는 것과 돌아가서 정중하게 약속을 다시 잡고 순서를 지키는 것.

그러나 후자가 옳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이를 선택할 수는 없었다.

[돌아가면 우리 여기에 다시 못 오겠지?]

[비행기 탈 돈이 없어. 그뿐만이 아니야. 당장 여기서 며칠 시간을 끄는 것조차도 숙박비를 땅겨봐야 할 형편인데 그 돈도 없지.]

[빌려줄 사람도 없고.]

[아··· 우린 왜 이렇게 가난한 걸까··· 돈 좀 많아 봤으면······.]

아나킨 스튜디오는 1999년에 설립된 회사다. 나름 이제 10년이 다 되어가는 회사인데, 그 10년간 게임을 개발해서 벌어들인 돈이 없었다. 말 그대로 하루 벌어 하루 먹고 사는

삶과 같은 개념으로 빌려 쓰고 개발 후 돈이 들어오면 다시 갚은 뒤 또 빌리고의 반복이었다.

그러니 지금도 이들은 돈을 빌릴 수 있는 지인이란 지인에게는 최대치로 돈을 빌린 상태였다. 당연히 돈을 더 빌려줄 사람도 없었다.

어쩌면 좋을까. 머릿속만 복잡하다.

얼마의 시간이 흘렀을까?

[저 사람들은 뭐지?]

한편, 로비에서 이리저리 방황하는 채 시간만 끄는 이들은 누가 봐도 의심스럽게 보일 뿐이다. 그 사람들의 행색이 볼품없고 손톱을 물어뜯다가 머리를 마구 헝클어뜨리는 이상

한 행동까지 하면서 2시간 넘게 서성거린다면 더더욱 그럴 것이다.

지켜보던 몇몇 눈들이 어딘가로 보고했다.

잠시 후, 큰 체구의 경비원들이 이들에게 다가왔다.

[실례합니다. 죄송하지만 이곳에는 무슨 일로 오셨는지 말씀해주실 수 있으십니까?]

복장과 덩치가 주는 위압감은 아무리 공손한 말로 물어도 무시무시한 느낌을 준다. 미카엘과 로널드 역시 잘못을 아직 저지른 것도 아닌데 괜히 불안해져서 말을 더듬더듬했다.

[그··· 저희는··· 그게··· 어어···]

[이곳은 엄연한 사유지이며 보안이 중요한 GF 그룹의 미국 법인 사무실입니다. 명확한 사유를 말씀해주시지 않으면 정당한 법적 절차에 따라서 사유지에서의 추방을 집행할 수

있습니다.]

법이라는 단어는 평범한 소시민을 겁을 주는 것이 너무나도 쉬운 단어다. 아나킨 스튜디오의 두 창업자는 남자들의 말에 얼굴이 창백하게 질렸다.

‘여기서 이렇게 쫓겨나면 정말로 기회가 없을 수 있어.’

자신들이 이렇게 쫓겨난 것이 알려진다면 이제는 기회가 완전히 사라진다. 예의 없이 찾아온 사람에서 찾아와서 행패나 부리고 간 찌질이들로 전락해버리면 어찌 될까. 어찌어

찌 돈을 마련해서 숙박하며 버틴다 해도 불쾌해진 GF가 자신들을 만나주지 않을 가능성이 컸다.

‘몰래 도망치자. 이름을 안 말하면 그냥 모르고 넘어갈 거야.’

[죄송합니다! 빠··· 빨리 나갈···]

겁을 먹은 로널드가 얼른 나가겠다고 말하려던 순간이었다.

[저··· 저희는!]

미카엘의 손이 우악스럽게 로널드의 팔을 잡아끌었고, 그 덕분에 로널드는 하려던 말을 집어삼켰다. 그리고 미카엘이 속사포처럼 빠르게 준비한 말을 쏟아부었다.

[저희는! GF에서 게임 개발사들의 기획안이 마음에 들면 투자한다는 말을 듣고 찾아왔습니다! 연락도 없이 이렇게 불쑥 찾아온 것이 예의가 없는 행동이라는 것을 잘 알지만, 너

무 급한 나머지 이렇게 오게 됐습니다! 들어가야 할지 말아야 할지 어쩌지도 못하고 이렇게 어정쩡하게 있어서 불편함을 끼쳤습니다! 죄송합니다!]

자신들은 무해한 사람이라는 사실을 보여주고자 가방의 포트폴리오도 보여주었다. 의심스럽거나 위험한 물건은 절대 없다는 적극적인 제스쳐였다.

적대적이던 저들의 시선이 바뀌었다.

‘내가 말을 이렇게 잘했나?’

급한 대로 마구 내뱉은 자신이 뿌듯하다. 그리고 경비원들은 경직된 표정 대신 웃음기를 보이며 말했다.

[투자요? 어디라고 말씀드릴까요?]

[오스틴에서 온 아나킨 스튜디오입니다.]

[알겠습니다. 저희가 대신보고 드리겠습니다. 하지만 저희가 보고를 올려도 회장님이나 비서실장님께서 꼭 만나주신다는 보장은 없습니다. 저희는 그냥 보고만 올리는 거예요.]

[아닙니다. 알려주시는 것만으로도 정말 감사합니다!]

바짝 긴장한 미카엘의 모습이 안타까웠던 걸까, 경비원들은 신속하게 업무를 이행했고 미카엘과 로널드는 아까와는 조금 다른 의미의 기다림을 갖게 되었다.

1분··· 2분··· 5분··· 10분······.

앞서 방황했던 2시간에 비해 10분은 기다린다는 표현이 민망할 정도의 짧은 시간이었다. 그러나 초조한 마음과 심리적 압박감은 비교할 수 없는 수준의 차이였다.

누가 나올까?

어떻게 말해야 할까?

거절당하면 정말 다른 방법은 없는 걸까?

두 사람 사이의 우스꽝스럽던 대화조차 사라지고 머릿속이 다시금 복잡해졌다.

그즈음.

[네, 알겠습니다.]

드디어 로비의 직원이 인터폰을 받았다.

[회장님께서 직접 만나보시겠다고 하십니다.]

로널드와 미카엘이 벌떡 일어났다.

[정말입니까?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진짜 진짜 감사합니다. 너무너무 감사합니다. 오 하나님 맙소사! 할렐루야!]

마지막으로 교회에 갔던 때가 5년도 더 됐건마는 오늘만큼은 절실한 기독교 신자가 된 것 같다.

그렇게 둘은 경비원들의 안내를 받으며 GF의 회장이 있다는 사무실로 들어섰다. 미리 알아본 바로는 각진 외모라는 표현이 어울리는 운동선수 같은 몸에 꽤 젊은 나이가 특징인

타고난 부자라고 했다. 돈 냄새를 미친 듯이 잘 맡아서 실패를 경험한 적이 없는 부러운 인물이라는 말과 함께 말이다.

[음. 오셨네.]

콧수염과 선명한 눈매로부터 시선을 사로잡는 외모. 눈에 번쩍 뜨이는 미남이라기보다 원숙한 매력이 돋보이는 남자가 자신들을 보고 말했다.

‘동양인인 줄 알았는데?’

‘우리가 아는 사람인가?’

은근히 카리스마를 풍기는 처음 보는 사람인데 괴상하게 낯익은 느낌이었다. 어쨌거나 사무실에서 의자에 몸을 파묻고 있던 편한 자세를 보면 그 정체는 물어볼 것도 없이 뻔했

다. 미카엘과 로널드는 윤태식 회장에게 얼른 인사했다.

그런데 그보다도 빨리 윤태식 회장이 일어났다.

[그럼 난 이만 가볼게.]

‘응?’

‘가요? 간다고요?’

어딘가에 손을 흔들더니 사무실을 불쑥 나가버리는 것이 아닌가. 어안이 벙벙해진 두 사람이 서로를 쳐다보며 물음표를 가득 띄우고 있을 때였다.

[일단 잠시 거기에 앉아서 기다려주시겠습니까?]

[으아악!?]

[어억?]

자신들이 들어왔을 때, 사무실에는 방금 나간 남자만이 있었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그게 아니었던 모양이다. 서류 더미에 파묻혀서 보이지 않았던 인물이 서류 너머에서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확실히 그자는 동양인이었다.

[제가 지금 유령 같은 몰골인가요? 그 정도는 아닌 거 같은데?]

[아닙니다!]

[죄송합니다. 외관이 이상해서라거나 그런 게 아니라 그냥 사람이 있는 줄 모르고 있었는데··· 그래서 그만···]

[죄송합니다!]

[괜찮아요. 번갈아 가며 사과할 필요 없습니다. 제대로 인사도 못 하고 앉아 있던 제 잘못이잖습니까. 아무튼, 지금은 확인할 것이 있으니 일단 거기 소파에 앉아서 기다려주십

시오.]

[네!]

처리해야 할 서류들이 많았는지, 사내는 아무런 말 없이 서류를 5분 이상 읽었다. 그리고 일을 마친 뒤 그들에게 다가왔다.

[반갑습니다. 윤태식입니다.]

미카엘은 몇 번 혀를 짓씹은 뒤 긴장한 채로 말했다.

[반갑습니다. 저는 미카엘 콜란토리오입니다.]

[미카엘 콜란토리오? 유럽식 이름을 사용하시는군요?]

[네! 프랑스에서 왔습니다!]

[하하하. 그렇게 긴장하지 않아도 됩니다. 편하게 말씀하세요.]

[감사합니다!]

자신이 말해놓고도 참 별 게 다 감사하다는 생각이 절로 드는 멍청한 대답이었다. 어떻게든 좋은 말만 해보겠다는 눈물겨운 노력이 만들어 낸 참사였다.

‘아까 경비원에게 했던 것과 같은 매끄러운 말이 좀 나왔으면 좋겠는데.’

랩처럼 말하는 것과 더듬더듬하는 쪽 중 무엇이 더 나을지는 모르겠으나, 미카엘은 부디 바보같이 보이지는 않았으면, 하고 바랐다.

[투자를 받고 싶어서 오셨다고 들었습니다.]

[그렇습니다.]

[기획안은 준비해서 오셨죠?]

[네! 여기 있습니다!]

‘젊은 회장이라서 조금 편하게 느껴질 거로 생각했는데 오히려 더 긴장되잖아.’

동양인이라서 그런가, 실제로도 젊다고 했으니 꼭 그 때문은 아닐 것이다. 이를 잘 아는데도 두 사람에게 GF의 윤태식 회장은 이상하게 다른 CEO들보다 더욱더 어렵게만 느껴

졌다.

‘군대에서 경험한 상사들과 비슷한 느낌이야.’

윤태식 회장의 눈이 기획안을 차분하게 읽어가면 읽어갈수록 두 사람은 긴장감에 더욱더 얼어붙어만 갔다.

‘맙소사! 주여. 제발 한 번만 도와주시면 앞으로 매주 교회에도 찾아가겠습니다.’

‘꼬박꼬박 헌금도 바칠게요. 그러니 부디 기회를 주시옵소서!’

둘은 각자의 방식으로 기도를 하며, 윤태식 회장의 입에서 긍정적인 말이 나오기를 기다렸다.

무언가에 대해서 고심하는 모습을 보이는 윤태식 회장.

이윽고 그가 말했다.

[확실히 두 분은 대중성 있는 게임보다는 두 분이 만들고 싶은 게임을 만드는 분들 같군요.]

‘망했다······.’

결론이 났다. 저 말은 상업성이 없고 투자 가치가 없다는 말과 일맥상통한다.

다 끝났다는 생각에 미카엘의 고개가 바닥을 향해 뚝 떨어졌다.

GF에서 투자를 받아보자는 계획은 이대로 사망한 것이다.

[재미있어요. 마음에 드네요.]

[그래도 읽어봐 주셔서 감사했습니다.]

[네?]

‘돌아가자.’

일생일대의 도박은 실패했다.

[바쁘신 분의 시간을 이렇게 내어주셔서 감사드리고 또 죄송했습니다.]

정중하게 말하는 그의 귀로 소곤거리는 듯 귓가에서 작게 외치는 로널드의 목소리가 들렸다.

[···야! 미카엘!]

[응?]

[정신 차려!]

의아해하는 그에게 윤태식 회장이 말했다.

[확실히 자기만의 세계가 확실한 분이군요. 못 들으신 것 같으니 다시 말씀드리겠습니다. 대중성은 없으나 재미있고 저의 마음에 들었습니다.]

[네? 아아! 네! 그 말씀은···]

[맞습니다. 특히나 이 부분이 마음에 들어요. 암살 게임이면서 잠입 액션 게임이기도 한 이 애매한 장르. 이것이 제 마음을 특별히 사로잡는군요.]

윤태식 회장의 말에 로널드와 미카엘의 몸에서 긴장감이 확 풀어졌다. 심지어 로널드는 눈가에 눈물이 살짝 맺혀있기까지 했다.

암살게임이면서 잠입 액션 게임. 이 게임은 자신이 암살자가 되길 원한다면 게임 내에서 모두를 다 죽이고 게임을 클리어 할 수도 있으며, 암살자가 아닌 잠입을 통한 미션 완수

를 원한다면 아무도 죽이지 않고 게임을 클리어 할 수도 있다.

하나의 게임이지만 두 개의 장르적 특성을 가진 것이다.

그리고 보통은 그것 때문에 이런 게임은 투자할 수 없다는 소리를 들어왔는데 윤태식 회장은 그 포인트를 짚으면서 오히려 마음에 든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투자하겠

다는 말보다 훨씬 강력하게 둘의 마음을 흔들었다.

[기획안을 보니 이름이 그냥 크로싱으로 되어 있더군요. 아직 정식 이름이 없습니까?]

[예. 아직 못 정했습니다. 사실 크로싱도 이 게임의 가제가 아니라 그 전에 개발하던 게임의 가제였습니다.]

아나킨 스튜디오에서 제대로 출시한 게임은 총 두 개다.

아더 페이탈리스와 히어로 마이트 매직.

< 하나 더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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