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999년 게임 스타트-433화 (433/577)

< 하나 더 >

[알았어. 엄청나게 무시무시한 폭탄이라고 대충 치자고. 그래서 그게 터지면 어떻게 되는 건데?]

[원래 이야기는 결과만큼이나 과정의 재미가 있는 건데 그걸 빼먹으면···]

[오오. 제발. 그러지 말고 살려줘. 터지면 어떻게 되는 건지로 바로 넘어가자. 응?]

[그야 쉽지. 터지면 미국만이 아니라 전 세계로 엄청난 혼란이 생겨나는 거야. 한순간에 수많은 회사가 도산하게 될 정도의 메가톤급 폭발이지.]

[그런데 뉴스나 전문가들의 이야기를 보면 잘 견뎌내고 있다고 그러던데?]

당연하다. 세상 어떤 정부가 ‘국민 여러분. 우리는 이제 좆됐습니다!’라고 말하겠는가?

원래 이런 사태가 벌어졌을 때 정부가 하는 가장 중요한 일은 사람들이 패닉에 빠지지 않도록 혼란을 수습하는 일이다. 그리고 그런 혼란을 수습하는 가장 쉬운 방법이 사람들에

게 ‘지금 세상은 그렇게 위험하지 않습니다.’라고 하는 거였다.

멀리 찾을 것도 없이 대한민국의 국부라고 하는 대통령도 ‘안심하십시오!’라고 하면서 한강 다리를 폭파한 사례가 있었던 만큼, 작금의 상황은 아는 이들이 소수, 대다수는 낙관

하며 절벽 밑 나락으로 떨어지기 직전인 상태였다.

누가 살아남을지는 슬프도록 명확하게 나뉘어 있다.

[말이야 다 그렇게 하지. 하지만 이건 무조건 터져. 그건 누구나 다 알고 있어. 그런데도 저런 말을 하는 건 ‘내 임기 때만 안 터지면 된다’고 생각하고 그걸 기대하기 때문이야.]

요행은 요행일 뿐이다. 결국, 그렇게 막고 있던 둑이 터지면 둑이 없는 것보다 큰 홍수로 찾아오게 된다.

그리고 며칠 후.

“회장님! 터졌습니다!”

드디어 올 것이 왔다.

서브 프라임이 터진 그 순간부터 이미 예견이 된 일이었다.

“지금 미국 전역에 난리가 났습니다!”

미국 경제 대공황!

이것은 단순히 저 서브 프라임 모기지 사태만으로 벌어진 것이 아니다.

‘신용파산스와프. 저것만 없었더라면 이 지경이 되지는 않았을 텐데.’

이쯤 되면 ‘이 사태를 이용해서 파생상품을 구매한다면 엄청난 돈을 벌 수 있었을 텐데. 왜 그러지 않았느냐’고 되물을 수 있다. 하지만 이건 한 가지만 알고 하는 이야기다.

작금의 사태는 전 세계 역사상 유래 없는 경제 위기다.

이것에 배팅한다?

그것도 미국인이 아닌 외국인이?

‘자살하려고 환장한 짓거리지.’

미국에서 그것을 가만히 지켜만 보고 있을 것 같은가?

그리고 가만히 지켜볼 만한 수준으로 약삭빠르게 투자한다고 쳐보자.

그 후는 어떻게 될까?

미국의 아픔을 이용해서 번 돈. 아주 잠깐은 달콤할 것이다. 그러나 딱 거기서 끝난다. 국가 역시 개인의 집합체다. 감정적으로 용납할 수 없으며 나는 미국에서 사업할 엄두도 내

지 못하게 된다.

이제 저울에 올려두면 계산은 쉽다. ‘지금 당장 벌 큰돈 vs 앞으로 평생 벌 천문학적인 돈’이 있다. 당연히 후자를 택하는 쪽이 현명하다.

‘게다가 부유한 정도로만 계산하면 나는 더 돈을 벌 필요가 없는 수준이야.’

지폐 뭉치에 깔려서 죽는 게 소원이 아닌 바에야, 돈만 바라보며 살 이유가 없었다.

끝으로 내 기억은 대략적으로는 맞지만, 세부적으로는 뒤떨어진다는 점을 들 수 있다. 도박은 타이밍의 싸움이다. 정확하게 시점을 알고 배팅해야 수익을 벌 수 있는데 나는 ‘얼

추 이맘때에 일이 터지지.’라는 폭넓은 바리에이션을 갖고 있다.

잘못해서 막차가 오기 바로 전에 차를 타거나 막차를 놓치면 여지없이 쪽박이다. 그래서 파생상품을 투자라는 단어로 포장한 도박이라 하는 것이다.

한편, 충격적인 보도를 접한 알버트가 아연실색해서 내게 물었다.

[맙소사! 진짜로 터졌어! 그럼 어떻게 해? 우리 미국이 망하는 거야?]

[안 망해. 넌 미국인이면서도 그렇게 미국을 모르냐? 미국이 어떤 나란데 망해.]

[미국이 잘나가는 거야 나도 잘 알지. 근데 그 대단하던 로마 제국도 망했고, 미국의 유일한 맞수였던 러시아도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잖아. 미국도 언젠가 그렇게 되지 말란 법

은 없지.]

‘어라? 이런 말도 할 줄 알아?’

대화가 조금만 복잡하면 머리 아프다고 관자놀이부터 누르는 알버트에게서 이런 말이 나오다니 그가 또 새롭게 보인다.

[뭐야? 그 표정은? 나 이래 봬도 할리우드 대 스타야! 영화배우라면 이 정도는 기본이라고!]

배우 생활을 하다 보면 다양한 상황에 대한 연기가 필수니까.

[그럼 어떻게 할 건데? 이거로 돈을 벌 생각은 없다며? 뭐 하려는 계획이 있어?]

[있지.]

[뭔데?]

[돈을 쓰는 일.]

[응?]

난데없이 돈을 쓰겠다는 내 말에 알버트는 멍청한 표정을 지었고, 김유천 실장은 기업 인수에 들어간다는 말로 알아듣고는 바로 행동할 준비에 들어갔다.

“바로 기업을 알아볼까요?”

하지만 이번에는 그가 틀렸다.

“김 실장님. 그게 아닙니다.”

“무슨 말씀이신지 모르겠습니다.”

“이 시기에 미국의 게임 개발사들을 손에 넣으려고 미국에 온 것은 맞는데, 이렇게 바로 득달같이 물어뜯으려고 온 건 아닙니다.”

“그럼. 돈을 쓰신다는 말씀은···”

이 사태로 마음 아픈 일을 겪는 사람이 참으로 많다.

“우선 100억 기부부터 시작합시다.”

“···아! 역시 회장님이십니다.”

무슨 의도인지 파악한 그가 즉각 움직였다.

과거에는 왼손이 하는 일을 오른손이 모르도록 하는 게 미덕이었을지 모른다. 그러나 지금은 널리 알리는 게 진리다.

[좋아. 나도 같이하자고.]

곁에 있던 알버트 역시 손을 맞잡았다.

【글로벌 게임 기업 GF그룹. 1,000만 달러 쾌척! ‘미국의 발전을 위해 써 달라.’】

【의리의 GF. 미국의 고난과 함께하겠다. 1,000만 달러 기부하다!】

【GF 그룹의 윤태식 회장. 거리의 노숙자들을 위한 복지 맨션 건설!】

【1,000만 달러 기부의 윤태식 회장! 부랑자들을 위해 100만 달러 추가 기부!】

【GF의 윤태식 회장과 마이크루의 빌 게이트가 손을 잡았다. 뉴욕, LA, 시애틀의 부랑자들을 위한 매일 아침 식사!】

【라이언 맨으로 일약 스타덤에 오른 알버트 다우니 주니어. 윤태식 회장 따라 10만 달러 기부하다.】

노골적이지는 않으나 자연스럽게 퍼져나가도록 섬세히 손을 썼다. 사실 딱히 기자를 구워삶는 노력조차 필요 없었다. 금액의 크기가 크기이다 보니 알려지지 않을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 결과, 인터넷 기사에는 연일 내 기부에 관한 이야기가 올라왔고 일종의 기부 경쟁이 생겨난 것인지 하나, 둘, 위기 사태에도 여전히 잘 나가는 미국의 기업가들도 나서서 기부

를 시작했다.

여기저기에서 수십억 단위가 쏟아지는 형국이었다.

“이런 거 보면 미국이라는 나라가 참 대단하긴 합니다.”

“네, 회장님. 한국이었으면 얼마를 기부해야 최대한 적게 내고 눈치를 안 봐도 될까? 아니 기부를 안 하면서 눈치도 보지 않을 방법은 없을까? 뭐, 이런 거나 계산하고 있었을 텐

데 말이죠.”

한국의 기업가들도 당연히 기부를 많이 한다. 그러나 미국처럼 신속하게 남들 눈치 안 보고 먼저 기부하는 일은 찾아보기 어렵다. 이들의 기부는 계산기를 다 쳐보고 나서 마진

까지 알아본 뒤 행동하는 사업의 일환에 불과해서다.

하지만 어쨌거나 기부는 기부이며 없는 것보다는 있는 쪽이 백배 낫다.

“이제 원하는 이미지도 얻었으니 슬슬 움직여 봅시다.”

“네. 기업들을 알아보겠습니다.”

이를 지켜보는 알버트가 고개를 흔들었다.

[검은 손이 여기에 있어. 영화랑 현실이랑 이러면 뭐가 달라?]

*

미카엘 콜란토리오.

그는 나름 잘나가는 게임 개발사의 대표였다. 아니, 정확히는 지금도 그 회사의 대표다. 단지 ‘잘 나가는 게임 개발사’라는 수식어가 사라졌을 뿐이다.

[이건 진짜 말도 안 되는 거야. 어떻게··· 내가 어떻게 일군 회사인데···크흑.]

그는 본래 프랑스군에서 군 복무를 하던 청년이었다.

울티마 다크 월드의 팬이었던 미카엘 콜란토리오는 군 복무 도중에 재미로 울티마 퀴즈 콘테스트에 참가했다가 하필이면 그 콘테스트가 사실 일렉트릭 아트의 직원 채용 과정의

일부였고 그 덕분에 얼떨결에 군 제대와 동시, 일렉트릭 아트의 고객 상담 서비스로 입사하게 되었다.

우연히 시작된 게임과의 인연.

그러나 그와 일렉트릭 아트의 관계는 오래 지속하지 못했다.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일렉트릭 아트는 점점 스포츠 게임에 집중하게 되었고 그는 그런 게임에 관심이 없었기 때

문이다.

결국, 이직하게 된다. 하지만 얼마 후, 그의 마음속에는 직접 게임을 개발하고 싶다는 꿈이 차오르고 퇴사 후, 친구와 함께 자신만의 게임사를 차렸다.

그것이 바로 지금의 아나킨 스튜디오다.

게임 개발사를 차렸으니 게임을 만들어야 하는데, 딱히 이 분야에서 인정받을만한 경력도 경험도 없는 이들이 당장 무슨 게임을 기획할 수 있을까? 그래서 생각한 것이 그와 친

구가 함께 즐겨 했던 게임 울티마 다크 월드 3을 개발하기로 결정했다.

그는 그 길로 울티마 다크 월드의 개발자에게 찾아가 협력을 구했다. 이후 판권을 가진 일렉트릭 아트를 찾아가 기획안을 보여주었으나 일렉트릭 아트는 기획안의 상당 부분을

수정하길 요구했다.

- 울티마라는 이름을 포기했으면 포기했지. 내가 만들고 싶은 게임 말고 다른 게임을 만들 수는 없어.

마음을 단단히 먹은 그는 울티마라는 이름을 포기하고 ‘아더 페이탈리스’라는 새로운 이름으로 게임을 개발하고 발매했다. 결과는 그럭저럭의 수준이다. 이 이름을 들어본 사람

이 많지 않을 정도의 성적만 이뤘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나킨 스튜디오라는 회사를 유통사들에 알리기에는 충분했다. 눈에 띄는 성과는 없었으나 나름대로 매니악한 팬층을 만드는 것에는 성공한 것이다.

다만, 그렇다고 해도 워낙에 매니악 한 게임인지라 아더 페이탈리스의 후속작을 개발할 투자자를 찾는 일은 요원했다.

이제 선택지는 두 가지만이 남았다.

첫째, 아나킨 스튜디오가 문을 닫는 한이 있더라도 이대로 아더 페이탈리스를 고집하느냐.

둘째, 다른 게임을 개발하느냐.

여기서 미카엘 콜란토리오는 스튜디오의 존속을 위해 유니 소프트의 제안을 받아 ‘히어로 마이티 매직’의 스핀오프 격인 게임을 개발했다. 그리고 이것으로 본격적인 투자자를

찾을만한 역량이 있다는 것을 게임계에 증명해내게 된다.

‘그렇게 겨우겨우 여기까지 왔는데···!’

최근에 들어서는 영화계의 거장 스티브 스필버거와 협약하여 새로운 게임을 개발하기로 했고 나름대로 좋은 게임을 만든다는 일념으로 최선을 다하고 있었다. 이때까지만 해도

아나킨 스튜디오는 이제 세계적인 게임사로 거듭날 수 있을 거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런데 미국에 경제 대공황이라니!

[세계 최강국에 돈이 없다는 게 말이 돼? 이게 있을 수 있는 일이냐고!]

돈이 없단다. 그 대단한 스티브 스필버거와 함께 하는데도 전 세계에서 엄청난 규모의 돈이 증발하는 바람에 투자자를 구하는 것이 불가능해졌다.

그렇게 미카엘의 장밋빛 미래를 약속하던 게임도 그의 회사도 이제 물거품으로 사라질 지경이 되었으니 참으로 환장할 노릇이다.

[미카엘.]

[아니야! 아니야! 무언가 방법 있을 거야! 이렇게 무너질 수는 없다고!]

[미카엘. 미카엘! 미카엘!]

어딘가 정신이 나간 사람처럼 계속해서 비명과도 같은 말을 반복하는 미카엘을 지켜보던 그의 친구 로널드가 점점 목소리를 키우며 그의 이름을 불렀다. 그리고 그의 이름이 열

번 정도 불렸을 때, 그 제야 정신을 차린 미카엘이 고개를 돌려 로널드를 응시했다.

[정신 좀 차리고 이걸 좀 봐 봐.]

[그게 뭔데? 돈 아니잖아. 지금 돈이 아니면 다 쓰레기라고. 나도 아나킨 스튜디오도 다 쓰레기야.]

더는 보다 못한 로널드의 손이 미카엘의 뺨을 치며 날카로운 소리가 터져 나온다.

[미카엘! 정신 좀 차려보라니까!]

[···미안하다.]

[미안한 건 됐어. 정신 차렸으면 이거나 좀 보라고.]

대체 뭘 보라는 것일까?

미카엘은 로널드의 손을 따라서 그가 가리키는 곳의 기사를 확인했다.

【글로벌 게임 기업 GF. ‘침체 된 미국의 게임 산업을 위해 대규모 투자를 할 것’】

눈이 번쩍 뜨일 기사 문구였다.

[투자? 대규모 투자? 지금 투자라고 했지?]

[그래. 투자.]

[투자한다는 건 돈이 있다는 이야기겠네?]

[얼마 전에 기사 못 봤어? 기부금액을 1,000만 달러씩 하는 회사야. 그곳의 회장은 따로 100만 달러씩도 쾌척하고. 그런 GF가 이제는 미국의 게임 개발사에게 대규모 투자를

하겠대.]

[기회잖아!]

거기까지 말한 미카엘은 문득 어딘가 이상하다는 것을 떠올렸다.

[로널드. 이게 진짜 너무 애매해서 그러는 데 말이야.]

[아 진짜. 또 뭐 때문에 그러는데!]

인내심이 바닥이 난 로널드가 소리를 꽥하고 질러버린다.

움찔했지만 이건 짚고 넘어가야 할 문제였다.

[우리도 미국 게임 개발사로 쳐 줄까?]

미카엘의 말에 그제야 로널드도 망치로 머리를 한 대 맞은 것 같은 충격을 받았다. 텍사스 오스틴에 너무 오래 있어서 그도 잊고 있었는데 자신들은 미국 게임사가 아니라 프랑

스 게임사였다.

< 하나 더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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