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하나 더 >
소고기는 기본적으로 어디에서 먹어도 맛있다고 본다. 더군다나 일본의 음식 수준은 상당히 높기에 아무 데나 골라도 실패할 확률이 낮다. 그런데 그렇게 움직이는 내게 히데키가 음식점을
추천해주었다.
[회장님! 제가 오사카에서 가장 맛있는 와규를 판매하는 식당을 알고 있습니다. 혹시 제가 그 식당으로 안내를 해도 괜찮겠습니까?]
안 그래도 어딜 가야 하는가? 이런 고민을 하고 있었는데, 잘 됐다.
“저야 좋죠. 갑시다.”
그를 따라서 함께 간 곳은 와규 스키야키라는 가게였다.
“혹시 무한 리필입니까?”
[맞습니다!]
‘내 주머니 사정을 걱정해주는 건가? 돈이 조 단위로 있는 사람을?’
무한리필이라니.
일반적으로 고기라는 건 무한리필보다 인당으로 파는 곳이 더 질이 좋고 맛있는 법이다. 푸짐하게 사주려고 한 내 입장으로서는 헛웃음이 나왔다. 그런데 오해하지 말라며 그가 손사래를 쳤
다.
[혹시 무한리필이라서 걱정하시는 거라면 그런 걱정은 절대 넣어두셔도 됩니다!]
“왜죠?”
[그야 맛있으니까요! 그것도 엄~청나게 맛있는 곳입니다요!]
이렇게까지 좋아하는데, 다른 곳으로 가자고 말을 하기도 쉽지 않은 일이다. 그래서 그냥 의심을 거두고 이곳에서 식사하기로 했다.
가격은 인당 2,980엔.
와규 무한리필에 이 가격이면 한국보다 저렴한 물가라고 봐야 하는 것 아닐까? 당연히 품질에 의심이 갈 수밖에 없는 가격이다.
그러나 이런 걱정은 소고기를 구워서 입에 한 점을 넣는 그 순간부터 사르륵 녹아서 사라졌다.
‘고기도 녹아서 사라지네.’
맛있었다. 히데키가 무섭게 생긴 외모와 달리 아이처럼 방방 뛰었는지 이제야 이해가 된다.
이곳은 정말 맛집이 맞았다.
‘역시 소고기는 어딜 가도 진리야.’
기름진 만큼 아침에 또 열심히 달리기를 해줘야 할 테지만, 살찐다고 걱정하며 덜 먹을 바에는 양껏 먹고 힘차게 운동을 하는 편이 낫다. 그게 사는 즐거움이라고 본다.
*
비카미신지가 윤태식 회장과 만나고 일주일.
[인생이란 참 모르는 거야. 나락인 줄 알았는데 갑자기 비상했어.]
한국인의 특성에다가 강단 있어 보이는 외모답게 윤태식 회장은 불같이 일을 추진했다. 그 결과, 1분 1초가 급하다는 태도로 계약서를 내밀었고 그렇게 클리버 스튜디오의 설립 멤버들은 GF
의 산하로 들어오게 되었다.
새로 지은 회사명은 ‘탱고 게임즈’로 정했다.
이름에 특별한 의미는 없었다. 그냥 탱고처럼 신나고 즐겁게 게임을 개발하자는 그런 단순한 이름으로 지었다.
[이렇게 완전 새로운 사무실에 들어와 보니까. 진짜 새로 시작하는 기분이 나네.]
[선배··· 아이고, 말실수했네요. 오늘부터는 다시 사장님이라고 해야죠?]
[그냥 선배라고 해 인마. 이제 와서 뭘 또 바꿔? 너, 그러다가 수틀리면 다시 선배로 부르고 그럴 거잖아. 사장이랑 선배랑 오가는 게 더 기분 나빠.]
[그건 그거고 이건 이거죠.]
[모르겠다. 너 편할 대로 해라.]
신지와 히데키는 새로운 사무실이 꽤 만족스러웠다. 이런 티격태격도 그만큼 만족감과 함께 편한 느낌이 들어서 나올 수 있었다.
[사장님. 이제 진짜로 우리가 만들고 싶은 게임을 마음대로 만들어도 되는 거죠?]
[그렇다니까? 내가 진짜 몇 번이고 회장님에게 다시 물어보고 또 물어보고 계속 확인했는데 진짜로 마음대로 하라더라. 아! 맞다. 근데 딱 하나는 안 된다고 한 게 있으셨어.]
[어떤 건데요?]
[야겜.]
[아······.]
호러 장르를 좋아하는 신지의 성격상 야한 게임을 개발할 생각은 전혀 없었다. 그러니 창작에 제한을 둔다거나 그를 옭아매려는 의도가 있는 제약은 절대로 아니었다.
[하긴 대형 게임사에서 개발하기엔 조금 그런 게 있죠?]
[야겜이 나쁜 건 아닌데 아무래도 이미지상 좀··· 그렇지. 근데 재밌는 게 뭔 줄 알아? 야겜이 안 되기는 하는데 또 무조건 안 된다는 건 아니라고 하시더라.]
[에엑? 정말요? 그 조건이 뭐래요?]
[야한 것만 보려고 하는 게임이지 않을 것. 애초에 게임 자체가 훌륭해서 하는 게임인데, 성인의 은밀한 부분도 만족시켜줄 수 있는 그런 야겜이면 개발해도 된다고 하시더라.]
[에이. 난 또 뭐라고. 그건 당연한 거잖아요. 우리가 마냥 야하기만 한 야겜을 만들 리가 있어요?]
[없지. 근데 우리만 그런 거고 세간의 야겜은 그런 게 99%잖아. 나오는 모든 여자랑은 장소 불문으로 전부 섹스하는 거.]
[하긴 그건 그러네요.]
[그럼. 이건 대충 됐고··· 우리와 함께하겠다는 애들은 어떻게 됐어?]
[시간 다 되어 갑니다. 곧 올 겁니다.]
신지와 함께 클리버 스튜디오를 차린 개발자들은 전부 케코의 개발파트 3팀과 4팀에 소속되어 있던 개발자들이다. 이들 중 메인 디렉터급이라 할 수 있는 7명과 상위 개발자들 22명은 전부
이번에도 함께 하는 것에 동의했다.
그러나 남은 120명의 개발자는 케코의 압박에 못 이겨 케코로 돌아갔다. 이를 비카미신지 역시 알고 있으나, 사람이라는 동물은 알면서도 ‘혹시나’하는 기대를 하는 감정적인 동물이다.
[얼마나 올 거 같아?]
슬쩍 묻는 물음에 히데키가 묘한 웃음을 지었다.
[글쎄요. 그건 사장님이 직접 보시는 편이 좋지 않을까요? 시간 됐는데 나가 봅시다.]
어딘지 모르게 장난스러운 표정의 히데키를 따라나선 신지.
그는 사무실을 가득 채운 개발자들을 보면서 입을 크게 벌렸다.
케코의 배신으로 텅 비어버린 사무실 책상을 볼 때마다 그동안 얼마나 마음이 아팠던가.
직원. 아니, 동료들에게 줄 급료가 밀려도 웃으며 버텨주던 이들이 결국 돈의 압박에 못 이겨 다른 일을 찾아간다고 할 때 또 얼마나 마음이 아팠던가!
‘그랬는데··· 그렇게 고생했었는데도 또 와주었구나.’
울컥 눈물이 흘렀다.
[에이. 오늘 좋은 날 아닙니까? 이런 날 우리 사장님 표정이 왜 그러십니까?]
[여전하시네요. 사장님.]
[자! 웃읍시다!]
쾌활한 히데키의 목소리와 동료들의 호응으로 자칫 다운된 뻔했던 분위기가 밝아졌다. 곧 사무실 전체에 웃음이 번졌고 신지마저도 입가에 미소를 다시 찾았다.
[거참. 뭐, 이렇게 얻어먹을 게 있다고 여기까지 다들 쫓아왔어!? 아. 또 너희들 먹여 살리려면 나만 죽어나겠네! 안 되겠다! 첫날부터 빡세게 일해야겠어!]
[그거지! 그래야 우리 사장님다운 거 아니겠습니까.]
[하하하! 얼마든 지요.]
[회의실이 어딥니까? 여기 이렇게 있지 말고 회의실로 갑시다!]
가는 척 말할 뿐, 당연히 농담이었기에 아무도 회의실로 이동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때 히데키가 손을 들고 크게 말했다.
[긴급 공지! 오늘은 다 함께 회식하는 날입니다!]
[회식? 갑자기?]
갑작스러운 히데키의 말에 신지마저도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히데키에게 고개를 돌린다.
[무슨 회식을 사장인 나도 모르게 정했어?]
[이게 엄청 비밀스러운 거였는데, 이렇게 공개를 해야만 하게 되네요.]
[응? 무슨 소리야?]
[사장님이 알면 분명히 거절할 거라고 회장님께서 제게 직접 지시한 겁니다! 자! 여기를 보시죠!]
히데키는 아주 자랑스러운 표정으로 황금색으로 빛나는 영롱한 카드 한 장을 내밀었다.
[이것이 바로 만능 카드! 회장님께서 바로 저를 믿고 맡겨주신 회식비! 얼마를 쓰더라도 관계없는 비장의 무기입니다! 오늘 우리 다 함께 와규 먹으러 갑니다!]
[와규? 회식으로? 진짜야?]
[그럼. 진짜지 가짜겠습니까? 우리가 몸담은 이 회사는 더 이상 그 쪼잔한 케코가 아니란 말입니다. 이제 우리는 GF 소속입니다!]
[우오오! 이거 진짜 굉장한데!]
[GF가 대단한 회사인 줄은 알았지만, 회장님의 배포는 더 대단하잖아!]
[그리고 지금의 이 카드를 보시는 것만으로도 다들 이미 눈치채셨겠지만! 제가 바로 GF의 윤태식 회장님께서 특별히 아끼는 이 회사의 비선 실세니까 사장 눈치는 대충 보고 다들 알아서···
어흠. 아시죠?]
[하하하하!]
다시 모인 비카미신지 사단.
열정으로 모인 창작자들이 GF의 게임을 위해 활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151. 하나 더
나름 여유를 부리느라 일본에서 좋은 시간을 보내다 보니까 문득 가족들 생각이 났다.
“그러고 보니까 가족들하고 마지막으로 여행을 했던 게 언제더라?”
마지막 가족 여행은 아니었지만, 군대를 전역하고플레지를 하면서 벌어들인 돈으로 아버지 과일 가게에서 사용할 트럭을 사드렸던 예전 일이 떠오른다.
‘트럭에 타고 그냥 드라이브만 해도 그렇게 즐겁던 가족이었는데.’
돈이 있으면 뭐 하나? 바쁘다는 핑계로 늘 이렇게 혼자만 돌아다니고 있는데. 뒤늦게나마 박봉이라도 늘 옆에 있는 아들이 더 효자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도 돈을 벌어두어서 다행인 점은,
생각이 났을 때 이 핑계, 저 핑계 대지 않고 바로 움직일 수 있다는 것이었다.
“김 실장님. 기왕 일본에 온 거. 가족 여행이라도 하죠?”
“가족 여행 말씀입니까?”
“곧 미국으로 떠날 건데 김 실장님도 가족들하고 너무 오래 떨어져 지내는 시간이 길었잖습니까. 저도 마찬가지이니 김 실장님은 실장님 가족을 부르고 저는 우리 가족을 불러서···”
여기까지 말했는데, 엄청나게 좋아할 줄 알았던 김유천 실장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아마도 가족 간에 불화가 있었는데 내가 그걸 몰랐던 모양이다.
겸연쩍게 슬쩍 말의 방향을 돌렸다.
“부담스러우시면 우리 가족만 불러도 됩니다. 어차피 같이 다닐 것도 아니었으니 이참에 자유로운 영혼으로···”
“아! 따로였습니까?”
‘뭐야? 두 가족이 같이 놀러 다니자고 하는 줄 알아서 그런 표정이었던 거였어?’
우스우면서도 살짝 섭섭하다. 나라는 사람이 좀 귀찮게 하는 일은 많아도 갑질을 한다거나 한자리에 있는 것이 불편하게끔 하는 사람은 아니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런 한편 이해도 된다. 군대에서도 부산관들의 계급에 따라 가족들도 상급자의 수발을 드는 일이 허다했다. 내가 제아무리 ‘편하게 있으세요’라고 말해도 저들은 세상 가장 불편한 자세로
편한 척 지낼 수밖에 없다.
그렇기에 크게 웃었다.
“걱정하는 일은 없을 테니, 그리 준비하세요. 경비는 다 댈 테니 김 실장님은 호텔도 따로 잡으시고요. 이 카드로 김 실장님 가족도 마음껏 즐길 수 있도록 하세요.”
아무리 다른 방을 사용한다지만, 그래도 같은 호텔에 있으면 이래저래 신경 쓰이는 법이다.
“배려해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럼, 저는 본사에 연락해서 회장님 가족분들이 문제없이 일본으로 바로 올 수 있도록 조처를 하도록 하겠습니다.”
기분 탓인지, 유난스럽게 가벼운 발걸음으로 김유천 실장이 나갔다.
이후 나는 휴대폰을 들어 전화를 걸었다.
- 여보세요?
“고 여사님~”
- 아들~! 해외 출장 중이면서 무슨 전화를 이렇게 자주 해? 전화비 많이 나오게.
자주 얼굴을 보지 못하는 만큼 그래도 일주일에 두 번 이상은 꼬박꼬박 집에 전화를 걸어서 잠시나마 통화 정도는 하는 편이다. 그러다 보니 툭하면 전화비 이야기를 하신다.
“에이. 그 전화비 이야기 좀 그만하시라니까요?”
- 돈 많이 번다고 이런 돈 우습게 보고 그러는 거 아니야. 아들.
“고 여사님. 그런 건 의사나 변호사처럼 그냥저냥 잘 버는 사람들 이야기에요. 저만큼 엄청나게 벌면 오히려 을 안 쓰는 게 세계 경제를 휘청휘청하게 만든다고요. 우리 고 여사님 아들이 그
정도 급이라니까요?”
- 하이고~ 잘 나셨네. 그래, 오늘은 무슨 일이야?
“태희도 요즘은 집에 있죠?”
- 걔야 뭐 집에 있으나 학교에 있으나 얼굴 못 보는 건 똑같은데 뭐.
태희는 이제 본과 4학년 마지막 학기를 남겨두고 있다. 곧 졸업시기가 다가오고 있어서 안 그래도 빡센 수의학과의 수업을 들으랴, 과제 하랴, 수의사 면허를 위한 국가고시를 준비하랴. 정
신없는 시간을 보내는 중이다.
“공부도 쉬면서 해야 하니까 방에서 좀 나오라고 해요.”
- 우리가 말한다고 듣니? 요즘 애가 점점 날카로워져서 안 하던 사춘기가 이제야 왔나 싶고 그런다니까?
어머니께서 그리 말씀하실 즈음, 아버지의 목소리가 들렸다.
- 어? 뭐야? 뭐야? 태식이야? 아들! 아빠도···
- 시끄러워욧! 나 통화하는 거 안 보여요!?
- 미··· 미안······.
은근슬쩍 통화에 합류해보려던 아버지였으나 우리 집 권력 1위이신 고 여사님께 바로 찌그러지고 마셨다.
- 하여간 그래서 요즘 얘랑 말하는 게 힘들어~
“이렇게 말하면 태희도 들을 거예요. 짐 싸라고요.”
- 짐? 무슨 짐? 얘 쫓아낸다고?
어머니는 늘 강한 것 같은 겉모습을 유지하시지만 사실 속은 남들보다 더 많이 여린 분이다. 지금도 태희에게 짐을 싸라고 말 한마디에 덜컥 겁을 집어먹은 목소리를 내신다.
“설마 쫓아내겠어요? 그게 아니라 제가 지금 일본이거든요. 이참에 우리 가족 다 같이 일본 여행이나 하면서 시간 보내면 어떨까 해서요.”
- 여행? 일본?
“네. 여기가 나중에는 오기가 정말 힘들어지는 나라가 되거든요. 그러니 음식들 건강하고 분위기도 괜찮을 때 한번 들려야죠.”
- 응? 그게 무슨 말이니?
“가족들이랑 신바람 나게 놀아보자! 이런 얘기에요.”
- 가족 여행! 좋지!
이렇게 기뻐하는 모습을 보니까 왜 진작 이러지 못했을까 하는 마음이 들었다.
“그럼, 내일 아침에 집으로 차 보낼 테니까. 준비해둬요.”
- 응~ 이따 봐, 아들~!
건물주 만들어드리고 태희가 졸업하면 동물병원을 선물로 주는 것만 생각하는 건 어리석은 게 분명했다. 함께하는 오붓한 시간으로 추억을 쌓는 일을 소홀히 해서는 안 될 것이다.
< 하나 더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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