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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카미신지는 고인 물은 썩기 마련이기에 새로운 개발자와 함께 새로운 바이로 해저드가 만들어져야 한다고 믿었다. 물론 아무런 대책 없이 코미야 히데키에게 후속작을 맡긴 것은 아니었
다.
애초에 코미야 히데키가 바이로 해저드의 기획 파트를 담당했던 인물이었기에 믿고 맡길 수 있었다.
결과는 나쁘지 않았다. 중간에 70% 이상 만들어진 게임을 갈아엎고 새로이 만들어야 했던 위기가 있었지만 결국, 580만 장이라는 판매고를 올리며 비카미신지는 자신의 선택이 옳았음을
증명했다.
그러하니 첫 단추가 문제는 아니었을 것이다.
‘아마도 2003년이 시작이었을 거야.’
케코에서 신지를 믿어주고 끝까지 지지해주던 유일한 선배, 요코야마 요시키.
케코의 전무이자 총괄 프로듀서였으며 차기 사장으로 유력하던 그 선배가 경영진과의 불화로 퇴사를 하게 되었다. 그로 인해 비카미신지는 자연스럽게 총괄 프로듀서의 자리를 경쟁해서 쟁
취해야 하는 상황에 직면하게 되었다.
이때의 경쟁 상대는 이마후에 케이지로서 로키맨의 아버지로 잘 알려진 강력한 상대였었다.
‘그때부터였어.’
케코는 비카미신지를 중심으로 한 파벌과 이마후에 케이지를 중심으로 한 파벌 둘로 나뉘었다. 여기서 콘솔을 선택하는 분기점이 다가왔다.
상식적으로는 높은 판매량이 보장되는 소미의 게임 스테이션을 선택해야 하지만 ‘고이면 썩기 마련’이라는 굳은 신념을 가진 비카미신지는 게임계의 흐름을 위해 닌텐두를 선택했다.
당연히 이 선택은 케코 경영진들의 극심한 반대를 불렀다. 그러나 열정과 추진력으로 무장한 비카미신지는 자기 뜻을 고치지 않았다. 오히려 ‘바이로 해저드는 닌텐두의 독점 타이틀로 발매
될 것이며 자신이 그 생각을 번복할 경우 할복을 하겠다’는 인터뷰까지 했다.
그토록 강경하게 버틴 끝에 그는 경영진에게 닌텐두 독점 발매라는 약속을 받아내기에 이른다. 하지만 최종적으로는 경영진에게 배신당하며 케코를 떠나 클리버 스튜디오를 차리게 된 것이
다.
‘그래놓고 왜 케코의 돈을 받았던 걸까··· 돈만 있었어도 이 지경에 이르지는 않았을 텐데. 이 빌어먹을 경영진 놈들 같으니! 절대로 이런 일이 없을 거라고 약속해 놓고는!]
말로만 한 약속을 철석같이 믿은 자신이 멍청했다. 하지만 후회는 아무리 빨라도 늦고 기껏 잘 키워놓은 클리버 스튜디오 전체를 통째로 먹히는 지경에 이르렀다.
[이미 한 번 배신을 당해놓고 그들을 또 믿은 게 잘못이었습니다.]
[알아. 나도 과거의 내가 미치도록 원망스러워.]
[그런데 사장님··· 아니, 선배.]
클리버 스튜디오를 차린 이후로 호칭을 명확히 해야 한다면서 히데키는 지금까지 선배라는 호칭을 입에 올리지 않았다. 오랜만에 듣는 그 호칭에 신지의 눈이 다시 떠진다.
[지금은 어디서부터 잘못된 걸까? 누가 잘못한 걸까? 이런 걸 생각할 때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그럼?]
[앞으로 어떻게 할 것인가? 이것을 먼저 생각해야죠.]
클리버 스튜디오의 개발자들은 이미 케코의 손에 전부 넘어갔다. 물론, 그런 개발자들 따위야 아무 상관 없는 문제이긴 했다. 어차피 중요한 인물들은 케코를 떠나면서 그를 따라온 히데키
같은 메인 디렉터였으니까.
문제는 세상 모든 것들이 그러하듯 돈에 달려있었다.
비카미신지는 실패한 디렉터가 됐다. 이런 자신에게 투자할 멍청이는 일본에 더 남아 있지 않다. 그렇다고 가증스러운 케코의 경영진에게 고개 숙이고 무릎 꿇으며 기어들어 가야 할까?
목에 칼이 들어와도 그럴 수는 없었다. 이를 잘 알기에 비카미신지가 체념했다.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그래. 나는 이미 끝난 것 같다.]
[선배! 그게 대체 무슨 소리입니까?]
[이미 난 끝났다고. 여기까지인 거야. 그러니까 히데키. 너는 이제부터는 나를 떠나서 너만의 날개를 달아라.]
자신에게 투자할 멍청이는 남아있지 않겠지만, 히데키는 다르다. 그는 여전히 인정받고 있는 디렉터였고 그에게라면 투자할 이들이 아직 남아 있을 것이다. 그게 아니라면 그를 데려가고 싶
어서 안달이 난 게임사 역시 차고 넘치리라.
‘그러니까. 이제 놓아주어야겠지.’
함께 하는 게 오히려 피해를 주는 마당이다. 비록 고여서 썩은 물이 되고 싶지는 않아서 열심히 흐르고자 했으나 결과적으로 자신은 실패하여 썩은 물이 되었다. 그러니 악취 풍기는 자신은
이쯤에서 사라지는 편이 품위를 지키는 일일 것이다.
[안 떠납니다. 절대 제가 선배를 떠나는 일은 없을 겁니다. 우리는 죽어도 끝까지 함께 하기로 하지 않았습니까?]
[모든 것은 끝이 있기 마련인 거야. 우리도 여기까지인 거야. 가라 히데키.]
그때였다.
어찌어찌 들으면 연인의 이별 대화가 같은 묘한 대화가 한창 이어지던 즈음.
똑똑-
노크 소리가 들렸다. 그런데 사무실 문에 노크하는 소리가 아니었다. 심도 높은 대화와 자신들만의 비장함에 물들어 있던 그들이 미처 눈치채지 못한 사이, 세 명의 남자가 사무실 내부에 들
어와 있었다.
[죄송합니다. 문이 열려 있어서 일단 들어온 건데······.]
멋쩍은 한국말이 잠시 후, 익숙한 일본어로 들렸다.
통역사를 데리고 온 이들인데 키가 크고 보디빌더처럼 몸이 좋아서 경호원이나 군인처럼 보이는 위압적인 인물이 유독 눈에 들어왔다. 하지만 그래서 움찔한 자신이 더욱더 부끄러웠고 버
럭 소리를 질렀다.
[당신들 뭔데 남의 회사를 마음대로 들어와!? 뭐야? 케코에서 보냈어!? 우리가 지금 여기서 어떤 꼴을 하고 있는지 지켜보고 오라고 시키든!?]
*
노발대발하는 모습. 허락받지 않고 들어오기는 했는데 필요 이상으로 미움받는 기분이었다.
통역사에게 물었다.
“뭐랍니까?”
“케코에서 보냈냐고 합니다. 저희를 케코에서 보낸 직원으로 오해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래요? 오해를 받았으면 풀어야죠.”
직접 내가 나설 필요가 없었다. ‘풀어야 한다’는 말을 하기 무섭게 김유천 실장이 재빨리 저들에게 다가가 무언가를 내밀었다.
[이게 뭐야? 명함?]
[한국어?]
[한국어로 적힌 거 보면 케코는 아닌가 본데··· 이거 뭐라고 읽는 거냐?]
[저라고 한국어를 압니까? 이 사람들은 우리가 이걸 알아볼 거로 생각하고 이걸 준 걸까요?]
고작 명함 하나를 받고 대화할 것이 뭐가 저리 많은지 토론을 벌였다. 만약 내가 아무런 정보도 없이 저 두 사람을 봤다면 만담 콤비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앞면만 보고 있잖아. 무슨 덤 앤드 더머도 아니고.’
GF는 세계적 기업이다. 일반적인 기업의 명함은 한쪽 면에 명함의 주인이 어떤 인물인지를 알리는 정보가 나와 있고, 반대쪽에 기업 로고가 있다. 반면에 GF의 명함은 1면에 한국어, 2면은
영어로 되어 있었다.
보다 못한 김유천 실장이 가벼운 손동작으로 명함을 돌려보라고 제스처를 취했다.
[뒷면?]
[여기에 뭐가 있··· 어라? GF? 그 GF?!]
‘그래. 이 반응이 나와 줘야지. 내가 요즘 이 반응 보는 맛에 살아요.’
동유럽이 아니라 잘나가는 일본의 개발자도 우리 이름을 보고 깜짝깜짝 놀라주는 걸 보면, 참 내가 많이 크기는 했다. 이만하면 명성 수치에 따른 카리스마가 제법 붙은 캐릭터로 삼아도 될
것이다.
[G··· GF면 거기 아닙니까? 요즘 가장 핫한 게임회사?]
[이런 곳에서 왜 여기를? 아! 맞아! 저 개발자답지 않은 엄청난 덩치! 전직 무사였다는 윤 회장이 틀림없어!]
[히이익! 저··· 저··· 저 사람이 진짜 윤 회장이라는 말씀입니까?]
[그래! 내가 E3에서 똑똑히 봤다니까!? 경호원인 줄 알고 착각해서 똑똑히 기억한다고!]
자극적이라서 신선한 일본식의 호들갑이었다. 잘 모르지만 보는 즐거움이 있었는데, 무슨 내용인지 알면 더 흥미로울 것 같아서 통역사에게 물었다.
“용 카이져, 용 카이져 그러는데 뭔가 소년 만화 대사 같군요. 그게 뭡니까?”
“그게, 카이져가 아니라 카이쵸오입니다. 회장이라는 말이죠.”
“그래요?”
외국어는 참 어렵다.
아무튼, 케코의 침입자가 아님을 알았다니 이제 본격적인 대화를 해도 될 것 같다.
“반갑습니다. 윤태식입니다.”
[바··· 반갑습니다. 저는 비카미신지라고 합니다. 팬입니다!]
“팬?”
난데없이 무슨 팬이라는 이상한 소리를 내지르고 있어? 게다가 팬이라니.
내가 지금 유명 게임사의 회장이긴 하지만 김강철 사장이나 김대익 실장이면 모를까. 내게 팬이 있는 건 이해하기 힘든 상황이다. 궁금해하는 내게 그가 빨리 뭐라 말했고 통역사도 실시간
으로 전달해 주었다.
[그게··· 드래곤 소울을 플레이하면서 완벽하게 팬이 되었습니다. 게다가 작년에 출시한 사이버 쇼크! 그건 정말 그 이름대로 쇼크 그 자체였죠! 서구식 게임들을 무참하게 무찌르는 동양의
새로운 혁명! 전직 무사다운 기강이 어린 그 게임은 정말 혁명 그 자체였습니다!]
‘뭔가 좀 오해가 있는 것 같기는 한데.’
아무튼, 좋은 게 좋은 거다.
“우리 게임을 이렇게 좋게 봐주시다니 감사합니다.”
[이렇게 굉장하신 분이 이런 미천한 곳에 와 주시다니요. 저희가 또 하필 상황이 이래서 제대로 대접도······.]
그는 정말로 진지하게 미안했는지 얼굴까지 붉혔다.
“정말 괜찮습니다.”
[그래도 예의가 아니니··· 정말 송구합니다.]
“신경 쓰지 않으셔도 됩니다. 그것보다 지금 이 상황이 너무 이해가 안 돼서 그러는데요. 실례가 아니라면 혹시 이야기를 좀 들어볼 수 있겠습니까?”
나에 대한 소개를 받고부터 잠시간 현실을 망각하고 있던 비카미신지가 현실로 돌아왔다. 다시금 어두워진 비카미신지의 얼굴은 금방이라도 이 자리에서 뛰쳐나가 버릴 것 같은 좌절감과 열
패감에 빠졌다.
‘캐릭터 참 선명하네.’
순수한 열정이 물씬 느껴지는 인물임은 틀림없었다.
[이런 부끄러운 모습을 보이고 있었군요. 죄송합니다. 그냥 요즘 들어 제가 꿈꾸던 것들이 허상이 아닐까? 그런 생각을 하고 있었습니다. 저희와 게임 공급에 관한 계약을 맺으러 오셨다면
죄송하지만··· 저는 이미 늦었습니다. 대신 옆에 있는 이 친구를 봐주십시오. 그는 아주 유능한 친구입니다. 믿고 투자만 해주신다면 충분히 만족할만한 성과를 얻으실 겁니다.]
[선배!]
[내가 마지막으로 해야만 하는 일이야! 너는 잠자코 있도록 해!]
[그럴 수 없습니다. 함께해야 해요!]
[아니야. 이제 네가 날아야 할 때다.]
“······.”
뭐랄까. 부지런히 통역하는 통역사의 얼굴이 붉어지고 김유천 실장과 나의 표정이 오묘해지는 가운데 저들만큼은 진지한 상황이었다.
‘장르가 다시 소년 만화로 넘어가려 한다.’
비카미신지와 그가 말하는 유능한 친구는 어떠한 상황이라도 자신들의 페이스로 분위기를 흐리는 이상한 기운을 가지고 있었다.
‘그래. 페이스를 가져가는 게 아니라, 자기 페이스로 분위기를 흐리는 기운이야.’
이대로 두었다가는 기껏 잡은 대화 분위기가 다시 흐려질 것은 명백했다.
“저기요. 비카미 신지씨?”
[신지. 신지라고 불러주십시오. 회장님.]
“그럴까요?”
[그렇게 불러만 주신다면 영광이겠습니다!]
“알겠습니다. 신지씨. 그러니까 우리가 이곳에 온 이유는 당신들과 게임 공급에 대해 계약을 하려고 온 게 아닙니다.”
[아! 그렇습니까······. 하긴, 이미 무너져버린 우리에게 그런 기대를 하고 찾아오는 사람 따위는 있을 리가 없죠. 잠시나마 봄날의 꿈같은 달콤한 상상에 빠져들었나 봅니다. 미몽에 취해 영
락한 저를 잊고···]
“그게 아니라! 케코가 아닌 저와 다른 꿈을 꾸자는 말을 하는 겁니다.”
[꿈이요!? 한국에서 여기까지 꿈 때문에 오셨단 말씀입니까?]
“맞습니다.”
[오오! 한국에서 우리가 함께하는 예지몽을 꾸셨다니! 회장님께서는 예언가이신 겁니까?]
[예언가!? 역시 윤 회장님은 그런 분이셨군요!]
‘뭐야? 이 사람들이 지금 뭐라고 하는 거냐고.’
대화를 잘라서 이해하더니 그나마 좀 멀쩡한 것 같았던 코미야 히데키가 예언가라는 단어를 믿으며 환하게 웃음 짓고 있었다.
“지금 통역은 제대로 하는 게 맞습니까? 내 말을 그대로 전하고 있는 거 맞아요?”
“그··· 그렇습니다. 회장님. 정말 저의 생각은 조금도 안 들어갔어요. 그런데··· 아니 무슨 빠가들도 아니고······.”
황당무계한 모습에 구경 중인 김유천 실장만이 끅끅거리는 숨을 억누르고 숨죽여 웃고 있었다.
< 구매중입니다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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